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톨른 차일드
키스 도나휴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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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이란 말을 들으면 왠지 날개가 달린 작고 귀여운 외모를 한 때론 마법을 써서 착한 인간들을 도와주는 어떤 존재가 떠오른다. 그런데 그 요정이 아이를 바꿔친다고 한다. 요정이? 설마, 그럴 리가 있나? 싶은데 유럽의 설화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한다. 키스 도나휴의 데뷔작인 소설 <스톨른 차일드>는 바로 그 설화에 뿌리가 닿아 있다.




‘나를 요정이라 부르지 말기를’이란 누군가의 고백으로 책은 시작한다. 자신은 ‘파에리’란 무리에 속하는 일종의 도깨비이며 ‘바꿔친 아이’라고. ‘바꿔친 아이? 이건 또 무슨 얘기야?’ 순간 눈동자가 커지는 기분이다. 아차 하는 순간에 중요한 걸 놓치는 건 아닐까 긴장된다. ‘나’는 계속 말한다. 자신이 속한 ‘파에리’들은 인간의 아이를 훔쳐오고 대신 자신 중의 누군가를 들여보낸다고. 한번 파에리가 되면 다시 인간세상으로 돌아가기까지 백 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아무나 바꿔칠 수는 없다고 한다. 짧은 삶을 살아오는 동안 어려움을 겪었거나 고독한 예닐곱살의 아이들. 그런 아이를 물색해서 오랫동안 관찰한 다음 바꿔칠 순간을 기다린다고. 무척이나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자신은 드디어 ‘헨리 데이’가 되었노라고.




헨리 데이가 된 파에리는 원래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구스타프란 이름의 소년이었는데 요정에 의해 납치되어 삶을 잃어버렸고 백 년을 기다린 끝에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헨리 데이가 되어 낯선 환경에 차츰 적응해가는 와중에 혼란을 겪지만  그의 내면에 살아있는 구스타프, 음악을 사랑하던 존재에 의해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게 된다.




그럼 원래 ‘헨리 데이’였던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헨리 데이’란 이름을 잃어버리면서 ‘헨리 데이’로 살았던 지난 삶의 기억들을 차츰 잊어간다. 대신 ‘애니 데이’란 이름으로 파에리의 무리 중 하나가 되어 숲에서의 삶에 순응하며 살아가지만 그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심한다. 점차 흐려지는 자신의 존재, 실낱처럼 희미하게 남아있는 파에리 이전의 삶과 가족들을 떠올리고 그리워하는데....




‘헨리 데이’에서 ‘애니 데이’가 된 소년과 ‘애니 데이’에서 ‘헨리 데이’가 된 파에리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듯 이어지는 소설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되뇌었던 의문이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나’란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어느 날을  기점으로 서로의 삶이 바뀐 두 ‘헨리 데이’의 삶은 단순한 호기심과 흥미를 넘어 독자로하여금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




‘체인질링’이란 영화가 생각난다.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아들을 찾기 위해 엄마는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그녀의 집념에 경찰은 한 소년을 그의 아들이라며 데려오지만 그 아이는 진짜  아들이 아니었다. 엄마는 울분을 토한다. 자신의 생명인 진짜 아들을 찾아달라고. 마지막에 가서야 아들의 죽음을 암시하는 얘길 듣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아들을 찾는 걸 포기하지 않고 힘주어 앞으로 나아가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헨리 데이의 부모님과 사뭇 다른 모습이어서 그랬을까.




마지막, 성인이 되어 가정을 꾸린 헨리의 연주를 들으며 그를 응원하는 자신의 원래 가족들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소년 ‘애니 데이’. ‘떠나고 돌아오지 않겠지만 모든 것을 기억할 것’이라는 그를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심정으로 지켜보며 생각했다. 먼 길을 떠나는 그에게 과연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 그가 앞으로 맞이하게 될 삶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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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사막을 사박사박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오유아 옮김, 오나리 유코 그림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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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달의 사막을 사박 사박 고등어 조림이 지나가네요. ♫




큰일이다. 요며칠 계속 이 노래(?)가 입가에 맴돈다.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않았기에 음정도 박자도 알 수 없는 노래건만 눈으로 한번 읽는 순간 뇌리에 콕 박혀버렸다. 생전 첨 듣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는 엄마를 가족들은 이상하게 쳐다보고 큰아이는 ‘왜 하필 고등어 조림’이냐며 물어보기까지 한다. “어우, 야아~, 그런 걸 물어보면 어떡하니? 나도 모르는데....”




이 책에는 열 살의 사키와 엄마의 일상이 담겨있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어제와 별다르지 않은 오늘, 내일도 오늘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일상의 모습이지만 왠지 정겹고 따스한 느낌을 준다.




사키는 열 살이란 나이보다 어른스러운 면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모습이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솜사탕이 너무나 맛있어서 아빠에게 주려고 접시에 담아두거나 바람을 막기 위해 창문을 열어두고 불어난 강물이 넘치지 않게 일부러 수도꼭지를 열어둔 사키. 어른의 눈으로 보기엔 터무니 없는 것이지만 순수한 아이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아들만 둘이지만 그동안 딸을 낳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지만 사키를 보는 순간, ‘이런 딸이라면 셋째를....?’하게 된다. 거기다 사키의 엄마! 사키의 짝꿍인 무나가타와 연락장을 통해 짤막한 대화를 주고 받고 사키가 ‘선행상’이라며 빨간 리본을 허리에 둘러주자 뛸듯이 기뻐하는 모습이 철딱서니 없다기보다 나도 이런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엄마와 어린 딸의 일상을 막 구은 촉촉한 케이크처럼 부드럽고 풍부한 감성이 담긴 글로 표현한 책이기에 저자인 기타무라 가오루는 당연히 나와 비슷한 중년의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읽었던 <스킵>이란 책에서도 저자의 감성을 감탄하며 읽었는데.... 너무나 놀랍게도!! 남자였다. 그것도 60대의 할아버지라고 한다. 오, 세상에...이런 일이. 인터넷으로 사진을 검색해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거다.




<달의 사막을 사박사박>. 감성이란 걸 손에 만질 수 있는 거라면 이 책에서 엄~청 많이 묻어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일상에 지쳐서 어떤 일에도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 ‘사박사박’이란 단어를 입으로 말하는 순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는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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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빛 매드 픽션 클럽
미우라 시온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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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악몽을 꿨다. 난 바닥을 알 수 없는 늪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발이, 다리가, 몸통...급기야 가슴이 조여오고 턱까지 빠지면서 숨이 턱 막혔다. 아,  이게 죽는 건가. 갑자기 다가온 죽음에 슬픔이 밀려왔다. 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데? 억울했다. 마지막 남은 숨을 몰아쉬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지독한 악몽에서 깨어났지만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가위눌림과는 달랐다. 잠깐이지만 코와 입으로 호흡하지 못하고 숨이 막혔던 게 마치 현실에서 일어난 일처럼 너무나 생생했다. 어둠에 사로잡힌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어둠에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느새 바다로 이어지 는 하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섬, 미하마. 행정구역상 도쿄에 속하지만 찾아오는 이가 적어 한적한 섬에 노부유키와 동갑내기 아름다운 소녀 미카,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는 다스쿠가 있다. 특별한 유흥시설이 없는 섬에서 유일한 오락거리는 담배와 포르노잡지뿐. 우연히 리카와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노부유키는 온종일 미카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런 노부유키를 다스쿠가 그림자마냥 졸졸 따라다니지만 노부유키는 다스쿠가 귀찮고 불결한 존재에 불과했다. 한껏 몸이 달아오른 노부유키가 늦은밤 미카를 만나기 위해 다스쿠와 신사로 향하던 날, 잠이 든 듯 고요하던 바다는 순식간에 거대한 쓰나미로 돌변하여 깊은 잠에 빠진 마을을 덮친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삼켜버렸다. 생존자는 신사에 있던 세 명의 아이와 다스쿠의 아버지 요이치, 등대 할아버지, 미카의 집에 머물던 손님 야마나카 뿐이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노부유키와 미카. 그들에게 또 다시 위기가 닥친다. 한밤에 야마나카가 미카를 덮치는 걸 목격한 노부유키는 야마나카를 죽이고 시체를 감춰버린다. 그리고 구조대의 헬리콥터를 타고 섬을 떠난다.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섬을.




세월이 지나 성인이 된 그들은 각자의 삶을 이어간다. 보통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노부유키는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고 미카는 시노우라 미키란 이름의 배우로 화려한 날을 보낸다. 하지만 다스쿠는 과거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에게 무심한 노부유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내의 정부가 되어 관계를 맺는데 노부유키는 그걸 알면서도 내색조차 않는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다스쿠의 집에 요이치가 나타나면서 표면적으로 잠잠하던 그들의 일상은 또 다시 큰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하는데....




인간의 어두운 내면과 폭력이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 보여주는 <검은 빛>. 미우라 시온의 이 작품을 읽고 한동안 가슴앓이를 했다. 음식을 허겁지겁 먹다가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명치가 아팠다. 왜 이렇게 괴로운걸까. 이유는 분명했다. 그건 책이 전하는 불편한 진실 때문이었다. 섬 주민 대부분을 몰살한 끔찍한 쓰나미로부터 살아남은 노부유키와 미카, 다스쿠. 똑같은 공포와 절망을 경험한 그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했다면 어땠을까. 이야기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굳이 불편한 진실로 우리를 이끌었다. 쓰나미로 미하마섬을 떠난 이후 저마다 다른 궤도에 접어든 그들이 어떤 삶을 이어가는 보여준다. 사랑하는 미카를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 노부유키는 미카를 위해서 또다른 살인도 불사하지만 노부유키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미카는 그에게서 잊고 싶은 과거가 떠올라 등을 돌리고 폭력이 일상처럼 되어버린 노부키는 결국 폭력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오히려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다.




책장을 덮고 나니 왠지 땅을 딛고 선 발아래에서부터 축축한 기운이 조금씩 위로 올라오는 것 같다. 옷이 물기를 머금어 무겁게 느껴진다. 아마도 당분간은  이 묵직함에서 벗어나기 힘들겠지. 첫 만남에서부터 호되게 휘둘렸지만 난 어느새 그녀에게 매료된 모양이다. 그녀의 문장과 또다른 이야기를 기다리는 걸보면....




폭력을 헤쳐 나가며 너와 나는 살아남았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몇 번이라도 죽여줄 테니, 안심하고 숨 쉬면 된다. 너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죽여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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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캡틴 2 오브리-머투린 시리즈 2
패트릭 오브라이언 지음, 이원경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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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였다. 가족들과 결혼 10주년 기념여행을 떠나면서 이 책을 가져갔다.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마스터 앤드 커맨더>. 주변을 온통 붉게 물든 단풍만 보다가 무료해질 때마다 난 넘실대는 바다로 여행을 떠났다. 잭 오브리와 스티븐 머투린이 활약하던 19세기의 바다로. 그리고 1년 가까이 지나 다시 가을을 맞은 지금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오브리 - 머투린’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가 출간됐다. 표지에 파도를 가르며 달리는 멋진 함선이 그려진 두 권의 책 <포스트 캡틴>. 이번엔 어떤 이야기가 담겼을까...궁금한 마음에 얼른 달려갔다.




전편에서 그렇게 바라던 함장의 직위를 얻고 잭 오브리, 첫 출항까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많은 적의 배를 나포하고 에스파냐의 대형전투함과과 싸워서 승리한다. 작은 전투함인 소피 호의 규모에 비해 많은 공을 세웠지만 그럼에도 잭 오브리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정식함장으로 불리지도 않는다. 좀 더 많은 공을 쌓아서 정식 함장으로 승진하려고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이 끝나버렸으니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거기다 자신의 함선인 소피 호를 잃고 빚쟁이들에게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던 어느날 잭은 멜빌 경으로부터 실험적인 선박, 폴리크레스크 호를 맡아보라는 제의를 받는다. 물에 뜨기만 하면 어떤 배든 상관하지 않겠다던 잭이었지만 육지이론가가 특별한 비밀 무기를 탑재하도록 설계한 폴리크레스크 호(다용도란 의미)는 썩 내키지 않았다. 이미 여러번 거절당한 배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잭의 상황과 정식함장으로 임명되려면 어쩔 수 없기에 받아들이고 다시 스티븐 머투린을 비롯한 예전의 동료들과 함께 바다로 향한다.




전편인 <마스트 앤드 커맨더>과 마찬가지로 보다 두 번째 이야기인 <포스트 캡틴>에서도 잭 오브리와 군의관인 스티븐 머투린의 활약이 펼쳐진다. 거기에 한가지 독자의 흥미를 돋우는 요소로 윌리엄스 자매와 사촌인 다이애나 빌러스가 등장해서 ‘사랑이야기’가 더해져서 업그레이드 됐다. 곱고 아름다운 외모에 내성적인 성격의 소피아와 달리 다이애나는 나이는 같지만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다가 인도에서 내전이 일어나면서 많은 빚을 떠안고 도망쳐 온 여인이었다. 각자 개성이 다른 아름다운 여인들과 사랑에 빠진 잭과 스티븐.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어찌보면 요즘과 크게 다를 것 없이 거의 흡사하지만 그래도 뭔가 신선하고 색다른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오브리 - 머투린’ 시리즈여서 그런지 해상용어나 함선의 세부 구조나 명칭이 낯설어서 초반에 살짝 애를 먹었지만 전편을 읽은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적응할 수 있었다. 남자들의 로망이라는 바다에서의 전투와 모험을 다룬 작품이지만 여자인 내게도 흥미로운 책이었다. 살고 있는 지역의 특성상 바다를 자주 찾는데 앞으로 당분간은 바다를 볼 때마다 잭과 스티븐, 그들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속삭이겠지. 오, 캡틴! 마이 캡틴! 언제 다시 만나게 될까요? 세 번째 이야기까지 또 1년을 기다려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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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타임스 - 21세기 코믹 잔혹 일러스트판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하나자와 겐고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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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듀본의 기도>, <집오리와 야생오리의 코인로커>, <사신 치바>, <골든 슬럼버>, <마왕>, <칠드런>, <사막>...이상은 모두 내가 읽은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만....아직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일뿐. ‘언젠가는 기필코’ 읽고 말겠노라고 다짐을 불태우는 작품들이다. 다만 매일 쏟아져나오는 신간에 밀려 읽을 기회를 계속 놓치고 있었는데, 드디어! 절호의 기회가 왔다. ‘21세기 코믹 잔혹 일러스트판’ <모던 타임스>. 코믹하지만 왠지 긴박감이 넘치는 표지그림만으론 왠지 소설보다는 만화쪽에 가깝다는 느낌이 드는데, 속은 어떨까?




모든 사건은 ‘검색’에서 시작되었다. 책은 이렇게 시작된다. 첫 장부터 코믹버전으로 배꼽잡고 깔깔 웃게 만드는 건 아닐까...은근히 기대했는데, 웬걸. 묵직하다. 검은 종이에 그려진 깍지 낀 두 손. 팔뚝 부분은 마치 촘촘한 그물로 이뤄진 것처럼 그려놨다. 우리 몸의 핏줄을 표현한 건가? 너무 단순하니 그런 것 같지 않은데...뭐지?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고. 한 장 더 넘기니 ‘하리마자키 중학교, 안도상회, 개별면담’ 이 세 가지 키워드를 검색한 사람들이 모조리 사건에 휘말린다. 알 수 없는 문장이 불쑥 다가오고 그 옆엔 어떤 남자가 칼에 찔리는 장면이 나온다. 엇, 이거 뭐야? 대체!! 독자가 불평을 늘어놓든말든 저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급기야 검은 안경을 쓴 의문의 남자가 한 남자를 고문하며 말한다. “용기는 있나?” “세상에 맞설 준비, 됐나?”




책의 주인공은 와타나베 다케루. 범상치 않은 아내가 있는 덕분에 걸핏하면 “당신, 바람피우지?”하며 폭행이나 고문을 당하는 게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 되버렸다. 그런 그와 오이시 구라노스케는 어느날 직장선배 고탄다 마사오미가 맡았던 일을 대신하게 된다. 담당자인 그가 거래처에서 작업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내빼버렸다는데. 문제는 그 고탄다가 와타나베에게 ‘너나 나나 감시당하고 있다’며 ‘못 본 체 눈감는 것도 용기’라며 알 수 없는 말을 한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충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자신 앞에 놓인 알 수 없는 수수께끼에 도전한다. 처음엔 호기심에서 시작했다가 자신의 전문분야 실력을 발휘해서 의문의 열쇠를 하나하나 열어간다. 그리고 알게 된다. 때론 꾀를 부리지만 유능한 시스템 엔지니어인 고탄다가 말한 ‘위험한 작업’이란 한마디로 인터넷에서 어느 특정한 단어를 검색하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거였다. 바로 ‘하리마자키 중학교, 안도상회, 개별면담’.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그 세 단어를 검색한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상황에 따라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다. 소심하고 순진한 오이시는 난데없이 부녀자 폭행사건의 주범으로 몰리는가하면 가토 과장은 자살을, 와타나베의 친구이자 소설가인 이사카 코타로는 여자가 찌른 칼에 사경을 헤매고 고탄다 선배는 실명을 한다.




대체 하리마자키 중학교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길래, 안도상회나 개별면담은 그 중학교 사건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사람들이 알 수 없도록 꼭꼭 감춰야하는 게 뭐길래 검색을 한 것만으로 벼랑 끝에 내몰리는가. 뚜렷하게 정체를 알 수 것으로부터의 위협이 계속되자 와타나베와 오이시, 고탄다는 그들, 배후의 인물로 여겨지는 국민적인 영웅이자 국회의원인 나가시마 조와 담판을 짓기로 하는데....




책에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가 자주 언급된다. 하지만 그 유명한 영화를 아직도 보지 못했으니 저자가 전하고 싶은 게 뭔지 정확하게 짚어냈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없다. 그저 모든 것은 시스템이라는 것. 전세계를 떨게 했던 잔혹한 독재자 역시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라는 걸 짐작할 뿐이다. 또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찾기 위해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지만 그것이 100% 진실이라고 말 할 수 없다는 것.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고 하지만 정작 그 속을 들여다보면 계획적으로, 고의로 은폐하거나 조작, 왜곡된 정보들이 넘쳐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처음 만나는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 <모던타임스>. 이야기의 전개과정이나 흐름, 등장인물 때문에 왠지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이란 만화가 생각났다. 본문 곳곳에 만화 컷을 넣어 소설과 만화를 접목했다는 점이 신선했지만 기대가 커서 그런지 아쉬움도 크다. 초반에 벌여놓은 것들, 끊임없는 불거지는 의혹, 팽팽한 긴장감이 왠지 끝까지 유지되지 못한 듯하다. 저자가 전하고 싶은 것들을 너무 늘어놓은 감도 있다. 만화컷이 삽입되어서 페이지가 많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630여쪽은 무리가 아니었나 싶다. 100페이지 정도 들어내면서 내용을 좀 더 압축했다면 어땠을까... 나의 이런 이의제기에 이사카 고타로는 뭐라고 할까. “댓츠 라잇?” 아니, 설마 “세상에 맞설 용기는 있나?”하며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하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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