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자신이 시무하던 비텐베르크 성당 게시판에 "교회는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제로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이후 종교개혁의 불길이 전 유럽을 뒤덮었다. 신(神)은 더이상 교황과 사제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만인의 하나님이었다. 사람들은 활자로 인쇄된 성경을 읽으며 신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자기자신의 진본을 발견해갔다. 유럽 곳곳에서 개인에 대한 천착이 이루어졌다. 이후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 터졌고 서구사회는 근대로 진입했다.

   사실 종교개혁을 시도했던 사람은 루터 이전에도 존재해왔다. 대표적인 인물로 얀 후스(Jan Hus, 1372~1415)가 있다. 그는 루터보다 100년 앞서 부패한 성당을 맹렬히 비판하고 면죄부 판매를 비난해 로마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종교개혁은 비록 실패했지만 훗날 루터를 위시한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오늘날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 외에도 유럽 여기저기서 비슷한 외침으로 종교개혁을 외친 선구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후스와 루터를 갈랐던 것일까. 다시 말해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끈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주지하다시피 그건 바로 인쇄혁명이었다.

   후스 시대는 활자가 발명되기 전이었다. 필사의 시대였다. 모든 것을 손으로 써야 했다. 후스의 외침이 전 유럽에 퍼지지 못했던 것은 그것을 대중적으로 전달(전파)할 소통의 수단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터의 시대는 달랐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을 고안한 것은 15세기 중반이다. 반세기 사이 인쇄술은 독일 여러 도시에 꽤 확산된 상태였다. 다만 인쇄할 만한 거리가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인쇄업자들은 굶주렸다. 하지만 무명의 사제가 절대권위인 교황에게 맞붙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뉴스였다. 멈춰서 있던 활자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독일 전역은 물론 전 유럽에까지 확산됐다. 그외 종교개혁과 관련한 여러 논쟁들이 인쇄되었고 팔려나갔다. 유럽사회의 지력이 폭발했다. 거대한 지식의 향연이었다. 이제 유럽인들은 더이상 과거의 그들이 아니었다. 세상은 바뀌었다.

   시공간을 동양의 19세기로 돌리자. 일본 메이지 시대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라는 유명한 계몽사상가가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죽일 놈'이지만 일본에서는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일본 화폐 만엔 권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계몽을 촉구하며 "정신의 서구화 없이 물질의 서구화는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쓴 <학문의 권장>이라는 책은 당시 무려 300만 부나 팔려나갔다. 19세기 후반의 일본 전체인구를 3,500만 명 정도로 추산했을 때 열에 하나가 이 책을 읽은 것이다. 일본사회는 변화했다. 메이지유신은 조선의 갑신정변과 청의 양무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비록 방향은 옳지 못했지만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룩했다. 요컨대 메이지유신의 힘은 바로 책의 힘이었다.

   내가 장황하게 루터의 종교개혁과 메이지유신을 거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책과 활자의 힘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비단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사례 외에도 인류 역사상 책의 힘을 증명하는 예는 수없이 많다. 거꾸로 책을 경멸함에서 왔던 지난한 역사도 수없이 많다. 여기서 굳이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등을 거론하지는 않겠다.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분노와 짜증이 밀려오는 비극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국사회에 모택동을 높게 평가하는 일부 지식인들이 잔존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어떻게 모택동을 찬양할 수 있는가. 그야말로 미친놈들이다. 각설하자.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문자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책의 힘을 안 민족과 국가는 번영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쇠락했다. 

   뱌아흐로 영상문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모든 것이 영상으로 대체되는 '도상적 전회(iconic turn)'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 VR, 사물인터넷 등 시각적인 것을 강화(강조)하는 쪽으로 인간의 소통과 문화가 변화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고 영상매체가 가진 장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문자가 가진 본래적 힘은 영상의 폭풍 속에서도 반드시 괴멸하지 않는다.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의사소통코드는 오직 문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궁극과 본질에서 문자를 대체할 코드는 없다. 문자만이 가진 고유한 '구체성'은 영상의 메커니즘으로는 발현해낼 재간이 없다. 즉 영상은 문자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보완하고 수식하는 수단으로서만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사이의의 일차적 커뮤니케이션 코드는 문자다. 

   다시 종교개혁으로 돌아가자.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여기저기서 요란하다. 반대로 혹자들은 너무 무관심하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더 예민하게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이 비단 기독교(도)만의 것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종교개혁이 유럽과 전 세계에 끼친 영향을 감안한다면 이는 누구나 공부하고 공유해야 할 인류 보편의 자산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개인을 인식하게 됐고 그것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볼 수 있게 했다. 바로 거기에 '문자의 힘'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의 역사는 항상 문자가 전해준 역사였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책 한 권 쓰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과 정신은 제자 플라톤에 의해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작금의 우리가 3D게임과 아이폰X가 주는 희열에 열광하는 스마트족이라 할지라도 죽도록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책 좀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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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짧고 소설은 길다. 소설에도 급이 있다. 유독 거대한 소설이 있다. 여기서 '거대함'이란 단순한 분량보다는 '정신의 크기'를 말한다. 예컨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작품은 인류 문학사의 가장 위대한 금자탑으로서 읽어도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지만 그 독서과정이 전혀 지루하지 않은 기적의 소설이다. 등장인물의 수와 생명력, 서사적 흡입력, 시대를 관통하는 구심력, 심원한 주제의식과 독특한 작풍(作風) 등 그야말로 괴물과 같은 소설이다. 거의 모든 출판사의 세계명작전집에 반드시 들어가 있으며 다수의 사람들이 읽어본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 읽어본 사람이 드문. 좀 더 솔직히 말해 책 좀 읽었다는 자들이 최고의 책이라고 떠들 뿐 정작 읽는 이는 거의 없는 신비의 소설이기도 하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작년에 처음 완독했다. 허리수술을 한 뒤 집에서 요양하면서 읽은 것인데 아직도 그때 받은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sms다. 소설을 제법 빠르게 읽는 나에게 이 소설은 꽤 긴 호흡을 요구했다. 다 읽고 나서 날아갈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고 내 안에서 왜 살아야 할지를 새삼 의문하게 했다. 책의 막장을 덮은 후 멍하니 하늘을 응시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아직까지 서평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오직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 소설이 공유하는 거대담론에 대한 명확한 주관과 도스토옙스키의 의미심장한 세계관에 대한 차분한 견해가 아직 내 머리속에서 명징하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소설은 거대한 여운을 남긴다. 여운이 클수록 갈무리는 어렵다. 이는 세밀함이나 복잡함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세계의 크기'와 '의식의 확장'에 관한 문제이다. 작품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거대할 경우 스케일 자체에 압도되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애매해지게 되는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난이도가 만만치 않은 소설이다. 소설 앞부분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적 논쟁에 몰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가문 이름이 어려워서 메모해가면서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보다 분량이 상당하다. 민음사를 위시하여 거의 대부분의 출판사에서 세 권으로 출간했다. 읽기도 전에 책 두께에서 먼저 주눅이 든다. 수천 페이지를 넘기는 것 자체도 곤욕이거니와 소설 기저에 흐르는 신학적, 철학적, 사상적 맥락을 붙잡고 따라가는 건 여간 험난한 작업이 아니다. 평소 꾸준한 책읽기로 기본적인 독서체력을 확보하지 않고 장편에 대한 이해(理解)와 애착을 전제하지 못한 독자라면 이 소설은 읽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 인생의 마지막 소설이다. 그는 이 소설을 쓰다가 죽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유일한 미완의 소설이자 최후의 걸작이다. 완결되지 않은 작품임에도 이 소설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오직 문학성에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물간의 묘사와 갈등을 굉장히 섬세한 방식으로 그려냈는데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인간의 복합적 인격을 각각의 카테고리로 분류, 형상화한 것이다. 소설은 다양한 인간군상의 부딪힘 속에서 인간의 절대가치가 무엇이고 무너진 인간성의 회복을 신앙적, 실존적, 도덕적 선상에서 어떻게 완성해야 하는지 심오하고 묵직하게 담아낸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에서 인간을 진정한 해방으로 이끄는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그는 인간 자유와 양면적인 본성을 억압하는 대가로 경제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당대의 어떤 이념에도 반대했다. 그는 인간 영혼의 자유와 사랑, 그리고 부활에 대한 희망을 토대로 하는 신앙만이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진정한 힘이라고 믿었다. 소설은 미완으로 남아 주인공 알료사가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장면까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혹자들은 이 소설의 주제를 '신에 대한 탐색'으로 해석해왔고 또 다른 혹자들은 '악의 문제'로 규정해왔다. 고전 중 가장 토론적인 소설이다. 잔인하되 웅장하고, 추악하되 숭고하며, 기이하되 선명한 소설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적, 철학적 정수를 맛볼수 있는 실로 괴물과 같은 작품이 바로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소설에 대한 소개가 길었다. 정작 하고 싶은 얘기를 하자. 얼마전 '효리네민박'이라는 종편예능에서 가수 아이유가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장면이 방영되어 화제가 됐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취미로 삼아온 아이유의 입장에서 "책읽는 게 뭐가 그리 화제일까"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선술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문학적 무게와 심원성을 부인하지 못한다면 이십대 중반의 아이돌 여가수가 한가롭게 여유로운 자세로 이 소설의 책장을 넘기고 있는 모습은 단연 인상적인 것이라 하겠다. 나도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책과 관련한 그녀의 여러 에피소드를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왔고 진지하게 책읽기를 탐식해왔는지 더 많이 알게 됐다. 그리고 그녀의 음악성에 관한 관찰로 내 관심은 전도(확장)됐다.

   아이유는 상당히 노래를 잘 부른다. 가창의 기술뿐 아니라 표정과 감성에 있어 도저히 이십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특색있는 운치와 기풍이 그녀에게는 존재한다. 아이유의 음악은 시대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모든 노래는 시대를 안고 태어난다. 즉 노래를 듣고 부를 때마다 그 노래가 탄생한 시대의 감정과 겹쳐지는 것이다. 아이유의 목소리에는 그 시대를 '지금 여기의 시간'으로 끌고 오는 힘이 있다. '그 시대'와 '이 시대'가 아이유의 목소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포개지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감수성을 가진 이십대 가수는 많지 않다. 나에게는 아이유와 로이킴 정도다.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어떻게 그런 놀라운 감성을 가진 가수가 됐을까. 그녀보다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많지만 그녀와 같이 노래하는 가수는 드물다. 어린 나이에 시간과 목소리를 공명시키며 노래하는 가수는 극히 드물다. 그 나이에 얼마나 사람을 만났고 얼마나 세상을 경험했기에 그녀의 목소리에서 김광석이나 유재하에게서 느낄 수 있는 '무(無)'와 '여백'에 관한 공허한 감동이 느껴지는 걸까.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음악적 현상이 어떤 내적 본질에 기초하고 있는지에 대해 나는 깊이 사유했다.

   혹 독서 때문은 아닐까. 그녀가 읽어온 수많은 소설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과 부질없는 세계에 관한 탐구가 그녀를 높은 차원의 시간세계로 인도한 동력은 아니었을까. 책을 통해 여러 인간의 모습을 진지하게 탐색함으로써, 인간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특질의 긴장을 자신의 가슴속에 녹여놓은 게 아닐까. 어려서부터 아이유가 쌓아올린 책더미들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부여잡은 음악적 감수성의 연원을 찾아보는 건 지나친 오버일까. 내가 너무 나간 것인가. 아이유와 도스토옙스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조금 더 생각하면 제법 어울릴 수 있겠다 생각했다. 독서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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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의 심리학 - 아버지의 부재와 무신론 신앙
폴 비츠 지음, 김요한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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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는 좋은 책들이 많다. 시간의 힘은 강하다. 개인을 기준으로 한다면 독서는 항상 세월보다 앞선다. 인생은 짧지만 양서는 수없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단한 다독가라 할지라도 거대한 책더미 앞에서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책 중에서 보석과 같은 책을 만날 때는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길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것이다. 어딘가 구석에 숨어 있어 널리 읽히지 않은 책들 중에서 보물을 발견할 때만큼 큰 희열은 없다.

   폴 비츠의 <무신론의 심리학>은 보석과 같은 책이다. 인파가 없는 해변가 끝자락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진주 같은 책이다. 저자 폴 비츠는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로 무신론자들의 삶을 추적해보니 공통적으로 아버지에게 결함이 있다는 놀라운 논증을 시도한다. 부정적인 아버지상이 무신론을 향하는 정신적 토대가 된다는 것인데 저자의 여러 논거들을 훑는 과정은 상당히 재미있다. 출판사 새물결플러스에서 2012년에 번역·출간했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일차적으로 '아버지'와 '무신론' 사이의 연관성을 역사적 천착과정을 통해 논증한 데 있다. 니체, 흄, 쇼펜하우어, 러셀, 사르트르, 홉스, 포이어바흐, 프로이트 등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철학자들을 논증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책 속에는 대(大) 사상가들의 가정환경과 유년기의 기록과 증언이 생생하게 소개되어 있다. 저자는 신과 종교에 대한 비존재와 불필요성을 역설한 열세 명의 무신론자들의 삶을 추적한다. 그들이 아버지와 어떤 부정적 관계를 맺어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사상과 철학에서 어떤 방식으로 신을 기각하게 됐는지 힘차게 논증한다.

   저자는 반대사례인 '유신론의 심리학'도 함께 다룬다. 이는 무신론 철학자의 삶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저자의 주장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한다. 저자는 파스칼, 페일리, 윌버포스, 슐라이어마하, 토크빌, 슈바이처, 바르트, 본회퍼 등 위대한 유신론자들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꼼꼼하게 추적한다. 또한 '정치적 무신론자'를 별도로 추가했다. 희대의 독재자 스탈린, 히틀러, 모택동의 어긋난 권력의지의 기저를 파헤치고 그 태동에 파괴된 아버지와의 관계가 놓여있다는 것을 논증한다. 그 외에도 남성과 여성이 자신의 논리적 맥락 위에서 각기 다르게 반응한다는 점을 논증하기도 한다. 또한 예외사례(드니로)와 개인적 사례를 더해 논증의 넓이를 크게 확보했다.

   이 책의 주제는 간명하다. 신에 대한 이해가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심리학적 표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무의식적으로 신에 대한 부정을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의 파괴된 관계(부재, 결핍, 학대)가 유년기의 가정환경은 물론 훗날의 인격형성을 좌우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해소되지 않아 삶을 둥개고 인격이 고장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존재한다. 가정의 상처는 가정 외에서 치유받기가 대단히 힘들다. 현대 교육학과 사회학의 공통된 목소리다. 저자는 이를 무신론과 아버지의 상관관계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신(神)'이다. 커가면서 부모보다 더 큰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어린 시절에 교제했던 부모에 대한 잔상은 그 아이의 미래를 결정하는 절대적 전거이다. 아이의 내적 성품은 오롯이 가정에서 결정된다. 여기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보편적으로 어머니는 자식과 모생애적 친밀성으로 긴밀하게 맺어져 있다. 반면 아버지는 보다 독특하고 난해한 위치를 점한다. 어머니는 존재만으로 친밀하지만 아버지는 꼭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대개 아들에게 더 그렇다. 유년 시절에 아버지의 부재 혹은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로 자아가 굴곡된 이들을 나는 주변에서 수없이 봐왔다. 그들의 분노는 타자를 겨누고 사회를 향한다. 자신의 현존을 갉아먹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치유되지 않는다. 비극이다. 

   '다윗의 서재'에 자주 방문해온 이웃이라면 내가 '가정'이라는 공동체에 녹록지 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가정학을 공부했고 그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해왔다. 관련된 많은 책을 읽었고 주변 지인들과 여러 담론을 쌓아왔다. 나에게 있어 가정은 내 '양심'과 '신앙'과 '책임'을 하나로 집약시킨 단 하나의 천국이다. '가정 행복'이야말로 내 인생 성공의 절대 원칙이자 숭고한 증거이다. 이러한 나의 보수적 가정관은 대부분 기독교 신앙과 가정교육에 기인한 부분이 크다. 그러나 모호하거나 원론적인 선언에 함몰되어 있지는 않다. 이런 배경에서 이 한 권의책은 나에게 무척 소중하다.

   인간은 가정에서 만들어진다. 사회는 개별인간의 본성과 궁극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사회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바꿔 말해서 인간은 사회가 구원할 만한 싸구려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부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류사를 빛낸 여러 철학자들의 삶을 추적하여 여기에 대입해보는 연구는 굉장히 매력적인 주제이다. 그 수고의 연장선상에 이 책의 존재성이 놓여 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을 다루다보니 개괄적으로 짧게 훑고가는 방식으로 씌어진 점은 아쉽다. 제시한 거대담론에 비해 적은 분량도 아쉽다. 깊이와 디테일보다는 넓이와 개괄성에 초점이 맞춰진 책이다. 이를 감안하면 꽤 흥미롭게 읽을 만하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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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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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 국회의원이 대통령에게 책선물을 해서 화제가 됐다. 공중파에서 특정소설을 다큐멘터리의 소재로 삼는 경우는 드물다. 언론의 유별난 찬사도 익숙지 않은 풍경이다. 딸을 가진 아빠라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떠드는 지인의 권유가 제법 매섭기도 했다. 서점가에서는 '김지영이 하루키를 눌렀다'는 말이 들리기도 한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동시대 대중의 정서를 공유하는 책이라면 읽어두는 편이 낫겠다 생각했다. 한국식 페미니즘에 거리를 두고 있는 나에게 조남주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은 그렇게 들어왔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기 때문에 줄거리는 다루지 않겠다. 아주 짧게 요악하자면 82년생 김지영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82년에 태어난 한 여성의 성장스토리가 소설 이야기의 본류이다. 각 장은 시대별로 나눠져 있고 주인공이 특정한 연령에 도달할 때마다 당시의 시대성과 포개어진다. 암울한 인생의 현장이 추적되고 들추어진다. 소설 전체를 포괄하는 전제는 이렇다.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이라는 곳은 여성이 살아가기에 힘들고 좌절하고 공포스럽다는 것이다. 김지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과 외부의 시선에 놀라고 불평하며 좌절하는 인물이다. 그녀가 겪고 느낀 한국적 현실은 어둡고 침울하며 착잡하다. 디스토피아가 따로 없다.

   솔직히 얘기하자. 나는 이 소설이 왜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간 많은 문학작품을 읽어왔지만 <82년생 김지영>은 냉정히 말해서 평균 미달인 소설이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갖추어야 할 정형적인 측면에서 어설프고 형편없는 작품이다. 소설로서의 이야기적 흥미, 서사의 전개방식, 인물의 매력과 전형성, 인물간의 갈등구조, 보편적 담론을 이끌어내는 설득력 등 어느 것 하나 단단하거나 세련되 면을 발견하기 힘들다. 우리사회의 단면적 마이너리티를 오직 작가 주관의 연역적인 입장에서 조각하여 보편성의 담론으로 무리하게 연결짓는다. 그렇기에 작가적 주관을 제외하고는 소설의 모든 요소가 생명력을 잃고 허공을 멤돈다. 작가적 총론과 소설적 각론은 서로 조합하지 못한 채 어긋나고 균열된다.

   이 소설의 유의미성을 문학적 체계와 구조보다 메시지 자체에서 발견하려는 독자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메시지에도 문제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가 전하려는 주제는 일관적인데 비해 인물간의 갈등과 상황의 전개는 몹시 어색하다. 가장 큰 문제는 작가의 과한 설정 오류에 있다. 작가의 주제의식에 이야기의 파편이 강제적으로 짜맞춰져 있기 때문에 설득력을 잃은 무리한 묘사가 즐비하다.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성급하게 일반화했다. 작가는 단적인 사건을 일방적으로 보편의 함수관계에 등치시킨다. 또한 개별 인간의 문제를 남녀간의 대치적 상황논리로 대입한다. 작가의 독선적인 이분법은 소설 전체에 흐르고 있는 가장 고약한 전제다.

   작가의 편협한 상황묘사는 소설 곳곳을 빼곡하게 채운다. 가령 작중에서 김지영이 회사에 첫 면접을 보러가는 장면이 있다. 그날의 택시기사에 관한 묘사가 대표적이다. 첫 손님으로 여자를 안 태운다는 원칙은 그 택시기사 개인의 잘못된 성향이지 남자들의 문제는 아니다. 화장실에 몰카를 설치하고 이를 비밀스럽게 돌려보는 사무실 남직원들의 모습 또한 그렇다. 그것은 단순한 범죄자의 모습이지 일상에서 보편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설정이 아니다. 제일 가관은 소설 말미에 있다. 김지영이 유모차를 끌고 공원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주변의 30대 남직장인들에게 맘충이란 소리를 듣는 장면이다. 김지영은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전율하며 한탄한다. "내가 오빠 돈을 훔친것도 아니잖아.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장면을 배치한 걸까. 그것이 흔한 모습인가. 자연스러운가. 대부분의 여성들이 주변에서 쉽게 맞딱드리는 보편적 일상인가. 현실에서 만나기 힘든 극단의 예―혹은 특별한 사례를 작가는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남용했다. 각 장면마다 무리한 설정에 기대서 핍박받고 공포스럽고 좌절하고 혼란스러운 여성상을 이 시대의 보편성으로 부각시킨다. 작가의 오만한 작위성에 토가 나올 정도다.

   소설에 묘사된 여러 사례들은 개별적으로는 사실을 지적하는 기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개별이 하나의 총체적 사실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 김지영이 대한민국 모든 여자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지영의 일면은 공유할 수 있으나 김지영의 전체는 상당히 독특하기 때문에 보편성이 조각난다는 얘기다. 소설을 읽는 내내 김지영이라는 인물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종일관 불공평하다고 징징대는데 그렇다고 현실을 타파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현실에 순응하고 안주하면서 오직 불평과 포기로 일관한다. 80년대 이전생들 여성이 대부분 그렇게 산 것도 아니고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김지영이 이 나라 모든 여자를 대변하는 듯한 그런 억지스러운 태도가 역겹고 짜증난다. 오히려 작가의 지나친 작위적 설정으로 인해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김지영의 표상성은 힘을 잃고 소멸되어 간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이 소설에 공감을 갖는다고 한다. 그 공감을 무시하거나 기각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 공감의 디테일(내밀성)에 나는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그들 중에서 '진짜 김지영의 삶'을 산 이는 얼마나 될까. 김지영의 일면이 아닌 김지영의 전체, 즉 오롯한 김지영 말이다. 남자의 적은 여자가 아니다. 여자의 적도 남자가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이 세계를 함께 경영하는 평등한 존재로서의 주체자이지 서로간에 경멸하고 기각하는 대상이 아니다. 이 소설의 굴곡된 논리 때문에, 즉 작가와 같은 이분법적 선입견에 함몰된 세계관으로 인해 우리사회에 여혐과 남혐이 번지고 꼴페미와 한남충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서로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참으로 안타깝고 혐오스럽다. 

   삶은 누구에게나 힘든 것이다. 꼭 여자라서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고 힘들고 고단하다. 남자는 남자대로의 고민과 무게가 있고 여자는 여자대로의 고충과 번민이 있다. 양성평등은 만고의 정의다. 하지만 지나친 약자의식에 젖은 '피해자 코스프레 페미니즘'은 그 어떤 생산적인 것도 추출할 수 없다. 우리시대의 페미니즘은 오직 급진주의 여성해방론으로 일관해왔다. 세계의 여러 문제들을 '핍박받는 여성'이라는 용암으로 녹여버렸다. 남녀 사이의 이분법적 구도로 사회문제를 편재해왔다. 그래서는 곤란하다. 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이 힘든가. 이해한다. 그렇다면 전혀 다른 이유로 한국사회에서 남자로 살아가는 것도 힘들다. 그것도 함께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작가의 논리대로라면 '82년생 김정훈'도 우리사회 곳곳에 존재하게 된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본래적으로 고단한 것이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징징대지 말라.

   이런 편협한 소설에 나약하게 감상되어 세상을 삐뚤고 굴곡지게 바라봐서는 곤란하다. 그럴 시간에 가족을 구체적으로 사랑하고, 이웃과 성실하게 교제하며, 자신의 일과 여가에 열심히 땀흘리는 것이 보다 값지고 보람찬 일일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세상은 원래 추악하고 고단하고 가난하다. 생생한 삶의 한복판에서 천국이 없다고 투덜대서야 되겠는가. 루돌프와 싼타클로스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어른됨의 본질이다. 진정한 행복은 바로 이 사실을 용기있게 관통하는데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작가의 삐뚤어진 사고방식에 중심추를 잃어버린 <82년생 김지영>은 외연만 요란할 뿐 실상 고약하고 부족하고 불쾌하기 그지없는, 과히 형편없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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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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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철학에 관심있는 사람치고 러셀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드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20세기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의 하나다. 철학, 수학, 과학, 윤리학, 사회학 등 다채로운 영역을 탐구했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다. 살아생전에 40여권의 책을 남길 만큼 열정적인 집필가였다. 하지만 러셀에 대한 내 평가는 애증의 선상에서 출발한다. 솔직히 그의 사상과 저작들 대부분에 냉소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호도된 조롱, 뼛속까지 가득한 좌익적(무정부주의적) 세계관, 철학에 대한 성급환 주관화(일반화), 기존질서를 대하는 경박한 태도 등 내가 그를 멀리해야 할 이유는 많다. 그러나 무조건 까고만 볼 수 없는 학자로서의 '박력'이 그에게 있다. 특유의 파워풀한 문장력과 어마어마한 글쓰기력에 압도당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가끔 그것이 나를 헷갈리게 한다.

   러셀에 대한 내 호감을 단적으로 드러낸 예를 소개하자.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다. 네이버에서 주최하는 큰 규모의 어워드가 있었다. 각 분야별로 우수한 콘덴츠를 생산해낸 블로거를 선정하는 행사였다. 당시 나는 책리뷰 부문에서 우승을 했다. 시상식에서 나는 러셀의 말을 인용해 수감소감을 말했다. 러셀의 자서전을 인용한 것인데 그 내용은 상당히 유명하고 매혹적이다. 러셀은 그의 자서전의 서문에서 자신의 전 일생을 지배했던 세 가지 열정에 대해 고백한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다. 러셀은 이것들이 자기 삶에서 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책읽기'였음을 역설한다. 러셀의 이 말을 인용해 나는 수상소감의 절반을 채웠다. 요컨대 나에게 러셀은 보편적 부정과 일면적 긍정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복잡한 인물인 것이다.   

   러셀의 수많은 저작 중에서 나는 『행복의 정복』을 최고로 꼽는다. 가장 유명한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호불호가 갈린다. 철학책치고 재미있고 박력있는 문체로 유명하지만 러셀의 지나친 주관과 삐딱한 편견 때문에 철학전공자에게는 증오의 책이다. 하지만 『행복의 정복』은 그런 불편한 호오가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조롱을 당하긴 했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현재의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행복의 정복』은 보편적으로 두루 널리 읽히는 고전이 됐다.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수학, 철학, 과학 등 전문분야를 다루지 않았고 러셀 스스로 작정하고 쉽게 썼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 무엇보다 인간의 영원한 화두인 '행복'에 대해 20세기의 대학자가 논증한다는 점에서 많은 독자의 이목을 끌었다.

  
이 책이 활력있는 고전이 된 이유는 행복에 대한 저자의 태도에 있다. 러셀은 행복을 정복의 대상으로 본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약속된 미래가 아니고 노력해서 정복해야 할 것으로 규정한다. 행복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불행의 원인을 아는 것이 필수다. 러셀은 책을 크게 '불행의 원인(Causes Of Unhappiness'과 '행복으로 가는 길(Causes Of Happiness)'로 나누어 설명한다. 현대사회에 만연한 일반적인 불행의 원인은 어두운 인생관이나 세계관, 경쟁, 피로, 권태, 질투, 부질없는 죄의식, 피해망상, 여론의 횡포 등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타파하여 행복으로 이르는 길에 올라타야 한다고 힘있게 논증한다.

   행복을 가로막는 여러 원인들을 뭉뚱그리자면 그것은 바로 자기집착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몰입은 자아를 바깥 세계와 단절시키는 주요한 원인이다. 자기도취나 과대망상, 모두가 나만 미워한다는 합리적이지 못한 자기비하 등의 감정은 우리를 자기 안에 가두어 행복이 머물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러셀은 '나'에 대한 관심을 멈추고 되도록 외부 세계에 폭넓은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따뜻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한다. 마흔인 내가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한 방의 충격이 있는 통찰이다. 

   행복은 자기 자신의 문제이다. 동일한 환경인데도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고 불행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행복에 관한 성찰은 일상의 편린이 아닌 삶의 총체성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인생의 비루한 속성은 외면한 채 삶의 디테일 하나하나마다 행복의 공식을 적용하는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자신의 내면과 외연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부분을 전체로 확대시키는 것이다. 자아에 구속될수록 바깥은 보이지 않는다. 육신이 건강한 사람은 시선을 외부로 향한다. 결국 행복은 학습과 환경이 아니라 자아와 관점의 문제인 것이다.

   내 주변에는 자존감이 강한 사람들이 꽤 있다. 오래 사귄 사람들 중에도 여럿 있다. 자존감 자체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 자신의 현존을 엉뚱한 방식으로 공격하는 경우라면 곤란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눈쌀이 찌푸려진다. 이는 관계라는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는데 자기도취에 함몰된 사람은 타인과의 대화와 소통을 자아의 실존에 묶어두려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은 대화의 기결(起結)을 자기자랑으로 채운다. 하지만 내용은 빈곤하고 맥락은 부재하다. 뜬금없기도 하다. 정작 자기 자신은 모른다. 더욱이 나이가 한참 어린 후배들이 이런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걸 보면 안쓰럽다. 정말 안타까운 건 대개 그들이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나친 나르시시적 자존감은 열등감의 역설적 분출이라는 건 심리학계의 오래된 정설이다. 지나친 자기애를 불행의 본질적 요인으로 본 건 시대를 초월한 러셀의 통찰력이다. 

   행복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쟁취해야 한다고 역설한 점에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은 건강한 에세이다. 어떻게 보면 뻔한 내용으로 보일 수 있지만 대철학자다운 탄탄한 논리로 자신의 논증을 이끌어간다. 러셀이 책에서 제시한 여러 논거들은 백년 전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이다. 시공을 초월하고 역사를 꿰뚫는 통찰이 있다. 시중의 천편일률적인 자기계발서를 읽을 바에는 러셀의 행복론을 일독하는 게 훨씬 더 유익하다. 읽을 때마다 그 울림이 매번 다른 고전이다. 사상, 종교, 정치와 무관하게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보편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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