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FTA에 버닝하게 된 데에는 무척 많은 우연이 작용했다.
우연 1> 인의협에 우연히 가입했다.
학생때도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는, 수련 마치고 대전에 내려와 조용히 개업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운동권 대신 중학생때부터 지속해온 자원봉사 활동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인의협 회원인 의사와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활동하는 자원봉사 동호회와 그 원장이 활동하는 인의협에 서로 교차가입하기로 한 것이 가입 동기이다.
인의협 회원을 존경한다고 하신 ㅁ 님께는 죄송하지만, 나의 가입 동기는 이렇게 별 게 아니었다.
우연 2> 게시판에 '나 영어 할 줄 안다' 고 농담으로 댓글을 달았다.
의대 다니면서 모두들 그 많은 원서를 읽었을테고, 당연히 다들 영어 조금씩은 할 줄 아는 것인데,
의사 단체인 인의협 게시판에 "나 영어 할 줄 안다." 는 뜻의 댓글을 달았다.
내 말은 그냥 남들 하는 만큼? 혹은 약간의 기본 생활영어 free talking이 된다는 뜻이었다.
물론 농담이었고, 사람들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게 결정적으로 엮이는 계기가 될 줄이야!
우연 3> 영어 한다면서~~~ 이것 좀 번역해줘.....
그 댓글을 달고 나서 한참 후, "영어 한다면서...." 라는 말과 함께 번역 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난 분명히 '생활영어'를 말한 건데, 떨어진 일은 딱딱한 논평이나 성명서의 영역, 혹은 외국 단체에 메일 보내기 같은 일이었다. 이제와서 하는 이야긴데, 처음에 메일 쓰는 서식조차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메일 하나 쓰려면 반나절씩 끙끙거렸다.
당시가 2001년경이었는데,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의 약가 (한달 약값 300만원!) 때문에 시끌시끌했었다.
제약회사 본사에 항의서한 보내고, 다른 NGO들에게 연대를 요청하는 메일 보내는 등의 일이었다.
우연 4> 세계보건포럼에 참가 신청 메일을 보냈더니, 발제를 하란다.
2003년 초에 인도에서 열린 세계보건포럼 내용이 아주 잘 짜인 것 같아서 참가 신청을 했더니,
"너네는 무슨 활동을 하니?" 메일이 왔다.
"우리는 이라크도 갔었고, 글리벡 때문에 싸웠다" 답장 했더니
"그럼 와서 그 두가지에 대해 발제좀 할래?"라고 초청장이 왔다.
허걱, 국내 학회에서도 발표를 안해봤는데 영어로 발표하라구? ㅡㅡ;;
모.... 말보다는 비쥬얼로...... 사진 많이 넣어서 발표 했다.
이때 처음으로 모 단체의 '국제 연대 담당'이라는 명함을 쓴 것 같다.
언듯 거창해 보이는 이 직함은 실은 명함을 만들면서 급조된 것인데, 어느덧 몇년 째 이 직함으로 굳어지고 있다. 공공기구와 달리 어느정도 유도리가 있는 NGO라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우연 5> 또다른 연대 요청 메일에 국제 회의 초청 답장이 옴.
2004년에는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가 가능하게 특허법 조항을 개정하는 것과 관련해서, 연대메세지 좀 보내달라는 메일을 돌렸었다.
이때쯤에는 KFHR라는 우리 단체 영문명이 그들에게도 익숙했는지 몰라도, 뜻하지 않게
"WTO/TRIPS 와 의약품 접근권"이라는 회의에 초청되어 남변리사와 함께 다녀왔다.
그 회의는 아시아 지역의 보건의료단체, 강제 실시 경험이 있는 국가의 관리, 제약산업 관계자들, MSF나 WHO의 관계자들이 모여서 WTO와 TRIPS의 문제점들, 도하 선언과 830결정에 나타나는 유예 조항들을 어떻게 최대한 이용해서 의약품 접근권을 확대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다. R&D fund의 개념을 처음으로 접한 것도 이 회의에서였다.
참가자들 중에 가장 아마츄어였던 나는 법률 공부를 한 적이 없는데, 그사람들 대부분은 변호사 혹은 변리사, 혹은 많은 정책 입안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도하 선언 paragraph 6가 어쩌고, para 6의 제 몇항이 어쩌고, 무슨무슨 법의 삼십몇 조 몇항이 어쩌고..... 하는데, 같이 간 남변리사마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으아~ 나만 제일 모르잖아~~ ㅡㅡ;;
가기 전에 나름대로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도 이야기들이 머리 속을 빙빙 돌다 새나갔다. (거기 다녀와서 열받아서 통번역 사전이니, 옥스포드 영문 법률 사전이니, 그런 책들을 사들였던 것 같다. 최소한 법과 관계된 기본 단어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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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험들과 몇번의 보건포럼을 준비하면서 접한 사실들이 모이다보니,
WTO나 FTA가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힘의 논리로 진행 되고 있고,
이는 우리의 일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고, 제삼세계에는 재앙에 가까운 충격을 주고 있었다.
다국적제약회사들( 그리고 몇몇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경험은 그 이전부터 가져왔던, 무언가 전세계적인 '시스템'에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고민해왔던 것,
환경적으로나, 삶의 질로서나 바람직 하지 않은 방향으로 돌진해 가는 시스템이라는 것,
선진국이나 개도국에 관계 없이 개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경쟁으로 내몰리는 상황이라는 사실 등과 겹쳐서 이 주제를 한층 심각하게 보게 되었다.
그런데, 돌연 놈현이 미국과 FTA협상을 한다고라고라?
이쯤되면 내가 버닝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