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지음, 이문재.김명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나에겐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빈약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친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외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의 인상착의 정도가 할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주변에 친구들이나 직장동료, 선후배들이 할아버지와의 생활이나 추억담을 얘기할 때면 상대성에서 오는 강한 부러움이 발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나이가 들어가는 것과 지혜를 터득해간다는 것은 어림 동의어로 간주할 만하다. 나 또한 29년의 인생을 살았지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몰랐던 인생의 깊이와 넓이를 배워가고 있음을 많이 느끼고 있다. 이 세상 그 어떤 교과서나 전공서적이 줄 수 없는 <삶>과 <경험>에서 오는 높은 차원의 <지혜>라는 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을 공경하며 그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샘에게 보내는 편지』는 할아버지가 자신의 손자에게 쓴 편지형식의 지혜담으로, 공고히 다듬어진 노년의 혜안을 두 세대를 넘어 전달하는 <삶>과 <지혜>의 목소리다. 여느 아이들과는 심히 다른 아이(저자의 손자는 자폐증 아이임)인 손자 샘에게 저자 자신이 겪은 사랑과 상실과 아픔이라는 인생의 깊이 있는 주제를 얘기해 주고 있다. 어린 샘은 세상 어느 누구한테도 쉽게 얻을 수 없는 노년의 혜안에서 오는 득도된 자의 지혜 덩어리를 자신의 할아버지로부터 얻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은 참으로 미묘한 특성이 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관련된 착각을 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적잖다. <스쳐 지나가는 것>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의 차이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지금보다 더욱 젊은 날에 삶의 혜안이 부족하여 <잠시>와 <영원>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채 <현재>라는 시간을 얼마나 무의미하게 소비했던가? 어른이 되어가면서 시간의 특질과 그에 대한 소중함을 더욱 깊이 알아가게 된다는 공식은 인생사 불변의 불문율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네 엄마 아빠는 과거의 고통을 미래에까지 가져가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샘, 너도 자라면 그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알게 될 거야. 과거에 매인 사람은 미래를 향해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단다.   <p20>

  66억의 인류가 지구라는 곳에 공존하고 있다. 다양하다는 얘기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서로간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 안에서 개인의 달란트를 극대화할 때에 그 사회는 진보하고 행복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different) 것>과 <틀린(incorrect) 것>을 혼동한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편견을 가진다. 더욱이 비판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런 편견과 비판이야말로 정말 틀린 것이다. <나>만 있는 것이 아닌, 그렇다고 <너>만 있는 것이 아닌, <우리>가 있다는 것. 나와 너,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존중하며 살아갈 때에 지구라는 집의 평수는 더욱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샘,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건 그냥 다른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 명심해라. 네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이 네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p33>

  인간은 많은 두려움을 갖고 살아간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내 본모습을 들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존재감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기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주위의 기대를 버리고 본래의 자기답게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 사람들은 이런 두려움과 싸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러한 두려움들이 우리의 내면과 영혼을 파괴시킨다는 것이다. 절대악인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두려움의 내포적 반의어인 <사랑>이란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 우주적이고 신성하며 자연스러운 존재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것이 신이든, 친구든, 부모든, 아님 사랑하는 이성이든, <사랑>은 반드시 <두려움>의 농도를 희석시킨다.
  나는 물속에 가라앉는 사람과 물에 뜨는 사람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가라앉지 않고 물에 뜨려면 물과 싸우기를 멈추고 물을 믿으면 된다. 몸에 힘을 빼고 누워서 물에 몸을 밭기면 되는 것이다.   <p67>

  적을 만들지 말라, 는 말이 있다. 대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일게다. 분명 좋은 말일테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에 100%의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싸울만한 가치가 있을 때에는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불관용, 거짓, 비정의, 비인권, 차별, 편견 등. 이런 것들과는 싸워야 한다. 인류 보편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들에 대해 묵과하고 비굴해하는 이들은 역겨울 정도로 싫다. 신께서 인간에게 <용기>라는 내면적 힘을 주신 이유는 반드시 써먹을 사용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용기가 없는 자들은 자기 자신과도 싸우지 못한다. 하지만 명심하자. 인류의 역사를 다시 썼던 수많은 위인들의 공통점은 바로 자기자신은 물론, 잘못된 것에 대항해 싸우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로 인해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적을 적잖게 만들었다는 것을.
  샘, 개인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 싸우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난 네가 너 자신을 위해서도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하지만 네 분노를 잘 다스려서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분노로,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에너지로 승화시켰으면 더욱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훗날 네가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네 손자 손녀들이 훨씬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자라날 수 있을 테니까.   <p199>

  마음에 넓은 그릇을 소유한 사람은 좁은 그릇을 소유한 사람에 비해 인생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 미국 부의 51.7%를 차지하고 있는 유태인들을 연구하는 석학들은 동일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유태민족 중에는 다분히 마음의 그릇이 큰 인물들이 많다는 것을. 넓은 마음에 나와 너와 우리를 품고, 더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우주까지 품으며 전진할 때에 역사는 다시 쓰여지는 것이다. 정치력, 경제력, 명예, 노벨상 등의 유태인들의 표상은 바로 그들의 유난히 <넓은 마음의 그릇>에서 연유했다는 것을 나는 심히 믿는다. 

  저자 고틀립 박사는 수많은 지혜의 이야기를 샘에게 전달한다. 아직 글을 읽을 수 있는 아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읽게될 샘을 기대하며 사랑의 마음으로 샘과 소통하려는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사랑으로 점철된 할아버지의 정신적 지혜의 유산은 두 세대의 기나긴 세월의 벽을 넘어 샘에게 반드시 빛을 발하며 전해질 것이다. 

  비록 자폐증으로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샘은 행복한 아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할아버지로부터 매우 소중한 지혜담을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샘이 자라서 이 책을 읽게될 때면 자기뿐만 아니라 세상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보낸 특별한 편지를 읽었다는 사실에 대한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보낸 할아버지의 편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도전을 얻고 감동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샘을 한 번 기억했다는 것. 비록 남들보다 언어가 더디고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 하더라도 그런 특별한 행복을 자기 인생의 조각으로 채우고 있는 샘은 분명 행복한 아이임이 틀림없다. 
 

내가 어두운 터널에 있을 때, 난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 터널 밖에서 어서 나오라고 외치며 출구를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기꺼이 내 곁에 다가와 나와 함께 어둠 속에 앉아 있어줄 사람. 우리 모두에겐 그럼 사람이 필요하다.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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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마키아벨리 군주론 서울대 선정 만화 인문고전 50선 1
윤원근 지음, 조진옥 그림, 손영운 감수 / 주니어김영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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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명저 『군주론』은 대극적인 평가로 양분되고 있는 책이다. 읽을 필요는 있지만 그 내용을 학습하고 수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책, 존귀하고 위대한 책이지만 극도의 위험성을 함께 내포하는 책이 바로 『군주론』이다. 본래 많은 분량의 책은 아니지만 내용이 작금의 시대상황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체 또한 지극히 건조하여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일전에 몇 번 끄적이다가 최근 주니어김영사에서 만화로 새롭게 출간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구독할 수 있었다.  

  비록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만화지만 유명한 고전을 다뤘다는 점에서 가볍지 않으며, 일반 성인들도 난해할 수 있는 내용을 만화로 쉽고 재미있게 재창조했다는 점이 이 책의 굵직한 존재감이다. 다섯 장의 큰 대제목으로 구성되었는데 어린 아이들에게 위험하게 읽힐 수 있는 점을 고려하여 1장과 2장에 안전망을 설치해 놓고 있다. 1장은 『군주론』이 어떤 책인지를 설명하고 있으며, 2장은 저자 마키아벨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설명한다. 결과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는 마키아벨리즘의 위험성을 최대한 고려하여 책이 쓰여진 시대상과 책이 쓰여진 동기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부정적으로 읽힐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마키아벨리즘은 매우 위험한 사상이다. 수단과 과정보다 결과가 우선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주의는 정치활동의 효율성과 신속성의 측면에서 솔깃한 주장임에는 틀림 없다. 하지만 정치의 목적이 종국에는 인간의 행복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많은 희생이 불가피하며 인권이 말살될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라는 점에서 쉽게 공감할 수 있음은 아니라 하겠다. 대한민국의 암울한 현대사도 이를 설명한다. 박정희를 위시하여 30년간의 군부통치는 경제발전이라는 절대적 결과물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바, 수많은 인권이 유린되었고 인류의 절대적 보편가치인 자유가 억압되었다. 경제를 발전시킨 공과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과과 역비례하여 공존한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양하지만, 적어도 공과 과에 대한 분석은 대부분 넓은 공감대 안에서 명확하게 정리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쯤에서 시대적인 차이를 목도할 필요가 있다. 『군주론』이 쓰여질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면 보다 부드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해의 공간이 생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핍했을 당시의 이탈리아는 주변 강대국의 횡포에 몸을 사리고 있었던 유럽의 삼류국가였다. 프랑스, 스페인, 독일의 희생자가 되어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는 허약한 국가의 표상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분열된 국가를 통일하고 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여망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절대 권력자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군주론의 형태 및 군주가 갖추어야 할 요건 등, 당대에는 생각하기 힘든 발군의 통찰력으로 『군주론』을 집필한 것이다. 

  시대적 차이를 초월하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 생동감 있게 말해주는 중요한 메세지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국가는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한 국가가 곧 행복한 국가이며, 강한 리더쉽이 국민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강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나는 전적으로 마키아벨리의 생각에 동의한다. 사실 대한민국의 반만년 역사는 대부분 약하기 그지 없는 역사였다.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침략과 약탈을 당한 약소국의 비애가 아직도 한민족의 유전자 속에 내재되어 있다. 지나친 패배주의와 군사독재시절에 대한 향수 등이 그것을 입증한다. 더욱이 최근 몇 년 간 계속해서 불고 있는 고구려 열풍은 한민족 역사상 유일했던 초강대국의 역사였기에 당시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의 발로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한반도 주변의 정세가 예사롭지 않다. 세계 제 2의 경제대국 일본은 우경화의 길로 한걸음씩 나아가며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듯 보인다. 러시아는 푸틴의 강력한 리더쉽 가운데 부국을 향해 나아가며 미국에 대항하고 있다. 인구대국 중국은 전 세계 자본의 23%를 빨아들이며 2008년 올림픽을 개최하고, 2020년에는 달을 정복한다는 야심찬 비전을 세워 시선을 우주로 향하고 있다. 그 사이에 낀 한국은 많지 않은 인구에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서 동족과 대치하여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고, 정치는 국민에게 시원함을 주지 못하고 경제는 미지근하기만 하다. 강력하고 믿음직한 리더쉽에 목마른 국민들은 금년에 실시될 대선에 앞서 많은 사유와 토론을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국민이 주인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마키아벨리가 생존했던 시절과는 모든 것이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좋은 지도자를 뽑아서 국가경영을 잘하는 데 있다. 국가를 굳건한 반석 위에 세워놓아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국가지도자의 절대명제이다. 작금의 대한민국국민들은 강한 지도자를 원하고 있다. 국민과 야당과 언론을 하나로 뭉쳐 국가적 에너지를 극대화하여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리더쉽. 그 강력한 리더쉽을 국민들은 여망하고 있다.  

  강한 나라와 강한 리더쉽. 이것이야말로 50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차를 넘어 『군주론』과 21C 대한민국이 동시에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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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을 역전시켜라 - 최윤희가 제안하는 이 시대의 성공학
최윤희 지음 / 여성신문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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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특별한 독서습관이 있다. 내가 구입한 책보다 남에게 선물받은 책을 먼저 읽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남이 나에게 선물을 하는 의도에는 여러 특질이 있을 것이다. 상대방의 독서기호와 책의 내용과 메세지를 고려하여 선물하는 것이 대체로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여기에 중요한 것 하나를 추가하자면 바로 <현재성>이라는 것이다. 책을 건네는 이가 나에게 건네주는 시간의 현재성은 결코 묵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상대방의 손을 떠나 내 손에 책이 들어온 시간과, 그 책이 내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의 갭이 멀면 멀수록 마음의 양식을 주고받는 행위에 대한 현재성이라는 시간가치가 퇴색될 수 있다는 우려때문이다. 내가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이로부터 받은 책을 나름대로 소중히 여기며 빨리 읽기를 원칙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뜻하지 않은 책이 손에 들어왔다. 지인에게 선물받은 것도 아니고, 이벤트로 당첨된 도서도 아니다. 이벤트에 당첨되었던 『바람이 흙이 가르쳐주네』를 흥미있게 읽은 후 쓴 서평이 인터파크 이 주의 우수 독자리뷰에 선정되면서 해당 출판사인 여성신문사로부터 감사의 의미로 『당신의 인생을 역전시켜라』를 받은 것이다. 여성신문사에서는 동봉된 편지를 통해 이 책이 자사의 스테디셀러임을 피력한 뒤 은근히 빨리 읽기를 독려하는 뉘앙스(?)를 풍겨주었다. 그리하여 <Right Now 정신>을 발휘하여 읽어야 할 수많은 책들을 뒤로 미룬채 한달음에 달려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인생을 역전시켜라』는 [절망하기보다 오히려 희망이라는 보석을 '캐'낸 사람들]이라는 책의 앞표지 문구가 말해주듯 절망 가운데서 좌절하지 않고 용기와 열정으로 새로운 삶을 영위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저자 최윤희는 자신의 고백을 전체 분량의 2할정도 할애하고 있으며, 나머지 8할은 지인들의 다양한 삶의 편린들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여성들의 힘을 믿는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과거 여성들이 가진 달란트는 유교가 만들어낸 습속과 남성우월주의의 영향 아래 잘 발휘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참여가 당연한 것으로 장려되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 뛰어난 것이 입증된 여성들의 논리&언어 능력과 섬세한 감성이 리드미컬하게 활동력을 갖고 우리사회에 침투할 때에 더욱 발전되고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은 자명하다.  

  저자 자신을 위시하여 소개되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역경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작고 크게 승리한 삶을 살았다. 이혼, 사별, 남편의 사업 부도, 건강의 문제 등 생각지도 않게 쓰나미처럼 덮쳐버린 인생의 순간에서 그녀들은 충분히 <강>했고 훌륭히 <승리>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완벽하게 소외계층을 벗어낫다고 할 수 없는 여성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그녀들의 인생 역전담을 박수와 경외로 상찬하는 데 전혀 인색할 필요가 없다 하겠다.  

  한 가지 지적하고픈 부분이 있다. 저자는 개구장스런 문체로 활력있고 열정적으로 인생을 역전시킨 여성들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 저자가 대변하는 대부분의 내용이 좋았지만 한 가지 거슬리는 저자의 관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가 남성을 바라보는 안목에서 다분히 강성적 페미니즘을 목도했다. 여성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상찬하지만 남성에 대해서는 비아냥거리는 표현의 문구가 적잖다. 57페이지에 실린 저자의 주장을 보자.

  사회적으로도 여성의 힘은 절대적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씨랜드 사건에서도 이장덕이라는 여성이 없었다면 아마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은 채 흐지부지되었을지 모른다. 신창원 사건에서도 역시 최은이라는 여성이 없었다면 그렇게 신속하게 해결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지금 우리나라를 한번 보자.
  남자들에게 맡겨놓은 우리나라의 모습은 참담 그 자체다. 입으로는 개혁입네 사회 정의입네 떠들어대면서 과연 그들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가.   <책 내용중, p57>

  과거 몇몇 사건에서 드러난 여성의 활약이 사회적으로 여성의 절대적 힘을 대변하는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최근 불거진 신정아씨 사건을 논거로 '역시나 여자들은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과 다른 것인가? 더욱이 작금의 대한민국 사정을 거론하며 <참담>하다고 평하는 저자의 주장에는 강한 거부감이 발생한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절대로 참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 세계 어느나라와 비교해도 꿀릴 것이 없는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식민지배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세계 최빈국이 불과 몇 십 년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기까지 희생하며 승리한 남자들의 존재감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더욱이 GDP 2만불을 넘어 3~4만불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사회적 일렁거림을 <참담>하다고 표현하며 남자의 탓으로 돌리는 저자의 안목은 좌정관천이요, 정저지와의 극치를 보여준다. 

  19세기 여성의 인권회복을 기치로 등장한 페미니즘은 본래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들어 페미니즘의 색깔이 변색되고 성향이 무서워지고 있다. 어느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의 존재감을 부정하며 여성의 절대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남성과 여성이 본래 동등하며 평등하다는 인류 보편의 이상과 상식을 넘어선, 여성우월주의라는 또다른 역발상적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본질과 비본질의 우선순위가 뒤바뀐 이러한 행태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가 없다. 간간이 책에서 남성을 바라보는 저자의 경향을 목도하면 다분히 여성우월적이며 여성주권적인 냄새를 강하게 느낀다. 절대 공감할 수 없다는 얘기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라는 속담에 저자는 심히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듯 하다. 세 번에 걸쳐 인용하면서 암탉이 울어야 집안이 잘된다는 의미로 수정하여 인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윗속담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대에서 결코 맞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저자가 위의 속담을 반박하는 논거가 수준미달이다. 암탉이 우느냐 울지 않느냐의 문제는 비본질이다. 본질은 <어떻게 우느냐>는 것이다. 나는 저자보다는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내 앎과 이상과 가치관의 기준에서 확신하는 나름의 진리가 하나 있다. 여자의 <지혜>는 자신을, 가정을, 국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을. 우냐 안우냐의 문제가 아닌 어떻게 우느냐의 문제. 그것이 본질이다. 

  내가 지적한 저자의 페미니즘적 성향에 대한 반박이 책 전체의 존재감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저자의 남성관에 대해 일부분만 보고 성급하게 일반화하여 반론하는 것일 수도 있을게다. 책 전체의 내용이 주는 풍성함의 색깔은 충분히 역동적이며, 충분히 유머스럽고, 충분히 힘이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인생의 IMF에서 열정과 도전을 갖고 희망찬 삶을 살았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는 오롯하게 감동적이며 경외스럽다.  

  여성은 위대한 존재다. 침묵적이며 수동적이기보다 자신과 가정과 사회에서 적극적이며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을 나는 지지한다. 단! 또다른 위대한 존재인 <남성>을 존중하며 함께 나아갈 때, 라는 전제 앞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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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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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흙이 가르쳐주네 - 네이버 인기 블로그 '풀각시 뜨락' 박효신의 녹색 일기장
박효신 지음 / 여성신문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몇 주 전 금요일 철야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어머니를 승용차로 교회까지 마중나간 적이 있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우산을 챙기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배려였다. 차를 타고 오는 길에 어머니는 포도가 드시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야밤에 무슨 포도거니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평소 포도에 대해 심히 경도된 어머니를 인식할 수 있었다. 엄마는 왜그리 포도를 좋아해?, 라고 질문했다. 어머니의 답변은 내가 얼마나 도시생활 속에서 과거의 추억을 잊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니 어미가 포도 과수원집 딸이라는 것을 몰랐더냐?" 

  그랬다. 어머니는 대전시(그 당시 대전은 광역시가 아니었음) 유성구 반석동의 과수원집 딸이었다. 외갓집은 내가 어렸을 적에 동네에서 가장 큰 과수원을 운영하는 부호였다. 여름방학이 되면 외갓집에 가서 과수원을 구경하고 포도도 먹고 시냇가에서 수영도 하고 올챙이도 잡으면서 삼촌들과 자연을 만끽하는 것이 낙이었다. 하지만 내가 중학교가 되기 전, 외가집 근처에 군사기밀건물이 들어서면서 과수원은 사라지고 마을 전체가 아랫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과수원과 시냇가의 추억은 내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졌고 성인이 된 작금에 이르러서는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던 것이다. 정말 아름다운 추억인데 말이다.  

  『바람이 흙이 가르쳐주네』를 읽었다. 한 여성의 농사꾼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억 대 연봉을 받는 능력있는 중년여성이 대도시 서울을 탈피하여 순수 자연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용기와 결단에 심히 놀랐다. 충청도 예산에 내려와 직접 농사를 짓고 인간냄새를 맡으며 살아가는 저자의 모습이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으며 살아야지, 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정작 지긋한 연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단하는 이들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머리 속에 그리는 미래의 꿈과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환경, 그리고 자신의 열정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대도시 서울을 한 번 쯤 떠나고픈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서울>이라는 곳은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며 세계적인 대도시로 발돋움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수도이기도 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부작용도 적잖은 공간이기도 하다. 도시인들의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등의 모든 감각은 서울이라는 경직되고 인공적인 대도시의 환경에 맞춰져 있다. 시간 또한 철저하게 비지니스 아워에 맞춰져 있어 경제적 극대화만이 추구된다. <삶>이 아닌 <비지니스 아워>를 살 때에 자연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경제적 시계만이 우리를 지배한다. 이러한 곳을 탈피하여 순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 누구나 한 번 쯤 사유했을 만한 주제리라. 

  사계절 모두 각기의 맛이 있지만 저자는 가을이라는 계절에서 많은 풍성함을 얻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을>이라는 책의 소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농사꾼으로서 매년 풍성한 소출을 안겨주는 가을이 좋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리라. 봄, 여름에 농사지은 것들을 대부분 가을에 거둬들이니 땀흘린 대가를 확인하는 성취감과 기쁨은 두말할 나위 없으리라.  

  나 또한 개인적으로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 봄은 미지근해서 싫고, 여름은 더워서 싫고, 겨울은 추어서 싫다. 하지만 가을은 시원하고 아름다워서 좋다. 단풍의 계절이자, 천고마비의 계절이자, 남자의 계절이자, 고독의 계절이자, 무엇보다 독서의 계절인 가을. 사계절이 뚜렷한 대한민국에 태어나 1년의 정확한 사등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을을 완벽하게 누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과 조상들께 어찌 감사할 수 없으리요! 

  저자가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올 때 다짐한 세 가지 항목이 흥미롭다. 
  더 이상 인연은 만들지 말자.
  더 이상 미워하지 말자.
  더 이상 가지려 하지 말자.
사랑, 미움, 욕심.. 인간을 인간되게, 혹은 비인간되게 하는 인간사의 가장 큰 이슈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오랜 기간의 대도시 생활을 통해 위의 세 가지가 얼마나 자신을 번뇌케했는지 고백하고 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수많은 인연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상처가 발생하며, 사람을 미워하면서 마음의 그릇이 작아지기 일쑤며, 채우고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심들로 인해 정신이 얼마나 피폐해지는가? 하지만 저자는 자신이 다짐을 하게 된 원인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사랑과 미움과 욕심은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즉 공간의 문제가 아닌, 철저한 자신의 문제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어느 곳>의 문제가 아닌, <어떤 생각>의 문제. 인간을 번뇌케 하는 것들의 상당한 분량은 바로 자기 자신에서 연유한다는 깊은 통찰을 저자는 자연 속에서 깨닫고 있다.

  우리가 대도시의 생활에 지루하고 지쳐있음을 느끼는 이유를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은 까닭이 아닐까? <결핍>의 문제가 아닌, <지나침>의 문제가 아닐까? 필요치 않은 것의 범람과 소소한 것에까지 경제적 대가가 필수불가결한 대도시와는 달리, 꼭 필요한 것과 있어서 나쁘지 않을 것에만 노출되는 <시골>의 매력이 저자의 시공간을 그리로 옮겼을지도 모른다.

  대도시 서울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세계적인 경제도시로서 분명 살기 좋은 곳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필요치 않은 것들이 너무 많다. 그것이 사람을 지치게 한다. 또한 <경제적 극대화>가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고 있다는 점도 삶을 번뇌케 한다. 왠지 모를 원초적이고 인간적인 냄새가 그립다. 순수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땅에서 느낄 수 있는, 바람과 흙이 가르쳐주는 웅숭깊은 맛과 향기. 그것이 그립다! 
 

[인상깊은 구절]
우주의 시간표는 약속된 시간을 어기지 않는다.
예정되어 있는 시간에 싹이 나오고, 예정된 시간에 정확하게 열매를 맺는다.
요즘 나는 자연의 시간에 내맡기는 법을 배운다. 뿌리고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운다.
아무 말이 없는 땅, 그러나 참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땅...
<책 내용중,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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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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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 - End of Pacific Series 2
오소희 지음 / 에이지21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여행이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보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여행에 대해 이만큼 명확하고 본질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말이 어디 있을 수 있을까? 여행의 외연적 의미에서부터 내포적 본질에까지 아우르는 깊은 통찰적 정의라 할 수 있는 명문장이다. 어린 아들과 함께 세계의 오지를 탐구하는 여행가이자 블로거 오소희씨는 자신이 있던 자리를 떠나서 자신이 있던 자리를 깊이있고 냉철하게 보기를 좋아하는, 바로 그런 여자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로 처음 만난 그녀의 여행수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세 살 배기 어린 아들을 데리고 한 달동안 터키의 오지 곳곳을 수색(?)하고 다닌 점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 여느 여행서적과 달리 여행에 대한 물리적이며 기술적인 설명 외의 웅숭깊은 삶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여행수기는 그저 다른 나라의 지리와 문화를 둘러보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우주 탐구를 보여준다. 그녀의 독특한 여행세계에 책을 통해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서 어느새 그녀의 팬이 되어 버렸다. 매일같이 그녀의 블로그에 들어가 새로운 흔적을 확인하지 않으면 좀이 쑤실 수 밖에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러한 팬의 입장에서 이번에 출시된 그녀의 두 번째 신간은 내 머리속의 도파민과 베타-엔도르핀 호르몬의 분비량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읽기가 예약되어 있는 적잖은 도서들에 새치기하여 우선 구독하는 것을 손쉽게 결정하게 했다.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 는 전작에 비해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사진이 상대적으로 많이 실렸고, 설명보다는 시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많다. 총 분량이 대략 300페이지 정도의 평범한 두께지만, 사진은 많고 글자는 적어서 완독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완독을 한 후에 느낀 것이지만, 라오스가 갖는 소박함과 안정감, 고즈넉함과 모자람 등을 표현함에 있어 장황한 설명보다는 어쩌면 짧고 간결한 글귀들의 시적 표현이 더 어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의 의도와 내 느낌이 부합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 속에 빠져 들어 읽었다는 점에서는 전작과의 차이가 없다고 하겠다.  

  라오스가 어떤 나라인가? 연간 3억불의 원조를 받는 세계 최빈국으로서 초등학교 수료율은 41%, 15세 이상의 문맹률은 43% 수준인 극도의 후진국이다. 유럽이나 미주여행이 해외여행의 교과서가 되어가고 있는 한국의 해외여행기호에서 라오스라는 국가는 쌩뚱맞은 선택일 수 있다. 그곳에서 과연 무엇을 보고 배울 수 있는가?, 라는 냉소적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저자가 언급한 여행의 목적과 동기에 철저하게 배치된다. 여행이라는 스승을 통해, 삶에 대해 더 낮아질 것을 배우게 되며, 엎드려 고개를 숙이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는 것이 저자 오소희씨의 여행철학이다. 낮추면 보인다는 것이다. 
지독하게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는 언제나 더 이상 내가 나를 낮추고 있지 않을 때였고, 스스로 그 직립이 피로할 때였고, 피로함으로 인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중에서> 

  라오스는 매우 조용한 곳이다. 시간의 속도가 더디게 흘러가는 곳이다. 바쁘지 않고, 바쁠 이유가 없고, 바쁨이 무언지도 모르는 곳처럼 보인다. 풍선이라는 작은 놀이기구 하나에도 새로움을 느끼며 흥분하는 아이들, 주고자 하는 돈과 받으려 하는 돈의 높낮이가 상하로 출렁거리는 최소한의 경제적 행위에도 익숙지 않은 시장상인들, 두 시간에 한 번씩 고장나는 버스를 타며 몇 시간을 이동해도 서두르거나 조급해 하지 않는 사람들, 상대방이 준비되지 않을 때 자발적으로 물러날 줄 아는 사람들, 개와 고양이까지도 조용하고 착한 그곳.. 라오스는 바로 그런 곳이다.  

  라오스의 남쪽과 북쪽의 지방색이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이 흥미롭다. 남쪽에 비해 북쪽에 대도시가 많고 경제적 활동이 활발하다. 한결같이 순수하고 고요함에 가득차 있는 남쪽 지역과는 달리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원하는 것보다 원하지 않은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사반나켓은 여행자가 봉이 될 가능성이 있는 곳이며, 수도 비엔티엔은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좋지 않은 곳(?)이다. 제법 북쪽에 위치한 방비엥이라는 작은 마을은 사랑하는 자와 싫어하는 자로 여행객들이 양분되는 두개의 얼굴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자연과 볼거리, 할거리들이 적잖은 방비엥이 해외의 수많은 배낭여행가들의 침범으로 인해 그 영혼을 잃어가는 모습은 씁쓸하기만 하다.
쏭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석회 카르스트 가운데 위치한 이 작은 마을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둘로 나뉜다. 이곳을 사랑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p170> 

  역시나 저자의 자녀교육은 철저하다. 축구공을 강력한 소통의 무기로 들고간 중빈이는 남부 시골에서 그곳 아이들과 쉽게 축구를 하며 교제를 이룬다. 하지만 라오스 4대 도시 가운데 하나인 사반나켓에서는 중빈이의 축구공에 신기해하는 아이도, 관심을 가져주는 아이도 없다. 내가 놀 수 있는 아이는 없어, 라며 결론 짓는 중빈에게 저자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뒤 자전거에 몸을 실은 채 자리를 비켜준다. 용기내어 말을 걸어보고, 축구공을 굴려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이다. 중빈의 얼굴에 울기 직전의 모습이 역력하지만 저자는 자녀의 사회성 학습에 절대 개입하지 않은 채 관찰자로만 일관한다. 중빈의 접촉 시도와 상대방의 무시가 반복의 반복을 거듭하던 끝에 아이들중 나이 많은 여자아이의 종용으로 축구공은 중빈과 아이들 사이를 오가게 되고 사회성 학습은 성공으로 마무리 짓는다. 무려 1시간 30분의 지리한 긴장감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의 힘으로 멋지게 성취한 중빈에게 돌아온 면류관은 엄마의 안아줌과 "JB!", "JB!" 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환호성이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생김새를 지닌 공동체 속으로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침투한 중빈의 용기와 인내, 그리고 그것을 이룬 성취감은 훗날 그의 당찬 미래의 보증수표가 될 것임을 믿는다.
아이가 해낼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부모의 무지이자 욕심이다. 그러나 아이가 해낼 수 있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부모의 무능력이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중에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왜 그토록 그녀의 여행수기에 매료를 느끼는 지를 말이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나의 독서 기호와 그녀의 여행 목적이 완벽하게 부합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문학을 위시한 다양한 장르의 도서를 읽는 내게, 독서는 인간 탐구의 또다른 성격의 학습으로 정의된다. 책 안에서 다양한 인간상들을 만나면서 인생과 사랑 등의 다양한 삶의 본질적 가치들을 목도할 때면 내 전두엽은 활발하게 작동하고 내 마음속의 감성량은 충만하게 흘러 넘친다. 그녀의 여행에세이도 철저하게 인간과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자연경관의 웅장함이나 문화재의 화려함보다는 나와 다른 너에 대한 깊은 천착을 거듭한다. 특별하지 않아 놓치기 쉬운 소소한 것에서 대단한 것을 이끌어 내며, 보편적 정서와 상식을 뒤엎어 한단계 높은 차원에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기도 하며, 아무 생각 없이 동일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약간 다르게 봄으로써 우주의 이치를 멋지게 해석하기도 한다. 깊은 사색에서 오는 주옥같은 언어로 정제된 독백적 문장들. 내가 그녀의 글귀를 좋아하는 이유다.  

  한 명의 애독자로서 앞으로 저자의 후속 신간들이 봇물 터지길 기대한다. 저자의 신간이 늘어나고 책의 판매량이 증가할 때마다 중빈이의 지성과 감성의 수치도 지수적으로 증가하길 축복하는 바이다. 

 

[인상깊은 구절]


현명함이란, 가진 것에 시선을 고정시킬 때 찾아온다.
그러나 시선을 제대로 고정시킬 수 있는 힘은
세상에 널린, 내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들을
오랫동안 두루두루 바라본 뒤에야 얻어진다.
젊음과 현명함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p242>
 
남자들은 사랑을 <한다>.
면도를 <하고> 사업을 <하고> 산책을 <하>듯.
그러나 여자들은 사랑에 생을 건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녀의 전부가 <된다>.
호흡을 하고 걸음을 내딛는 순간순간이 사랑과 결부된다.
사랑이 있는 여자와 없는 여자는 같은 여자여도 다른 여자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게 진화되어 왔다.
일단 사랑에 빠지면 다른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도록.
오직 사랑하는 대상만이 존재하도록.
그렇게 진화되어 오직 않았다면
유난히 긴 양육기간을 필요로 하는 인간은
더러운 기저귀를 떼기도 전에 모성으로부터 버림받았을 것이다.
<p243>

모든 소망에는 그것을 높게 하거나 낮게 하는 장애가 있다.
생의 절반을 지나 엄밀하게 생각해 보니.
소망을 이룰 때까지
모든 장애는 단지 변명의 크고 작은 다른 이름이었다.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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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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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9-05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누르고 가요, 다윗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