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0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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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사막 한 가운데로 헬리콥터가 날아듭니다. 도심에서 벗어나 휘황찬란한 불빛 대신 잡초만이 무성한 곳. 헬리콥터의 엔진 소리 외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사방이 고요합니다. 헬리콥터가 지상에서 900미터 높이의 상공에 이르자 갑자기 문이 열리고 곧 이어서 한 남자가 밖으로 떨어집니다. 남자를 허공 속으로 밀어 떨어뜨린 헬리콥터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1030>의 첫 부분인데요. 소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첫, 도입부분이라고 하지요. 거기에 하나 더 매력적이고 개성적인 주인공도 빼놓을 순 없습니다. 해서 작가들은 처음부터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수단을 총동원합니다. 상투적이지 않은 신선한 도입, 되도록 빨리 주인공의 매력을 드러낼 수 있는 스토리를 위해 고심한다고 하는데요.

 

 

<1030>의 도입은 의문으로 출발합니다. 표지를 펼쳐 두어 장 넘기는 동안 밝혀진 건 헬리콥터에서 인정사정없이 내쳐진 남자가 캘빈 프란츠인데, 당시 그의 양 다리는 모두 부러졌다는 것과 캘빈을 사막에 떨어뜨린 일당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이번의 일이 처음이 아니라 비일비재 하다는 사실입니다. 희생자와 베일에 싸인 악의 무리가 드러나는 순간인데요. 이제 남은 것은 악의 무리를 처단할 ‘정의의 용사’, 일명 ‘해결사’입니다.

 

 

‘정의의 용사’, ‘해결사’라고 해서 바람에 망토를 휘날리며 짠~~하고 등장하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이 남자, 찌질하기 짝이 없어요. 낯선 곳의 독신자 클럽에서 만난 여자와 지내다보니 빈털터리가 된데다 행색도 초라합니다. 195센티미터의 키에 10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지만 쿨한 해결사라기보다 텁텁한 방랑자가 제격인듯 한데요. 그런 그가 ATM카드로 현금을 인출하려다가 순간 멈칫합니다. 통장에 자신의 예상보다 더 많은 금액이 들어있었거든요. 정확하게 1030달러. ‘1030’이란 숫자는 잠자고 있던 그의 두뇌를 깨우는 스위치가 됩니다. 1030. 그것은 헌병들이 사용하는 암호화된 숫자로 동료들의 지원을 다급하게 요청할 때 사용하는 코드였거든요. 과거가 자신에게 보내는 특별한 메시지에 이 남자, 순식간에 돌변합니다. 최고의 군인이자 최고의 특수부대원, 첩보인 잭 리처(Jack Reacher). 그가 드디어 눈을 뜨는 순간입니다.

 

 

이후부터 소설은 잭 리처가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낸 사람, 옛 동료였던 프랜시스 L. 니글리를 추측만으로 찾아가고 그녀에게서 역시나 옛 동료이자 형제와 다름없었던 캘빈 프란츠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는데요. 그들은 한때 출신성분과 남녀, 계급을 초월해서 탁월한 능력과 끈끈한 전우애로 똘똘 뭉친 최정예 특수부대원들이었습니다. 리더인 잭의 지휘아래 생사의 순간을 넘나들면서 무수히 많은 임무를 함께 수행했습니다. ‘특수부대원들에게 덤비지 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말이지요. 잭과 니글리는 캘빈의 죽음에 숨겨진 비밀과 처절한 복수를 위해 흩어진 옛 동료들을 찾아 나서는데요. 그런 잭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솔직히 잭 리처는 이번에 처음 만납니다. 친절한 톰 아저씨로 불리는 톰 크루즈가 잭 리처 역할은 맡은 영화가 작년에 상영됐지만 미처 보질 못하고 놓쳤는데요. 엄청난 덩치와 카리스마를 내뿜는 고독한 방랑자 같은 거구의 잭을 단신인 톰이 어떻게 연기했을까. 책 읽는 내내 궁금했답니다. <1030> 외에 다른 잭 리처 시리즈와 함께 지금이라도 꼭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리 차일드에 의해 창조된 인물, 잭 리처. 그의 치명적인 매력을 단 한 권의 책으로 알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표지를 펼치는 순간부터 책을 내려놓기는 힘들다는 거. 약속이 없는 금요일 밤이나 다음날의 스케줄이 한가할 때, 잭 리처와의 만남을 시도하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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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좋다 2014-08-05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실망입니다.

몽당연필 2014-11-04 01:01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아쉽네요 ^^;;
 
유니버설 랭귀지 - 박자세, 자연의 탐구자들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 지음 / 엑셈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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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책에 관한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섭렵(?)했다고 자부(?)했는데. 이런 경우는 참 드뭅니다. <유니버설 랭귀지> 표지를 가득 메운, 암호 같은 문자들을 보고 순간 머리를 짚었습니다. 어이구야, 이건 또 뭔가...? 사실 제가 화학을 워낙 싫어해서 생물학의 전공과목인 생화학, 유기화학 수업을 자주 빼먹긴 했습니다. 그래도 기본이란 게 있는데.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기호 앞에선 비명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이건 아니야! 너무 하는 거 아냐? 좌절하고 포기하려는 찰라, 몇 개의 문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E=mc2’, ‘H2O’, ‘CO2’, 'ADP', 'ATP'... 정말, 어찌나 반가운지. 큰 맘 먹고 참석한 모임에 아는 사람 하나도 없어서 난감한 순간에 그다지 가깝지 않은 몇 다리 건넌 ‘지인’을 만난 기분이랄까요? 순전히 이 몇 개의 문자 덕분이었습니다. 제가 <유니버설 랭귀지>를 읽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유니버설 랭귀지>의 저자부터 얘기 해야겠습니다. ‘박자세’라는 이름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요. 박자세는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의 약칭으로 ‘인간의 의식을 포함한 137억년 우주의 진화 전체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습단체이자 자연과학 문화운동단체’라고 하는데요. 특히 ‘137억년 우주의 진화’와 ‘특별한 뇌과학’ 강의는 박자세 회원은 물론 온라인상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강의 녹취록과 강의에 참여한 회원들의 기록을 한데 모아서 펴낸 것이 이 <유니버설 랭귀지>입니다.

 

책은 모두 15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반상대성 이론, 초기우주. 별의 일생, 생명의 에너지, 기억과 훈련, 자연과학으로 본 인문학 등 자연과학 분야에서 인간이기에 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의문들을 하나씩 다루고 있는데요. 박자세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위해 첫 장에서 박자세의 원칙인 몸 훈련, 뇌 훈련, 목적 훈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공부를 하는데 있어 암기는 반드시 필요하며 어떤 것을 암기해야 하는지 설명한 다음 공표합니다. 박자세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

 

힘들지만 책 보는 습관을 바꾸세요. 논문은 과학자들이 헉헉대면서 한 발씩 딛고 올라간 산물입니다. 논문을 본다는 것은 그 분야의 연구원 수준이 되는 겁니다. 박자세의 최고 목표는 논문입니다. 일반인이 전문가의 수준으로 과학을 공부하는 것, 박자세의 목표입니다.ㅡ19쪽.

 

‘2장 일반상대성 이론’부터 본격적인 강의가 시작되는데요. 21세기를 앞두고 과학자들이 선정한 과학 분야의 위대한 발견 중에서 첫 번째가 진화론, 두 번째가 일반 상대성 이론, 세 번째가 특수 상대성 이론이라고 하면서 아인슈타인의 밝혀낸 것들에 대해 설명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변형에 있어서 ‘광속불변의 법칙’이 얼마나 중요한지, 중력과 가속도의 관계를 짚어줍니다. ‘5장 디랙 방정식’에서는 양자역학의 시작이라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이야기하는데요. 처음 보는 기호 ‘Ψ (파동함수)’를 비롯해서 이것도 미분인가? 싶을 정도로 낯선 미분 방정식에 학창시절 제일 싫어했던 행렬까지 총동원이 되더군요. 현대 물리학은 양자 물리학의 기초 위에 성립되었기 때문에 양자 물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슈뢰딩거 방정식은 반드시 알아야 된다고 하는데 막상 만나보니 외계어로 이루어진 수식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겐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 이해되는 것보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박자세 회원들의 열정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매주 서울에서 열리는 강의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 대구, 광주는 물론이거니와 먼 유럽이나 베트남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기도 한다는군요. 뿐만 아니라 강의 듣기에 가장 좋은 명당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최소한 한 시간 전에 도착하고 칠판에 빼곡하게 채운 강의내용을 4가지 색 볼펜을 동원해서 적거나 그마저도 안 되면 강의 중간 잠깐의 쉬는 시간에 칠판 앞으로 달려가 카메라를 들이댄다고 하는군요. 수강자들 중 일부를 제외하고는 중학생부터 대학생, 주부나 일반 직장인, 상담전문가, 인문예술분야의 학자, 종교인 전직을 알 수 없는 80대의 노인들이라고 하는데요. 그런 사람들이 결코 쉽지 않은 자연과학과 뇌과학 공부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해외학습탐사를 가는 공항에서도 공부의 몰입하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한다. 왜 하는가? 무엇을 위해 하는가? 가끔 허공을 향해, 내면을 향해 던지곤 하는 질문이다. 진리를 보는 안목을 갖자는 생각을 늘 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정면으로 돌파할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이제는 막혔던 답 하나를 담게 되었다.ㅡ386쪽.

 

생물학을 전공했지만 대학시절의 저는 공부보다 딴 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자연과학에 대한 약간의 부채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자연과학 분야의 책을 꾸준히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요. <유니버설 랭귀지>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0여 년에 걸친 박자세 회원들의 공력은 책 한 권으로 넘볼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강의 부분을 볼 때면 어려워, 난해해...를 연발했지만 이어지는 회원들의 에세이와 참여소감을 보면서 지금이라도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표지의 앞뒤를 가득 메운 외계어 같은 기호를 모두 알게 되는 날이 올까요?

 

매 강의마다 마지막 부분에 메모할 수 있는 백지와 해당 강의에 관련해서 참고도서를 소개해놓은 점은 정말 좋았습니다. 본문 사진에서 만난 박자세의 단체 티셔츠는 심플하고 독특해서 탐이 날 정도였는데요. 하지만 색인이 없어서 아쉬웠어요. 이후 개정판이 출간되거나 다른 책이 출간될 때 색인을 꼭 덧붙여지길 바라며 제 마음을 울린 대목을 소개합니다.

 

별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젤란 성운 하나만으로도 호주에 갈 만한 이유가 돼요. 10년 전 울룰루 바위 부근에서 야영하면서 처음으로 마젤란 성운을 새벽에 보았습니다. 아직도 그 놀라운 순간이 생생합니다.……바라보고 망연해지고 하면서 그 새벽이 하얗게 될 때까지 가슴에 내려앉은 은하가 심장박동으로 옮겨지고 그 새벽, 울룰루 바위 부근에서 본 마젤란 성운은 내 몸의 일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ㅡ241~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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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4-07-28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각하 상당히 많은 분량의 리뷰입니다.

몽당연필 2014-07-28 20:19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런가? 원래는 더 적으려고 했는데 너무 긴 듯해서 중간에 편집했다능....^^;;
 
현기증
프랑크 틸리에 지음, 박민정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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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그럴 때가 있다. 자다가 설핏 눈을 떴는데 주변이 낯설게 여겨질 때. 방 안의 가구가, 벽에 걸린 사진이 눈에 익지 않아서 내가 잠든 곳이 과연 어딘지 생각하다가 다시 잠들기도 하고 오히려 잠에서 깰 때도 있다. 무의식과 의식, 그 사이의 언저리에서 벌어지는 혼동이나 착각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런 게 아니면? 착각이나 혼동, 악몽이 아니라면?

 

사방이 어둠에 잠겨 있다.…… 이곳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50세의 조나탕 투비에. 그가 기억하는 것은 병원에 입원한 아내 프랑수와즈의 병실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너무나 익숙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는 것. 아, 몸이 안 좋아서 역한 맛이 나는 시럽을 마셨다. 이것이 전부였다. 이후 어딘지 알 수 없는 빙하의 동굴에서 잠에서 깬 그가 맞닥뜨린 것은 오른손에 채워진 족쇄였다. 자신이 기르는 체코슬로바키아 울프독 포카라가 함께 있어 잠시 위안이 되긴 했지만 머리에 철가면을 쓴 남자, 미셸 마르퀘를 만나면서 혼돈에 빠진다. 두 사람의 등에 ‘누가 도둑일 것인가?’ ‘누가 거짓말쟁이일 것인가?’라고 적힌 천 조각이 붙어 있는데다 철가면에는 폭발물이 장전되어 있어서 서로 50미터 이상 떨어지면 폭발한다는 내용의 편지가 발견된 것이다.

 

자신들이 왜 이 낯선 곳으로 끌려와 갇혀 있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들은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오른쪽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남자, 파리드 후마드. 그의 등에 적힌 문구는 ‘누가 살인자일 것인가?’였다. 족쇄가 채워진 두 사람과 철가면을 쓴 사람. 제한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의문투성이의 사건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분노하면서도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를 의심하기 된다. 급기야 감추었던 비밀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상황은 더욱 파국으로 치닫는데.....

 

어느날 갑자기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악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스스로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또 선택을 강요하는 그래서 다소 불편한 소설이었다. 프랑크 틸리에의 작품은 <현기증>이 처음이다.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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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책과 연애하다 - 통섭의 책 읽기 경계를 허무는 도서관
안정희 지음 / 알마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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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망은,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바로 작은도서관이다.

 

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아동문학에 발을 들여놓았다. 동화 읽는 어른 지역모임에서 그림책과 동화를 읽기 시작해서 급기야 어린이 독서지도사 교육을 받았다. 동기는 단순했다. 내 아이를 좀 더 알고 싶다는 것. 나와 닮았지만 전혀 다른 아이의 마음이 궁금했다. 수많은 그림책과 동화 속에서 해답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뻔히 보이지만 감춰져 있고 꽁꽁 숨겨진 듯 의외의 장면에서 아이들의 순수함이, 재기발랄한 모습들이 톡톡 튀어나왔다. 그림책이나 동화는 그저 어린이들이 보는 ‘쉽고 단순한 책’이 아니란 걸 실감하게 됐다.

 

그즈음이었다. 외형이나 내용에서 천편일률적으로 규격화된 전집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어린이 책시장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어린이책 전문가의 검증과 부모들이 추천하는 단행본이 서가를 가득 메우고 일과 중에 동화를 읽어주거나 어린이를 위한 공연이 열리기도 하고 엄마들이 도우미로 활동하는 도서관. 바로 느티나무 도서관이었다. 아동문학 작가의 염원이 볼로냐국제도서전의 초청이라면 내겐 느티나무 도서관이 그랬다.

 

느티나무 도서관이 2000년에 개관한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도서관의 서가를 가득 메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베스트셀러에 연연하지 않고 사람들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 사소하지만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고 배움의 동기를 찾을 수 있는 책으로 가득한 느티나무 도서관은 모든 도서관이 나아가야할 바를 보여준다.

 

<도서관에서 책과 연애하다>의 저자는 느티나무 도서관의 북큐레이터인 안정희씨. 그는 법학을 전공했음에도 책이 좋아서 책과 일상을 함께 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책들을 만날 수 있다. 전쟁 중에도 인간의 내면이 성장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미스터 핍>, 책을 읽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기억전달자>를 통해 저자는 ‘인간에게 ‘책’과 ‘읽기’는 삶 그 자체(38쪽)’라고 말한다. 책이 존재하는 공간인 서점, 헌책방, 북카페, 개인의 서재가 저마다 어떻게 다른지 짚어주고 책이 어디에 놓여있느냐에 따라 책의 의미도 달라지기 때문에 가끔은 책을 도서관처럼 열린 공간에서 읽으면 시야가 확장되는 걸 느낄 수 있다고 전한다.

 

책은 인류가 후대에 전승코자 하는 정신이자 기억이다. 그 오래고 방대한 ‘인류의 기억’인 서가 앞에 서면 ‘나’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ㅡ 61쪽.

 

소설가 김연수와 시인 문태준의 일화를 소개하는 대목은 놀랍다. 그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일찍이 작가를 꿈꾼 김연수와 작가를 꿈꾸지 않았지만 저절로 시가 흘러나왔다는 문태준. 두 작가의 이야기 속에서 도서관이란 공간의 무궁무진함을 느낄 수 있다. 취학 전 아이는 부모가 도서관에 바로 데리고 들어가지 말라는 것도 의외였다. 아이가 되도록 빨리 책을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아이가 도서관 주변의 환경을 관찰하면서 익숙해지는 과정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도서관이 가장 필요한 시기가 중, 고등학교 때라고 하는데 요즘의 청소년에게 도서관은 공부의 장소로 여겨지고 있어 안타까웠다. 학창시절의 나는 도서관에서 책으로 빼곡한 서가 사이를 걷다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곤 했는데 내 아이도 그럴까? 때론 원하는 책을 찾지 못해 서가 사이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더라도 그것 역시 소중한 경험이고 추억이라는 걸 내 아이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쩌다 우리 집을 방문한 이는 모두 한결같이 묻는다. “여기 이 책들, 전부 읽었어요?” 난데없는 질문에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젠 당당하게 말한다. “에이, 설마 다 읽었겠어요? 그래도 일단 차례를 훑어보니까 대충 어떤 내용인지는 알아요.” 내 아이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책을 읽었고 어떤 책을 읽는 중인지, 외면 받는 책은 무엇인지 아이 방을 정리하면서 짐작해본다. 방 안 여기저기 쌓여있고 아무렇게나 펼쳐진 책들을 보면서 핏줄의 무서움을 새삼 느끼면서 오늘도 난 아이와 함께 할 책을 찾고 있다.

 

무엇보다 내 눈에, 내 마음에 아이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내 아이가, 다음에는 다른 아이들이, 그렇게 책과 더불어 나와 아이는 진정으로 가족이 되었다. 내 인생이 통째로 변하기 시작했다. ㅡ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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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7-15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북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신선합니다.
장바구니에 쏙 들어갑니다~~
 
고종석의 문장 한국어 글쓰기 강좌 1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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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그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다. 지인을 통해서, 혹은 책을 통해서 그가 좋은 글, 올바른 글을 쓰는 문장가라는 걸 여러 차례 접했다. 허나 그의 글을 만날 기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읽어야 하는 책보다 좀 더 흥미롭고, 좀 더 구미가 당기는 책에 끌렸다.

 

그러다 기회가 찾아왔다. 고종석의 책, 그것도 글쓰기에 관한 책이다. 사실 글쓰기에 관한 책을 지금까지 수차례 읽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읽고 나서 왠지 위축되는 기분이 들곤 했다. 저자가 권하는 글쓰기의 방식,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오롯이 내 것이 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저자의 방식을 녹여내어 나만의 글쓰기로 담아내질 못했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글쓰기를 게을리 했다는 것. 해서 이번 <고종석의 문장>은 어떨지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읽었다. 결코 유쾌하지 못한 기분을 또 한 번 맛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더구나 글쓰기, 문장에 관한 책치고는 두께도 상당해서 시작부터 조금 걱정이 됐지만 결론은...뭐, 좋았다. 그렇다고 글쓰기에 대한 중압감을 느낄 수 없는 책이었느냐,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글이란 것이 무엇인지, 왜 글을 쓰려고 하는지, 어떤 것이 올바른 글, 제대로 된 글인지 알려주는 글쓰기의 기본을 짚어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종석의 문장>은 저자가 2013년 9월부터 그해 12월까지 숭실대에서 진행한 글쓰기 강연을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해서 본문의 문장은 구어체로, 대상이 학생이었기에 내용도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어 있다. 책은 가장 먼저 ‘글은 왜 쓰는가?’를 묻는다. 글을 왜 쓰는지, 그것을 짚어보기 위해 저자는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생계 때문이 아니라면 글을 쓰는 동기는 대략 네 가지가 있다고. 자신이 돋보이고 싶은 이기심 때문이거나 아름다운 것을 보고 듣고 글로 남기고 싶은 미학적인 열정, 후세의 사람들을 위해 사실과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는 역사적인 충동, 세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서라고 하는데 나의 글쓰기의 동기는 무엇인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이후에는 세계의 유일무이한 언어, 한국어에 대한 이해, 한국어다운 글쓰기에 관해이야기하는데 언어학자인 저자의 이력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정치평론가로 알려진 촘스키가 원래는 언어학자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시작으로 한국어가 얼마나 풍부한 음성을 지닌 언어인지 강조한다.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웠던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의 [청산별곡]은 ‘ㄹ’소리의 향연이라고 하는데 소리내어 읽어보니 어떤 의미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평집 <자유의 무늬>를 교재삼아서 글을 쓸 때 주의해야 할 것들, 미처 모르는 오류들을 하나씩 짚어준다. 이를테면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 ‘그런데’ 같은 접속부사는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쓰지 않는 것이 좋다는 거나 ‘~적’ ‘~의’는 일본식 표현이라 가급적 빼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아름답고 정확한 글쓰기란 무엇일까’ 책장을 덮으면서 생각해본다. 아름답고 정확한 글은 무엇보다 논리가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논리적인 글을 위해 아직 배우고 느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됐다. 그런 다음엔 쓰고, 또 쓰고. 꾸준히 글을 쓰는 것. 그것만이 나의 글이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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