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삶에 관하여 (2017 리커버 한정판 나무 에디션)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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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허지웅을 싫어한다. 그는 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 편견에 빠진 무지, 자본주의에 대한 몰이해, 짓까부는식의 소통방식, 나이에 맞지 않은 훈계조의 언변 등은 상당히 불쾌한 것들이다. 특히 정치적인 것뿐 아니라 절반의 찬반을 가진 진영논리적 주제에 대해 강한 자기확신으로 질타하는 그의 표현방식은 언제나 비호감이다. 작년 그는 모 종편 방송에서 "드라마 <정도전>을 보지 않는다는 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목에 힘을 주며 역설했다. 드라마 한 편의 시청여부를 놓고 인생의 보편성을 훈계할 만큼 그는 대단한 사람인가.

   우리사회의 여러가지 민감한 이슈들에 대한 자신의 주관을 마치 전투하듯이 대중에게 훈계하는 그의 어법은 정말 밥맛이다. 그렇다고 그의 말이 옳은 것도 아니다. 본인이 지껄일 수 있는 자유의 자아상은 외면한 채 남도 나와 같이 지껄일 수 있는 자유의 현존에 대해서는 극도로 무지한 반응을 보이는 추태가 꼴사납다. 옥소리의 부정(不貞)을 비판하는 대중의 자유와 그 양상을 비판하는 그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자유권에 속한 것이다. 누가 감히 자유의 과잉과 한계를 말한단 말인가.

   허지웅은 '옥소리 간통 논쟁'에서 '공인(公人)'의 개념을 전근대적인 수준에서 이해했다. '공인'의 의미를 '공적에 적을 둔 사람'이라는 좁고 사전적인 의미로 걸러낸 것이다. 그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현대적 공인의 개념에 무지해 있다. 미국의 '공인이론'과 한국의 법원 판례를 한 번이라도 훑어봤는가. 근래의 공인 범위 논쟁은 명예훼손과 직선적으로 닿아 있다. 연예인은 자발적이면서도 비정치적인 공인으로 분류된다. 모든 명예훼손법이 이 기준에서 적용되고 있다. 연예인은 공인이다. 더이상 무식한 얘기를 하지 말라.

   허지웅은 싫지만 그의 글은 읽어보고 싶었다. 한 사람의 공인은 입체적으로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방송인이면서도 '글쓰는 허지웅'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그의 텍스트만큼은 살필 필요가 있었다. 세간의 말처럼 그의 뇌가 얼마나 섹시한지 알아보고 싶었다.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 하는 노파심도 작용했다. 그랬다. 허지웅의 신간 『버티는 삶에 관하여』는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책 제목이 맘에 든다. 저자는 인생을 '버티는 것'으로 규정한다. 제목뿐 아니라 책 곳곳에서 인간 삶의 고단함을 인정한다. 저자는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내재된 잘못된 전제를 나와 비슷한 논지로 규탄한다. 인생은 피곤하고 가난한 것이다. 자기 인생을 사회적 합의와 제도로써 천국처럼 만들 수 있다는 망상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인물은 아니다. 제목 '버티는 삶'은 박수 쳐 줄만하다.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반갑다. 시대가 변해도 책읽기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책 읽는 개인과 청춘, 국민 들이 역사를 추동했다. 저자는 일갈한다. 책을 읽지 않으면 내가 아는 것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이 말만큼은 진실이다. 오만과 편견에 빠진 지성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라도 폭넓은 독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마르크스식으로 말해 책은 세계를 '해석'하고 '변혁'하기 위한 인류 지성의 거대한 용광로다. 책읽기의 소중함을 설파한 부분 또한 박수 쳐 줄만하다.

   그러나 책 속으로 깊게 들어가면 문제가 많이 보인다. 저자는 여러 사안에 대해 정통좌파식 어법을 가감없이 구사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기제라는 논리를 줄기차게 쏟아낸다. 저자의 주장에 새로울 건 없다. 무엇보다 20대를 천착하는 저자의 시각은 가장 불편하다. 저자는 현재의 20대를 부정적으로 본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지금의 20대만큼 '세대의식'이 전무한 경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작금의 20대는 주위의 문제의식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돈에 미쳐있다는 게 저자의 논지다. 원인은 IMF 체제 이후 과거와 전혀 다른 환경을 세계 전부로 경험했고 급격한 신자유주의 바람 속에서 무한경쟁의 순환고리 안으로 떠밀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과연 그럴까.

   건강한 청년이 대학을 졸업한 후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타인과 경쟁하는 게 잘못된 걸까. 돈을 모으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 노력하는 게 나쁜 걸까. 시대는 변한다. 80년대와 90년대는 다른 시대적 소명을 요구한다. 21세기는 더하다. 지금의 20대가 80년대의 20대처럼 광장에서 화염병을 던지며 민주화를 외칠 세대인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이가 87체제의 아비투스에 함몰되어야 하는가. 내 주변의 20대들은 어느 시대의 20대 못지않게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며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 20대는 꼭 마르크스주의자여야만 하는가. 치열한 세계에서 자신을 분석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대비해 공부하며 땀흘리고 부를 축적하는 것은 고결하고 자생적인 인간의 행위다. 자신을 돌보지 못하면서 남을 돌본다는 건 위선이요 거짓이다. 저자는 뒷골목에서 짓까불며 덤방거리는 유럽의 얼빠진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을 뿐이다. 비호감이다.

   이밖에도 책 내용 곳곳에서 비판할 대목은 많다. 다만 뒷부분의 영화리뷰는 인상적이다. 저자의 이력에서 영화잡지사 경력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영화리뷰만큼은 수준급이다. 리뷰어로서 주관이 뚜렷하고 개성이 있다. 어느 정도 전문성을 확보해 논설에 여유가 느껴진다. 정치색과 정파성을 버리고 순수하게 영화 칼럼리스트로 활동했다면 저자의 뇌는 정말 섹시하게 보였을 것이다. 사람마다 잘 하는 분야가 있고 어울리는 옷이 있다. 타자의 존재성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지만 내가 보는 관점에서 지금 입고 있는 허지웅의 옷은 어울리지 않는다.

   서평을 정리하자. 『버티는 삶에 관하여』는 외연적으로 에세이의 평균은 유지한다. 허지웅은 말보다 글이 낫다. 앞서 그의 지력과 태도를 모두 꼬집었지만 글에서는 태도적 문제가 어느 정도 순화되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건질 것은 별로 없다. 영화 해설을 소개한 몇 페이지를 제외하고는 자본주의에 대한 일천한 냉소로 가득 차 있다. 아무런 대안없이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조소를 던지며 마치 그것이 정의의 편에 선 위트인양 지껄이는 모습은 신물이 날 정도로 지겨운 풍경이다. 자본주의는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고 수정해가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해없이 함부로 나불대지 말라. 동갑이라서 조언하겠다. 방송에 나와 떠들려면 공부 좀 더하고 기본적인 태도를 갖추라. 그게 공인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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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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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세계문학상은 1회 수상작부터 꾸준히 읽어오고 있다. 세계문학상은 다른 문학상과는 다른 뚜렷한 개별성을 갖고 있다. 텍스트의 가독성과 재미를 중시하는 게 주된 특징이다. 한국판 나오키상(直木賞)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읽기에 쉽고 몰입도가 높은 대중적인 소설이 꾸준히 선정이 되어 왔다. 도발적인 소재와 개성있는 문체, 빠른 속도감과 흡입력 있는 서사를 갖춘 작품이 세계문학상의 표적이 된다.

   1회 수상작 김별아의 『미실』은 여태까지 생각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어냈다.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는 보수적인 한국사회에 '비독점적 다자연애'를 질문함으로써 꽤 충격적인 도발을 시도했다. 신경진의 『슬롯』은 도박을 소재로 자본주의의 바다를 헤엄치는 인간의 정체성을 흥미있게 그려냈다. 백영옥의 『스타일』은 신세대 한국여성의 진화된 원형을 익살스럽게 담아냈다. 잘 읽히고 흥미있고 도발적이고 신선한 점이 세계문학상 수상작들의 공통적 분모다.

   제 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내 심장을 쏴라』는 제 1회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대중에게 낯설지 않게 자리매김한 소설가 정유정의 장편소설이다. 이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보다 '문학적'이라는 점에서 강한 매력을 가졌다. 요컨대 소설 『내 심장을 쏴라』는 재미와 무게를 함께 지닌 힘있고 감동적인 소설이다. 최근에는 영화로 제작되어 기존에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다시 한 번 재조명되고 있다.

   이 소설은 폐쇄된 정신병원에서 만난 두 남자가 서로를 알아가면서 각자의 삶으로부터 교차되어 얻는 깨달음과 열정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가위만 보면 공황장애를 일으키는 1인칭 화자 이수명과 그와 같은 날 정신병원에 입원한 시력장애인 유승민과의 첫 만남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첫 만남의 데면데면함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친밀한 우정으로 변화하기까지의 과정을 흥미있고 생동감 있게 담았다.

   수명과 승민은 각자 삶을 대하는 태도가 상이하다. 수명이 내면 속으로 자신을 축소화한다면 승민은 외연을 향한 방향성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수명과 승민은 공히 과거의 비밀을 가슴에 품고 지낸다. 작가는 두 인물의 과거 트라우마와 그것에 함몰되어 일상을 둥개는 현실의 긴장감을 잘 그려냈다. 소설의 뒷부분으로 가면서 과거에 봉착되어 있던 수명과 승민의 내밀한 비밀은 밝혀진다. 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에 의해 고백되고 깨달아졌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소설의 앞부분은 서사의 진척이 느리고 미지근한 몰입도를 보인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 후반에 이르게 되면 여태까지 소급되어 응축된 이야기가 한꺼번에 터지면서 독자의 가독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소설의 말미, 주인공 수명이 오랫동안 가슴 깊숙한 곳에 봉인해두었던 삶의 참된 진실을 인식하고 용기를 표출하는 장면, 그 순간은, 이 소설이 선사하는 가장 강렬한 울림이자 카타르시스다.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는 두 가지로 정리된다. 그것은 바로 '자아'와 '자유'다. 폐쇄된 정신병동이라는 외면의 벽을 탈출하려는 몸부림은 자아를 제대로 인식하기를 원하는 내면의 열정에 닿아있다. 두 인물의 과거의 아픔과 이에 구속된 일그러진 현재상은 자신의 인생에서 자아의 지정학적 위치를 잘못 두었을 때를 그대로 은유한다. 자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은 결락된 채 비본질에 대한 집념과 고집만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자유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정작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방식은 자아의 역동과는 거리가 먼 외적 환경의 파괴, 또는 내적 울림과의 단절에 불과하다.

   이러한 두 인물의 자유 성취와 자아 성찰에 대한 공전(轉) 행태은 승민이 병원을 탈출하여 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활공하는 바로 그 순간, 앎과 행복의 실현으로 급반전된다. 승민은 종내 죽는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소설의 마지막 수명이 정신병원을 퇴원하는 장면과 연결된다. 죽은 승민은 수명에게 질문한다. 너는 누구냐고. '새' 아니면 '비행기'냐고. 이에 대한 수명의 답은 단호하고 명확하다.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라는 것을.

   한 사람의 자유는 타자의 간섭이나 외부의 구속으로 조정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생 또한 타자가 아닌 자아의 추동, 즉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생(生)의 강렬한 욕망은 항시 자유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내 인생을 '나'로서 사는 것은 분명한 진리다. 이 타협할 수 없는 절대명제 앞에서 우리 삶은 때때로 외부를 의식하고 타자에 주눅들며 방황한다. 진정한 자유의 가치는 내가 내 삶의 주어로서 존재하며 약동할 때 빛을 드러낸다. 내 실존은 누구도 욕망하지 못한다. 이 말이 진리라면, 외부를 향해 가슴을 열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내 심장을 쏴봐.

   굉장히 잘 쓴 소설이다. 서사를 풀어가는 능숙함과 재치있는 입담이 돋보인다. 순간순간의 감동이 녹아있고 시종 재미를 잃지 않는다. 정교하고 정제된 묘사와 독자의 호흡을 쥐었다 놨다 하는 작가의 내공이 훌륭하다. 우리는 이런 소설에 박수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 내적 자유와 자아의 고찰에 번민하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이 한 권의 소설이 위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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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인생을 아직 덜 살아서일까. 난 왜 쿤데라 선생의 말에 동의할 수 없는 걸까. 그의 말대로 과연 하찮은 것이 진지하고 무겁고 특별한 것들을 본질적인 선상에서 전복해낼 수 있을까. 텍스트의 분량과 화법의 속도는 전작과 많이 다르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인 『농담』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일관되게 포착하고 있는 '가벼움'의 철학은 신간에서도 여지없이 연장된다.

   그는 왜 항시 가벼움과 무의미함을 삶의 정형성 전면에 배치하는 걸까. 사실 '의미 없음', '보잘 것 없음', '하찮음', '초라함', '가벼움' 등은 쿤데라 문학을 관통하는 핵심코드다. 기승전결 없이 막 써내려간 듯 보이는 짧은 소설을 통해 쿤데라는 무의미한 것의 의미, 가치 없는 것의 가치를 설파한다. 쿤테라는 결국 인간의 고독과 삶이 아무런 의미 없음의, 보잘 것 없음의 축제이며, 이 '무의미의 축제'야말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시대의 본질이라고 역설한다.

   고백컨대 쿤데라의 소설은 매번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영원성의 무거움과 일회성의 가벼움을 역설적으로 대비시켜 치환해버리는 쿤데라 문학의 골격은 니체식 시간관념의 문학적 재현이자 관통이다. 더 나아가 헤겔의 분해이자 쇼펜하우어의 소환이다.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일상의 나날이 그 자체로 축제라고 규정하는 그의 일관된 논변에 나는 여전히 고개를 젓는다. 혹시 그는 '지루함'과 '가벼움'을 혼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노벨상을 목전에 둔 노작가의 거대한 진동이 좀처럼 나에겐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아주 가끔,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의 텍스트에서 쿤데라의 잔영(殘影)을 목도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무언가의 모호성이 추동하는 강한 전율을 느끼곤 한다. 내가 여전히 쿤데라의 소설을 읽는 유일한 이유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 쿤데라는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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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죽지 그래 - 남정욱이 청춘에게 전하는 지독한 현실 그 자체!
남정욱 지음 / 인벤션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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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계발서를 싫어한다. 개인의 환경과 개별성을 무시한 채 출세와 성공의 방법이 일반화될 수 있는 것처럼 설교하는 계발서의 부조리는 정말 밥맛이다. 오래전부터 계발서를 비판해왔다. 동시에 깊이있는 책읽기를 멀리하고 계발서만 죽도록 파고드는 이 나라 젊은이들의 독서기호를 꾸짖기도 했다.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길기 때문이다.

   내가 자기계발서에 냉담한 이유는 간단하다. 계발서의 내용과 구조를 살펴보면 카뮈식의 부조리(不條理)가 예외없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같은 전형적인 힐링 서적이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나라는 OECD국가에서 대한민국밖에 없다. 이런류의 책들은 교묘한 선동, 저자만의 기준, 무의미한 합리주의, 뜬구름잡는 달콤한 소리 등으로 인간의 행복을 이상세계에 대한 잠시성(暫時性, transiency)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는다. 독자는 읽는 순간만 환상에 사로잡힐 뿐이다. 그래서, 정말 싫다.

   그간 여러 매체에서 보수적 담론을 쏟아낸 숭실대 문예창작과 남정욱 교수는 이러한 내 입장을 지지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이다.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자기계발서를 바라보는 기준과 신념만큼은 그와 내가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아예 책까지 출간해서 자기계발서의 모순을 공격한다. 그의 신간 『차라리 죽지 그래』는 "자기계발서에 파괴당하는 청춘들을 위한, 남정욱 교수의 잔혹 감성 어드바이스"라는 강렬한 부제를 단 명확한 존재성을 가진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제법 쎈 표현과 방식으로 계발서가 가진 내·외재적 모순을 가차없이 재단한다.

   저자 특유의 단단한 문체와 익살스런 표현은 독자로 하여금 거침없이 책장을 넘기게 하는 동력이다. 저자는 우리사회의 과잉된 힐링과 호도된 멘토링을 강하게 질타한다. 또한 거짓 멘토에 의해 위험한 인생관을 권유받고 있는 불안한 청춘성의 회복을 탐색한다. 저자는 역설한다. 청춘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때로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고,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며, 사는 일은 정말이지 뜻대로 되지 않는 굴절과 실망의 연속이 바로 청춘의 실재임을 일깨운다. 누구도 쉽게 거론하지 못해왔던 청춘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가감없이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평소 젊은이에게 번쩍이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온 몇몇 멘토들에 대해 가차없는 매질을 가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김난도 교수를 '착한 어른'이라 조롱하며 두들긴다. 또한 최근 메스컴에서 활발한 강연활동을 하고 있는 철학자 강신주는 저자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진다. 저자는 강신주의 베스트셀러 『강신주의 다상담』을 마치 회를 떠서 도려내듯이 굉장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비판하고 있다. 강신주와 그의 어록에 대한 저자의 칼날은 집요함과 디테일 면에서 과히 압권이라 할 정도로 냉소적이며 날카롭다.

   실명을 거론하면서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는 저자의 논지에 나는 오롯이 동의한다. 강신주처럼 포스트모더니즘 흉내를 내는 소위 '강단 좌익'의 현상은 비단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삶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무언가 비틀고 뒤집어서 보려고 하는 그들의 지적 변태행위는 구토가 날 정도로 짜증나는 일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마치 사탄의 사술(詐術)인양 비아냥거리며 요란을 떠는 그들의 무지와 착각이 불편하다. 그들의 주장(논리)에서 새로울 건 전혀 없다. 러셀의 반복이고 라캉의 연장이며 레비스트로스의 소환일 뿐이다. 오래전 사르트르가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흉내내며 덤방댔던 것과 흡사한 방식이다. 더 짜증나는 건 이런 방식이 유독 한국사회에서 잘 먹히고 있다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있다. 사람이든 사건이든 실재를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만의 연역적 결정론(決定論)대로 뒤집고 비틀어 사회적 구성물로 치환하려는 사조가 횡행하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현상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데 그 본질은 동일하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합리주의 전통을 거의 노골적으로 부정하며 경험적 검증과 동떨어진 이론적 담론에 머문다. 과학적 지식과 귀납적 사실을 인간이 만든 사회적 구조체로 대체시킨다. 종국적으로 객관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병(病)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이런 풍토를 가르치고 선동하는 지식인들이 가장 큰 문제다. 강신주는 그중 최전선에 있다. 그가 쓴 『다상담』이나 『감정수업』을 읽으며 나는 충격을 넘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이 제정신인가. 일하지 말고 노는데 힘써야 하고, 올해 안에 회사에 사표를 내야 하며, 부모님을 반드시 우려먹어야 하고, 진실보다 거짓을 말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고 가르치는 강신주의 인생관은 도대체 무슨 개똥철학이란 말인가. 그것도 철학인가. 이러한 거짓 멘토와 쓰레기 철학을 시원하게 씹어준 것만으로도 저자의 노고는 결코 녹록지 않다.

   물론 이 책에 한계가 없는 건 아니다. 자기계발서가 가진 모순을 비판하면서 결국 저자마저도 뒷부분으로 가면서 전형적인 자기계발서의 방식으로 젊은이들을 훈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강신주와 김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 뒤 '이것이야말로 진짜 자기계발서'라는 자신만의 계발서 속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저자가 제시한 내용은 '진짜'라고 하기에는 진부하고 별 것 없다. 새로운 게 없다. 잘못된 내용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기존의 경험적 통념과 겹치기 때문에 굳이 필요치 않은 부분이다. 더욱이 후반부 '농담수업'이라는 코너는 책의 앞뒤 맥락의 연결에 방해가 될 정도로 불필요하다. 지면을 채우기 위한 장치로 오해를 받을 만하다. 더 많은 거짓 선지자(先知者)들의 텍스트를 해부하면서 청춘의 고된 일상성을 진지하게 천착하는 것으로 갈무리했다면 좀 더 힘있는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삶은 고단하다. 천국은 없다. 플라톤이 상정한 이데아의 세계는 인간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본래 추악하고 고단하며 가난한 것이다. 비루한 현실을 견디고 책임지는 여정 위에 인간 삶의 원형이 놓여 있다. 자기 삶은 철저히 자기 방식대로 본인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다. 멘토와 힐링은 필요한 것이되, 비본질인 것이다. 이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소망이 샘솟을 수 있다. 난 그렇게 믿는다.

   서평을 정리하자. 남정욱의 『차라리 죽지 그래』는 누구에게나 권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계발서가 지닌 부조리의 민낯을 살펴보고 질적으로 우수한 독서를 여망하는, 무엇보다 모호한 인생관 가운데 삶을 둥개는 고된 젊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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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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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시민의 신간은 항상 구독하는 편이다. 지금까지 출간된 그의 모든 저작을 탐독했다. 작가 유시민의 애독자라 할 만하다. 그가 좋아서가 아니다. 그의 글 속에 묻어있는 특유의 주관적 향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의 글빨에는 공감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유시민이 전직 장관(혹인 국회의원)이 아닌 작가로 불리길 원한다.

그가 현대사 책을 낸다고 했을 때 굉장한 기대를 가졌다. 한국현대사는 아직까지 보편적이고 명확하게 정리된 바이블이 합의되지 않았다. 유시민의 말대로 현대사 논쟁은 고대사나 중세사 논쟁과 달리 격렬한 감정의 표출과 정치적 대립을 동반한다. 대한민국은 그 경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좌·우파의 극심한 이념대립의 현실 속에서 이 땅의 근현대사는 가장 뜨거운 감자로 놓여 있다. 실례로 지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낙마사태는 한국 근현대사를 보편적으로 정립시키기 어려운 이 나라 이념 정서의 함몰성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시민의 신간 <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은 제목 그대로 저자 인생 55년 간의 한국현대사의 기록이다. 전직 장관이었던 저자는 현재의 자신을 '쁘띠부르주아 리버럴(자유주의적 소시민계급)'이라고 당당히 소개한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쁘띠부르주아 리버럴 지식인이 출생 후부터 현재까지 보고 겪고 느낀 주요 사건들을 대중의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들여다본 한국현대사 55년의 기록이다. 일반 역사서와는 달리 저자의 경험과 주관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자는 특유의 날카로운 서술과 개성있는 향기로 한국의 현대사를 흥미진진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다.

저자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좌·우가 극렬히 대립하고 있는 이념전쟁의 한복판으로 진단한다. 대한민국 역대 정권의 성격과 그게 상응하는 국민들을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으로 분류하면서, 역사는 단지 회고의 기록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더 나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지금 같은 세대 간의 단절이 아니라 적극적인 소통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 한국현대사의 큰 줄기이기 때문에 양쪽 모두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하는 토대가 마련되지 않으면 온전한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응당 옳은 얘기다.

이 책이 저자의 자전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라 하여 역사책으로서의 무게가 가벼울 것이라 단정해서는 곤란하다. 55년 동안 이 땅에서 벌어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영역의 다양한 사건들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저자의 국회의원 경력과 보건복지부 장관 재임 시절의 경험은 여타 역사서에서는 보기 힘든 개성있는 각론들을 추출하는 재료가 된다. 수없이 등장하는 수치와 도표, 당대의 주요 사진들, 꼼꼼하게 표기된 각주와 주석, 적지 않은 인용서적 리스트 등은 저자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이 책을 저술했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것들이다.

과거 어느 책보다 공들인 흔적은 엿보이나 책에 기록된 저자의 견해에 대해 나는 많은 부분 공감하지 못한다. 물론 지금까지 보여준 저자의 진보주의적 색채, 보다 직선적으로 말해 좌파적 기질은 과거에 비해 한층 세련돼졌다. 온건하고 차분해진 흔적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 과를 객관적으로 구분하려는 자세는 진일보했다. 동아일보와 조갑제 씨에 대한 긍정적 해설도 눈에 띈다. 그러나 문제는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저자의 기준이 아직까지도 자기 편향적 우월성에 함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끊임없이 보수주의의 기작을 생물학적 편의성으로 설명한다. 보수주의는 인간 여러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을 지향하는 이념이라는 과거의 견해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건지, 그렇게 규정하고 싶어 의도적으로 단언하는건지 잘 모르겠다.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보는가는 비단 정치이념뿐만 아니라 역사학, 철학, 경제학 등의 모든 인문학 분야의 뜨거운 감자였다. 저자는 은밀하면서도 일관되게 인간의 이타적 감응을 이기심 위에 올려놓으며 개인주의(個人主義, individualism)로부터 출발하는 보수주의의 맥락을 인간성의 결핍으로 등치시킨다. 상대적으로 진보의 가치가 우월할 수 있도록 스탠스를 잡고 있는 것이다. 책에 나와 있진 않지만 최근 어느 강연에서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좌·우파가 갈라지는 이유에 대해 뇌과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인용하기도 했다. 대뇌피질의 거울뉴런이라는 신경생리학적 기관이 발달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고통이나 기쁨에 감응하는 강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뇌 구조의 기작 분포로 좌·우파, 혹은 진보·보수를 가름하며 의도적으로 상대적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그의 편향된 이념인식에 동의하지 못하는 건 비단 나만일까.

이기심과 이타심의 대결구도로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방식은 이미 오래전에 기각됐다. 서울대학교 이영훈 교수는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사실과 인간이 타인과 신뢰·협동의 규범과 제도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전혀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상호 정합적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협동할 때 서로에게 득이 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인지하고 발전해가는 영지의 동물이다. 그래서 개인주의와 사유재산권이 성숙한 서유럽과 미국에서 오히려 사회적 신뢰와 협동이 발달하고 그에 기초한 정신문화가 풍성하게 꽃을 피웠다. 반면 그러한 정치철학의 전통이 없는 동아시아의 문화는 세계에서도 가장 물질주의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근대문명의 출발점이 자립적 개인이라는 것은 현대 역사학계의 통설로 자리매김한 분명한 사실이다.

인간의 본성과 정치사상의 견해에 있어 저자 유시민이 가진 불편한 편향성에 대해 지적했다. 물론 이 책이 가진 많은 장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저자의 경험과 일상이 추동하는 평이성과 접근성은 역사에 대한 독자의 탈부담화를 견인한다. 객관적인 수치·도표의 인용과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논지 전개는 역사책이 가져야 할 진지한 무게를 담아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또한 좌·우파 상관없이 반드시 읽어야 할 양서와 우리사회에 큰 이슈가 된 다양한 책들을 소개한 점은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인용된 책들을 살피는 것으로도 이 책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다. 단 저자의 주관과 해석이 강하게 배어 있기 때문에 현대사 교과서로서의 보편과 권위를 갖기에는 한계가 있다. 전직 정치인이 쓴 자전적 역사에세이 정도로 가볍게 읽어 볼만한 책이다.

오랜 기간 동안 유시민을 봐왔다. 그는 기억을 못하겠지만 사석에서 만난 적도 있었다. 유시민은 정치적 색채를 버리고 어깨에 힘을 뺐을 때 멋드러진 지식인의 면모가 드러나는 인물이다. 그의 직업은 작가다. 최근 모정당의 팟캐스트에 고정 출연하여 이런저런 정치적 담론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있다. 정치를 떠난 만큼 과한 표현을 자제하고 왕성한 저술과 수준있는 강연으로 참된 지식인의 역할을 다해주기를 바란다. 정치적·철학적·이념적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작가로서 종횡무진하는 그의 열정을 순수한 마음으로 기원하는 건 비단 나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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