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독서 (리커버 에디션)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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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유시민의 고전리뷰집 『청춘의 독서』가 리커버에디션으로 출간됐다. 내용은 그대로 두고 커버 디자인만 바꾼 신장판이다. 정계를 떠나 작가가 본업이 된 후부터 유시민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끼치는 그의 영향력은 결코 녹록지 않다. 정치적 외연을 벗고 저술과 강연으로 자신의 본실력을 굴곡없이 전달한 게 소위 '유시민 현상'의 원동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여러 방송을 통해 그의 지력은 더욱 재조명받고 있다. 그간 정치성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한 그의 지적 내공이 대중적으로 널리 공유된다는 건 좋은 일이다. 지식인도 연예인 못지않은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풍토를 만든다는 점에서 유시민의 존재는 소중하다. 이에 2009년 출간 이후 지금까지 17만 권 이상 팔린 그의 스테디셀러 『청춘의 독서』를 재리뷰하고자 한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좋은 책은 항상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변화하게 한다. 책이 세계를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변혁의 동기를 부여하고 고취한다. 인류사에 기록된 수많은 고전들을 보라. 그것들은 인간을 탐구하고 시대를 조명하며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왔다. 한 시대 공동체 구성원의 지적 화두를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고전에는 오롯이 새겨져 있다. 그것이 없는 텍스트는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고전은 뜨겁다.

   우리는 고전을 통해 인간의 당위적 가치와 그 시대의 고민에 직면할 수 있게 된다. 대작가(대저자)의 혼과 숨결은 텍스트 곳곳에서 독자의 머리와 가슴을 진동시킨다. 고전은 입증된 텍스트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욱 지난한 시간의 검증과정을 누적하며 그 입증을 단단히 쌓는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 길이 멀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고전을 통해 참된 길이 무엇인지를 교훈받고 도전받는다.

   '지식소매상'임을 자처하는 우리시대 대표 진보 지식인 유시민은 『청춘의 독서』를 통해 바로 고전을 얘기한다. 저자 자신이 청춘시절에 읽고 감동한 고전 중 14편을 선정하여 독자에게 소개한다. 저자가 전하는 14편의 고전은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찬란한 명저들이다. 저자는 저작마다 담긴 웅숭깊은 가치와 다양한 시대성에 대해 수준높은 식견과 진지한 자세로 리뷰한다.

   유시민은 역시 진보다. 훌륭한 명저였지만 서슬퍼런 정권의 감시때문에 공개적으로 읽기가 힘들었던 희대의 금서들을 리스트 위에 올려놓았다.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불과 이십오 년 전만 해도 금서로 분류되어 제도권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작품들이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지금이 과거에 비해 확실히 '좋은 시대'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만개한 세상이 됐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전환시대의 논리』를 숨어서 읽고, 『공산당 선언』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남산에 끌려가는 시대는 종말했다. "젊은 시절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서 빛나는 금서들을 탐독했다"는 저자의 솔직한 고백을 통해 진실이 역사를 어떻게 압도해왔는지를 새삼 반추한다.

   이 책의 가치는 다양성에 있다. 인간, 역사, 철학, 정치, 사회, 과학에 이르기까지 인류를 다채로운 관점과 방법으로 관류해온 여러 고전을 선택했다. 도스토옙스키에서 카(E. H. Carr)에 이르기까지 세기의 천재들이 뿜어낸 텍스트는 한결같이 역동적이고 찬란하다. 고전을 집필한 거인들은 항상 새로운 것으로써 기존 사상과 관습을 들추어보려고 했다. 용기가 있었고 끊임없이 고민했으며 깊이 통찰했다. 그리고 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생산했고 재창조했다. 이러한 고전작품의 혁신적 정신은 항시 시대성의 전복과 맞물려 발생해왔다.

   고전이 지닌 태동적인 진보성은 저자의 성향을 고려하면 자연스럽게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선술한 바와 같이 유시민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명징한 진보주의자다.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정치적 선탠과 신념은 기존의 것을 바꾸고자 하는 데에 많은 부분 닿아 있다. 이러한 그의 진보적 색채는 시대 안에서 시대를 혁신해온 고전의 특질과 일맥상통한다. 난 믿는다. 모든 고전은 태생적으로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수주의자인 나에게 '고전의 진보'가 뿜어내는 생기(生氣)는 언제나 도전이다. 이념의 대립을 넘어선 '검증된 지적 대화'라는 점에서 고전을 관통하면서 보수와 진보는 화해한다.

   저자는 각 고전 속에 살아 숨쉬는 여러 맥락을 소개한다. 기존 해설서와는 다른 저자만의 시각과 사유로 추출해낸 해석이 인상적이다. 젊은 시절 날카로운 첫키스와 같은 책 《죄와 벌》을 통해 평범한 다수가 갖는 강력한 힘과 선한 수단과 목적 사이의 인과관계를 사유했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를 배웠고, 《공산당 선언》을 읽으며 혁명의 가치와 매력에 경도되었다. 《맹자》에서 진정한 보수守가 무엇인지를 알았고, 《사기》를 통해 권력의 단면과 정치의 속성을 배웠다. 《진보와 빈곤》을 읽고 문명과 빈곤의 함수관계를 학습했고,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역사와 사회에 대한 개안(眼)을 일으켰다. 물론 그의 주관과 해석에 내가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니다.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부분은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편이다. 이 소설은 개인과 언론 사이의 무서운 구조적 관계에 대해 묘파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카타리나와 신문사 '차이퉁'의 대립은 당시 독일에서 작가 자신과 일간지 <빌트>와의 대결구도를 그대로 상징한다. 판매부수 400만 부로 독일 내 1위 신문 <빌트>는 논조가 매우 보수적이며 때로는 극우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많이 팔린다고 해서 '일등 신문'이 되는 건 아니다. 비록 <빌트>보다 판매량이 많진 않지만 품격 있고 사회적 영향력을 갖춘 다른 신문들이 균형감 있고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한국적 현실을 대조한다. 1위부터 3위까지 모두 '빌트'로 점령당한, 다수가 '일등 신문'이라고 부르고 읽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환경에 빠져 있는 한국 언론시장의 세태에 한숨을 짓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공급받는 정보와 진실은 일차적으로 미디어의 프레임을 통해 가공된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영향으로 종이신문의 권위가 예전 같지는 않다. 그러나 언론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신문의 헤드라인이 가진 거대한 폭력을 고발하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유시민이 어떤 생각과 마음에서 읽었을지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주지하다시피 그와 나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스탠스를 달리 한다. 엄밀히 말해 개인과 사회를 바라보는 근본인식에 큰 차이가 있다. 자기자신을 스스로 '자유주의자(liberalist)'로 규정하는 것만 동일할 뿐 그는 상당히 왼쪽에, 나는 굉장히 오른쪽에 서 있다. 그럼에도 내가 그와 그의 텍스트를 즐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식인으로서의 실력을 그가 갖추었기 때문이다. 나는 유시민의 거의 모든 저작들을 탐독해왔다. 저자와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소위 나는 '유빠'인 것이다. 그의 책(언어)은 한결같이 쉽고 시의적이며 재미있다. 어렵고 민감한 사안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다는 건 지식인으로서 최고의 내공이다. 그의 책과 강연과 방송이 대중으로부터 환영받는 이유다.

   '다윗의 서재'를 자주 찾는 분이라면 유시민에 대한 내 견해가 상당히 안온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감지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정치적 견해와 사상적 맥락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까고 보자는 스탠스는 곤란하다. 예컨대 나는 꼴통보수이면서도 완전한 공산주의자 에릭 홉스봄을 좋아했다. 그의 내공(내용이 아닌 내공 그 자체)과 태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유시민 또한 마찬가지다. 지식인에 대한 평가는 입체적이어야 한다. 유시민을 향한 내 따뜻한 시선은 바로 그 기준에 닿아 있다. 한국 보수에 유시민만한 지식인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의 고전리뷰집 『청춘의 독서』를 아낌없이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그의 저작 중 최고로 꼽는다. 돈이 아깝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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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 (100만부 돌파 기념 양장 특별판) -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지음 / 말글터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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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주의 에세이 <언어의 온도>가 또다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수십 주 째 베스트셀러에 우뚝 서 있다. 도무지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간 눈에 띄는 신작이 없던 이유도 있지만 작가 특유의 따뜻한 문장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외연을 확대해간 것으로 보인다. 언어의 홍수 속에서 말과 글의 범람에 허덕이는 현대인들에게 이 한 권의 책은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건넨다.

   평소 자기계발서를 위시하여 소위 '힐링서적'에 거리를 두는 편이다. IMF 이후 국내 서점가는 위로와 멘토를 중심으로 한 힐링문학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서점 중앙에 군을 형성하여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정도다. 읽어 보면 대부분 내용과 얼개가 도긴개긴이다. 개별성을 고려하지 않은 저자만의 기준과 실질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는 합리주의로 쓰여진 말랑말랑한 얘기들뿐이다. <언어의 온도>는 그런 책들과 궤와 결을 달리 한다. 작가 이기주는 뜬구름 잡는 달콤한 소리에서 벗어나 언어의 일상성과 인문성을 대중적인 수준에서 잘 녹여냈다. 

   언어에도 온도가 있을까. 이에 대한 작가는 답은 단호하다. 분명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온도>는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라는 명확한 선언으로 책 표지의 전면을 장식한다.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역설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언어적 존재'라는 명제에도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사회적 맥락은 대부분 언어를 통해 채워지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 상처와 번민, 기대와 실망 등 인간이 향유하는 거의 모든 정서적 소용돌이는 서로 간의 말과 글을 통해 발생한다. 따뜻한 언어가 사람 사이를 안온하게 하고 차가운 언어가 사람 사이를 냉랭하게 한다. 사회는 곧 언어인 것이다.

   언어에는 힘이 있다. 기독교는 신神이 세상을 언어(말씀)로 창조했다고 선언한다. 빛이 있으라, 했더니 빛이 생겼다. 나사로야 일어나라, 했더니 죽은 사람이 깨어났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신성에 기인한 것이다. 인간은 언어의 힘을 신으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렇기에 인간의 언어에도 신성적 힘과 능력이 내재해 있다. 언어가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킨다. 반면 언어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주변을 어둡게도 한다. 즉 언어는 그 내밀성 속에 빛과 어둠을 동시에 공유하고 있으며 인간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수렴하고 있다. 그야말로 인간은 호모로퀜스(Homo loquens)다.

   작가는 여러 지식과 경험을 통해 추출한 사유로 자신의 언어학을 풀이한다. 일상의 편린이나 한 편의 영화, 혹은 다양한 간접경험을 소재로 해서 '언어'라는 매개로써 독자의 가슴을 관통한다. 아주 작은 일상의 순간, 좀 더 큰 시간의 흐름, 더 크게는 한 사람이 가진 삶의 폭과 같은 것들을 통해 보편적 이해와 공감대를 추출한다. 각론에서 뽑아내는 총론의 메시지가 가볍지 않고 각 장이 총체적으로 '언어의 격格'이라는 큰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통합된다는 점에서 작가의 단단한 내공이 느껴진다. 

   작가는 '언어의 온도'를 말하기 위해 적확한 '언어의 무게'를 찾았다.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다. 특유의 냄새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개성이 강한 문장들도 아니다. 불필요하게 화려한 덧칠을 하지 않았다. 허세와 겉멋이 없는 진솔한 문장이 인상적이다. 무색무취의 공명적 힘이 있다. 과하지 않고 군더더기없는 문장을 이쁜 디자인으로 두른 작은 책에 담았다. 그렇기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많은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책이 됐다. 힐링서적에도 '격格'이란 게 존재한다. 두서없이 마구 갈겨쓴 여느 에세이들과는 격을 달리 한다. 주제를 잡고 일관되게 쓴 작가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잘 쓴 책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이례적인 호평 속에는 앞으로 비평의 시각을 변화하고자 하는 내 의지가 담겨 있다. 내 비평의 현존을 진지하게 탐색한다. 베스트셀러에 대해 보다 아량있는 스탠스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기존에는 베스트셀러에 옥석을 구분하는 예리한 칼날을 먼저 들이댔다. 위대한 고전의 존재성을 기준으로 하여 현재의 책들을 재단하려고 했다. 돌아보건대 불필요한 짓이었다. 요즈음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유시민의 말대로 "베스트셀러는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에 베스트셀러인 것"이다. 많이 팔리는 책은 이유가 있다. 동시대 대중으로부터 공감과 사랑을 받는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힘과 능력이다. 그래서 말하겠다.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를 아낌없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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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일상에 관한 이런저런 상념을 두서없이 남긴다.

1.  19대 대통령 취임
   새 대통령이 취임했다. 시의성 때문인지 국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나라의 진보주의 담론을 대중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신임 대통령에게 국민들은 녹록지 않은 기대를 보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나는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진보'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꽉 막힌 보수꼴통인 내가 그의 정책과 이념을 지지한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취임 초기의 여러 신선한 모습에 박수를 아끼고 싶지는 않다. 철학과 진영이 다르다고 해서 잘한 것에 대해 무조건 비판하려는 태도는 부당하다. 지지 여부를 떠나 지금은 힘을 실어주고 격려해줄 때다. 부디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2. 이기주 <언어의 온도>
   이기주 작가의 에세이 <언어의 온도>를 읽고 있다. 베스트셀러 1위에서 쉽사리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간 눈에 띄는 신작이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작가 특유의 따뜻한 위로의 문장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외연을 계속해서 확대해가고 있는 듯하다. 가벼운 맥락의 힐링서적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이기주의 에세이는 신선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최근 말과 글로 인해 상처와 권태를 가진 내 자신의 현재성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나의 한계를 유독 많이 느끼는 요즘이다. 나 자신을 비워야 할 때다. 이기주의 말대로, 비우는 행위는 뭔가를 덜어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움은 자신을 내려놓은 것이며 자기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어 주는 것이다.

3. 책 추천
   아끼는 교회 후배가 연애와 결혼을 준비하며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해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간만에 서재를 훑었다. 책장 빼곡하게 들어선 책들을 살피며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사랑을 책임진다는 것.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것. 이것들은 그야말로 어렵고 험난한 길이다. 추할 때도 있고 고독할 때도 있다. 그러나 기적의 길이기도 하다. 이 고차함수의 길을 묵묵하게 관통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삶과 사랑과 사람은 동의어'라는 진리에 자신의 현존을 맡길 수 있게 된다. 부디 후배녀석이 뜨겁게 사랑하며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4. 육아
   최근 둘째를 많이 혼냈다. 둘째 특유의 심통기질이 최극단의 지점에 도달한 듯하다. 엄마와도 매일 전쟁을 치른다. 훈육은 엄마의 영역이지만 가끔 아이가 도를 넘어설 때에는 참지 못하고 개입하곤 한다. 인내가 부족했다. 부끄럽다. 물론 두 딸이 너무 예쁘다. 하지만 어떨 때는 한없이 밉기도 하다. 아이는 정말 내 맘대로 크지 않는다. 육아와 훈육은 부모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이미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으나 현실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난 아직 멀었다. 부족한 아빠다.

5. 구분선
   최근 객관과 주관의 철학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이 사람 저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사실과 주관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설정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어떤 사안에 대해 자기만의 주관과 견해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사실관계 자체를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명확한 사실을 자신의 주관적 구성물로 대체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몹시 불편하다. 그들은 사실에 관한 명확한 텍스트를 제시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한나 아렌트 식의 '악의 평범성'은 특별한 곳에 있지 않다. 우리 주변 곳곳에 내밀한 방식으로 숨어 있다.

   베이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기각한 논거는 바로 대전제의 오류였다. 대전제가 잘못되면 과정과 결론은 공히 거짓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다양한 건 좋은 것이다. 다양성에 대한 관용은 우리사회가 밝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분선'을 인정하지 않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에릭 홉스봄의 말대로 사실과 허구를 가르는 명백한 구분선은 존재한다. 개인이 분출하는 모든 형태의 다양성도 바로 이 구분선 위에서 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의견은 자유롭되 사실은 신성한 것이다. 고민은, 그 구분선을 지적하는 순간 관계의 균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부분이다.

6. 진정한 남자
   "진정한 남자는 열등감을 갖지 않습니다" 라디오에서 전여옥 작가의 말이 흘러나온다. 정치인은 정치를 그만둘 때 비로소 철이 드는 것 같다. 전여옥도 그렇고 유시민도 그렇고 현실정치를 그만두고 작가라는 지식인의 본업으로 복귀하면서 내공과 매력을 더욱 찬연하게 뿜어내는 듯하다. 한때 거침없는 독설로 주변에 생채기를 많이 남긴 전여옥의 말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혹적인 명언이다. 그렇다. 열등감은 남자의 본성과 양립하지 않는다. 결코 함께 설 수 없다. 형편없는 남자만이 열등감을 가진다. 남자는, 아니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열등하지 않다.

7. 고전 원서
   외국고전을 읽다 보면 작품과 문장이 너무 좋아서 그 나라 언어를 배우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원서로 읽고 싶은 욕망이 샘솟음치는 것이다. 대표적 언어가 독일어와 러시아어다. 나에게 독일은 괴테의 나라고 러시아는 톨스토이의 나라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독일어 원서로 <안나 카레리나>를 러시아 원서로 읽을 수 있다면, 딱 한 번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 인간의 타락이여. 바벨탑의 비극이여. 나의 무지함이여. 천성의 게으름이여.

8. 인간의 품격
   "품질은 결코 유행을 타지 않는다" 문화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말이다. 이 말을 인간에게 적용해서 다음과 같이 패러디해볼 수 있겠다. "인격은 결코 유행을 타지 않는다" 그렇다. 사람의 품격이란, 과거와 오늘이 없고 보수와 진보가 없다. 인격의 시제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훌륭한 인격은 신(神)을 닮아가는 거룩한 여정 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거추장스러운 형용수사로 정의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생이란, 선하고 겸손하게,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다.

9. 독서 권태
   요새 들어서 책읽기에 흥미를 잃고 있다. 책읽기에 권태가 생기니 자연스럽게 글쓰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간 많은 책을 읽어왔다고 자부하지만 독서를 통해 얻는 앎과 지혜는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생각이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는 지식이 있다. 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깎이고 떨어져 나가는 지식도 많다. 나이가 들수록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는 깨달음에 봉착하곤 한다. 그럴수록 책더미에서 해방되는 것이 참 지혜를 알아가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과 나 자신 사이의 적절한 긴장관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책과 지식을 떠나 사람과 신앙을 돌아보자.

  
   삶은 고되지만 참으로 역동적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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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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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영화 <오두막> 개봉을 기념해 소설을 다시 읽은 후 과거에 올린 서평을 수정 편집해서 쓴 것임을 밝힌다. 소설의 내용과 메시지를 감안할 때 전적으로 기독교 관점의 서평일 수밖에 없다. 읽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길 바란다.

 

   하나님을 안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여기서 '안다'의 의미는 인격적인 교제까지를 포함한다. 내가 언급하는 '하나님'이라 함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즉 삼위일체의 신神을 말한다. 여섯 살 때 교회에 속해 있는 유치원에 다니면서 하나님과의 첫 만남을 가졌다. 그후로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찬양을 부르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 또한 서리집사의 직분으로 교회에서 이런저런 봉사와 헌신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하나님에 대해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해 완벽한 인식이 가능하겠는가. 하나님은 온전한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성과 절대성을 실존 자체에서 본인 스스로 내재하고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력 부족은 비단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전세계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지금 이 순간 고민하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나는 한 가지 뚜렷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질문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며 인간의 행복을 원하시는 사랑의 신이라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악한 사람이 승리하고 선한 사람이 패배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이 발생하는 곳이다. 선과 승리, 악과 패배 사이의 방정식이 정방향이 아니라 역방향으로도 굴곡되어 펼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사회 곳곳에서 엄연하고 다양하게 일어나는 불가해하기만 한 '불공평' 혹은 '부정의'라는 테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내 신앙을 흔들어 왔는지 모른다. 선의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신단 말인가. 왜 선하게 사는 사람이 핍박을 받고 악하게 사는 사람이 승리를 한단 말인가. 이게 과연 공의의 하나님과 부합할 수 있는 일인가. 깊은 사념이 내 신앙을, 아니 어쩌면 우리 세계의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도전을 가해온 것이 사실이다.

   소설 『오두막』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당신은 어디 계신가요,라는 강렬한 문장을 띠지로 두르고 있는 이 소설은 악과 양립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본성을 매우 인상적인 방식으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작가 윌리엄 폴 영(이하 '윌리')은 자신의 첫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노련한 필력으로 개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소설은 윌리가 자신의 친구인 매켄지 앨런 필립스(이하 '맥')의 고백을 대필해나가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맥의 막내딸 미시가 캠핑장에서 유괴되어 살해된 사건을 통해 맥이 겪는 슬픔과 분노, 기적과 회복, 용서와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맥이 딸의 죽음을 현실적으로 확인한 '오두막'이라는 공간은 맥의 '거대한 슬픔'을 완전한 평화의 길로 인도하는 치환적 시공간이 된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결국 이 소설의 제목 '오두막'의 상징성을 내밀하면서도 함축적이게 하는 요인으로 드러난다.

   맥이 시각적으로 목도한 하나님의 형상은 기존의 인간적 상상력을 전복한다. 성부 파파는 흑인 여자의 모습으로, 예수는 중동계 남자의 모습으로, 성령 사라유는 아시아계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왠지 수염이 있고 연세가 있으며 백인의 형상을 띨 것이라는 쓸 데 없는 인간의 과도한 상상력에 조소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3차원 과학에서 조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시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상조차 불가한 존재다. 단 우리 삶 곳곳에 각기 다양한 의도와 모습으로 역사하시며 섭리하실 뿐이다.

   소설의 간절한 메시지를 단순화하자. 이 소설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인성人性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 관계성에 대해 깊이 있으면서도 밀도감 있게 접근한다. 주인공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인간 형상들은 하나님의 인성을 아주 잘 보여준다. 제도와 규칙이 아닌 관계를 통해 자신의 피조물과 호흡하려는 하나님의 성품이 이야기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 상처받은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위로를 건네려는 하나님의 수고를 '오두막'이라는 표상의 시공간적 장치를 통해 작가는 아름답게 녹여놓는다.

   작가는 하나님의 존재성을 삼위의 신으로 완벽하게 소개한다.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파파, 예수, 사라유는 그대로 성부, 성자聖子, 성령의 하나님과 연결된다. 세 위격이 하나의 실체인 하나님 이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의를 끌어내 한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길 원하는 신의 사랑을 구체적이고 진정성 있게 풀이한다. 오두막에는 삼위의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셨다. 서로 토의하고 기도하시며 맥의 구원을 성취시키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집요함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선연히 구분되는 고유특질을 드러낸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인간이 먼저 신을 찾아나섰다. 오직 기독교만 신이 먼저 인간을 찾았다. 갈대아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먼저 선택하셨고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을 먼저 찾아나섰다. 무엇보다 신의 차원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직접 들어오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집요한 인간 쫓기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와 사상이 종내 '사랑'이라는 거대한 선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고결함을 이끌어낸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다.

   오두막에서 맥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에 눈물을 짓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밀하고 실재적이며 파워풀하다. 악의 승리는 하나님 역사의 사실성에 대한 증거 불충분 요건이 아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악은 선의 결핍일 뿐이다. 하나님은 분명 맥의 딸을 살릴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는 분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 하셨다. 할 수 있음에도 할 수 없는 이 아이러니한 하나님의 고민은 철저히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인간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오게 될 때 비극이 시작된다. 몰이해에서 야기된 의심과 불신이 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구분짓는 지혜와 결단이 필요하다.

   인간은 신의 차원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절대 고차원의 하나님이 저차원의 인간을 향해 발산하는 사랑의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대하고 오묘하기 때문에 인간의 낮은 차원에서는 완전히 읽어내기 힘든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신을 이해하려 할 때 신의 차원을 전제하지 않을 경우 상당한 손실의 사유적 상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에 단언한다.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관계에서는 가깝고 차원에서는 멀다.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가 신과 인간인 것이다. 이 소설은 신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과 상치성을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통해 아름답게 들려줌으로써 재미와 감동을 모두 확보했다.

   이야기 전체적으로 소설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야기 자체도 감동적이지만 작가가 의도한 서사의 구조 또한 감동을 배가시킨다. 작가는 뒷 이야기를 통해 소설이 철저히 자신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픽션임을 고백한다. 맥은 실존인물이 아니며 모두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딸을 잃은 한 남자가 오두막에서 며칠동안 삼위의 하나님과 대면하여 지낸다는 이야기가 황당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기적은 믿음 안에서 현실이 된다. 작가의 가공인물인 맥의 고백을 작가 자신이 대필하여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이 소설이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도 부담없이 읽힐 수 있는 넓은 공간성을 확보하는 부분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상처를 받고 위로를 얻고자 한다. 인간의 고통과 신의 위로가 만나는 오두막이라는 상징적 공간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바로 그곳인 것이다.  

   어떤 소설은 별 다섯 개로도 부족하다. 『오두막』은 별 만땅으로도 호평이 차지 않는 소설이다. 감동적인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말 좋은 소설, 소름이 돋도록 감동을 주는 소설은 흔치 않다. 또한 이를 평가하는 잣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오두막』은 매우 잘 쓴,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아름다운 소설이다. '삼위일체'라는 기독교의 본질적이고 난해한 교의를 다양한 독자들이 받아들이기에 편안하고 부담없도록 상징화한 부분이 돋보인다. "상처와 치유라는 상반된 성질의 것이 결국 동일한 곳에서 치환된다"는 거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 깊은 감동의 모멘텀이다. 

   이런 소설은 혼자 읽기에 아깝다. 최근에는 영화로까지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치유를 선사하고 있다. 감동의 파장은 타자과 함께 나눌 때 지수적이 된다. 좋은 소설은 반드시 추천되어야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야 한다. 『오두막』은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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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vs 역사 - 책이 만든 역사 역사가 만든 책
볼프강 헤를레스.클라우스-뤼디거 마이 지음, 배진아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서점의 정문에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멋진 문장이 적혀 있다. 그렇다. 책은 인간의 지적활동의 산물이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수없이 많은 책을 만들어왔다. 좋은 책을 쓰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대단했다. 별 볼 일 없는 책은 기억되지 않고 사라졌다. 위대한 책은 읽고 또 읽히며 시간의 세례를 통과했다. 그래서 고전으로 남았다. 책이 사람을 만들고 시대를 만들었다. 책은 역사와 함께 했다.

   '책이 만든 역사, 역사가 만든 책'이라는 강렬한 부제를 달고 있는 볼프강 헤를레스(클라우스 뤼디거 마이 공저)의 <책 vs 역사>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50권의 고전을 소개한 책이다. 사후세계의 여행안내서인 <사자의 서>에서부터 J K 롤링의 <해리포터>까지 각 시대를 대변하는 여러 명저를 선정해 책에 얽힌 역사와 문화를 입체적으로 리뷰한다. 

   이 책의 강점은 천편일률적인 기존의 고전리뷰집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역사를 일반적인 구분법인 '고대-중세-근대-현대'의 네 시대로 나눈다. 각 시대가 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서설한 뒤 선정한 책들을 해설한다. 책 자체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각 책이 집필된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그 책이 끼친 영향에 대해 자상하게 서술한다. 각 장마다 틈틈히 들어선 사진과 참고자료는 저자의 서술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난잡하지 않은 교과서 형태의 인문서적을 만들어냈다.

   저자가 선정한 책들은 한결같이 인류의 역사를 빛내고 움직인 명저들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경전인 <성경>과 <코란>이 전면에 배치됐다. 수천년 간 동양사상의 뿌리가 된 공자의 <논어>를 수록해 동서양의 균형을 맞추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로 철학적 담론을 소개했고 괴테의 불멸의 소설 <파우스트>를 놓치지 않았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는 경제학을, 왓슨과 크릭의 <DNA의 구조>에서는 자연과학을 논했다. 저자는 정치, 과학, 역사, 문화 등 전 영역의 고전들을 두루 아우르면서 독자를 당시 시대의 한복판으로 이끄는 힘있는 서술을 펼친다.

   이 책에 수록된 50권의 책 중에서는 내가 읽은 책도 있고 안 읽은 책도 있다. 또한 내가 훌륭한 책으로 인정하는 책도 있고 그렇지 않은 책도 있다. 예컨대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선과 악이 지닌 힘과 검증과정, 즉 권력과 인간성에 대한 위대한 이야기를 어마어마한 판타지에 녹인 불멸의 소설이다. 반면 마오쩌둥의 <마오쩌둥 어록>은 그릇된 경제정책으로 야기된 기근과 대규모 정치테러로 무려 7,000만 명의 사람을 희생시키는데 사용된 지옥의 교과서다. 중요한 건 이러한 책의 양면성이 결국 현재의 우리사회를 더욱 밝게 빛내는 지적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책 자체가 훌륭하기 때문에 명저인 것이고, 후자는 책은 쓰레기지만 그것을 통해 명징한 역사적 교훈을 얻었다는 점에서 고전인 것이다.

   물론 이 책에 아쉬운 게 없지는 않다. 저자가 독일인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독일 고전이 많이 선정된 점과 인문·사상 분야의 책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점은 아쉽다. 문학의 비율이 현저히 낮은 점이 가장 아쉽다. 세계문학의 거대한 산맥이라 할 수 있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빠졌다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 <죄와 벌>과 <전쟁과 평화>가 인류 역사의 빛과 그림자를 만든 50권의 책에 포함되지 못할 작품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무너진 균형이 아쉽다.

   칼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마지막 태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해석해왔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이 다 옳았던 건 아니지만 그의 저 말 만큼은 진실이다. 그렇다. 지식은 반영과 해석을 넘어 변혁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참된 지식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가장 좋은 책은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책이다. 이 명징한 진실을 곱씹게 한 것만으로도 헤를레스의 <책 vs 역사>는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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