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부활』을 다시 읽는다. '다윗의 서재'를 자주 방문한 이웃이라면 내가 톨스토이의 소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내 인생의 단 한 권이 책이고, 『전쟁과 평화』는 내 내면의 크기를 바다와 같은 스케일로 확장시킨 걸작이다. 톨스토이에 대한 지나친 헌사인지는 모르겠으되,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통해 근대소설의 개시를 알린 이래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 두 장편만으로 인류 소설사는 모두 덮이고 커버된다.

 

주지하다시피 『부활』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와 함께 '톨스토이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소설이다. 다른 두 소설에 비해 비교적 후일에 쓰여 후기 톨스토이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작품이기도 하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예술성과 완성도 면에서 과거 두 작품에 비해 저평가 되고 있지만 나는 이 소설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아끼고 사랑한다. "『부활』을 읽는 건 우리 자신을 읽는 일이다."라는 서평가 이현우의 해설은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함축적으로 안내한다.

 

사실 『부활』은 종교적·사상적 관점에서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 소설에서 상징하는 '부활'이 본래의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부활과 다를 뿐 아니라, 귀족과 지주로 대변되는 19세기 러시아 특권계층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사유재산권 중 가장 기초가 되는 토지소유권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나이가 들면서 평화주의자, 기독교 사상가, 공동체주의자 등으로 바뀌어 갔다. 톨스토이가 말년으로 갈수록 작가에서 신학자로, 소설가에서 사상가로 변질(?)해가는 과정은 흥미롭지만 안쓰러운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소설을 집어 든 이유는 바로 '힐링'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추구하여 영혼의 부활을 이루는 과정을 극한의 진솔한 묘사로 그려냈다. 유려하기 그지없는 톨스토이의 글발은 한 인간의 고도의 정신적 구원의 과정을 아름답게 이끌어간다. 악에서 선으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육체에서 영혼으로 향하는 네흘류도프의 순전한 여정은 그 방향의 전개 과정을 살피는 것만으로 독자에게 힐링이 되고 위안이 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읽어보고자 이 소설을 들었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힐링'과 '멘토'라는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관련 책들이 서점가를 지배했고 그 여파는 아직까지 흔적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싸구려 힐링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의 외침이 들린다. 고단하고 추악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힐링은 거부한다. 내 나이 어느덧 마흔을 넘었다. 현실을 도피하는 힐링이 아니라 현재를 객관화하는 힐링을 소원한다.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힐링이 아니라 동일한 실재가 상승하는 힐링을 갈망한다. 전자는 일상을 파괴하지만 후자는 삶을 단단하게 한다. 전자가 과거의 시간대에 구속되는 반면 후자는 현재와 미래 사이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요컨대 인간세계의 저차원적 힐링이 아니라 훨씬 높은 차원의 신성한 힐링을 소망하는 것이다. 그 동기부여의 선상에 톨스토이의 걸작 『부활』이 놓여 있다.

 

오래간만에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으려 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자세한 것은 후일 서평으로 갈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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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 -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
이영훈 외 지음 / 미래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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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책을 읽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책이 왜 논란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완독한 지금 시점에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대표저자 이영훈 교수의 과거 저작들에 비해 과히 대담하고 도전적인 서술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이후 일본의 무역보복이 개시되고 한일군사정보협정(지소미아)이 종료되는 등 최악의 한일 관계를 겪고 있는 작금의 시점에서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이 주장하는 모든 내용을 긍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론이 적지 않은 입장이다. 특히 마지막 위안부 관련 장은 상당히 대담하고 거칠어서 평소 비이성적 반일 정서를 비판해온 나조차도 굉장한 긴장감과 반발심으로 읽어내려갔다.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많은 책을 읽어왔지만 '종족주의(種族主義)'라는 용어는 처음 접한다. 이영훈 교수는 종족주의를 명확히 정의한다. '자유로운 개인'이란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 집단, 즉 집단에 몰아(沒我)로 포섭되며 집단의 이익과 목표와 지도자를 몰개성으로 수용하는 집단이 바로 '종족'이며, 이러한 집단을 기초 단위로 한 정치가 곧 '종족주의'라는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한 동력은 한국의 오랜 역사 가운데 내재된 '샤머니즘'이며 '거짓말', '물질주의', '육체주의'가 그 현실을 이루는 축이라고 비판한다. 즉 종족주의란 한국적 민족주의의 독특성을 부정적으로 비꼰 개념인데 한민족 그 자체가 하나의 집단이고 권위이고 신분으로 발흥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종족주의적 민족성이 비이성적인 반일감정과 뒤섞여 '반일 종족주의(反日 種族主義)'를 만들어왔다는 게 이 교수의 진단이다.

 

『반일 종족주의』는 대표저자 이영훈 교수를 위시하여 총 6인의 공저자가 집필했다. 각 공저자들은 각기 다른 주제로 일제 시대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던 기존의 통념을 뒤집는다. 엄밀히 말해서 뒤집는다기보다 역사를 사실 있는 그대로 추적하자는 취지에서 여러 실증적 자료를 제시하며 객관적 인식을 촉구한다. 책에 나온 대부분의 내용들은 과거 수차례 학계에서 토론된 것들이다. 예컨대 '쌀 수탈론'과 '쇠말뚝 신화' 등은 이미 학문적으로 사실관계가 정리된 것들이다. 잘못된 팩트를 바로잡기 위해 이 교수를 위시하여 소위 뉴라이트로 불리는 공저자들이 그간 얼마나 땀 흘리고 노력해왔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책은 완성도가 많이 떨어진다. 너무 많은 주제를 다루려 한 것 같다. 평소 주장해온 일제 시대의 여러 담론들을 다루고 있지만 기존 범위를 더 넓게 확대하여 역사적으로 가장 민감한 이슈라 할 수 있는 '독도'와 '위안부'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다.

 

평소 나는 이영훈 교수의 책을 즐겁게 탐독해왔다. 그가 다른 공저자와 함께 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기존의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이후 쓴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어느 학자도 엄두 내지 못할 실증적 연구를 꾀하였고, 두 권으로 출간된 『한국 경제사』는 기존의 서양식 도식을 벗어던지고 사실의 귀납적 결과로서의 한국사의 전 흐름을 추적했다. 또한 『대한민국 이야기』와 『대한민국역사』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훑어보는데 훌륭한 저작들이다. 특히 『대한민국역사』는 내가 읽어본 근현대사 책 중 가장 정확하고 대중적이라 할 정도로 탁월하다. 그래서 주변의 젊은이들에게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오해와 편견 없이 탐색하기 위해 꼭 필요한 책이라고 소개하며 추천하고 있다.

 

이런 내 평가와는 별도로 이영훈 교수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입체적이다. 이 교수는 그간 많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어 왔다. 그의 책과 논문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채 무조건 '친일파'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가 욕먹는 이유는 간명하다. 통계와 사료를 통해 역사를 실증적으로 연구한다는 그의 실증사관이 한국인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민족 정서와 괴리가 있다는 비판 때문이다. 사실 이 교수가 실증사학자로서 조선 후기부터 일제시대까지 여러 고문서와 통계자료를 통해 추적한 학자적 연구활동은 과히 찬연하기 그지없다. 그 유명한 허수열 교수와의 '벽골제 논쟁', 박현모 교수와의 '세종 토론'을 흥미롭게 바라본 내 입장에서 최소한 객관적인 자료와 실증적 연구에 있어 국내에 이 교수와 맞설 자가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주의 사학자들조차도 이 교수가 수년에 걸쳐 발굴하고 연구한 '조선총독부 1차 자료'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인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점에서 나는 이 교수의 학자적 실력과 양심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이번 책은 굉장히 멀리 나갔다. 기존 논조에 비해 훨씬 더 과격하고 공격적이고 도전적이다. 물론 이 교수 혼자 집필한 책이 아니기 때문에 논설의 맥락과 구심력이 책 전체의 통일성 면에서 흐트러진 측면이 있다. 각 공저자들이 제시한 통계와 자료에 대해 내가 반박할 입장(수준)은 아니다. 중요한 건 서술의 관점과 논리의 전개 방식이다. 책의 일부 대목에서는 사실 확인과 논리 전개가 상당히 거친 부분이 발견되는데 그중 하나는 「독도,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의 상징」라는 제13장이다. 이 교수가 직접 쓴 이 글은 사실상 무주지(無主地)였던 독도를 1905년 일본이 먼저 영토로 편입했고, 한국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뒤인 1952년 1월 평화선 발표로 독도를 영토에 편입했다고 기술한다. 이 교수는 '우산도(于山島)' 사료나 안용복의 '울릉도 쟁계(爭界)'와 관련된 사항은 모두 기각하는데 그 논리의 수준이 평소 이 교수답지 않다. 무엇보다 독도가 한국 영토였다는 가장 명징한 증거로 꼽히는 1877년 '태정관문서(太政官文書)'와 같은 일본 측 사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실증과 사료를 중시하는 실증주의자로서 가장 핵심적인 반대 증거를 누락한다는 건 불성실 혹은 고의적이라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가장 큰 문제는 위안부에 관한 서술이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라는 제목으로 3부 전체를, 전체 책 분량의 1/3을 할애하는데 전개하는 논지와 서술의 방식, 제시된 논거와 결론 도출이 상당히 부적절하고 매끄럽지 않다. 이 교수는 일제의 위안소 운영은 조선의 기생제와 1870년대 일본이 시행한 공창제를 토대로 생겨난 것이라 주장한다. 이어지는 주익종 교수의 글과 함께 정리해보면 위안부는 자율형 혹은 기업형 매춘의 속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즉 일제의 강제 만행으로써 '성노예(sex slave)'로 끌려간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미군 위안부가 존재했고 6·25 전쟁 시 한국군 위안부도 존재했던 것인데 1937~1945년 역사만 달랑 떼어내 일본군의 전쟁범죄라고 몰아붙이는 건 적절치 않다는 주장이다. 또한 20세기 말의 기준을 20세기 전반에 투사해서는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뒤 점령국 소련군에 의해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100만 명의 독일 여성이 강간당했다는 것을 예로 들며 일본군 위안소 문제를 등가시키는 주 교수의 논지에는 기가 찰 정도다.

 

이 교수와 주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가 '군(軍)에 의해서 운영된 공창제의 부분집합'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통계와 자료를 인용한다. 그러나 자료 인용의 폭이 좁고 근거가 일면적이다. 관련 장을 두세 번 정독해봐도 김학순 할머니를 위시하여 기존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전복할 만한 귀납적 설득력이 포착되지 않는다. 이 교수가 제시한 사료를 부정한다는 게 아니다. 연구자가 필요한 사료만 선택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위안부 중에서도 여러 층위가 있다는 가능성은 왜 단언적으로 배제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즉 자발적으로 갔던 분도 있고, 혹은 속아서, 돈 벌게 해주겠다, 공부 시켜주겠다, 그래서 속아서 가신 분도 있고, 강제로 끌려간 분도 있을 텐데, 이 여러 층위의 양립 가능성을 재단한 채 "위안부는 그들의 선택과 의지에 따른 것이다"라고 무 자르듯이 단언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이런 대담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다수가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을 만큼의 보편성을 띤 논증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자료가 부족하고 논증이 불성실하다. 일부의 부분 오류가 있는 것을 끌어와 전체 오류로 연결 짓는 논리 전개 방식이 평소 이 교수답지 않아 아쉽다.

 

위안부와 관련해 몇 마디 더 하겠다. 평소 이영훈 교수는 '자유로운 개인'의 존재를 중요시했다. 그는 역사를 이끄는 동력을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개인의 '자유'와 '이기심'으로 분석했다. 응당 맞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230년 전 애덤 스미스가 발견한 공(功)이자 공산주의를 누르고 자본주의(자유시장체제)가 승리한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교수에게 묻겠다. 일제 시대에 자유를 말살당한 채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갔다며 '내가 증거'라고 외치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에 대해서는 왜 높은 실증적 가치를 두지 않는가. "기억이 희미해졌거나 새로운 기억이 가공됐다"라고 말하는 건 상처에 대한 인간의 기억력을 너무 낮게 평가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절대로 잊지 못하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존재다. 일본군으로부터 자신의 성(性)을 유린당했다고 일관되고 애절하게 고백해온 수많은 원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이 교수가 평소 강조해온 '자유로운 개인'이 지금 이제서야 쏟아내는 절규의 목소리다. 그 숭고한 증언이 책 속에 소개된 몇몇 사료에 비해 무가치한 것인지 정말 진지하게 질문하고 싶다.

 

과거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이번 책을 통해 이영훈 교수가 인간과 역사 사이의 관계를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단선적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의 실존이 결여되고 무시된 채 일정량의 실증만으로 역사를 천착해서는 곤란하다. 숫자와 기록의 양이 반드시 사실을 확정하는 건 아니다. 더욱이 연구자의 연역론을 성립시키기 위해 취사선택된 사료라면 더욱 위험하다. 역사학자라면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인간에 대한 겸허한 이해와 성찰을 전제로 사실관계를 연구해야지 경제와 경제관계라는 수리적 공식만으로 한 시대를 재단해서는 곤란하다. 이 같은 시도는 그가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은 칼 마르크스와 같은 사회과학자나 하는 행위이다. 역사에서 실증은 중요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실증만 강조하다 보면 오히려 그것이 진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목적에 따라 일부만 남은 사료를 사용한 오류, 잔존하는 사료의 무리한 일반화, 사료의 잘못된 해석, 다른 사료의 이해 부족 등의 역사 실증주의가 갖는 오류 가능성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역사가들의 고민이었다.

 

총평하자면 나는 이 책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견해를 갖고 있다. 책을 쓴 취지와 일부 주제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긍정할 수 있다. 작금의 한국인은 극단적 형태의 분노심으로 일본에 대한 객관적인 탐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을 지나치게 우습게 보고 깔보는 경향이 한국인의 태도에 마치 전염병처럼 옮아 있다. '반일'이 마치 민족적 도덕성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징표가 될 정도다. 영원한 아·적군이 없는 국제사회의 복잡한 힘의 전장에서 무엇이 국익과 민족을 위하는 길인지 냉정히 살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지나친 반일주의에 함몰된 작금의 '관제(官製) 민족주의'의 낙후성을 신랄히 고발하는 이영훈 교수의 경고를 나는 오롯이 주목한다. 또한 일제 식민시대를 민족적, 정서적, 감정적 덩어리로 애매하게 보지 말고 통계와 자료를 통해 그 이면을 탐색해보자는 것에도 동의한다. 자신의 학자적 양심을 지키기 위해 평생 온갖 욕을 먹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묵묵하게 쌓아올린 그의 투혼과 신념을 높이 평가한다. 그래서 이 책의 일부분을 긍정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은 지나치게 많이 나갔다. '사료의 편파 선택'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자주 눈에 띈다. 평소의 이 교수라면 하지 않았을 논리의 과잉과 반증 가능성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는 이 책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너무 많은 내용을 대중적인 관점에서 쉽게 쓰려다 보니 애매하고 산만한 책이 되었다. 또한 지극히 예민한 주제를 공저자 여럿이 다루다 보니 논리와 표현의 통일성이 결락되어 편집과 구조 면에서 지저분한 책이 되었다.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주장은 비과학적이고 비역사적이다"라는 주장이 불과 10장 남짓한 분량으로 도출될 수 있는 주제인가. 주장에 관한 충분한 증거를 합리적이고 성실하게 제시해야 독자에게 설득력을 얻는 법인데 제한된 지면에 논거 몇 개 툭 던지고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바람에 힘을 잃었다. 또한 외부 곳곳에 존재하는 여러 반론들을 일체 외면(무시)했다는 점에서 비겁한 면도 있다. 충정은 이해하나 내용은 역부족이다. 학자로서 확신이 있다면 전술한 바 있는 몇몇 예민한 주제와 관련하여 별도의 개정증보판을 출간해주기를 제안 드린다.

 

서평 말미의 이러한 혹평은 나의 순수한 애정에 다름 아니다. 나는 이영훈 교수가 한국에서 가장 연구를 많이 한 최고의 경제사학자라는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조선시대와 근현대사 연구에 있어 그가 쌓아올린 실증사학의 성과는 너무나 찬란한 것이어서 일정 부분의 경외심까지 있을 정도다. 다만 책 리뷰어로서 책에 대한 평가는 냉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 권의 책으로서 『반일 종족주의』는 많이 부족하다. 총론은 일부분 성공했을지 몰라도 각론에서는 상당히 실패했다. 다른 공저자는 차치하더라도 이영훈 교수만큼은 많이 아쉽다. 그의 내공과 지력을 평소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쉬움이 더 크다 하겠다. 차후 공개석상의 토론회나 후속 저작을 통해 이 책의 빈약한 논증을 보완·수정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책의 평가와는 별도로 서평의 첫 문단에 기술한 바와 같이 『반일 종족주의』는 한 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유야 어떻든 10만 부가 넘게 팔렸다. 모든 베스트셀러는 그 시대의 관심과 정서를 반영한다. 동시대적 고민은 설사 그것이 오류를 포함한다 하더라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무엇을 얻을 수 있고 무엇이 문제인지 스스로 아는 노력은 꼭 필요하다. 한국사에 관한 기본적인 맥락만 잡고 있다면 여기저기에 경도되지 않은 채 자기 주관대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비판도 읽고 나서 하기 바란다. 유독 힘든 서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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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합본) 신 :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김용규 지음 / IVP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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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 읽었다. 정확히 두 번 읽었다. 900페이지가 넘는 이 두꺼운 책을 2독 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기독교인에게 신(하나님)은 언제나 갈망의 대상이요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다. 책 내용도 방대한 신학적, 역사적, 인문학적 디테일을 공유하고 있어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특히 저자가 '디아트리베(diatribe)'라는 고대의 수사법, 즉 친근하고 생동하는 일상용어로 바꾸어 독자나 청중을 대화의 상대로 끌어들이고 그들과 함께 담화를 나누는 방식의 문체를 사용하여 심오한 신학적, 철학적 담론을 어렵지 않게 수용할 수 있었다.

 

철학자 김용규의 『신』은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부제가 알려주듯이 제목에서 말하는 '신(神)'은 바로 기독교의 신, 즉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다.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하나는 신앙을 통해서고 다른 하나는 이성을 통해서다. "전자는 은혜롭지만 자폐적이기 쉽고, 후자는 설득적이지만 자주 은혜롭지 못하다"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라는 안셀무스의 말을 인용하며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 이 책이 표방하는 관점이라고 얘기한다. 즉 『신』은 인문학적, 신학적, 역사적 맥락을 통해 살피는 기독교 하나님에 관한 서술(설명)이다. 

 

책은 총 5부로 나뉜다. 「1부 - 하나님은 누구인가」는 서구의 문학과 예술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외형을 소개한다. 「2부 - 하나님은 존재다」는 존재물이 아닌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신성을 탐구한다. 「3부 - 하나님은 창조주다」는 하나님이 세계 만물을 창조하고 초월적 존재로서 어떻게 세계에 내재하는지를 천착한다. 「4부 - 하나님은 인격적이다」는 하나님이 인간과 어떤 식으로 인격적 관계를 맺는지 은혜롭게 성찰한다. 마지막 「5부 - 하나님을 유일자다」는 기독교의 가장 난해한 교리면서 핵심적인 내용인 '삼위일체( 三位一體, trinitas)'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는 총 5개의 파트로 하나님의 존재성(신성)이 역사적·신학적으로 어떻게 인간에게 정립되어 왔는지를 세밀히 추적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책은 이해의 신앙을 강조한 안셀무스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라는 강렬한 문구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책 곳곳에 수많은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이 소개된다. 그중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주 언급되는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각기 신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압도적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의 잦은 등장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외 암모니우스, 오리게네스, 플로티노스 등의 고대 철학자뿐만 아니라 아리우스, 아타나시우스 등의 중세 신학자, 그리고 마르틴 루터, 요한 칼빈 등의 종교개혁가,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헤겔 등의 근대 철학자, 또한 칼 바르트, 에밀 브루너, 파울 틸리히 등의 현대 신학자들까지 전 시대를 아우르는 철학자, 사상가, 신학자들이 소개되며 저자의 서술을 이끌어간다.

 

저자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소재로 철학과 신학만 사용하지 않는다. 문학, 역사, 과학, 예술 등의 여러 영역에서 탐구되고 천착된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맥락을 소개한다. 칸트의 철학, 미켈란젤로의 그림, 단테의 시, 다윈의 논문, 카잔차키스의 우화, 파스칼의 경구,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등 각기 다른 여러 매체들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입체성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그런 탓인지 책 속에는 여러 삽화들이 수록됐는데 저자의 설명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입체적 설명을 돕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미켈란젤로가 그린 성 시스티나 성당의 폭 13.2미터 길이 41.2미터의 희대의 역작 '천지창조'에 숨겨진 역사적, 인문학적, 신학적 의미를 자세히 감상하는 방식이다. 서양문명을 아름답게 수놓은 예술작품을 삽화로써 눈으로 감상하고 찬란한 문학작품의 인문학적 리뷰를 읽어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4부 - 하나님은 인격적이다」라는 장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고난의 아이콘 욥의 삶을 비교 추적하며 하나님의 인격성을 설명한다. 사르트르를 위시한 현대 실존주의자들이 고민했던 '부조리(不條理, absurdity)'의 문제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상세히 소개한다. 요는 이렇다. 하나님 앞에서는 거룩한 침묵이 필요한데 아브라함은 믿을 수 없는 것(부조리)을 믿었기 때문에 침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키르케고르가 역설한 인간 성숙의 3단계 중 가장 높은 '종교적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를 아브라함이 잘 실행했기 때문임을 부언한다. 이러한 저자의 서술은 인격적 하나님을 만난 성경인물의 예를 추적(분석)함으로써 수 천 년이 지난 작금의 현대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준다.  

 

마지막 장 「5부 - 하나님을 유일자다」는 '삼위일체론'이라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다루는 장이다. 기독교 신학은 처음부터 성부·성자·성령이 하나라는 것을 주장했고, 325년 열린 니케아 공의회 이후 그것을 교리로 정립한 바 있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격성의 실체이자 정수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을 만나 그의 형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그의 음성을 귀로 직접 듣지 않아도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더 나은 처지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이란 가장 난해한 신성이면서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이며, 은혜롭고 감동적인 교리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초기 기독교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였다. 318년 아리우스 논쟁에서 시작되어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마감될 때까지 63년간 삼위일체론은 교회 회의를 통해 신조 형태로 고정되었다. 이쯤에서 내 고백을 보태겠다. 삼위일체의 교리사 중 나는 반아리우스주의자이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아타나시우스의 용기와 기백을 가장 인상적이고 은혜롭게 수렴하고 있다. 과거 청년 시절에 아리우스-아타나시우스 논쟁을 성극으로 꾸밀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의 감동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들은 구세주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외치는 아타나시우스의 강변은 아직까지도 내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신성의 고차원적 독특성인데 이를 인간의 글로 표현하거나 그림으로 그려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인간의 이성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소개된 시인 단테와 화가 루블료프의 고민도 여기에 닿아 있다. 

 

젊은 시절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성적 이해가 불가능해 수많은 질문이 내 신앙을 짓눌렀던 때가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가장 뜨거웠다고 자부할 수 있는 시기였지만 젊은 치기에 뭐가 그리 궁금하고 의심이 많았던지 하나님의 존재성과 섭리 방식, 교회 교리에 관한 이성적 납득을 예민하게 요구할 때였다. 그러던 터에 아우구스티누스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기독교사에 한 획을 그은 성인조차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다는 걸 알고 나는 '불가해된 은혜'로 삼위일체를 드디어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우리가 확실히 밝힐 수 없는 이유를 다름 아닌 인간의 이성과 언어의 한계에서 발견했고, 우리가 육체의 한계와 이에 따른 이성의 한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때에야 이 진리를 완전하게 알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성부·성자·성령의 공동체적이고 동등한 사귐이 곧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삼위일체를 피상적이고 기계적으로만 탐구했던 나의 무지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전회와 같은 놀라운 지혜와 통찰로 경각한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유독 5부에 많은 관심을 갖고 탐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인문학으로 톺아본다는 건 종교적(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굉장히 발칙한 행위일 수 있다. 하나님은 예배 생활을 통해, 성경 묵상을 통해, 기도와 그 응답 과정을 통해 '은혜롭게' 만나야지 학문적으로 탐구한다는 건 현존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인격성을 고매한 논리의 틀 안에 가둬버리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소중하고 성도의 신앙 지침서가 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은 여러 신조들도 역사적으로 토론과 협의를 통한 학문적 통과의례를 거친 산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신앙을 더욱 단단하게 한다는 면에서 유의미한 일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의도치 않은 장에서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결국 '사랑'임을 강조한다. 현재 인류가 직면한 여러 문제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데 있음을 지적한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님의 인격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은혜롭게 논증한다. 저자의 이런 맥락은 책의 「맺음말」까지 이어지는데 기독교는 결코 독단적이거나 배타적인 종교가 아니며 오히려 고차원적·공동체적 사랑, 즉 상호내주적·상호침투적 자유와 평등과 사랑으로 이룩되는 인간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근대 이후 서양문명의 주요한 특징인 하나님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역사를 맞이함을 경고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숭고한 틀 안에서 이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응당 타당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시대 가장 잘 나가는 인문학자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통렬히 경고한 대로 인간은 "신이 죽었다"라고 선언하는 것을 넘어 제 스스로 신이 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우리의 모든 인식과 가치는 상대적으로 재구성된다. 객관적 진리와 과학적 지식은 이론적 담론과 사회적 구성물로 전복되며 시대와 기호에 따라 절대적 진리는 반귀납적으로 역조합된다. 신은 이제 죽음을 넘어 인간으로부터 조롱의 대상으로까지 전락했다. 나는 그것을 피부로 느낀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주변 지인들로부터 심심치 않게 공격과 비아냥을 받곤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내 주일성수는 시간 낭비이며 십일조는 자선사업으로 조롱당한다. 신을 부정하면 가치가 사라져 버리고 신을 긍정하면 더 이상 세련되지 않다고 핍박받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 명징하게 신의 존재를 믿는 나에게 이 한 권의 책은 엄청난 도전과 감동을 선사했다. 

 

서평을 정리하자. 9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인문학(혹은 신학)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탐독할 수 있었다. 평소 인문학에 관심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공부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읽을 뿐만 아니라 가끔은 은혜롭기까지 해서 나름 유익한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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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 기행 1 -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 파리 편 유럽 도시 기행 1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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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서의 유시민의 약진이 반갑다. 이제 여행기까지 외연을 확대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독서, 여행 등 다양한 글감을 주제로 자기만의 글을 뽑아내는 유시민의 역동을 환영한다. 비록 나와 정치적·사상적 입장은 다르지만 글쟁이로서 수준 있는 역량을 갖춘 그를 나는 결코 멀리하지 않는다. 그의 글은 대중적이되 가볍지 않고 잡학적이되 산만하지 않다. 지식에 품격이 있고 감칠맛도 난다. 무엇보다 쉽고 재미있게 쓰는 건 그의 가장 큰 무기다. 좀 안다고 거들먹거리지도 않는다. 내가 그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중단한다고 선언한 이래 유시민은 '작가' 혹은 '지식인'으로 불려왔다. 최근 노무현 재단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세간으로부터 정치 중단의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했다. 그는 정치보다 집필과 강연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내가 아는 한 우리 시대 지식인 중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수많은 청년들이 그의 책을 읽고 그의 강연을 들으며 그의 유튜브 방송을 시청한다는 게 이를 방증한다. 지식의 외연이 넓고 거대 담론을 대중적 언어로 뽑아내는 내공이 탁월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리고 관심을 가진다. 정치 재개 가능성만으로 지식인 유시민의 존재감이 재단돼서는 곤란하다.

 

유시민이 새로운 책을 출간했다. 여행을 주제로 한 에세이다. 신간 『유럽 도시 기행 1』은 작가 유시민의 유럽 여행기다. 각기 다른 시기에 유럽 흥망성쇠의 공간적 배경이 되었던 아네테, 로마, 이스탄불, 파리의 이야기를 담았다. 네 도시는 워낙 유명해서 말이 필요 없을 정도의 세계적, 역사적 아이콘들이다. 작가는 특유의 박식한 지식과 정제된 주관, 실제적 경험을 보태 흥미로운 도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 에세이로 읽히지 않는다. 관광 안내서는 더욱 아니며 단순한 인문학 기행에 머물지도 않는다.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객관)과 작가 스스로 체험하며 느낀 감상(주관)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도시의 모든 것은 '텍스트(text)'일 뿐, 도시의 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해 '콘텍스트(context)'를 파악해야 한다"라는 작가의 말은 이 책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건축과 여행, 역사와 예술을 전공하지 않은 작가의 이 책이 가볍지 않고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콘텍스트주의', 즉 외연과 현상에 앞서 맥락과 본질을 주목하는 작가 고유의 진지한 감상 덕분이다.

 

작가가 선택한 유럽의 네 도시는 역사적으로 유럽의 각 시대를 전면에서 대표한 곳들이다. 헬레니즘이라는 서구 문명의 한 축을 담당했던 그리스의 아테네를 가장 우선으로 꼽았다. 오래전 모든 길은 이곳으로 통한다 했지만 '이탈리아 최악의 도시'로 소개한 로마는 그 두 번째다. 1453년 동로마를 멸망시킨 오스만튀르크의 영광이 담긴, 하지만 '다양성을 잃어버린 국제도시' 이스탄불이 그다음이다. '인류 문명의 최전선'으로 작가의 긍정이 유독 돋보이는 파리가 마지막이다. 작가는 특유의 달필로 각 도시의 역사성과 그것을 읽어내는 작가적 주관을 잘 풀어낸다.

 

이 책이 힘이 있는 건 네 도시에 대한 객관적 서술과 실제 여행 중 추출한 작가의 현장성이 적절한 비율로 배합되었다는 점이다. 마라톤과 살라미스로 대변되는 고대 아테네의 황금기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아크로폴리스 야경을 즐기는 만찬을 소개한다. 로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 카이사르의 삶을 얘기하면서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에 대한 솔직한 감상을 얹는다. 이스탄불 곳곳에 있는 궁전과 박물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서술하면서 '터키 커피'의 정수가 어떤 것인지를 놓치지 않는다. 파리에서는 나폴레옹의 영웅담을 논하는 동시에 루브르에 대해 '들어가도 들어가지 않아도 후회할 박물관'이라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이러한 객관과 주관의 황금률이 독자로 하여금 책 읽는 맛을 배가시킨다.

 

특히 파리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지구촌의 문화수도를 정한다면 망설임 없이 파리를 선택하겠다"라 하고, "호모 사피엔스가 도달한 문명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도시"라 상찬하며 프랑스 파리에 대한 애착을 요란스럽게 뿜어낸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만큼은 나는 작가의 견해에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 도시 자체가 이쁘고 고풍스러워서 품격 있는 도시가 되는 건 아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시민의 수준이 도시의 급을 결정한다. 나는 파리 시민들, 엄밀히 말해 프랑스 국민의 우수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파리는 위대한 도시다. 하지만 그 위대함의 이면에 추악함과 경박성, 그리고 오욕의 디테일이 묻어 있다는 걸 부인하기 힘들다. 자국의 월드컵 우승 축하잔치에서 거리 상점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며 국가를 대표하는 숭고한 문화재(에투알 개선문)를 훼손시키는 등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광기 어린 시민이 과연 세계 문화수도의 주인이 될 수 있을지는 토론이 필요한 주제다.

 

서평을 정리하자.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작가 유시민의 약진이 반갑고 즐겁다. 유시민은 정치라는 외연을 벗었을 때 더 빛나는 지식인이다. 사람마다 자기에 맞는 옷이 있고 어울리지 않는 옷이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유시민에게는 정치보다는 글과 강의가 더 잘 어울린다. 여행이라는 테마까지 외연을 넓히며 작가적 활동을 이어나가는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반대편의 칭찬은 더욱 힘이 있다. 유시민의 신간 『유럽 도시 기행 1』은 이러한 내 칭찬의 최신판이다. 돈이 아깝지 않은 책이다. 이어서 출간될 2권은 빈, 프라하, 부다페스트, 드레스덴을 다룬다고 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정치색을 버리고 캐주얼하게 읽는다면 즐거운 독서가 될 것이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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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바캉스 에디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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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쓴 에세이는 다르다. 결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다. 수필가가 소설가보다 글발이 못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소설은 허구의 세계를 완전히 새로 창작해야 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에세이는 다르다. 에세이에서 중요한 건 창조나 전개가 아닌 일상의 포착이다. 삶 속에서 촉촉한 글감을 추출해내는 능력이야말로 읽을 만한 에세이가 씌어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김영하라는 이름을 오랜만에 만났다. 김연수와 함께 한국문학을 책임질 투톱의 젊은 작가로 불렸던 그다. '작가론'을 주제로 무명의 평론가와 피곤한 토론을 하다 논쟁이 되자 모든 걸 접고 미국으로 떠나기도 했다. 오랜 침묵이 있었고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그가 쓴 소설의 원작이 영화로 개봉되고 모 예능에서 온갖 잡지식을 늘어놓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나와는 거리가 있는 얘기였다. 개인적으로 TV를 보지 않을뿐더러 일차적으로 작가는 작품으로 만나고 평가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갑다.

 

『여행의 이유』는 김영하의 최신 에세이다. 직업 소설가로서 그가 경험하고 관조한 여행에 대한 사색을 담았다. 두껍지 않은 책 속에는 소설가 김영하가 여행을 통해 만난 사람과 겪은 체험을 통해 얻은 다양한 사유가 잘 녹아 있다. 소설가답게 짧은 에세이에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내공이 탁월하다. 기계적이고 외연적인 의미로서가 아닌 본질 그 자체로서의 여행의 내적 성질을 깊이 탐색한다. 여행을 통해 뽑아낸 다양한 삶적, 작가적, 철학적 고뇌가 웅숭깊게 읽힌다.

 

책은 작가가 중국 여행에서 추방된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후 대학 시절 때 우연찮게 간 중국 여행을 소개하며 계획대로 흘러가는 완벽한 여행보다 매끄럽지 않은 실패한 여행이 본질적으로는 더 성공한 여행이라고 얘기한다. 과연 소설가 다운 글의 시작이요 메시지의 제시다. 여행의 궁극이 결국 현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완벽한 스케줄에 의해 오차 없이 흘러가는 것보다 끊임없는 변수의 연속선상에서 오직 '지금 여기'에 몰입하는 것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아름답다. 작가에게 여행은 존재에 대한 인식이자 응시인 것이다.

 

여행에세이면서도 다른 여러 책들에 관한 인용과 해설이 많이 소개된다. 가끔은 북에세이가 아닐까 할 정도로 작가는 책 소개를 무한히 쏟아낸다. 하지만 과하지 않다. 오히려 '여행의 이유'라는 책 제목과 좋은 궁합을 이룬다. 여행을 통한 경험과 여행에 대한 저자의 주관이 과거 자신이 읽은 여러 고전들의 일면과 자연스럽게 포개어지는 것이다. 특히 책 말미에 여행을 소설과 비교한 대목은 인상적이다. 여행이 일상의 부재라면 소설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현실과 다른 작동 방식의 시간성이 발휘되고, 인간과 세계에 관한 집중력을 고양시키며, 분명한 시작과 끝이 존재하고, 타 관점에서 우주를 천착하게 하며, 언젠가는 반드시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소설과 여행의 유사성을 탐색하는 작가의 사유가 흥미롭다.

 

작가는 여행의 의미를 깊고 넓게 풀이한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으로 여행을 정의한다. 결국 소설가 김영하의 여행론은 "나 자신을 보다 객관적으로 천착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라는 여행작가 오소희의 견해와 완벽히 일치한다. 곧 여행은 나 자신을 떠나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임을 일깨우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자각 혹은 대비라는 관점에서 결국 여행은 인간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기회와 가능성을 제시한다.

 

최근 여행 에세이가 봇물 터지듯이 출간되고 있다. 1인당 GDP 3만 불에 도달한 대한민국의 현재상은 앞만 보고 달려온 과거의 무시무시한 속도를 소급해서 제어하려는 듯 여기저기서 힐링에 대한 갈망을 표출 중이다. 여행은 그 최전선이다. 서점에 한 섹션을 할당해 산더미처럼 쌓여져 있는 여행 도서의 방대한 양이 이를 방증한다. 이 가운데 옥석을 구분하는 건 쉽지 않다. 바로 여기에 김영하의 신간 『여행의 이유』의 위치가 있다. 간결하고 묵직한 방식으로 '여행의 이유'에 대해 특유의 감성적 달필로 써 내려간 이 작은 에세이를 쉼이 필요한 모든 독자에게 추천한다. 역시 김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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