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그림책은 내 친구 2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장미란 옮김 / 논장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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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둡고 좁은 터널 안으로 주춤거리며 들어가는 아이. 얼굴표정이 보이지 않는데도 바짝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왜 터널로 들어가는 거지? 의문이 들면서 동시에 터널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호기심이 일어난다.


 

 

어느 마을에 오빠와 여동생이 있었는데 둘은 비슷한 데가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게 딴판이었다. 동생이 책을 읽거나 공상하기를 좋아하는 반면 오빠는 친구들과 바깥에서 뛰어노는 걸 좋아했다. 모든 점이 서로 다른 남매는 툭하면 티격태격 다퉜는데 어느 날 보다 못한 엄마가 버럭 화를 낸다. “둘이 같이 나가서 사이좋게 놀다 와! 점심때까지 들어오지 마”

 

 

 
엄마의 호통에 일단 집에서 나오긴 했지만 어디서 어떻게 놀아야할지 알 수 없어서 찾아간 곳이 고작 쓰레기장. 무섭고 싫다는 동생을 겁쟁이라며 놀리던 오빠는 우연히 터널을 발견하고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동생을 뿌리치고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동생은 터널 밖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오빠는 나오지 않자 무섭고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하지? 그러다 오빠를 찾아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터널 속은 컴컴하고, 축축하고, 미끈거리고, 으스스했어요.


 

 

 

간신히 터널을 빠져나오자 거기엔 넓은 숲이 펼쳐져 있었다. 커다란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숲이 왠지 동화 속에서 만났던 마녀와 거인, 늑대 같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동생은 겁에 질려 뛰기 시작한다.


빨리빨리, 빨리빨리....


 

  

한참 달리다 숲이 사라지고 빈터가 나타났는데 그곳에 오빠가 돌처럼 굳어져 있는 게 아닌가. 자신이 너무 늦게 왔다며 생각한 동생은 슬퍼서 돌로 변한 오빠를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그러자 차갑고 딱딱하던 돌의 색깔이 조금씩 바뀌고 부드럽고 따스한 기운이 감돌더니 조금씩 오빠로 바뀌었다. 오빠는 말한다.




“로즈! 네가 와 줄 줄 알았어.”

오빠와 동생은 다시 깊은 숲을 지나고 작은 숲을 거쳐, 터널을 지나 밖으로 나왔어요. 둘이서 함께.


 

 

둘이 집에 돌아오니 마침 점심을 차리고 있던 엄마가 웃으며 반겨준다. 어서 오너라. 별일 없었니? 엄마의 물음에 둘은 살며시 웃는다. 엄마도 모르는 둘만의 비밀을 공유한 이의 웃음이다. 또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동생에 비해 오빠는 뒷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분명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도 예전보다 정이 담뿍 담겨있을 것 같다.




앤서니 브라운의 책에는 언제나 유머와 볼거리가 가득하다. 사소한 주변사물의 모습에도 의미를 담기 때문에 상징적인 메시지가 가득하다. 때문에 앞뒤의 속면지도 꼼꼼하게 봐야 그림책의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경우도 동생을 상징하는 그림책과 오빠의 성격을 나타내는 축구공이 어디에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 꼭 한번 찾아보시라. 거기에 앤서니 브라운이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얘기가 모두 들어있다.




또 하나 짚어볼 것은 앤서니 브라운의 책에서 ‘터널’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거다.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기보다 자신의 색깔만을 고집해온 두 아이가 터널을 통과한 후 서로 화해하고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는 겉으로 보기엔 그저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 터널은 상상과 판타지가 펼쳐지는 마법의 세계로 향하는 장치이자 길이 아니었을까. <사자와 마녀의 옷장>에서 옷장 속에 이어진 길이 나니아라는 판타지 세계로 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판타지 세계를 경험한 아이들은 그전과 조금씩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소극적이고 외골수적인 아이가 밝고 활달하게 변하는가 하면 자기만 알고 고집 센 아이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부드러운 마음을 갖게 되는 걸 알 수 있었다.




한 권의 그림책에서 결코 쉽지 않은 물음을 갖게 됐다. 시간을 두고 곰곰이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는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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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이 사는 나라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6
모리스 샌닥 지음, 강무홍 옮김 / 시공주니어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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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만 해” “안돼!!” “하지 마!” “제발 말 좀 들어라” “엄마 좀 살려줘”




혹시 누군가 나의 일상을 몰래카메라로 찍는다면...그 속엔 어떤 모습들이 담겨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굳이 심각하게 생각해볼 것도 없다. 매일 똑같이 벌어지는 일들이 다시 눈 앞에 펼쳐질 테니까.




“그만 해” “안돼!!” “하지 마!” “제발 말 좀 들어라” “엄마 좀 살려줘”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처음 만난게 큰아이가 두 돌 무렵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큰애는 둘째에 비해서 순한 아이였지만 당시로선 그걸 알 리가 없는 내 눈에 큰애는 사고뭉치 말썽쟁이에다 때론 괴물로도 변신했다. 책 속의 맥스처럼.




엄마가 소리쳤어. “이 괴물딱지 같은 녀석!”

맥스도 소리쳤지. “그럼, 내가 엄마를 잡아먹어 버릴 거야!”

그래서 엄마는 저녁밥도 안 주고 맥스를 방에 가둬 버렸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나는 아이에게 “니 할 일이나 해”라며 방으로 들여보낸다. 그런데 방에 들어간 아니는 내가 속이 뒤집어지거나 머리에서 연기가 폴폴 나거나 신경쓰지 않는다. 당연히 해야할 숙제나 과제보다 자신의 특기이자 취미인 상상의 날개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다.




바로 그날 밤에 맥스의 방에선 나무와 풀이 자라기 시작했지.

나무와 풀은 자꾸자꾸 자라났고,

나뭇가지가 천장까지 뻗쳤지. 이제 맥스의 방은 세상 전체가 되었어.




배를 타고 괴물나라에 도착한 맥스가 괴물 나라의 왕이 되어 괴물 소동을 벌이듯 아이도 괴물 나라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기라도 하는지 방에선 쿵쾅쿵쾅 요란한 소리를 내곤 했다. 조금 잠잠하다 싶어서 방 앞에서 기웃거려보지만 아이는 금세 또다른 놀이에 빠져있곤 했다.




괴물나라 왕 맥스는 쓸쓸해졌지. 맥스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그때에 머나먼 세계 저 편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어. 마침내 맥스는 괴물 나라 왕을 그만두기로 했지.




그리고 잠시후 아직도 잔뜩 삐쳐있겠구나...하고 생각했던 아이는 너무나 멀쩡한 기분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 “엄마, 뭐 먹을거 없어? 배 고픈데....” 세상에, 난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는데 넌 먹을 것만 찾는단 말이냐. 니 잘못을 니가 정녕 모른단 말이냐. 이렇게 일장연설을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 일단 꾸욱 참고 간식거리를 챙겨주면 아이는 맛나게 먹고 또 휑하니 지 방으로 가거나 거실에서 책을 읽곤 한다. 그제서야 난 허탈해진다. 난 대체 뭣 땜에 화를 낸 거니?




그날 밤에 맥스는 제 방으로 돌아왔어.

저녁밥이 맥스를 기다리고 있었지.

저녁밥은 아직도 따뜻했어.




엄마를 잡아먹어버릴 거라던 맥스가 괴물나라에서 한바탕 놀고 나서 지겨워할 때 맥스를 다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바로 맛있는 음식 냄새였다. 그렇다면 나한테 실컷 야단맞아서 심술이 난 아이를 세상으로, 스스로 제 방에서 걸어나오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간혹 두 아이의 등쌀에 아이고 정말 못살겠어. 지겨워...하는 생각이 들때면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들쳐보곤 한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틀에서 벗어나 시간을 넘어서서 자신만의 세계에서 신나게 열심히 놀이에 몰두하는 맥스를 보며 내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내 아이는 어떤 나라를 꿈꿀까...궁금해지기도 한다.




아이들의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을 보며 한가지 소원을 갖곤 한다. 내 아이들이 언제 어떤 고난과 시련을 겪더라도 가족의 사랑과 따스함이 잊지 않고 돌아올 수 있게 되기를...




<괴물들이 사는 나라>가 영화로도 제작 중이란 소식을 들었는데, 완성됐을까? 국내엔 언제 개봉하는 걸까. 기다려진다. 아이들과 함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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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김소연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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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 야!! 너 어디 가?” 퍼뜩 이 한마디를 내뱉고 싶어진다. 한 마리의 목마가 자신이 머물던 자리를 벗어나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른다. 늘 같은 자리에서 맴돌던 목마가 찾아가는 곳은 어딜까. 오기와라 히로시의 <회전목마>를 보자마자 들었던 생각이다.




도쿄의 잘 나가던 회사에서 근무하던 토노 케이치. 과중한 업무에 동료들이 자살하자 회사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사표를 낸다. 그리고 고향인 코마타니로 돌아와 공무원을 하게 된다. 안정된 직업, 큰 만족이 없는 대신 큰 불만도 없는 생활에 젖어있던 케이치가 파견근무를 하게 된다. 그가 맡게 된 부서는 바로 ‘아테네 마을 리뉴얼 추진실 준비실’. 나름 특색 있는 관광도시로 자리매김하고자 놀이공원을 세웠지만 해마다 엄청난 적자를 내서 누계 적자가 47억 엔에 달하는 골칫덩이가 되버린 ‘아테네 마을’을 되살리라는 것이다. 그것도 오래된 공무원 생활에 푹 젖은 나머지 패기나 협력, 추진력이란 걸 기대할 수조차 없는데다 재건을 위한 프로젝트를 위해 아테네 마을을 찾을 때조차 점심으로 뭐가 나올지에만 관심을 갖는 동료들과 함께 말이다. 케이치는 갑자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아들인 텟페이가 학교에서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 숙제해가야 한다며 ‘공무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의문을 가지는데다가 아내에게서도 자신에겐 ‘퍽’하는 박력이 부족하다는 말까지 들었다. 뭔가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아니고선 아테네 마을을 재건한다는 게 불가능해 보이지만 무사안일한 관료주의에 빠진 동료와 이사진들은 해마다 치뤘던 프로그램으로 하자고 나온다. 하지만 왠지 사소한 일에서 골치아파질 것 같은 예감이 들자 ‘추진실’에서 일임하라고 하기에 이르고 상사인 탄바는 그걸 모두 케이치에게 떠맡긴다. ‘아테네 마을 골든위크 이벤트’ 개최까지 겨우 3주일 남겨둔 시점에서. 도쿄에선 숨 쉴 틈 없이 바쁜 생활을 했지만 고향에서의 여유로운 생활에 왕소심남이 되어버린 우리의 케이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 것인가.




도무지 해결책이 없을 것 같던 케이치의 ‘아테네 마을 재건 프로젝트’는 의외의 인물들을 만나면서 하나씩 돌파구를 찾아가는데,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야말로 코믹하고 유머가 넘친다. 튀는 외모와 행동으로 인해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그야말로 아니올시다’라고 여기는 이들이 모두 자신의 능력을 살리며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준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철밥통이라 일컫는 공무원, 무슨 일에든 ‘선례가 없기 때문에’라며 뒤로 물러서는 이들이 더욱 답답하게 여겨졌다. 물론 이 작품 속에 등장한 공무원이 모든 공무원들을 대표하는 건 아니지만.




오기와라 히로시 특유의 유머와 감각이 살아있는 작품이지만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소설의 제목이자 케이치가 추친하던 이벤트의 최정점인 ‘회전목마’로 뭔가 대형타가 일어나지 않을까...은근히 바랬는데 나의 희망사항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저자는 그것 역시 벗어날 수 없는 공무원 사회, 관료주의의 하나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딸인 카에데조차 아빠에게 “소심해”라는 말을 듣는 케이치. 그에게 곧 쨍하고 밝은 날이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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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브 1
모리 에토 지음, 오유리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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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소설을 꾸준히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만나보지 못한 작가가 꽤 많다. 촉촉한 감수성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에쿠니 가오리와 츠치 히나토리를 비롯해 요코하마 히데오, 요코미조 세이지...도 만나지 못했다. 모리 에토 역시 마찬가지다. 몇 년 전 나오키상을 수상한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는 줄곧 리스트에만 올라있을 뿐 구입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만난 것이 물빛을 띤 작은 책 <다이브>였다.




‘높이 10미터. 시속 60킬로미터. 공중에 떠 있는 시간 1.4초.’ 지극히 간단한 단 몇 줄의 문장이 ‘다이빙’에 관한 모든 것을 설명한다. 올림픽이 열릴 때 어쩌다 보게 된 경기에서 다이빙은 너무나 단순하게 보였다. 10미터의 다이빙 대에 올라 풀쩍 뛰어 아래의 풀로 입수. 그때 물이 얼마나 조용한가, 물이 얼마나 튀느냐에 따라 채점이 이뤄지는 걸 보면서 저렇게 재미없는 경기를 왜 하나...싶었다. 하지만 다이빙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낸 굳센 의지를 지닌 사람만이 화려한 빛을 발하는 운동이었다. 잠깐 동안의 비행을 위해 등에 날개를 다는 이들의 이야기...바로 <다이빙>이다.




도모키와 레이지, 료는 미즈키 다이빙 클럽(DMC)에 소속된 동갑내기 다이빙 선수들이다. 어느 나라든지 비인기 종목에 대한 생각과 대접은 비슷한가 보다. 오랫동안 누적된 적자 운영 때문에 DMC는 곧 폐쇄될 위기를 맞는데 바로 그때 나타난 인물이 아사키 가요코란 코치였다. DMC를 창설한 이의 손녀로 클럽을 지키려고 하는 그녀가 눈여겨보는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사카이 도모키였다. 부모가 모두 다이빙 선수 출신으로 올림픽에 출전했던 후지타니 요이치에 비해 실력은 떨어지지만 무한한 재능을 갖춘 도모키에게 그녀는 ‘다이아몬드 눈동자’, ‘동체시력’을 갖추고 있다며 철저하게 훈련을 시킨다. 그 결과 도모키의 다이빙은 눈에 띄게 향상되고 숨겨진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런 도모키에게 아사키는 너의 라이벌이라며 또 한 명의 다이빙 소년을 데려온다. 유명한 다이빙 선수였던 할아버지를 둔 오키쓰 시부키. 할아버지의 지도로 어릴 때부터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내렸던 그의 다이빙은 거칠지만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매력을 갖고 있었다.




이후 책은 중국에서 치러지는 아시아 합동 훈련의 참가선수가 되기 위한 선발전과 DMC의 존속 조건인 올림픽 출전 국가대표 선수가 되기 위한 도모키와 레이지, 료, 요이치, 시부키의 여정을 보여준다. 저마다 다른 소질과 재능을 가진 아이들은 때로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앞으로 한걸음 내딛는다. 서로에게 있어 더없이 큰 힘이 되는 동료이자 라이벌의 관계 속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단련시켜 나간다. 또 각자 자신만의 다이빙을 발견하는 계기를 찾게 되는 모습들이 무척 감동적으로 와 닿았다. 책을 읽는 내내 잔잔한 물결이 내 주변을 휘감고 도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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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 브로드 1
팻 콘로이 지음, 안진환 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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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해질 무렵. 대저택의 여기저기에서 하나 둘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그 뒤로 유유히 흐르는 거대한 강을 보고 있으니 왠지 오랫동안 이어진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 속에 존재하는 느낌이다. 팻 콘로이. 지금까지 어떤 작품으로도 접하지 못한 작가지만 이 책의 표지에서부터 매료된 내게 그건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우스케롤라이나의 찰스턴. 남북전쟁이 시작된 도시로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남부인의 자존심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곳이다. 겉으로 보여지는 외양보다 절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 찰스턴을 배경으로 주인공인 레오와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의 오랫동안 이어지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는다. 나는 이 사실을 힘겹게 배웠다.’고 말문을 연 레오는 1969년 6월 16일, 서로 관련이 없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모든 일이 시작됐음을 털어놓는다. 못 생기고 소극적인 자신에 비해 눈부실만큼 아름답고 카리스마 넘치는 형 스티브가 갑자기 자살을 하는데 그때의 충격으로 레오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그 후엔 코카인을 소지한 혐의로 보호관찰 처분을 받는다. 그 일환으로 신문배달과 이웃주민에게 봉사활동을 하면서 레오는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1969년 6월 16일, 레오에게 어머니의 지시로 몇 가지 일을 하게 된다. 산골 마을의 고아원 출신인 나일즈와 스탈라 남매를 만나 그들을 수갑에서 풀어주는 지혜를 발휘하고 길 건너편 집으로 이사 온 쌍둥이 남매, 시바와 트레버를 만나 그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며 이름난 가문의 후계자이자 자신이 다녔던 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채드워스와 프레이저 남매와 몰리를 만났으며 흑인 코치의 아들인 아이크를 만난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과거에 수녀였다는  가장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하나 떼놓고 보면 그리 특별한 것 없는 만남이었지만 레오는 1969년 블룸스데이에 만났던 이들과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그들과 함께 인종과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과 사랑을 나누면서 성장해간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1989년 어느 날. 자신이 소망하던대로 저널리스트가 되어 칼럼쓰기에 여념없는 레오에게 어느날 미모의 여인이 찾아온다. 레오에게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을 기억을 안겨준 시바가 유명한 배우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혼란과 방황의 시기를 지나 성인이 된 그들은 서로에게 반려자가 되어 살아가지만 모두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건 아니었다.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품고서 그저 살아갈 뿐이었다. 시바의 방문을 계기로 그들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어린 시절과 그동안의 일들로 얘기를 나누다가 시바에게서 트레버가 에이즈에 걸렸으며 행방이 모연하다는 소식을 듣는다. 곧이어 그들은 트레버 찾는 일에 나서는데 그 과정에서 시바와 트레버 남매의 숨겨진 과거와 충격적인 비밀이 드러나는데...




초반 다소 지루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는 레오를 비롯한 친구들이 성인이 되고 그들의 관계가 다시 얽히기 시작하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자신의 우상이었던 형의 죽음 앞에서 충격으로 정신을 놓았던 레오는 이후 시바의 죽음도 보게 된다. 그리고 아내인 스탈라의 죽음까지도. 거기에 형 스티브의 자살에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면서 레오는 또한번 충격에 빠지지만 중심을 잃지 않는다. 1969년 여름 블룸스데이에 일어난 일을 글로 쓰면서 깨닫는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에서 벌어지는 자살과 살인, 마약, 강간, 동성애, 자연재해와 같은 사건들이 모두 끔찍한 기억이지만 그것 역시 인생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지구의 공전과 단단히 고정되어 깨뜨릴 수 없는 통로를 따라 움직이는 행성의 궤도를 총괄하는 법칙들 속에서 내 운명이 모습을 드러내가 시작했고, 나는 내 아치형 인생의 춤에 주역들이 되어줄 주인공들을 만났다.- 2권.452쪽.




운명이란 장난감 총을 쏘듯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삶을 만신창이로 만들고, 바로 그 날을 영원히 잊지 못할 날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존재다. - 2권 461~462쪽.




1,2권 두 권을 합해 자그마치 천 페이지 가까이 되는 소설 <사우스 브로드>. 1969년과 1989년을 오가며 레오와 그의 주변에서 벌어진 일들을 바라보며 문득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거대한 강을 떠올렸다. 찰스턴을 싸고 흐르는 강이 어떤 일에도 흐름을 멈추지 않듯 우리의 인생 역시 오로지 앞으로 흘러갈 뿐이란 것. 간혹 걸림돌을 만나더라도 결코 흐름을 멈추지 않는 강, 그것이 바로 인생이란 걸 팻 콘로이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저자의 수려한 문장 때문이었을까. 레오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책장을 덮었지만 아직도 그의 주변에서 맴도는 내 마음이 느껴진다.




‘이토록 훌륭하게, 이토록 아름답게 쓰는 작가도 없다’는 띠지의 문구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작품이지만 다소 치명적인 옥의 티가 있었다.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양장본에 가름끈이 없다니. 독자를 배려하지 않은 듯해서 그만큼 아쉬움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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