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원자 - 세상만사를 명쾌하게 해명하는 사회 물리학의 세계
마크 뷰캐넌 지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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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원자와 물리적 원자 사이에는 한 가지 큰 차이가 있다, 수소 원자는 탁자에 있든, 별 속에 있든, 물속에 있든 언제나 똑같은 수소 원자이다. 물리적 원자는 언제 어디서나 똑같다. 그러나 사회적 원자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변하고 적응하며 사회 조직을 알아채고 거기에 반응한다. 사회 물리학의 아이디어를 비판했던 위대한 철학자들은 인간 행동을 완벽하고 정확하게 수학적으로 예측하지 못한다고 말한 점에서 옳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 현상에 대한 물리학적 접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사회 현상이 물리 현상보다 더 풍부할 뿐이다. 물리적 원자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패턴을 따른다. -p61~62 

 서문에 소개된 토머스 셸링의 체스판 위의 흰 동전과 검은 동전을 통한 흑인과 백인 사회의 분리 경향에 대한 통찰력 있는 실험은 사람들이 인종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사는 사회의 환경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을 통해서 저절로 분리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꼭 인종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자신이 단지 소수자가 되기 싫어하는 경향을 지녔다는 가정만으로도 결국은 사회가 흑백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이 실험은 보여지는 현상을 설명하는 우리의 안목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흑백 사회의 분리에 대한 기존의 설명이 인종주의에 대한 비난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면, 분명 이 실험은 사회가 분리되는 경향은 그러한 극단적인 인종 차별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성향이나 삶의 패턴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회현상에 대한 이러한 극적인 설명을 가능하게 한 셸링의 분리 게임은 기존의 사회학이나 철학, 경제학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던 인간사의 영역에 대한 설명에 단순화한 과학적인 모형이 더 유용할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이 다루는 사회 물리학은 그런 원대한 꿈을 지니고 세상에 첫 선을 보였을 것입니다.

 '세상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이제 사람들에겐 진부한 진리가 되었고, 물리학은 그것 보다 더 작은 미시세계를 다루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학이 현대에 이르게 된 것은 바로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분자들 이루고 또한 다양한 물질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그 바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역자가 인용한 파인만의 '모든 물체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 이 작은 입자는 조금 떨어져 있으면 서로 끌어당기고, 밀착되면 반발하면서 영구히 운동한다.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하면, 이 한 문장에 세계에 대한 방대한 정보가 들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처럼 물리학과 화학, 생물학 등의 과학은 '세상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 상상력을 입히고 그것을 현실에서 확인하는 학문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과학에서의 원자라는 아이디어를 사람이 사는 사회에 적용하고자 이 책에서 사용한 용어가 '사회적 원자'입니다. 세상을 이루는 물질의 기본 단위가 원자이듯이, 사람들이 사는 사회를 이루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원자의 개념으로 이해하자는 의미인데, 물론 첫머리에 소개한 사회적 원자와 물리적 원자 사이에 확연한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일정한 패턴에 따라 움직이는 물리적 원자들처럼 사회적 원자도 결국은 일정한 원칙이나 패턴에 따라 사회를 구성하고 또한 변화를 일으키리라는 가정을 그 바탕에 둔 개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서문에 소개된 셸링의 분리실험은 사회적 원자라는 개념이 복잡한 인문학적인 이유와 인과관계에 대한 고찰보다 인간 사회를 더 잘 설명해 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사회 물리학이 다양한 방면에서 과학적인 단순화와 패턴의 정립을 통해서, 기존의 인문학이나 철학, 경제학이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던 복잡하게만 보였던 사회현상을 상당히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가 사회물리학의 설명에 이용한 주된 분야는 경제학으로 요즈음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기 시작한 행동경제학의 영역과 일맥상통하는 내용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과연 인간 세상도 물리적인 세계처럼 수학적인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을 원자로 보고, 전체 패턴에 크게 기여하는 핵심만 남겨두고 군더더기는 없애버리는 단순화를 통해서, 통계 물리학의 아이디어로 사회현상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이러한 관점에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 같습니다. 각 나라의 소득분포, 인종분리, 집단학살, 주가의 예측, 루머의 확산 등과 같은 사회현상을 과학적인 방법론에 의거한 패턴이나 원리를 통해 간단명료하게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고, 사회적인 원자라는 개념에 스스로 배우고 행동을 따라하기도 하고 교정할 수도 있다는 특징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지만, 사람이라는 존재를 집단적인 특징이 중시되는 집합체인 사회적인 원자로 다룬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까지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은 아닌 듯 합니다. 물론 이제 시작한 이 분야가 시간이 흐르면서 더 정교해지고, 더 설득력 있는 사회현상에 대한 설명을 내놓을수록 사람들에겐 단순한 관심분야가 아닌 실제적인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때에 이르면,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그리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고, 종교적인 심성 또한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되기는 하겠지만.....

 사람은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정직한 노력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 사람의 힘을 늘리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진리 탐구이며, 이것을 통해서만 인간의 완성에 끝없이 다가갈 수 있다. -p255,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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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대로 하세요 - 전예원세계문학선 306 셰익스피어 전집 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199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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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노래여, 나뭇가지에 매달려 사랑의 증인이 되어다오. ..... 이 나무들을 수첩삼아 그 껍질에다 내 심정을 새겨 놓으리다. ..... 그 아름답고 정숙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녀의 이름을 모든 나무에 새기자. -p78, 3막 2장, 올랜도  

  낭만 희극으로 분류되는 이 작품은 1599년에서 1600년 경에 창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역사극과 비극 사이의 휴식기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에 대해서 역자는 '감동적인 분위기로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작품', '어둡고 냉랭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 않은, 암울하고 황량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고 쾌적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극의 대부분은 아덴의 숲이라는 자연을 배경으로 주인공들이 사랑의 하모니를 이루어가는데, 인위적인 궁전이나 대저택에서 벗어난 이러한 배경 설정이 이 작품에 쾌적함과 상쾌함을 불어넣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의 소재는 토마스 로지의 <로잘린드-유퓨즈의 진주의 유문>이라는 산문 로맨스 작품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동생인 프레데릭 공작에 의해 성에서 쫒겨난 전 공작이 아덴의 숲으로 잠적하게 되는 것을 시작으로, 그 후에  프레데릭의 딸 실리어와의 친분으로 성에 남았던 전 공작의 딸 로잘린드가 쫒겨나게 되는 과정에서 실리어가 아버지 몰래 로잘린드와 동행하기로 하고 함께 집을 나와 아덴 숲에 거처를 마련하고 기거하게 되는 사촌간의 우정, 또 다른 형제 올리버와 올랜도와의 갈등, 올랜도와 로잘린드가 서로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성에서의 숙명적인 만남과 아덴 숲에서 로잘린드의 남장으로 인해 두 사람 사이의 변형된 사랑 나눔, 로잘린드가 피비와 실비어스의 사랑에 얽히게 되는 이야기 등이 이리저리 얽혀서 사랑이라는 큰 주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여느 희극에서처럼 이 작품에서도 여성인 로잘린드가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십이야>에서의 올리비아나 <베니스의 상인>에서의 포오셔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작품의 주된 뼈대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여러 남여간에 이루어지는 로맨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사랑이 결혼이라는 축복으로 맺어지는 과정은 숲이라는 배경과 어울려 상쾌하고 유쾌하게 진행됩니다. 이러한 면이 이 작품을 읽는 이나 연극을 보는 이들 모두가 역자의 평가대로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고 책을 덮거나 극장을 나올 수 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사려깊은 독자나 관객이라면 이러한 사랑이라는 주제가 주는 경쾌함에 덧붙여진 이 극의 이면에 담긴 몇 가지 요소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셰익스피어가 이 작품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또다른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풍요롭기는 하겠지만 배신과 음모의 음습함이 담겨있는 궁궐에서의 생활과 물질적인 빈곤을 겪지만 몸과 마음의 순전함을 유지할 수 있는 아덴 숲을 배경으로 하는 자연 속 생활의 대비를 통해 우리의 삶의 위치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전 공작의 '이런 생활이 몸에 배고 보면 겉모양만 화려한 저 궁궐 생활보다 한결 상쾌하지 않느냐 말이오? 이 숲이 저 사악함이 가득찬 궁궐보다 위험성이 오히려 없잖은가? ..... 그리고 동지 섣달 모진 바람이 사납게 휘몰아쳐 살을 저미듯하고 온몸이 추워 오그라들 때에도 난 웃으면서 이렇게 의연하게 말할 수 있소, "이건 간신의 알랑수가아니라 진심으로 나의 참다운 위치를 가르쳐 주는 올바른 충신의 직언이다."라고.....'라는 대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자연속에서의 삶에 대한 예찬은 곧 저자가 독자 -또는 관객-에게 하고 싶은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력의 한단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는 광대 터취스턴과 전 공작을 따라 숲으로 들어간 항상 우울한 제이퀴즈의 대사에 담긴 삶에 대한 유모와 풍자, 비판이 주는 일깨움입니다. 사랑이라는 작품의 주제를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마냥 그 주제에 취해서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현실의 모순과 냉혹함에 대해서 일깨우는 두 인물의 대사는 이 작품에서처럼 가슴뭉클한 사랑이라는 주제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을수도 있는 숨겨진 우리 삶의 진정한 일면을 진지하게 살펴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아름다움을 준 여자에게는 정조를 주지 않고, 정절을 준 여자에게는 추함을 같이 준다니까. -p29, 1막 2장, 실리어 

 현명한 분네들이 바보짓을 하는 판국을 바보가 현명한 말로 해서 안되다니. 젠장 알고도 모를 일이군. -p31, 1막 2장, 터취스턴 

  역경이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주는 아름다운 교훈이오. 이는 옴두꺼비를 닮아 보기 흉하고 독도 뿜지마는 그 머리에 귀한 보석을 지니고 있지 않소? 속세와 멀리 떨어져 온갖 사람들로부터 방해 받지 않고 사는 우리의 나날은 수목에서 말을 듣고 흘러가는 여울물을 책으로 삼고, 작은 돌에서 신의 가르침을 얻고 삼라만상 속에서 선을 발견하지 않느냐 말이오. -p49, 2막 1장, 전 공작 

  잊혀지지도 않습니다만 제가 어떤 여자에 반했을 땐 칼로 돌을 쳐서 부러뜨리고선 한밤중에 제인 스마일을 찾아가는 놈은 이렇게 작살을 내겠다고 외쳐댔습죠. 그리고 아직도 생각납니다만 그 처녀가 쓰던 빨래방망이엔 말할 것도 없고, 그녀의 곱싸한 손으로 짠 젖소의 젖꼭지에 입을 맞추기도 했습죠. 그리고 완두깍지를 그 여자로 생각하고 사랑을 하소연도 했으며, 그 깍지 안에서 알맹이 두 개를 꺼냈다가 도로 넣어서 그 처녀에게 준 다음 눈물을 흘리면서 "날 위해 이걸 지녀다오." 하고 말했습죠..... 정말로 참다운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란 묘한 미친 짓을 잘하나 봐요. 세상만사가 덧없듯이 사랑은 하면 모든 사람이 미련둥이가 되나보죠! -p58, 2막 4장, 터취스턴 

 이 세상 모두가 하나의 무대요, 남녀 모두는 한낱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제각각 무대에 등장했다간 퇴장해버리고 하지. 그리고 살아 생전에 사람은 여러가지 역할을 맡아 하는데 연령에 따라 7막으로 나눌 수 있는 바..... 우선 제1막은 아기역 ..... 제2막은 개구장이 학동 ..... 제3막은 사랑하는 젊은이 ..... 제4막은 군인 ..... 제5막은 법관 ..... 제6막은 실내호를 신은 수척한 어릿광대 노인 ..... 파란 많고 기이한 인생살이의 마지막 제7막은 제2막의 어린아이랄까, 오직 망각이 있을 뿐. 이도 빠지고, 눈도 안보이고, 입맛도 없고, 세상만사가 허무하다. -p71-72, 2막 7장, 제이퀴즈 

 시간의 걸음걸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답니다. ..... 시간은 어떤 분하고 걸을 땐 느리구 또 어떤 분하곤 종종걸음을 하구 또 어떤 분하곤 마구 달리는가 하면 누군가에게는 아주 정지하기도 한다 이 말입니다. -p90, 3막 2장, 로잘린드  

 남자란 청혼할 때는 화사한 사월이지만 일단 결혼하고 나면 눈보라 치는 섣달이지요. 처녀 역시 처녀 땐 따스한 오월이지만 결혼하구 나면 변덕스런 날씨가 되거든요..... -p119, 4막 1장, 로잘린드 

 "우자는 자신을 현인인 줄 알고 현인은 자신을 우자로 아느니라"..... 어떤 철학자는 포도가 먹고 싶자 입을 딱 벌리구 포도를 집어 녛었다지 뭔가. 포도는 사람이 먹기 위해 생겨났고, 입은 벌리기 위해 생긴 것이라는 거야..... -p134, 5막 1장, 터취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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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없다
버지니아 펠로스 지음, 정탄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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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기록 가운데 없는 것은 셰익스피어를 그의 작품들과 연관시키는 서류가 아니라 다른 어떤 인간을 그의 작품들과 연관시키는 서류이다. 셰익스피어 학자 조너선 베이크가 지적했듯이, "셰익스피의 생전 또는 그의 사후 200년 동안에는 그가 그 희곡을 쓴 작가라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말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 빌 브라이슨의 <셰익스피어 순례>, p201 

 셰익스피어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뿐이다. 역사를 아무리 들추어봐도 옥스퍼드 백작이나 말로, 또는 베이컨의 지인들 가운데 그런 말을 흘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증거라고 할 만한 것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역사상 가장 큰 문학 사기 사건을 그 범죄가 저질러지고 400년이 지난 후에 들춰낸 반셰익스피어파 열성분자들의 비상한 재주는 치하해야 마땅할 것이다. - 빌 브라이슨의 <셰익스피어 순례>, p213 

 빌 브라이슨의 <셰익스피어 순례>의 마지막 장 '이색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셰익스피어가 그의 작품의 실제 작가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내용입니다. 실제 지금까지 셰익스피어 후보로 오른 사람은 프랜시스 베이컨을 비롯해 옥스퍼드 백작, 크리스토퍼 말로, 펨브로크 백작부인 메리 시드니 등 50여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빌 브라이슨은 앞의 인용구에서처럼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에 얼토당토 않음에 대한 비난을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 책은 빌 브라이슨이 비난한 반셰익스피어파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베이커니언(Baconian)의 시각을 담은 책인데, 베이컨이 셰익스피어의 작품만이 아니라 당시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을 저술한 실제 작가이고, 그 작품들 안에 다양한 방법으로 암호를 숨겨놓았다고 주장하는 다소 황당 -실제로 이 책을 읽은 것은 베이컨 저작설의 정당성에 대한 관심보다는 비판적인 입장에서 그 내용에 대해서 알고자 한 것이니 이리 표현합니다-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 덧붙여 베이컨이 엘리자베스 여왕과 레스터 백작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이고, 에식스 백작은 또다른 엘리자베스의 사생아라는 주장도 담고 있는데, 실제 베이컨이나 에식스 백작 등에 대한 기록을 체계적으로 접하지 못한 입장에서 가타부타 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런 주장이 주류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냉소를 받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The Shakespeare Code이고 우리말 제목은 <셰익스피어는 없다>입니다. 제목과 내용을 통해 저자는 셰익스피어가 그가 썼다고 주장하는 문학작품들의 실제 저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겠지만,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건데 정말 셰익스피어는 눈을 씻고 찾아보다도 보이질 않습니다. 오로지 베이컨이 그 많은 작품들을 썼다는 일방적인 주장-실제로 그것을 뒷받침 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서도 다루질 않았습니다-을 내놓고서 증명하지 않은 그 주장을 근거로 베이컨 저작설을 단정하여 받아들이고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라고 한 것은 바로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가 아니라고 하면서, 그 이유에 대한 아무런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에는 셰익스피어가 없다는 사실을 제목에서 고백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또한 원제목도 The Shakespeare Code가 아닌 The Bacon Code라고 쓰는 것이 더 솔직한 태도일텐데, 저자가 용감하게 그리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스런 생각을 지울수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책은 결코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베이컨에 대한 이야기, 그것도 사실이라기보다는 음습한 구석에서 몇몇 사람이 피운 의심의 싹이 인간의 불신 또는 교활함과 만나 부풀려진 이야기일 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골 출신에 글자도 모르는 부모-셰익스피어의 아버지가 지금으로 하면 시장급의 직책을 역임하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다분히 의도적인 왜곡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음-를 둔 셰익스피어는 결코 그런 작품을 쓸 위인이 못된다고 우기면서도, 제대로 된 근거도 없이 사생아이긴 하지만 왕족이었고 고급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베이컨은 당대를 뛰어넘어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어떤 사람보다도 출중한 초인적인 능력을 지녔을 것이라고 우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뻔뻔함도 함께 담겨 있는 이야기..... 

 굳이 품절된 이 책을 중고로 사서 읽고자 했던 것은 도대체 그들이 주장하는 '베이컨 저작설의 실체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는데, 이 책에는 그에 대한 대답은 하나도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궁금증을 해결하려면 이 책이 인용하고 있는 베이컨의 숨겨진 암호를 풀었다는 사람들의 책을 찾아보는 수고가 필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1564년에서 1616년을 살았던 인물이고, 이 책이 담고 있는 셰익스피어-베이컨 설의 연보에서 셰익스피어가 원작자가 아니라는 첫 주장은 그의 사후 100여년이 지난 1728년이었고, 프랜시스 베이컨을 원저작자로 심도있게 다룬 것이 셰익스피어 사후 200여년이 지난 1857년 델리아 베이컨에 의해서라고 하는데 그녀의 일생이 진지한 작가라고 말하기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는 것, 이그나티우스 도넬리가 암호 해독법으로 베이컨 저작설을 밝혔다고는 하지만 동일한 방법으로 셰익스피어 저작설을 지지하는 암호를 밝혀낸 사람도 있다는 점, 니체나 마크 트웨인의 경우는 어떤 근거를 바탕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 책의 근저에 깔린 베이컨 저작설의 허술한 면들이 더 부각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애써 베이컨 저작설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보다는 빌 브라이슨의 <셰익스피어 순례> 마지막 장을 진지하게 읽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이 책은 제목이 멋지기(?)는 하지만, 제목에 낚여 시간을 들여 진지하게 읽을만한 내용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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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문학동네 루쉰 판화 작품집
루쉰 지음, 이욱연 옮김, 자오옌녠 판화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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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네 건달들은 그 정도에서 그칠 인간들이 아니어서 아Q를 놀리다가 결국 때리기까지 했다. 아Q는 형식적으로는 졌다. 동네 건달들은 아Q의 누런 변발을 틀어쥐고는 벽에다 네다섯 번 소리가 날 정도로 찧고 나서야 아주 만족스럽게 승리한 기분을 느꼈다.   아Q는 잠시 서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들놈에게 맞은 셈이네. 요즘 세상은 정말 개판이라니까.....' 그리고 나서 그도 아주 만족스럽게 승리한 기분이 되어 돌아갔다. ..... 버러지라고 해도 동네 건달들은 놔주지 않았고 가까운 담벼락에다 머리를 대여섯 번 짓찧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승리했다는 듯이 떠났다. 이번에야말로 아Q를 제대로 혼내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십 초도 못되어 아Q 역시 만족해하며 떠났다. 그는 스스로를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데에는 자기가 첫째가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더구나 '스스로를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데에는'이라는 말을 제외하면, '첫째가는 사람'이라는 말만 남으니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도 첫째가는 사람이 아닌가? "네깟 것들이 무엇이라고 감히?" 

 불굴의 정신승리법으로 무장한 민초..... 이 사람은 자신의 근본 -제대로 된 성이나 이름, 출신지등-이 알려지지도 않은, 딱히 직업이 없어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날품을 파는, 그리고 마땅한 거처가 없어 동네 사당에 몸을 의탁해 사는 '아Q'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눈에 보일 때, 일감이 있어 그의 손길이 필요할 때 잠시 생각할 뿐, 자신들의 일상에서는 이 사람의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존재감도 없고, 자신에 대해서도 딱히 내세울게 없으며, 건달들에게 시시때때로 얻어맞는 초라한 민초라지만 그 나름의 세상을 편히 살아가는 비법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승리법..... 앞에서 언급한 그 누구에게도 지지않고 자신을 승리자로 이끌수 있는 '위대한(?)' 정신승리법으로 무장한 그는 적어도 자신에게는 '대단한(?)' 존재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의 초반부는 정신승리법으로 무장한 아Q가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개인사적인 서술이 이어집니다. 

 마을에서의 초라한 실패를 뒤로하고 -정신승리법으로 무장한 아Q는 스스로를 승리자로 만족해하였겠지만 - 소리없이 사라졌던 아Q가 다시 마을에 나타난 시점에서 '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아Q로 대표되는 민초가 사회적인 격변이 일어나는 시기에 자신을 추스리던 정신승리법을 극복하고 정말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물음과 함께 사회적인 격변의 중심에 자기 기만에 빠져있던 아Q가 내던져지고 시험을 받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에서 혁명당의 모습을 보았던  아Q가 처음부터 혁명을 갈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혁명은 반란이고 반란은 그를 더욱 힘들게 할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혁명에 부정적이었지만, 혁명이라는 말이 자오 나리를 비롯한 있는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을 보고는 '혁명도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빌어먹을 것들을 혁명해 버리자'고 생각하고서는 자신으로부터 생성된 알맹이가 없는 타인의 혁명에 동참하고자 나섭니다. 이 민초에게 혁명이라는 것은 평소 자신을 무시하던 녀석들을 하둥대게 만드는 힘이 있는 도구라는 사실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고 또한 원하는 여자를 소유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인식될 뿐, 그 이상의 내적 사고와 외적 행동의 발전이나 변화의 싹은 눈을 씻고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혁명의 공간은 아Q의 입장에서는 갈아엎어야 할 대상이었던, 물질을 소유했다고 또는 더 많이 배웠다고 으시대던 이들이 다시 모양만 바꿔 자리를 차지한 것이었기에, 그가 그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혁명의 깃발을 내세우든지 이미 펼쳐진 혁명의 공간에서 자리를 다시 꿰차고 앉은 이들에게 굽신거리며 자기 자리를 만들어 줄것을 부탁하는 것일터인데, 아Q가 혁명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후자의 길을 택하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혁명은 그리 진행되었지만, 그 공간에서도 약자로서 남아있는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변화마저도 이끌어내지 못한 무능한 아Q를 위한 배려는 남아있지 않고, 그의 삶이 혁명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혁명의 공간 안에서도 힘없는 씁쓸한 희생자로 끝나고 맙니다.  

 이 소설이 중국의 신해혁명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씌여졌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민초를 상징하는 아Q의 모습과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에 대한 작가의 기록은 실제 역사적인 사건이라던 신해혁명의 왜곡된 모습에 대한 작가의 절망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Q처럼 많은 이들에게 혁명이 단순한 주인 바꾸기, 권력자 교체라는 의미에서 이해되었지만 실제로 혁명이 추구해야 할 것은 그러한 단순한 것이 아니고, 실제 혁명에서는 그러한 단순한 권력 교체마저 이루어지 못하고 겉모양만 약간 바꾸었을 뿐이라는 것이 그러한 절망감 속에 담긴 저자의 인식인 것 같습니다. '혁명이라는 사회적인 흐름속에서 아Q와 같은 민중이 그 주체가 된다는 사실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실제 소설속에서 기득권자들이나 그 권속들이 직책만 바꿔서 혁명의 주체로서 뻔뻔하게 앞장 선 것과 달리, 흐름이 바뀌어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민중들에게 권력이 넘어가 기존의 권력자들이 쫓겨나고 새판이 짜였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는 혁명의 열매를 누리는 주체만 바뀌었을 뿐 알맹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이다. 혁명에서 중요한 것은 그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보다 그 혁명을 이끄는 주체들의 정신이 어찌 개조되었고, 그러한 정신과 사상의 개조가 사회에 어떤 근본적이고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는가 하는 사실이다. 이 소설과 달리 아Q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혁명당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서 그가 말하던대로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뻐기며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 이상을 이룰 수 없다면 그것은 혁명이라기보다는 권력이 바뀐 것 뿐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인식이 혁명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정신승리법으로 무장한 위대한 민초 아Q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 소설은 다른 의미로는 민중들의 힘으로 이루어졌다던 위대한 혁명에 대해 과감하게 사망선고를 내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때의 혁명은, 아Q라는 덜떨어진 사람이 처형되는 것을 볼려고 다리품을 팔며 헛고생만 하다가 끝난, 그리고 처형의 방법으로는 총살보다는 목을 치는 것이 더 볼거리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정도를 담고 있는 빛바랜 기억일 뿐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작가가 보기에는 혁명에 들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그리 보일 뿐이라고 외치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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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전쟁 : 넥스트 비즈니스 - 미래를 설계할 핵심코드와 충격적인 일터 경쟁 시나리오
진 마이스터 & 캐리 윌리어드 지음, 김정수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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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앨빈 토플러의 '제 3의 물결'을 비롯한 미래학 서적들이 등장하고 실제로 기술의 발전에 따른 정보통신 사회가 도래했을 때, 미래학은 우리에게 미래의 삶에 대한 많은 암시를 주고 갈 곳을 가르키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정보가 쌓이고,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더 다양한 사람들이 그 변화에 동참하면서 더 크고 가속도가 붙은 변화를 만들어가는 현재에 이르러서는 미래를 예측하고 비전을 제시한다는 것이 무모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나침반 역할을 하는 지식이 더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처럼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감히 나서서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다양한 지식의 융합과 더블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책이 다루는 직장과 기업이라는 영역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변화에 민감하고 빠르게 반응하는 분야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 분야에서의 10년 후 미래를 말하려고 달려든 두 저자는 자신들이 가진 데이터와 지식에 대한 자신감 만이 아니라, 책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현대인들에게는 너무 한가하게 들리는 이야기입니다. 변화라는 단어를 일상에 달고 살며, 생존하기 위해서 변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속에 사는 현대인에게는 속담 속의 10년이 2-3년의 기간이라고 해야하지 않을는지..... 물론 현대에도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게 10년이면 변한다는 강산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시대의 대세는 이미 가속화되는 변화 속에 휩쓸려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10년후에 우리가 일할 직장의 모습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우리가 그러한 직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적응하고 생존할 것인지, 그리고 기업은 어떤 방식으로 인재들을 확보하고 조화롭게 유지할 것인지 등에 대한 현재의 분석을 기초로 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 있습니다. 개인에게는 핵심적인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그리고 기업에게는 우수한 인재를 적시적소에 확보하기 위한 분석과 예측을 제공한다고 하겠습니다.  

 1부 '일터 전쟁의 서막'에서는 2020년 일터를 구성할 다섯 세대-전통 세대, 베이비붐 세대, X세대, 새천년 세대, 2020년대 세대-의 특징을 살펴보고, 그들이 이룰 2020년 일터의 핵심 키워드 10가지-급변하는 인구통계, 지식경제, 인력 이동의 세계화, 디지털화, 모바일 커버리지 확대, 접속 문화, 참여와 협력, 소셜 러닝, 사회적 책임 경영, 새천년 세대 출현-를 통해 현재 일터의 변화와 그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2부 '일터 방어전'에서는 각 세대에 대한 설문조사, 지도자들과의 대화, 직장 문화를 선도하는 기업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개발된 <일터 참여 2020 모델>을 통해 2020년 일터에 통용될 기본 원리 -협력, 진실성, 개인화, 혁신, 사회적 접속-와 여러 세대가 이런 기본 원리에 공감하고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실행 영역 -소셜 리쿠루팅, 고도 접속, 소셜 러닝, 가속화된 리더십의 개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부 '2020년 일터 전쟁 시나리오'에서는 2020년대 일터에 대한 20가지 예측을 통해 '유동적이고, 다양한 연령과 민족이 있고, 유연하고, 협동적이고, 기동력 있고, 세계적이고, 고도로 접속되어'있을 2020년 일터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그 일터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개인과 기업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미래의 직장 구성원이 될 각 세대에 대한 조사, 미래 직장 문화를 선도하는 기업과의 인터뷰 및 이 분야의 지도자들과의 대화, 현재 변화의 주된 원천이 되는 블로그 등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 소셜 미디어와 네트워크, 모바일 혁명과 세계화 등 현재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자들이 말한 예측의 일부는 10년 후가 아닌 수년 뒤에 우리 일터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변화가 우리의 직장에 불어닥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앞날에 대한 불안감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나아갈 곳을 딱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길을 제시해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대해서 좀더 깊이있게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데 있지 않을까 합니다. '미래를 대비하는 최선의 방법은 직접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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