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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개의 봄 - 역사학자 김기협의 시병일기
김기협 지음 / 서해문집 / 2011년 1월
평점 :
지난해 여름, 시어머니께서 갑작스런 마비 증세를 보이셨습니다. 부랴부랴 병원에 입원해서 검사를 해보니 뇌졸중이라는 진단이 나왔는데요. 빨리 조치를 취한 덕분에 심한 후유증은 남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 나이가 그런 시기인가요. 찬바람이 불면서부터 지인들에게서 슬픈 소식이 연이어 들려왔습니다. 어른이 돌아가시고 중풍으로 쓰러지고 지병으로 고생하신다는 얘길 자주 듣습니다. 그래선지 언제부턴가는 만나면 자연스레 이런 얘기부터 나옵니다. “요즘은 어떠셔?” “평안하신가?” “차도는 있고?” 어르신들의 연세가 연세인지라 자리보전하다가 하루아침에 쾌차할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잘 알지요. 하지만 밤새 안녕이라고 그간의 안부를 건네게 되더군요. 어찌보면 그게 또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간의 예의이기도 합니다만...
노인의 미소가 눈길을 끈 책이었습니다. <아흔개의 봄>은. 사실 그동안 전 주름진 얼굴에선 쇠잔함과 처연함, 깊은 회한이 배어나온다고 생각했는데요. 그게 아니었어요. 아무런 장신구도 없는, 그것도 흑백으로 된 사진이지만 표정이나 분위기에서 “참 말갛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이쯤 되니 궁금해지더군요. 어떤 사연일까. 이 책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역사학자 김기협의 시병일기’란 부제를 보니 누군가의 간병일기 같은데 이 분은 어떤 병을 앓고 계실까...
책은 역사학자인 저자가 2008년 11월 26일부터 2010년 11월 22일까지 2년간의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적은 글입니다. 늦게 절 살림에 드셨던 저자의 어머니가 어느날 갑자기 쓰러지고 맙니다. 크게 위급한 병은 아니지만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무엇보다 기억력 감퇴가 큰 문제였다는군요. 이런 상황 속에서 저자는 어머니를 걱정하고 소식을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노모의 근황을 알려주고자 글을 쓰게 됩니다. 이것이 이 책의 출발이었습니다.
하지만 뭐든 글로 쓰기 위해선 그 대상에 대해 단편적인 것만 알아선 불가능하지요. 대상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매순간의 변화를 포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저자에게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글의 성격이 소설이든 논문이든 보고서든 다른 무엇이든 말입니다.
저자에게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말썽쟁이, 사고도 제일 많이 친 그야말로 불효자였던 저자가 병든 노모의 간병일기를 쓰려고 마음먹는 순간 저자와 노모의 관계는 달라졌습니다. 아내가 있는 남자와 결혼한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어 미워했던 저자는 예전과 다른 시선으로 노모를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미움을 조금씩 덜어내고 그 자리를 사랑으로 메워가면서 어머니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내게 됩니다. 비관적이고 염세적이라 여겼던 노모가 알고보니 누구보다 낙천적이고 밝은 사람이란 걸 말이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자는 서서히 자신의 마음속 벽을 허물어냅니다. 무심코 말 한마디 건네는 것조차 예전의 저자가 아니었습니다. 아흔 번의 봄을 맞이한 노모의 “뭐 해줄 거야?”는 말에 선뜻 “업어드릴게요.”라고 대답하고 ‘똥배’를 ‘효자배’라며 능청을 떨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 노모의 이마에 뽀뽀를 합니다.
솔직히 처음엔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역사학자였던 아버지와 국어학자이자 대학교수였던 어머니를 둔, 역사학자인 저자의 글. 그것도 전문서적이 아닌 어머니의 간병기라고 하니 왠지 귀가 솔깃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학자집안, 이들의 일상은 얼마나 특별할까, 나와 어떻게 다를까 궁금했는데요. 저자가 성장할 당시의 상황, 시대적인 아픔이 다르긴 하지만 그들도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부당함에 상처받고 아파했으며 가족, 혹은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갈등하는 나날을 보냈다는 것을...
저자는 말합니다. 자신의 ‘엄마 찾기’는 화해의 과정이었다고. 노모와의 화해를 통해 세상과 화해하고 자기 자신과도 화해할 수 있었다고. 뒤늦게 꽃이 핀 저자의 노모에 대한 사랑과 화해를 보면서 어머니와 아들, 가족 간의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년간 적은 글은 어머니의 ‘인생강의’를 받아쓴 노트인 셈이다. 이제 노트 필기는 접어놓고, 어머니 얼굴만 기분 좋게 쳐다보며 지내겠다. 언젠가 다음 노트 필기를 시작하게 되겠지만, 서두르지 않겠다. - 4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