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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 오래된 사물들을 보며 예술을 생각한다
민병일 지음 / 아우라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방 빼!” “싫어!” “싫긴 뭐가 싫냐? 이 방 내가 쓸 거니까 넌 방 빼!” “절대 안돼!” “싫으면 버릴 거 버리고 정리 좀 하던가! 이게 뭐야, 휴지통은 장식용이냐?” 한 달에 두어 번, 저희 집에선 이런 소동이 벌어진답니다. 놀토나 휴일날, 빈둥거리며 방황(?)하는 큰 아이에게 어질러진 공부방 정리를 시키면 어찌나 투덜대는지. 가뜩이나 좁은 집에 물건 정리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니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닙니다. 근데, 얄밉게도요, 그럴 때 큰아들과 남편은 꼭 한 편을 먹습니다. “그러는 엄마(니)도 버릴 건 좀 버려!”
사실, 할 말이 없습니다. 저도 오래된 물건들 집 구석구석에 모셔두고 있거든요. 이를테면 초등학교 때 쓰던 예쁜 인형그림의 연필깎이(외항선원 아버지께서 사주신 외제 학용품)나 중학교 입학선물로 받은 고장 난 파커 만년필이라던가 초등학교 때 갖고 놀던 종이인형, 만화 캔디 일러스트, 수채화풍의 소녀 그림엽서들(여고 때 엄청 모았지요), 전축 턴테이블(앰프랑 스피커는 고장 나서 버렸어요)과 한 장 두 장 모은 LP판과 빽판들,.. 모두 남편에게서 제발 좀 버리라는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는 물건들이지만 전 차마 못 버리겠더라구요. 손때가 묻어 꼬질꼬질하지만 그 물건들의 하나하나마다 제 소중한 추억과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어떡합니까.
오래된 물건에 대한 애틋한 감정은 비단 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의 저자는 예술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갔다가 오래된, 고릿적 물건에 매료되고 맙니다. 주말마다 벼룩시장을 찾아다니면서 발견한 오래된 물건들에게서 무언의 언어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고 해요. 그래서 그것들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합니다.
이 책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은 저자가 낯선 나라, 낯선 장소에서 만난 고릿적 물건들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담겨있습니다. 주황색 불빛이 포근하고 온화한 느낌마저 주는 유겐트슈틸 램프를 시작으로 작은 상자에 보물처럼 빼곡하게 들어찬 갖가지 모양과 색색의 단추들, LP판, 고서, 작은 액자, 펜촉 같은 사물들의 이야기와 내재된 아름다움을 사진과 함께 전해줍니다. 또 찻물이 배어져있는 찻주전자와 찻잔을 보며 어린 시절 차를 마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고 오래된 독일제 타자기에서는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사진과 그녀가 타자기로 쓴 시를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저자가 발견한 고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이었어요. 갑옷을 입은 무인 석상과 석물이 그려진 책 속에 구한말의 조선의 산천과 풍물, 사람들의 다양한 사진과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외국인의 시선에 당시 조선은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을지 궁금해졌습니다. 또 비닐봉지 속의 올망졸망한 몽당연필들을 만나는 순간 저도 감탄이 흘러나왔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누군가의 타임캡슐을 열어본 기분이랄까요? 독일을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그들의 일상이 녹아있는 물건들을 통해 왠지 예전보다 조금이나마 그들과 가까워진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에겐 오래되고 낡은 물건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추억을 떠올리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손때 묻은 물건들. 그런 물건들을 저도 만나보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