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덱의 보고서
필립 클로델 지음, 이희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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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월드컵으로 인해 잠잠해지긴 했지만 요근래 ‘서울 불바다’라는 말이 인터넷과 일간지상에 종종 등장하곤 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한 나라의 수도를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발언이 나오다니. 더구나 올해는 한국전쟁 60년을 맞는 해. 한국전쟁 당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조국을 지켰던 학도병들의 실화를 다룬 영화가 개봉되었고 얼마전엔 오랫동안 종군기자로 활약하던 이가 전쟁터가 아닌 외진 망루에서 전쟁 벽화를 그리며 살아가는 내용을 담은 소설도 읽었다.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나로선 이렇게 영화나 소설로 접하는 게 전부이지만 그럴 때마다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그로 인해 사람들이 받는 상처와 고통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끼게 된다.




<브로덱의 보고서>. 제목만 보고 처음엔 소설이 아닌 사회현상이나 세태를 고발하는 형식의 글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검은 형체의 인간이 검은색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타자기를 두드리는 모습이, 바로 그 사람을 언제라도 움켜잡을 것처럼 손바닥을 쫘악 편 표지그림이 호기심을 자아냈다. 이 사람이 보고서를 쓰는 인물, 브로덱인가? 그렇다면 그가 쓰는 보고서는 대체 뭐에 관한 거지?




‘내 이름은 브로덱이고 그 일과 무관하다.’ 책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그 일’과 자신은 절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한다. 아니, 무슨 일인지도 말 안했으면서 무조건 난 아니라고 발뺌하다니...뭘 모르는구만.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걸 모르나? 언뜻 삐딱한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론 더욱 궁금해진다. 도대체 ‘그 일’이 어떤 일이기에, 얼마나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걸까.




브로덱이 말하는 ‘그 일’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상처와 혼란이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때,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인 외딴 마을에 낯선 이가 찾아온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타인’이란 의미로 ‘안더러’라 불렀는데 마을에서 한동안 머물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브로덱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기록으로 남기라고 말한다.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은 너 밖에 없다면서. 그후 브로덱은 보고서를 쓰기 시작한다. 시장을 비롯해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그간의 일을 조사하자 사람들은 그를 친절하게 대하면서도 왠지 괴리감을 느끼는 행동을 한다. 있지도 않은 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아내려고 애쓰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이쯤 되면 궁금증은 더욱 커진다. 안더러는 대체 누구였을까. 왜 이 마을에 왔으며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걸까. 그 안더러를 마을 사람들은 왜 살해했을까. 그리고 ‘그 일’의 보고서를 왜 브로덱에게 일임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의문들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책은 브로덱이 보고서를 써가는 과정을 그대로 따라가는 동시에 그의 과거를 보여준다. 브로덱이 어떻게 해서 마을에서 지내게 됐는지, 전쟁이 한창일때 오떤 일이 벌어졌고 그로 인해 브로덱은 어떤 고통을 당해야 했는지...낱낱이 드러낸다. 그리고 안더러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드러나게 되는데...




한 권의 소설을 이토록 오래 잡고 있기는 정말 드문 일이다. 소설의 내용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해거나 복잡한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던 건 아마도 ‘그 일’의 이면, 어둠에 가려진 사건의 진실, 마을 사람들 모두를 불안에 떨게 했던 진실을 만나기가 불편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낯선 이방인을 대할 때 호기심과 신선한 자극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가 위험한 존재란 생각이 들 경우엔 지금까지의 태도에서 돌변해서 무리지어 공격할 수도 있다는 사실,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공포와 폭력성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영화 <도그빌>과 <모든 것이 밝혀졌다>란 소설이 떠올랐다. 자신들의 마을에 찾아온 낯선 이에게 인간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추악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가할 수 있는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때로 낯선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도 서슴지 않는 모습이 충격적이었는데 <브로덱의 보고서>를 통해 그때의 느낌, 기분들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필립 클로델. 그를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났다. 그렇기에 하나의 작품만으로 그를 평가할 수는 없다. 그가 펼쳐보인 세계는 단번에 읽어내고 파악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의 또다른 작품을 만나거나 이 책을 다시 읽어야할 것 같다. 그것도 조만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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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미스터리 해결사 과학 시크릿
이진산.강이든 지음 / 삼양미디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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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의 축제, 월드컵이 남아공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상대로 그리스를 맞은 태극전사들의 모습을 지켜보신 분들, 아마 모두들 손에 땀을 쥐었을 거예요. 쾌적한 헬스클럽에서 달리는 것만도 힘든데 기후나 환경이 우리와 판이하게 다른 나라에서 경기시간 내내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거. 얼마나 힘들까요. 우리 선수들,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거 아세요? 월드컵에서 우리 대표팀이 입은 유니폼의 재료가 바로 음료수 페트병이래요. 폐 페트병을 녹여서 실을 뽑아내어 그 실로 옷감을 만들고 국가대표 유니폼을 제작했는데요. 2ℓ 페트병 8개 정도면 유니폼 1벌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일상 속에서 늘 접하는 평범한 패트병이 최첨단 유니폼으로 변신하다니. 과학의 힘은 정말 놀랍죠? 




사실 아침에 일어나서 깊은 밤 잠자리에 들기까지 우리의 일상은 모두 과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냉장고 문을 열고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시거나 식후 디저트로 상큼한 과일을 먹을 때,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친구들과 수영을 하고 차가운 음식을 전자레인지로 데울 때, 놀이공원에서 아찔한 롤러코스터를 탈 때...이 모든 현상에 과학이 숨어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과학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거죠. 그런데 그걸 미처 느끼지 못했다구요? 그렇다면 <과학 시크릿>을 주목해주세요. 우리 일상 속에 숨은 과학적 미스터리를 단번에 해결해줄 미스터 Lee가 있으니까요!




‘생확 속 미스터리 해결사’라는 부제의 책은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우리 생활 속에 숨어있는 과학적인 원리들을 화학, 물리, 생물, 지구과학 분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어릴 때 엄마에게서 무수히 듣다가 이제 내가 아이들에게 매일 반복하는 말, “빨리 냉장고 문 닫아! 전기세 많이 나간다”라는 말이 그냥 빈말이 아니라는 것. 공기는 찬 공기가 더운 공기보다 무겁기 때문에 오랫동안 냉장고 문을 열어놓으면 그만큼 냉장고의 찬 공기가 빠져나와 온도가 올라가니까 그걸 다시 차갑게 만들기 위해 전기가 소모된다는 거지요. 그러면서 요즘 대부분의 가정에서 사용하는 김치 냉장도가 일반 냉장고와 달리 문을 위로 여는 방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게 바로 찬 공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군요.(이담에 김치냉장고 장만할 때 참고해야겠어요.) 또 과일의 단맛을 내는 과당이 알파형, 베타형 두 종류가 있어서 냉장보관 했을 때 더 맛있는 과일이 있는가하면 파인애플이나 바나나, 망고 같은 열대과일은 상온에서 보관해야 더 맛있다고 해요. 요즘 한창 제철인 수박도 시원하게 먹으려고 냉장보관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수박은 상온에 뒀을 때 우리 몸에 좋은 성분의 함량이 더 많아진데요. 그러니까 먹기 한 두 시간 전에 잠깐 냉장고에 넣어두는 게 좋다고 합니다. 이뿐 아니라 뚱뚱한 사람이 물에 더 잘 뜨는 원리는 부력이 물에 닿는 표면적과 관계가 있다는 것과 안경은 시력교정의 효과가 전부이기 때문에 안경을 쓰면 그때부터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진다는 이야기가 그야말로 ‘카더라’통신이라고 하네요. 큰아이가 난시여서 안경을 쓰는 게 은근히 마음에 걸렸는데, 6개월마다 시력검사와 렌즈교체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학창시절 공부하느라 머리 싸맸던 과학의 모든 과목들이 총출동 했습니다만 책의 내용은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여러 경로를 통해 제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도 많았구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나쁜 공기 때문에 두통과 피로를 느낄 수 있다(부지런히 청소하고 환기시켜야겠어요.)는 거나 도로 위의 스키드마크가 곧 과속의 증거가 된다(남편에게 상기시켜할 듯)는 건 처음 알게 됐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식물 중에 공기 정화 능력이 뛰어난 친환경적인 식물이 있다는 거예요. 전자파 차단에 선인장이 좋다는 건 알았지만 집중력 향상에 도움을 주는 식물이 있다니, 놀랍네요. 파키라와 보스턴줄고사리! 큰아들을 위해 얼른 장만해둬야겠어요. ^^




과학! 해도해도 어렵고 무조건 외워야 하는 골치 아픈 학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이제 <과학 시크릿>을 만나보세요. 일상 속에서 늘 접하는 과학적 원리들을 미스터 Lee가 쉽고 재미있게 알려줄 테니까요. 아이와 함께 보시면 더욱 좋다는 거,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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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화를 그리는 화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시공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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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다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긴다. 지극히 사소한 일이 눈덩이처럼 부풀리기도 하고 웬만해선 풀기 어려울 것 같은 심각한 사건이 눈이 녹아내리듯 무마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봐야 할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사람이 자신을 죽이겠다는 말을 한다면?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장강도나 연쇄살인범이냐, 그것도 아니다. 참으로 기이하고 해괴한 일이다. 대체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소설의 주인공은 안드레스 파울케스. 전직 사진기자였는데 전쟁의 한가운데서 현장감 넘치는 사진을 찍는 종군기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손에서 카메라를 내려놓고 찾아간 곳은 지중해의 작은 마을, 해안가 절벽의 버려진 망루였다. 매일 아침마다 팔을 150번 저어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온 파울케스는 망루의 벽을 마주한다. 그리곤 카메라를 들었던 손에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여러 시대를 걸쳐 일어난 전쟁의 순간을 담은 거대한 전쟁 벽화를.




파도소리와 관광유람선에서 들려오는 엔진과 음악소리를 빼면 고요함만이 가득한 망루에 어느 날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의 이름은 이보 마르코비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파울케스에게 그는 한 장의 사진을 내민다. 그건 파울케스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전쟁에 종군기자로 활약할 때 퇴각하는 크로아티아 병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는데 당시 ‘전쟁의 상징’으로 여겨질만큼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파울케스는 권위있는 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파울케스에게 영광을 안겨다준 사진이 마르코비치에게는 곧 불행의 시작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크로아티아군의 상징이 되버린 마르코비치. 그는 세르비아 군대에 포로로 잡혀 모진 고문을 받는가하면 아내와 아이까지 잔혹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브라질에서 나비가 날갯짓 한 것이 세상 반대편에 허리케인을 몰고 가듯이 오래전에 일어난 우연한 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기에, 사랑하는 가족에게 끔찍한 불행이 닥쳤기에 마르코비치는 그 원인이 된 사람, 파울케스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를 찾기 위해 오랫동안 여러 곳을 수소문하던 마르코비치는 결국 알아낸다.




자신에게 크나큰 불행의 씨앗을 안겨준 사람이었지만 마르코비치는 파울케스를 만나자마자 죽일 수 없었다. 이제 전쟁사진이 아닌 전쟁화를 그리는 파울케스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언제부터 눈앞에 펼쳐진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됐느냐고. 당신이 찍었던 죽어가던 여인의 사진은 어찌했냐고. 그녀를 사랑했던 거냐고. 왜 그림을 그리느냐고...




책은 파울케스와 마르코비치, 두 남자가 3일에 걸쳐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생과 사, 전쟁과 삶, 사랑, 예술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느 미스터리 소설처럼 의문의 사건이 벌어지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편이 더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다고 그들의 대화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더뎌지고 자꾸 멈추게 됐던 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던진 질문들이, 그 화살이 왠지 내게도 향해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나 자신이 마치 제 3자가 되어 무의식중에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마르코비치는 결국 파울케스를 죽이게 될까? 궁금해서 자꾸 뒷장을 들춰보고 싶은 걸 꾹꾹 참느라 정말 힘들었다. 20여 년간 전쟁과 내란의 현장을 누비는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아르투로 페레스-레베르테. 그는 자신이 겪었던 전쟁의 참혹함을 이 한 권의 책 <전쟁화를 그리는 화가>를 통해 보여준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를 모두 가슴에 담아내려면 언제든 이 책을 다시 읽어야 될 듯하다.




우연히도 사진을 찍는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을 연이어 읽었다. 화려한 도시에 살아가는 색명의 여자 사진작가가 카메라를 통해서 흑백의 세상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펼쳐보이기 위해 고심했다면 파울케스는 참혹한 전쟁터를 누비며 수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그건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순간 포착에 지나지 않았다.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작품을 읽으며 내게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카메라를 통해서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서툴게나마 내가 담아내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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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큐피드의 동생을 쏘았는가
데이비드 헌트 지음, 김승욱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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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옷을 입은 마네킹도 빛이 사라진 깊은 밤엔 공포의 대상이 된다. 어두운 밤길을 걷다가 쇼윈도의 마네킹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누가 큐피드의 동생을 쏘았는가>를 처음 만났을 때 바로 그런 기분이 들었다. 생기 없는 공허한 눈빛, 민머리,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몸체. 더욱 놀라운 건 마네킹의 몸이 마치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전,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사춘기 무렵의 아이들을 나타내는 것 같다는 점이다. 어떤 장식도 없는 단순한 표지. 이것이 상징하는 건 대체 무얼까...




책의 주인공은 케이 패로. 사진작가인 그녀는 상염색체 퇴행성 색맹, 즉 색맹이다. 색깔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는 그녀에게 세상은 무채색의 거대한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들 때 카메라 렌즈를 통해 바라본 세상은 저마다 다른 형태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걸 케이는 느끼게 된다. 그런 케이에게 있어 카메라와 사진은 그녀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이자 도구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수단이었다.




색맹이기에 하나의 대상이나 사물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이면을 꿰뚫는 감각을 키울 수 있었던 케이. 그녀는 자신만의 특별한 작품집을 만들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의 후미진 뒷골목을 찾는다. 그 곳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남창들은 케이를 ‘버그’라 부르며 어울리는데 케이는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청년 팀을 대상으로 작품을 구상한다. 어느 날 케이는 팀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아 약속장소로 나가지만 팀은 오래도록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누군가에게 살해되어 토막 난 그의 머리가 발견된다. 허나 이 사건을 경찰 측에서 단순히 남창을 살인한 사건으로 무마하려고 하자 케이는 분노하여 직접 사건을 조사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팀의 사건이 케이의 아버지가 경찰이었던 때 T사건으로 알려진 연쇄살인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한다.




이후 케이는 옛날 자신의 동료였던 기자 조얼과 명예욕이 강한 여형사 힐리와 함께 사건을 추적해나가기 시작한다. 팀의 사건이 정말 T 사건의 연장선에 있는지 아니면 단순한 모방범인지. 과거 T 사건과 관계된 경찰들을 한 명씩 만나 인터뷰하던 케이와 조얼은 당시 관계자들의 얘기에서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는데...그 속에 숨겨진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사건의 의문을 풀어나가는 인물이 색맹의 사진작가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읽었던 여느 미스터리 소설과 달랐다. 주인공이 지닌 신체적 여건이 독특하다보니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도 독특한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하지만 그로 인한 한계점도 있었다. 미스터리 소설을 읽을 때면 마지막 부분에 가까워질수록 지금까지 알려진 것들을 완전히 뒤집는 급반전이 있을거라 짐작하는데 이 책은 그 부분이 많이 아쉬웠다. 아니, 나름 반전이 있긴 했으나 기대했던 급반전보다 약한 나머지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인간의 내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본 듯하다. 마치 컬러 사진의 화려함과 강렬함은 없지만 흑백 사진 특유의 진중함이 묻어나는 것 같다고나 할까. 햇살이 뜨거운 요즘, 무더위를 식혀줄 독특한 미스터리를 찾는 이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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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흩어진 날들
강한나 지음 / 큰나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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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본에 다녀온 적이 있다. 내 평생 처음으로 해외 나들이했던 그 곳은 바로 언니 가족이 살고 있는 오사카였다. 겨우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떠나기 전엔 무척 설렜다. 여권을 만들어 비자발급 받고 여행가방을 꾸리는 것, 항공권을 손에 들고 출국장에 들어설 때 어찌나 가슴이 두근대던지... 하지만 비행시간이 워낙 짧은데다 우리와 생김새가 비슷한 곳이어서 그런지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다 입국 수속을 밟을 때. 나를 마중 나온 형부 차를 오른쪽이 아닌 왼쪽으로 타고 도로에서 반대 차선으로 달리는 장면을 목격하고 순간 당황했다. 엇? 뭔가 이상한데? 아차! 그렇지! 그리고 내가 드디어 내가 외국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그때 이후론 일본에 다녀온 적이 없다. 언니는 언제든 아이들 데리고 오라고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의 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저 소설이나 만화, 영화를 통해 보고 만나는 일본을 내 눈으로, 내 두 발로 직접 만나고 이 곳 저 곳 다녀보고 싶다는 생각만 품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설까. 분홍빛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속에 한 여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뭔가를 응시하는 장면의 <우리 흩어진 날들> 표지사진을 보고 순간 가슴이 설렜다. 평소 다른 이의 여행이야기를 여간해선 읽지 않는 나였다. 그들이 자신의 경험을 아무리 글로, 사진으로 생생하게 남겼다 하더라도 나 자신이 그곳을 가보지 않았다면, 그들의 경험을 제대로 공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멋지고 아름다운 사진 한 장을 보는 것과 다를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책만은 왠지 끌렸다. 그래도 오사카는 가봤잖아... 그러니 다른 곳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선뜻 집어들었다.




맛깔난 음식을 먹듯 서슴없이 달려든 책이었기에 대체 어떤 여행이야기가 숨어있을까...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오사카로 떠나기 위해 출국장을 나설 때처럼. 그랬는데 본문에서 제일 먼저 오사카가 등장하는 걸 보고 이야!! 쾌재를 불렀다. 나와 저자의 경험이 얼마나 공감대를 가지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초반부터...뭔가가...달랐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 방식에 당황했다. 문어체와 구어체를 넘나들고 때로 시나 편지를 쓰듯, 일기를 쓰듯 써내려간 글에서 정돈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엇, 이거 여행서 아닌가? 싶어 표지를 살펴보니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작은 글씨. ‘빈티지 감성 여행에세이, 일본’. 빈티지?? 아하...그래서 소제목마다 ‘낡은..’이란 단어를 썼구나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감성 여행에세이’...이게 난관이었다. 저자의 감성을, 일본을 여행하면서 느꼈던 감흥을 내가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면 거기에 완전 몰입할 수 없는 게 아닐까...여행서 치고는 꽤 두툼한 책이 갑자기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그래서 책의 순서와 상관없이 내 마음에 내키는 대로 그동안 일본의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읽어나갔다. 오사카를 시작으로 교토, 나라, 고베, 나가사키, 도쿄, 주고쿠...로. 저자의 이야기에, 감성여행에 몰입할 수 없다면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만 보자고. 내 나름의 일본여행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감성은 나와 거리감이 느껴졌다. 저자와 나의 세대가 달라서인지 저자가 털어놓는 사랑과 이별, 추억, 일본에서 만난 낡은 사물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과하지 않나...인터넷 포털의 개인 블로그에 올려서 지인들과 공감하는 정도의 이야긴데...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책에 수록된 사진이 모두 실감나고 좋았느냐...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사카 성을 앞에 두고 갈까 말까 망설였다는 대목이 예전에 내가 일본에 갔을때 고민했던 것과 같아서 공감했다는 정도?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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