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 - 종교, 믿음을 팔고 권력을 사다
김상구 지음 / 해피스토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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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기독교인으로서 이 책이 다루는 주제와 같은 '변질된 종교와 타락한 신앙인'에 대한 날선 지적을 대할 때마다, 스스로의 부족함에 대한 부끄러움과 손가락질 당하는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고는 합니다. 그들의 지적에 대해서 때로는 변명을 하고 싶고, 그래도 많은 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항변을 하고도 싶고, 그럼에도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의 살아있는 손길을 알기나 하는 거냐고 따져보고 싶기도 하지만, 이내 그 안에 담기 그들의 주장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라면,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는 합니다. 그래도 안타까움이 진하게 묻어 나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감정안에는 진실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우리의 부족함에 대한 안타까움이 먼저요, 그 다음은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때로는 일면만을 침소봉대하곤 하는 이들의 편협함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주된 요지는 우리에게도 이제는 종교 단체를 통제(?)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일본의 '종교 법인법' 형태의 입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재 소득세를 내지 않는 성직자를 비롯한 종교인, 막대한 부동산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실명제를 유유히 피해가는 종교계의 유지재단을 통한 명의 신탁, 개신교가 종부세라는 세금폭탄을 피해가는 과정 등을 통해서 성역화된 한국 종교의 모습을 보여주며, 주류 언론도 힘있는 정치인도 철저히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러한 변질되고 세속화된 종교의 개혁을 위한 근본적인 개혁의 시도로서 저자는 '종교 법인법'의 입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2부 한국 종교의 뒤틀린 모습'을 통해서 우리나라 종교계의 치부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종교의 개혁이 필요한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일제시대부터 만들어진 기독교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의 허구성에 대한 지적은 유관순 열사,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 손양원 목사 등의 과거에 대한 의문들로 연결됩니다. 또한 기업화된 대형 교회와 그들과 손잡고 돈을 굴리는 금융기관의 기가 막힌 유착, 여성차별을 아직도 공공연히 행하는 종교계, 정치권력과 야합하는 종교 권력, 종교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정치권보다 더 구린(?) 형태의 정치를 마다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의 타락 등 저자는 그동안 우리에게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더 종교계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더 썩어 문드러지기 전에 개혁이 필요하지 않는가 하고 묻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주장하는 종교 법인법이 뒤틀린 우리 종교의 모습에 대한 개혁의 완성이라기 보다는 기틀이고, 그러한 기반을 통해 현재 사회적인 화두가 되고 있는 보편적인 복지를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계 50대 교회 중 그 절반이 대한민국에 있다!' 순전한 신앙인의 눈으로 교회의 부흥을 생각한다면 결코 부끄럽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 내면을 끄집어 내면 낼 수록 그 안에는 부끄러운 이면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리 성장한 교회를 향해 던지는 저자의 외침은 신앙인들의 마음이 무디어지지 않은 이상은 깊이 숙고하고 겸손히 반성-실제 신앙적으로는 회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할 제목들을 안겨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즉 저자의 지적을 교회에 흠집을 내려는 사악한 자의 간교함 -분명 책의 내용 중 일부는 정통적(?)인 신앙인의 관점이나 기독교를 이해하는 입장에서가 아닌 신앙 밖에 있는 이로서 교회와 신앙인들의 모습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단하고 있다는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아닌, 있는 그대로 현재 우리의 종교가 안고 있는 변질되고 타락한 모습에 대한 따끔한 지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꿈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반성을 통해서 저자가 말하는 '종교 법인법'을 뛰어 넘는 해결책과 변화된 교회, 처음의 모습을 회복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줄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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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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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리다와 해체주의    

  로고스(logos) 중심적이던 서양 철학을 근원적으로 비판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독자적인 사고방식을 해체주의라 일컫습니다. 서구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서구 사상의 근간이 되었던 것들 모두를 상대화시켜 새로운 사상을 구축하려던 시도로서, 비판의 대상은 미리 주어진 것으로 존재하는 '전체성'이라는 사고방식과 그 배후에 있는 신 또는 로고스를 궁극적 존재로 삼는 서구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입니다. 형이상학은 철학만이 아닌 서구 문화와 사상의 바탕이 되는 근간인데, 이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사고방식의 구축을 위해 맞닥뜨리는 해체의 대상은 사물과 말(언어), 존재와 표상, 중심과 주변 등의 형이상학적인 사고에 의해 지탱되어 온 모든 2원론적인 입장들입니다. 하지만 데리다는 자신의 해체주의에 대해서 여러 사상들처럼 깔끔하게 정리하거나 공표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가장 큰 이유는 해체주의가 품고 있는 근원적인 특징에서 유래하는 것 같습니다. 해체주의의 가장 큰 목적은 '기존의 권위, 기준에 대한 다시보기'로서 기존에 있었던 것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개선방향을 고민하는 기능적으로 존재하는 철학의 한 방식이지, 민주주의나 사회주의처럼 잘 정리되어 사회에 적용하고자 하는 사상적인 구조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상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으므로 결국 해체주의는 사상체계가 아닌 사유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기원(원전)과 대리보충이라는 의미도 해체주의에서 중요한 개념인 듯 한데, 기원(원전)이 순수하게 현전할 수는 없고, 우리가 기원을 대하는 방식은 문자를 통한 대리보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면에서 '순수한 기원은 없고 흔적(문자 또는 텍스트)의 기능만 있다'는 생각은 서양철학의 근간이 형이상학, 로고스에 대해 해체주의가 다가서는 주된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체주의 이러한 면을 상기한다면 이 책의 부재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에서 유령의 의미를 유추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눈앞에 나타나고 스쳐갔지만 결국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산산히 사라지는 유령처럼 해체주의가 대상으로 삼았던 것들은 그리 해체되어 버리겠지만 그에 상응하는 또 다른 체계나 대상이 해체주의를 통해서 생성되는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구조주의, 포스트 구조주의 그리고 포스트 모던니즘

  구조주의란 어떤 사물의 의미는 개별로서가 아니라 전체 체계안에서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개인의 행위나 인식 등을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총체적인 구조와 체계에 대한 탐구를 지향하는 사상적 경향을 일컫습니다. 세상에서 사물은 다른 사물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기 때문에 사물의 의미는 개별적으로 인식되거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관계망 안에서 사물이 지니는 위치에 따라 규정되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조주의는 전체 체계안에서 사물들의 관계를 기술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려고 시도하고, 개개인의 행위나 인식을 포괄하고 그것들의 최종 성격을 규정하는 구조와 체계의 원리를 밝히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인간 주체에 앞선 '구조'의 강조는 실존주의 등의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과 대립하며 언어학에서 출발하여 문학, 인류학, 철학, 정신분석학 등 거의 모든 인문사회학 분야에 확산되면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포스트 구조주의는 J. 데리다, M. 푸코로 대표되는데, 구조주의를 근간으로 그 안에서 나온 사상이라기 보다는 구조주의가 제기하는 철학적인 의미를 더 철저히 하려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를 중시한 나머지 관계라는 것을 무시했던 실존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등장한 것이고, 존재의 가치를 상대화하여 모든 것을 관계성의 틀안에서 이해하려고만 했던 구조주의의 인간 경시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으로, 구조주의와 다르게 종교와 역사의 역할을 중요시합니다. 포스트 구조주의는 고대 이래의 철학 제도에 의문을 제기한 철저한 자기비판임과 동시에 정치, 윤리적 사상의 새로운 기획으로 이해되며, 포스트 모더니즘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탈근대주의)은 1960년대에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학생운동, 여성운동, 흑인민권운동, 제3세계운동 등의 사회운동과 전위예술, 그리고 후기 구조주의 사상에서 시작되어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 이념적 조류입니다. 서구에서 근대 혹은 모던(Modern) 시대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로 부터 시작한 이성 중심주의 시대를 일컫는 말로 종교나 외적인 힘보다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던 계몽사상은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으나 지나친 객관성을 주장하여 20세기 들어서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여러 도전을 받기 시작합니다. 포스트 모던니즘을 니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거친 후 J. 데리다, M. 푸코, J. 라캉에 이르러 시작됩니다. 철학에서의 포스트 모더니즘은 근대의 이성적 합리주의에 대한 반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탈이념, 광고와 패션에 의한 소비문화, 여성운동, 제3세계 운동 등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현상으로까지 확대되어 나타납니다 

 '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에 대하여  

  '평전'이라 함은 어떤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다른 사람이 평가하여 쓴 전기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대했던 다양한 인물들을 다룬 위인전은 자서전을 제외한다면 대다수가 일종의 평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다루고 중요한 업적과 사상을 강조하는 식의 내용이 가장 일반적이겠지만, 쓰는 사람의 개성이나 관점에 따라 다양한 형식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대하다 보면 그러한 다양한 형식에서 더 벗어난 듯한 접근방식-난해함이라고 할 수도-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한 낯섦은 데리다의 삶을 따라 기록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단선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가 삶속에서 형성해가는 사상적인 여정을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듯 합니다. 삶 자체보다는 그의 사상적 여정과 그와 관련된 작품과 작업을 중심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이 책의 독자에게 데리다와 해체주의, 그리고 그와 연관된 현대 철학사상에 대한 상당한 이해와 지식을 먼저 요구한다고 하겠습니다.  

 해체가 '이제껏 우리를 지배해온 전통적인 교의들의 허구성을 폭로하여 그것으로부터 남은 힘을 빼앗는 것이며, 기본적으로 체계나 정식화를 거부한다'고 이해하고, 사상의 체계라기보다는 하나의 사유방식으로서 인정한다면, 저자가 이 책을 쓰는 방식 - 데리다의 삶과 저작들을 따라서 그의 사상적 변화와 탐구에 담긴 그가 가진 문제의식과 열정에 찬 노력을 추적하는 방식-은 해체의 철학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해체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해체를 통해 새로운 체계를 세우거나 도식화하기를 거부했다는 사실과 모든 기원은 문자를 통한 대리보충만이 가능할 뿐 현전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그의 삶과 해체주의는 유령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도 그가 허무주의로 흐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던 것은 해체를 통해 얻어지는 것, 문자를 통한 대리보충을 통해서 도래하는 것이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순수함이고 그것에 대한 열정을 일생동안 불사른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의 이해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이 물음표로 남는 것은 현대철학 사상에 대한 짧은 지식과 이러한 방식의 책읽기에 연습되는 않은 연유가 클 것입니다. 데리다와 해체주의,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 후기 모더니즘 등에 대한 관련 지식을 앞에서 처럼 여기 저기를 뒤적여 정리하고 이해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결국 이 책이 저자가 데리다에 대해서 기울였던 포괄적인 고찰의 결과임을 인정한다면, 그런 노력은 주마간산의 효과도 되지 못할 듯 합니다. 결국 이 책은 어떤 이유에서든지간에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완전한 독서를 위해서는 데리다와 그의 사상에 대해 더 많은 대면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숙제를 내게 남기는 그런 책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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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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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8년 세계를 강타했던 경제 위기는 국제 관계의 근간을 뒤흔들어 놓았다. 세계화의 흐름이 더 이상 모든 강대국에게 편익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또한 미국은 새로운 라이벌 국가의 등장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이제 세계는 기후 변화, 핵확산 같은 진정으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문제들에 맞닥뜨려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국가간의 경쟁과 분열을 조장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또한 세계는 오랫동안 유지되어왔던 국가간 협력의 시대를 끝내고, 경쟁과 분열이 지배하는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윈윈 세계는 제로섬 세계에 자리를 내주었다. -p8, 프롤로그 '다보스 2009'  

  2000년은 새천년을 맞이하는 기대를 담아 구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때였던 기억입니다. 하지만 10여년이 지나지 않은 2008년 발생한 경제위기는 그러한 새천년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무런 근거가 없었음을, 차라리 새로운 천년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지난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거대한 위험에 인류가 처해 있음을 확연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금융위기의 여파로 인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겐,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불안의 시대 또는 혼돈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불안의 시대'의 의미도 우리가 안고 사는 시대의 상황과 맞물려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서구인의 시각으로 쇠약해져 가는 서구 선진국의 입장에서 현재 세상의 변화를 읽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2008년 경제위기가 이러한 불안과 혼돈의 단초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서로의 공통점을 간추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지난 30여년 동안의 세계 정치와 경제를 크게 전환의 시대, 낙관의 시대, 불안의 시대로 구분하고, 이 시대의 커다란 두 사건으로는 1978년 중국의 개방과 2008년 경제위기를 들고 있습니다. '전환의 시대'는 1978년 중국의 개방에서 시작하여 1991년 소련이 지도에서 사라지던 때까지의 시기로,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세계화를 수용하고 중국과 인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낙관의 시대'는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시작해서 2008년 국제 금융시스템이 붕괴되는 것으로 막을 내렸던 시기로, 저자는 세계화가 강대국간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윈윈 세계를 창출했던 시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안의 시대'는 2008년 경제위기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로 국제 정치가 더 위험하고 불안정한 쪽으로 흘러가며 제로섬 세계라는 위험한 논리로 빠져들 수 있는 불안 요인을 안고 있는 시대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물론 독자들이 저자의 시대 구분을 바라보면서 유의해야 할 점은 저자가 <파이낸셜 타임스>나 <이코노미스트>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지난 세기동안 세상을 지배하던 서구의 시각에서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를 불안스레(?)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라는 생각입니다.  

 아직까지는 미국이 제1의 강대국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고, 서구 선진국들이 세계 질서의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서구인의 시각에서는 아무래도 그러한 질서가 영구적으로 견고하지 못하고 균열이 가고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러한 힘의 이동이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지난 30여년간의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정리하며 현시기를 불안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에도 그러한 시각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구의 시각이 아닌 이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로 불리는 중국이나 브릭스 국가들, 눈부신 발전을 이룩해가는 개발도상국들의 입장에서는 현재의 불안정한 정세가 단순히 불안의 시대라기보다는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시대로, 더 나아가서는 세계 정치경제의 주변부가 아닌 중심부로 나아가는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역동적이고 극적인 변화의 시대로 인식될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가 저자에게는 불안의 시대로 불리겠지만, 우리에게는 긍정적인 변화를 담고 있는 새로운 도전의 시대, 기회의 시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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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 피시 - 네 종류 물고기를 통해 파헤친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환경의 미래
폴 그린버그 지음, 박산호 옮김 / 시공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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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고기야말로 과학자들이 인위적으로 개량할 수 없는, 세상에 남은 유일한 음식이다. 현재 우리가 먹는 물고기는 우리의 까마득한 조상들이 먹던 물고기보다 비타민이 손톱만큼도 첨가되지 않았으며 맛도 똑같다. 물고기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음식은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 더 이상 사람이 먹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경까지 개량되고 말았다. -1994년 조셉 미첼의 <Old Mr. Flood> 중에서  

 저자가 책의 처음에 소개한 위의 문장은 아마도 자신이 다룬 물고기들이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방식이 얼마만큼이나 극적으로 변한 것인지를 일깨우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미처 20여년이 되지 않은 1994년에는 물고기가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무한정 공급될 수 있을 것 같은 훌륭한 음식으로 당연하게 생각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제는 사료를 주며 인공적으로 양식된 물고기들이 넘치게 된 것이 그 20여년 사이의 일이고, 그물을 던지면 한없이 딸려 올 것 같은 많은 물고기들이 인간의 식탁을 채우기 위한 남획으로 인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 실색하게 된 것도 그 짧은 20여년 사이에 발생한 일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저자는 연어, 농어, 대구, 참치, 이 네가지 물고기가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게 되고, 인기를 끌면서 수요가 늘어나는 과정에서 남획되거나 산업화의 과정에서 동반되는 환경파괴로 인해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줄지 않는 수요를 채우기 위해 양식 기술이 개발되어 인공적으로 생산된 양식 물고기들이 자연산 물고기의 빈자리를 상당부분 보충하게 되지만, 양식으로 인한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나타나게 되고, 인공적인 양식으로 인해 생기는 여러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비효율적으로 양식되는 물고기를 대체할 만한 적절한 양식 물고기들이 선택되어 부상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음식으로서의 물고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과 한 생명체로서의 물고기를 존중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과 해결책을 이 책에 담고 있습니다.   

 '물고기를 연구하거나, 잡거나, 어부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물고기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 하지만 그 나머지 사람들은 물고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혹은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 굳이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매년 점점 더 많은 양을 먹어치우고 있다. 나는 그런 추세가 변할 거라는 간절한 희망을 품고 있다. 언젠가는 물고기 역시 그 나름의 완벽한 존재로서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종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가 올거라는 희망 말이다.' -p269  

 저자는 기본적으로 물고기들이 인간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는 훌륭한 음식인 것을 인정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음식으로서의 물고기 보다는 이 지구상에 인간과 함께 공존하는 하나의 생명체라는 사실에 더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나름의 완벽한 존재로서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종'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식탁에 올릴 음식으로 무작정 남획하여 심각하게 개체수를 감소시키고, 수요을 채우기 위해 다시 효율적이지 못한 양식을 실행하면서 생태계에 부담을 주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한 음식으로서의 물고기를 지속적으로 식탁에 올리는 길을 찾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연어, 농어, 대구, 참치가 우리의 식탁에 오르내리면서 지난 수십여년간 겪은 수난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가능한 한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물고기 공급량을 늘릴 수 있는 기준이다. 인간은 자연산 물고기 공급량과 점점 더 늘어가는 인간의 수요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간극을 메우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산업 규모의 사육에 적응할 수 있는 소수의 물고기 종을 과감하게 골라야 한다. 물론 전 세계 인구가 계속 줄지 않고 증가한다면 어떤 해법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인구가 성장한다는 시나리오에서는 오직 하늘의 별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 사실 육지에서 생산되는 식량이 한계에 다다른 상태에서 바다는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가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곳이다. 인간이 세계의 생물량과 태양 에너지를 더 많은 인간으로 전환할 수 있는 유일하게 남은 방법이다. 인간 성장의 미래는 우리가 바다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p279 

 앞의 인용문은 바다의 물고기를 관리하는 방식이 앞으로의 인간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는 자각이 담긴 말입니다. 자신이 언급한 연어, 농어, 대구, 참치가 밟아온 과거를 볼때, 사람들이 순수하게 바다 속에서 건져올린 자연산 물고기만으로는 결코 사람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제공할 수 있는 물고기를 선택해서 기업적인 양식을 통해서 물고기에 대한 수요를 해결하고, 바다 속에서 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물고기는 우리의 보호를 받으며 자유롭게 번식할 가치가 있는 야생생물로서 다루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인식의 전환이 있을 때, 어업량을 감소시키고, 바다 생태계의 많은 부분을 어업 금지 구역으로 전환하고, 적절히 관리할 수 없는 종은 전 세계적으로 보호하고, 무분별한 양식을 지양하고 먹이사슬의 근본을 지켜 바다를 효과적으로 되살리자는 저자의 제안이 의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음식으로서의 물고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양식을 위해 선택되는 물고기는 효율적으로 자라고, 자연을 파괴하지 않으며, 양식을 허용하는 물고기 종의 숫자를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고, 선택된 물고기는 적응력이 뛰어나고 여러 종을 함께 양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사람들에게 가치있게 받아들여 질 것입니다. 그런 면을 생각한다면 이 책은 그러한 인식의 전환에 다가서기 위한 기초를 다지는 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고기도 존중받아야 하는 생명체이다'라는 사실을 무조건 부인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탁에 올라오는 생선구이나 싱싱한 생선회를 보면서 그런 생각까지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들려 준, 물고기들의 과거의 수난과 남획, 개체수의 감소로 인한 위기, 양식에 의한 대량 생산 등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다만 맛깔스런 음식으로서 생선이 눈앞에 아른 거릴 뿐일 것입니다. 또한 건강에 좋은 식단이라며 일주일 또는 한달에 몇번 생선을 식탁에 올리라는 권위있는 기관의 권고문을 대할 때면, 사람들은 생선이 몸에 좋은 음식이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이 세상 사람들 모두의 건강을 위해 공급되어야 하는 물고기가 충분할 것인가 따위의 질문은 결코 생각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우리의 모습에 문제의식을 느껴 저자는 이 책을 썼을 것이고,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밝힌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에 희생되고 있는 물고기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심있게 들여다 본다면 '자연산 물고기는 그저 우리의 음식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개별적인 운명을 추구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사냥해서 먹는다면 조심스럽게 잡아서 먹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자연 식품을 먹는 것 자체가 특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마지막까지 강조하는 저자의 심정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 저자의 주장은 환경의 보존이라는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훌륭한 음식으로서의 물고기의 지속적인 공급이라는 측면에서도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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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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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여기서 오늘날의 제3기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나 금융자본주의 혹은 소비자본주의로 정의하기보다 인지자본주의로 정의하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인지자본주의는 앞서 말한 것처럼 베네치아, 제노바, 네덜란드 등에 의해 표상되는 상업자본주의, 영국과 독일, 그리고 20세기 후반의 미국에 의해 표상되는 산업자본주의에 이어 나타난 제3기의 자본주의다. 그것은 인지노동의 착취를 주요한 특징으로 삼는 자본주의다. 우리는 이 개념을 통해서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다시 사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문제설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지자본주의라는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자본 자신이 아니라 노동이 현대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을 가져오는 우선적 힘이라는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그 노동의 역사적 진화와 혁신의 과정을 중심적 문제로 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32~33, 서장   

 정보를 획득하고 파지하고 활용한다는 의미에서의 '인지cognition'라는 용어는 아마도 심리학이나 뇌과학, 신경학, 컴퓨터 등을 다루는 과학도들에게 더 익숙한 용어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에 인지의 개념을 적용해 인지자본주의를 제3기의 자본주의로 소개하는 이 책의 제목이 유난히 눈을 사로잡은 이유가 그런 익숙함에 의한 것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처음 두툼한 책을 접할 때, '인지자본주의'라는 제목만 보고서는, 비록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처음 수십여 페이지를 읽다가 다시 고이 접었고 인문 서적들보다는 자연과학 서적들이 더 익숙하고 편한 나같은 사람도 무언가 만만하게 대들어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대담한 생각을 했던 것도 아마 그런 익숙함에 의한 자신감의 발로가 아니었을는지..... 하지만 그런 자신감은 처음 몇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던 중에 바닥이 나 버렸다는 사실을 먼저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인문학적인 기본 소양이 제대로 갖춰졌을리 없는 자연과학도라고 할 수 있는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은 애초부터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고 손을 드는 것이 솔직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과학에서 사용하는 인지의 개념을 이 책에서는 '지각하고 느끼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의지하는 등의 활동에 포함되는 정신적 과정을 총칭하는 용어로서, 감각, 지각, 추리, 정서, 지식, 기억, 결정, 소통 등의 개체적 및 간개체적 수준의 정신작용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깊이의 차원에서는 표면에서 의식되는 것과 더불어 전의식적인 것 (의식되기 이전의 의식적인 것), 하의식적인 것 (의식적인 것의 누적의 산물로서 의식되지 않고도 의식적인 것으로 기능하는 것), 무의식적인 것 (의식되었으나 억압된 의식적인 것)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사용되며, 그런 연유로 지식의 물질화로서의 기계는 하의식적인 것에 해당하여 그 자체로 인지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지기계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인지라는 개념을 물질적인 속성에 까지 확장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들이 지닌 물질적 속성과 정식적 속성이 독립적인 것이나 인과적인 것이 아닌 평형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지 개념을 바탕으로 저자가 말하는 인지자본주의를 쉽게 이야기 한다면 '신체가 노동하던 시대'에서 '영혼이 노동하는 시대'로의 전이를 이야기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인지노동의 전형은 연구자, 교육자, 프로그래머 등이 수행하는 지식노동이나 정보노동, 예술 노동이나 감정 노동 등이 있습니다.  

 저자는 인지자본주의라는 용어를 통해서 현대 자본주의의 얼굴을 밝히고자 한 것만이 아니라, 이러한 개념 정립을 통해서 기존의 자본주의를 다시금 고쳐 생각하고 그 안에서 자본이 아닌 노동이 현대사회의 전환과 재구성을 위한 힘이 될 수 있음을 밝히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동의 '인지화가 가져오는 실제적인 변화들, 그 결과들, 그리고 의미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인지자본주의의 막바지에 이른 모습을 들여다보고 '인지혁명'-축적을 위한 인지의 전용이 아니라 삶의 혁신과 행복을 위한 인지혁명-을 통한 문제 해결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를 구매력과 동일시하고, 쾌락을 소유와 동일시하며, 노동과 소득 사이에 엄격한 상관관계를 설정하고, 광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지금까지의 경제주의적 인지양식을 해체하고 부와 쾌, 그리고 행복에 대한 질적으로 다른 인지양식을 창출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지적 혁신의 힘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에 기초한 물리적인 정치적 행동이 따라야 만이 저자가 말하는 인지혁명이 온전히 달성되고 유지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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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meral 2011-08-31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웹진 <자율평론>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연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drheaven 님이 작성하신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서평글을 오는 9월 초 발행 예정인 <자율평론> 36호 게재할 수 있을지 문의를 드립니다.

<자율평론>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총 35호의 웹진을 발행한 계간 정치철학 웹진이며,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copyleft 웹진입니다. 그간 <자율평론>에 게재되었던 모든 원고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aam.net/xe/autonomous_review

<자율평론>은 인문학 강좌 공간인 다중지성의 정원, 독립 출판 활동을 하는 갈무리 출판사, 세미나 공간 다중지성 연구정원의 마디 단위로, 위 공간들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지적 활동들의 성과들을 모아내고, 우리들의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원고료를 드리기는 어렵지만, 게재를 허락해 주신다면 웹진이 발행되는 대로 PDF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리며,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다면 아래 연락처로 언제든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율평론> 편집위원회 김정연 드림
daziwon@waam.net / 02-325-2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