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BI 예술품 수사대 - 도난당한 인류의 유산을 찾는 미국 최고의 예술품 범죄팀 특수요원 현장 보고서
로버트 K. 위트만존 시프만 지음, 권진 옮김 / 씨네21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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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이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사망 40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된 소설 <카라바조의 비밀>을 읽었다. 천재적인 재능과 광기를 갖고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카라바조와 그의 작품을 만나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그의 작품 [아기 예수의 탄생]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이 세상 어딘가에 아직 존재하고 있는 걸까?




<FBI 예술품 수사대>를 읽으며 얼마전 품었던 의문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도난당한 인류의 유산을 찾는 미국 최고의 예술품 범죄팀 특수요원 현장 보고서’라는 띠지의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FBI 예술품 수사대>는 도난당한 예술품의 수사에 관한 이야다. 바로 이 책에 카라바조의 [아기 예수의 탄생]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예술품의 작품가가 오를수록 범죄도 늘어났는데 ‘그 중 가장 큰 사건이 ‘1969년 팔레르모에서 카라바조의 [아기 예수의 탄생]이 사라진 사건이었다(33쪽)’고. 책의 흥미도가 초반부터 급상승하는 대목이었다.




드가와 달리, 클림트, 샤갈의 명화를 훔친 일당이 빠른 속도로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장면으로 책은 출발한다. 혹시나 추적하는 차량은 없는지 살피며 속도를 내는 운전자 뒤에서 한 사람이 말한다. “긴장 좀 풀어요. 천천히 가자고.” 마치 일당의 한 사람처럼 보이는 그는 사실 FBI의 예술품 범죄 전문 요원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최악의 예술품 도난 범죄로 통하는 ‘가드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언더커버(비밀 위장 근무) 작전으로 수사 중이었다. 자신의 위장신분이 언제 범죄일당에게 노출될지 알 수 없는 초긴장 상태에서 수사를 진행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FBI 예술품 수사대였다.




어린 시절 일본 도자기와 골동품에 둘러싸여 성장했던 저자 로버트 K. 위트만은 FBI 요원이 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FBI 요원이 되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1988년, 서른두 살이 되어서야 저자는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된다. FBI 아카데미에서 기본훈련을 마치고 발령지인 필라델피아로 향한 저자에게 곧 첫 사건이 찾아든다. 로댕 박물관이 생기고 나서 처음으로 도둑이 들어서 로댕의 [코가 부러진 사나이]를 도난당한 것이다. 당시 FBI에는 예술품 전담 수사관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밥 베이진이라는 요원이 박물관 사건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예술품 절도 사건이 발생하면 수사를 맡곤 했는데 저자가 바로 그와 파트너가 된 것이다. 세계 조각의 역사에서도 가히 혁명적이라고 통하는 로댕의 [코가 부러진 사나이]는 저자와 베이진의 수사 끝에 범인을 체포하고 작품도 되찾는다.




이후부터 저자는 유물이나 미술품 중에서 어떤 작품이 값으로도 따질 수 없는 뛰어난 예술품인지 구별하기 위한 수업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소중한 보물을 지키기 위한, 도난당한 예술품을 되찾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 언더커버 작전에 돌입하는 준비를 마치게 된다. 그리고 2008년까지 자그마치 20년간 페루의 중요 유물인 [백플랩]을 비롯해 미국의 국보인 [권리장전], 램브란트의 [자화상] 등 수많은 사건을 해결하면서 인류의 보물인 예술품과 골동품을 되찾는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다.




<FBI 예술품 수사대>는 소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말 흥미진진했다. [인디애나 존스]나 [내셔널 트레저] 같은 영화를 즐겨보는 나로서는 도난당한 예술품이 어떻게 제 자리로 돌아가는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소중한 예술품을 찾기 위해 벌이는 언더커버 작전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모든 것이 흥미로웠다. 특히 역사상 가장 큰 예술품 범죄로 통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내부자의 소행이라는 점은 ‘범인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법칙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했다. 책의 마지막, 저자 로버트 K. 위트만은 세 달 후에 은퇴한다고 밝혔다. 그의 빈자리, 역할은 과연 누가 대신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의 임무는 역사의 조각과 과거의 기록을 구하는 일이고, 그 과정에서 범인을 잡는 것은 그저 보너스 일뿐이다.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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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이 하하하 - 뒷산은 보물창고다
이일훈 지음 / 하늘아래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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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이가 여름방학을 맞은지 2주째다. 방학을 앞두고 몇 가지 계획을 세웠다. 방학이라고 해서 생활리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것, 지난 학기에 부족했던 학과 공부를 복습하는 것, 아이와 함께 산에 가는 것. 이 중에서 앞의 두 가지는 그런대로 실천하고 있는 편이지만 세 번째 등산은 방학 시작 무렵부터 컨디션 난조로 지키지 못했다. 지금도 평소의 컨디션으로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가벼운 활동정도는 무리가 없을 듯해서 며칠 내에 바로 시도할 생각이다. 평소 운동량이 부족했던 나는 물론이고 큰아이도 처음엔 힘들겠지만 곧 익숙해지리라.




<뒷산이 하하하>를 읽으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산에서, 야외에서 이 책을 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울창한 숲 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부족한 기운을 불어넣는 기분이 더욱 실감날텐데... 그런데 난 이렇게 좁은 집에서, 그것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어야 하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시원한 바람이, 짙은 초록의 기운이 너무나 그리웠다.




<뒷산이 하하하>는 건축가인 저자가 뒷산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자는 의도가 담겨있다. 처음엔 ‘산이면 그저 산이지, 앞산도 아니고 왜 꼭 뒷산이야?’고 의문을 가졌다. 나의 물음에 저자는 머리말에 이렇게 답을 했다. ‘앞산은 보는 산이지만 뒷산은 동네를 품는 산’이라고. 뒷산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 차례에서 잘 드러난다. 모두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 책의 각 장의 주제가 아이들의 말꼬리 잇기 놀이처럼 ‘뒷산은 맛있어’ ‘맛있으면 약수터’ ‘약수터는 짜릿해’로 이어진다. 통통 높이 튀어오르는 탱탱볼처럼 리듬이 살아있다. 보물창고라는 뒷산에 꼭꼭 숨겨진 보물을 어서 빨리 찾아나서고 싶은 기분이 든다. 1장 ‘뒷산은 맛있어’에서 저자는 뒷산과 동네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뒷산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과 그것이 우리의 일상과의 이어짐에 대해 전해준다. 2장 ‘맛있으면 약수터’에는 뒷산과 떼어놓을 수 없는 약수터, 그 주변의 이야기들이 가득하고 3장 ‘약수터는 짜릿해’에서는 약수를 길어가기 위해 약수터에 길게 늘어서 있는 물병과 사람들의 모습들이 글로 만나니 새로운 느낌이 드는 동시에 팍팍한 세상살이가 뒷산의 약수터에도 이어지는 걸 보면서 안타까움도 밀려왔다.




사실 지금까지 산은 그저 산이었다. 산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나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문득 학창시절 한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미국 여행을 하다가 자꾸 뭔가 이상한, 생소한 느낌이 들어서 그게 뭘까...한참 고민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산이 없다는 거였다. 자동차로 며칠을 달리고 달려도 산을 볼 수 없었다는 것. 그 당시 우리는 미국 땅이 그만큼 넓다는 데서 “우와!” 감탄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삭막할 것 같다. 뒷산은 정말 보물창고일까? 아직 확인해보지 않아서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어쩌면 보물 그 이상의 것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런 뒷산을 소홀히 하고 홀대해서일까. 얼마전에 내린 폭우로 뒷산이 무너져 내리는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이가 있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산은 언제든 허물고 다시 쌓으면 되는 그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아프고 상처 난 가슴을 부모나 친구를 통해 위로를 받듯이 일상에 지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진정으로 포근하게 보듬어주고 회복할 수 있는 기운을 북돋워주는 것은 바로 뒷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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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조각 창비청소년문학 37
황선미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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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이었다. 동기여학생을 성추행한 것도 모자라 그것을 촬영까지 했던 이들이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바로 국내 일류대학의 의대생이었다는 것. 충격적이다 못해 경악을 금치 못할 사건에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쓴 소리를 토해냈다. 장래 사람의 생명을 마주하게 될 의대생들이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일을 벌일 수 있냐고 비판했고 같은 대학의 재학생은 물론 졸업생들도 가해 학생들의 출교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른바 짱짱한 집안을 배경으로 한 그들에겐 어떤 징계도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건의 공판 때 누가 가해 학생들의 변호를 맡을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기도 했다.




예비 의료인의 윤리와 도덕성에 의문을 던진 사건이 황선미의 소설 <사라진 조각>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대기업의 간부이지만 가족에게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는 아버지와 우등생 오빠만 감싸고 위하는 엄마, 특목고를 목표로 한 성적도 외모도 최상위권인 오빠 신상연, 그런 가족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딸 신유라. 책은 이들 네 명의 가족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가족에게처럼 친구들과도 마음을 터놓지 못하는 유라는 어느 날 엄마가 자신을 필리핀에 강제로 유학보내려 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 엄마에게 반항하기 위해 유라는 가출을 생각하지만 문제는 그런 용기가 없다. 답답한 마음에 대공원을 찾은 유라는 그 곳에서 오빠가 같은 반의 재희와 함께 있는 걸 목격한다. 자신이 본 것을 확신할 수 없었던 유라는 바로 그날부터 집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걸 느끼게 된다. 언제나 반듯한 모범생인 오빠가 아무런 말도 없이 외박한데다 그것도 모자라 평상시와 다른 행동을 보이고 낯선 아줌마가 집을 방문한 이후로 엄마는 더욱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재희마저 며칠째 학교에 결석하고 있는 상태. 우연치고는 뭔가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재희가 집단 성폭행 당했다는 소문이 학교에 퍼지기 시작하는데...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많은 이에게 감동을 전한 황선미 작가의 새로운 소설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서둘러 읽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만난 저자의 이야기에 모두 만족이었기에 읽기 전부터 기대가 됐다.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아니면 전작들에 대한 인상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서일까. <사라진 조각>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다.




청소년의 집단 성폭행과 막장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출생의 비밀을 주된 소재로 끌어와서 의문의 사건을 마치 퍼즐 맞추듯 이끌어가는 시도는 좋았으나 진행과정이 왠지 허술하게 느껴졌다. 전체적인 이야기를 가해 학생의 처벌에만 너무 치중한 나머지 피해자인 재희에 관한 언급이 극도로 제한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성폭행 사건이 소설의 모든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인만큼 청소년들이 아픔과 상처, 고난을 딛고 일어서는,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는 성장의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이 부족했다. 200쪽이 안 되는 분량에 그 모든 걸 담기가 어려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좀 더 치밀하고 꽉 차인 이야기와 감동을 전하는 저자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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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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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낭’이라고 아시나요? 제주도의 옛날식 대문을 ‘정낭’이라고 하는데요.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텔레비전에서 바로 그 ‘정낭’을 본 적이 있습니다. 긴 장대 3개를 대문에 걸쳐놓는 방식을 달리 하는 것만으로 그 집의 주인이 있는지, 출타중인지, 언제 돌아오는지 나타낸다고 하는데요. 도시의 굳게 잠근 대문이 눈에 익어서일까요?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만큼 이웃 사람들을 믿는다는 의미이니까요.


여기 이 마을도 그랬습니다. 캐나다 퀘백주, 지도에도 거의 표시되지 않을 만큼 작은 시골 마을 스리 파인즈도 범죄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범죄도 그 마을은 예외였습니다. 고작해야 마을에 남아도는 서양호박을 이웃집에 몰래 가져다놓는 게 전부였는데요. 그런데 바로 그 마을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추수감사절을 하루 앞둔 일요일 이른 아침, 단풍나무 숲에서 제인 닐이 쓰러진 채 발견됩니다. 일흔 여섯이란 나이는 그녀의 자연사를 짐작할 수도 있었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화살이 제인의 가슴을 관통했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때마침 마을에 사냥철이 시작됐기에 사냥하던 이들의 실수로 인한 불행한 사고가 아닐까 예상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누구하나 자신이 실수했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없는데다 전직 선생님이자 아마추어 화가로 통하는 마음씨 좋은 노부인인 제인에게 나쁜 감정을 품은 사람조차 없었거든요. 이에 경찰청의 아르망 가마슈 경감과 수사팀은 제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화살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합니다. 그런 중에 가마슈 경감은 여태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거실을 공개하지 않았던 제인이 자신의 거실로 사람들을 초대하기로 했었다는 것과 제인이 [박람회 날]이라는 그림을 그려서 전시회에 출품했다는 것과 문제의 그림이 일주일 전에 죽은 티머가 죽던 날의 박람회의 폐막 퍼레이드를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퀘백 독립운동 당시 영국의 황실주의자와 프랑스군이 대립하던 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세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는 데서 유래한 스리 파인즈. 서로 너무나 잘 알아서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안다고 여겼던 마을에서 일어난 의문의 사건은 마을을 점점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오랫동안 스리 파인즈에서 살았던 제인을 살해한 이는 누구일까요? 또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조용한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가마슈 경감과 수사팀에 의해 하나씩 의문이 풀어지기 시작하는데요. 여느 추리소설처럼 눈에 띄는 개성이 강한 등장인물이나 미로처럼 복잡한 사건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소설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현대의 작품이라기보다 마치 정통 추리소설을 읽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이 작품이 저자의 데뷔작이라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 책을 시작으로 앞으로도 출간될 가마슈 경감 시리즈,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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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 그리고 사물.세계.사람
조경란 지음, 노준구 그림 / 톨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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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 인근에 있지만 내가 그 곳을 찾을 때는 서점이나 공연관람이 유일하다. 그 외에는 백화점을 찾을 이유가 없다. 물론 이런 나도 한때 백화점을 자주 들락거린 때가 있었다. 막 결혼한 신혼이었을 때 친구들과 시내에서 약속해서 시간을 보낸 후 남편의 회사 근처의 백화점에서 만나서 함께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간혹 세일기간이라 짐이 무거워도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당시 백화점에는 셔틀버스가 있어서 백화점과 집을 편리하게 왕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셔틀버스 운행이 금지되면서 백화점에 발길도 자연히 뜸하게 됐다.


그런 내게 조경란의 <백화점>은 새로운 시선, 색다른 경험으로 다가왔다. 소설인 줄 알았던 책은 그러나 소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본문의 내용이 신변잡기나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백화점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 백화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한 권의 책에 모아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책의 구성이 독특하다. 모두 11개의 주제(?)로 나뉘어진 책은 지하 1층에서 지상 10층 건물의 백화점을 연상시킨다. 제일 먼저 1층에 들어선 저자는 시계와 향수, 명품매장에 관한 생각과 경험들을 털어놓는다. 자신의 시계 취향, 시계를 고를 때 무엇에 중점을 두는지부터 시작해서 강렬하고 짙은 ‘머스크’ 향에 매료되었던 경험을 얘기하면서 슬쩍 향수의 기원을 건드리기도 한다. 또 명품과는 거리가 멀지만 우연찮게 명품매장에 들렀을 때 머쓱했던 경험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물건이 우리를 말해준다’는 말을 새삼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2층에 오르면서는 백화점의 동선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장과 매장 사이의 간격과 크기, 이어짐이 모두 치밀한 계산에 의해 설계된 것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 바로 에스컬레이터라고 한다. 위와 아래를 오고가는 엘리베이터와는 달리 이동속도는 느리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 수 있기 때문에 백화점에서 아주 중요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한때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동매장과 키즈카페에 들르곤 했는데 백화점에 아동매장이 생기게 된 과정이나 마케팅과 관련된 내용을 접하니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역시 ‘책’에 관한 것이었다. 평생동안 다 읽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만큼 책을 모으는 난 수첩이나 노트를 너무나 좋아한다. 문구점이나 대형마트의 문구코너에서 한참 서성이다 작은 하나라도 건져야 직성이 풀리곤 하는데 그런 내게 저자의 ‘수집’에 관한 이야기는 기억에 남는다.


백화점에는 창과 시계가 없다고 했다. 백화점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 오로지 소비에 몰입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최근엔 달라지고 있는 듯하다. 1층에서 10층까지, 그리고 지하1층으로 향하면서 내게 낯설기만 한 백화점을 저자와 함께 쉬엄쉬엄 돌아다닌 기분이 든다. 구경꾼이자 만보객이 된 듯한 느낌이랄까. 그러고보니 얼마전 공연 관람을 마치고 우연히 찾아든 옥상에서 초록의 작은 정원이 펼쳐져있는 걸 보고 얼마나 감탄했던지. 백화점 영업이 이미 마친 시간의 옥상정원에서 자판기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행복감에 젖었던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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