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를 리뷰해주세요.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 2008 촛불의 기록
한홍구 지음, 박재동 그림, 김현진 외 글, 한겨레 사진부 사진, 참여사회연구소 외 / 한겨레출판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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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현정부의 시작과 함께 많은 기대도 함께 부풀어 올랐어야 할 2008년의 시작은, 현정부가 정권인수위 시절부터 온갖 혼란스런 정책들을 내뱉고 불협화음을 연출한 탓에 기대보다는 '또 다시 5년을 견뎌야 하나!'라는 염려와 체념의 싹이 자라기 시작한 시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자라는 또 다른 싹이 있었으니..... 그런 염려와 체념과는 다른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촛불이었습니다. 학교 자율화 조치와 미국 쇠고기 수입 협상타결에 대한 반응으로 처음 촛불을 든 여중고생들의 행동은 아마도 염려와 체념속으로 가라앉아가던 평범한 이들의 마음속에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일깨워준 계기가 된 듯 거침없이 사람들을 거리로 모아들였습니다. 거리에는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염려와 체념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들이 가슴속에 쌓았던 생각과 말들을 뱉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부와 대통령을 향해 그들이 외친 말들이 참의미는 바로 '내가, 우리가 이 나라의 주인이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었고, 또한 '우리를 인정해 주고, 우리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너무도 당연한 요구였습니다. 물론 주권자로서의 촛불시위자들의 말은 번번히 외면당했고, 충돌했고, 낙인이 찍혔지만, 열린 광장에서 서로 꿋꿋이 연대하며 진화하여 우리 현대사에 또 다른 의미있는 메시지를 남겼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는 촛불이 밝혀진지 1년여가 돼가는 길목에서 이 책은 2008년의 촛불에 대한 의미있고 좋은 기억들을 문자로 옮긴 기록이고, 또한 그 안에 담긴 의미와 메시지를 찾아서 정리하고자 한 노력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방관자..... 난 여러 의미에서 2008년의 촛불에 대한 방관자였던 듯 합니다. 지리적으로, 시기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인 위치와 생각의 차이 등으로 인해 멀리서 바라만 보던 촛불의 방관자였습니다. 그러한 방관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은 촛불시위 안에서 이루어지던 여러 의미있는 생생한 사건과 이야기들보다는 기존 언론매체에 의해 전해지는 각색된 기사들에 의존해야 한다는 말이고, 그만큼 한쪽으로 편향된 판단을 할 개연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인터넷이 있다고는 하지만, 반듯하게 정리된 신문기사나 방송뉴스가 더 그럴 듯하게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었고, 그 말에 더 귀를 기울인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우병에 대해서는 촛불집회자들의 경우 광우병에 대한 실상의 확인을 뒤로 한채 너무 과민하게 반응한다는 보수 언론과 정부의 주장을 더 신뢰하는 편이었고, 신문과 뉴스에 나오는 폭력시위 장면에 염려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뒤에 편집과 조작이라는 속임수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PD 수첩이 주저앉는 소와 한 여자를 광우병 환자라고 단정적으로 보도한 사실들의 교묘한 왜곡을 지적하는 의견들을 보면서 그런 부정적인 방관자의 위치는 더 강화되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한데, 이 책의 촛불집회 진행과정에 담겨있던 생생한 이야기들은 내가 일방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또 다른 각도에서, 또 다른 의미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촛불의 시작과 진행이 단순한 학교 자율화 반대나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라는 구호에 머물러 있는 현상이 아닌, 자신의 정당한 주권을 주장하는 시민사회와 권력을 틀어쥐고 질주본능을 과시하려고 하던 현정부와의 대결, 정책과 비젼과 가치관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는 면이 있고, 그렇다면 내겐 전혀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 같은 것 말입니다. 물론 아직도 촛불집회에 대한 평가와 의미, 성취와 실패에 대한 것들은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진행형이고, 그 안에서 우리사회의 다양한 가능성과 한계를 찾고자 노력하는 이들의 노력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도 기억속으로 사라져가는 현장의 기록이라는 의미와 함께,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책에는 촛불집회에 대한 다양한 이들의 의미있는 기억, 긍정적인 내용과 미래의 희망과 바람에 대한 기록들이 담겨 있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라는 제목처럼, 2008년 촛불집회 자체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귀닫은 정부에 대한 시민사회의 항의와  경고,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보인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한 가능성 등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 대한 반성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시민사회의 힘을 하나로 이끌어 내지 못한 시민단체나 시민 단체 지도자들의 무능력함에 대한 반성, 변화나 변혁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일방적인 승리의 선언으로 허탈하게 끝나버린 것에 대한 반성 등..... 하지만 거대한 시민사회의 힘을 눈으로 보고 듣고 체험한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촛불의 계속을 꿈꾸는 책이라고 말하기에는 자신이 생각하던 가치와 의미, 소망과 정당성에 대해서는 과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 뒤에 담긴 이면에 대한 냉철한 반성에는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간의 '촛불과 시민권에 대한 성찰'이라는 차병직 교수의 글마저 없었다면, 내게는 이 책이 마지막 촛불축제의  일방적인 승리 선언만큼이나 허탈한 촛불의 자화자찬으로 여겨질 뻔 하였으니 말입니다.  

"촛불의 권리는 추상적이다. 추상적인 권리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손아귀에 쥘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신 상징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권리를 획득하는 데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시민권은 구체적인 권리다. 구체적 권리는 그 내용의 목록까지 확인이 가능하다. 하지만 헌법과 법률의 범위 내에서만 실현할 수 있는 권리다. 구체적인 권리를 향유하는 데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 촛불집회를 평가하는 전문가들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부분도 바로 책임이다. 촛불집회는 헌법적 자항권의 발동이었는가, 아니면 시민불복종의 행동이었는가, 혹은 그 자체로 모두 정당한 구체적 시민권의 행사였는가. 헌법적 저항권이었다면 목적은 혁명일 수밖에 없고, 혁명의 성공여부에 따라 논공행상되거나 처벌받을 것이다. 정당한 시민권의 발동이었다 하더라도, 의도하지 않게 타인에 끼친 손해는 배상하고 불가피하게 행한 실정법 위반 부분에 대해선 대가를 받아야 한다. 시민 불복종이라고 주장한다면 기꺼이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자세로 부당한 법의 개폐까지 요구하며 자발적으로 체포되어야 옳다. 이런 원칙적 문제까지 면밀히 검토하여 평가해야, 가슴속에 남겨둔 불씨를 언제든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이런 몇 가지 문제만 훓어보더라도, 지금까지의 촛불집회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과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의심스럽다......" (p135-6, '촛불과 시민권에 대한 성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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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2008년 촛불집회의 과정을 전반적으로 정리해, 그 의미와 성과를 묻고, 새로운 연대를 고민하고 있다는 점, 촛불의 정신을 망각하지 않고 발전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한 고민의 첫걸음을 담았다는 점 등.....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촛불을 외부에서만 바라보던 방관인들, 촛불을 냉소하거나 야유했던 이들, 그리고 무엇보다 촛불 안에 있었지만 그 의미와 결과를 혼돈스러워했을 이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차병직 교수의 '촛불과 시민권에 대한 성찰' 전문 (p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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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잔의 차
그레그 모텐슨.데이비드 올리비에 렐린 지음, 권영주 옮김 / 이레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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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키스탄 키라코람 산맥의 K2를 사랑한 , 그래서 그 정상을 정복하고 싶어한 한 산악인이 있었습니다. 죽은 누이동생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열렬히 그 산의 정상에 서고 싶어했고, 오로지 그 곳에만 눈길을 향하고 있었기에, 등정에 나선 동안에는 그 주변에 있던 것들에는 마음 한자락 주지 않았던 서구의 오만함을 지닌 건장한 산악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웅장한 그 산은 그의 건장함과 오만함, 그리고 짧은 안목을 질책하고 시기하듯, 그가 정상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혼자 외떨어져 길을 헤매며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는 고난을 안깁니다. 마치 사자가 자신의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려 사는 녀석만 품에 키운다는 전설같은 이야기처럼, K2는 자신이 품은 그 땅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해야할 일에 그가 합당한 사람인지를 시험이라도 하듯이, 자신에게 도전한 그가 길을 잃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게 합니다. 그의 이름은 그레그 모텐슨, 하지만 그가 일하는 파키스탄 지역에서는 보통 '닥터 그레그, 또는 '그레그 사하브'라고 불리웁니다. 자신의 조국 미국에서는 군인이기도 했고, 간호사로서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가 일하는 지역에서는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지어주는 사람, 가난한 그들에게 조국인 파키스탄도 해주지 못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우리들 식의 사회사업가나 박애사업가라는 말이 더 폼나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에게는 파키스탄 사람들이 부르는 '닥터 그레그'라는 호칭이 그 어떤 말보다 더 의미있고, 폼나는 말일 듯 합니다. 

 다시 그가 등정에 실패하고 길을 잃고 헤맨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가 단순히 오만한 서구인으로서 K2를 정복하기를 원했던 사람에서, 그 땅을 근거삼아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공감하고, 자신의 일을 총과 미사일과 탱크로도 이루지 못한 테러와의 전쟁에서의 완벽한 승리 비결이라고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한 시작이 바로 K2 등정 실패뒤에 따라온 길잃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길잃음의 끝에 다다른 코르페 마을, 그리고 촌장 하지 알리와의 만남과 병약해진 그에 대한 가족같은 환대와 보살핌 속에서, 그의 눈에 그가 오르기를 원했던 산이 아니라,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황량한 땅만큼이나 힘든 삶을 사는 그들은 병원이나 의료서비스를 생각할 수도 없어서 상처의 고름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고, 그를 위해 잡은 숫양의 고기 뿐 아니라 뼈를 으깨 골수까지 뜯어 먹는 굶주린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아이들은 지붕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아무 책이나 필기구도 없이 땅에 글씨를 쓰며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아마 그는 깨달았을 것입니다. 동생을 위해 정상에 목걸이를 걸기위해 K2를 등정하려고 했던 일이 얼마나 하찮은 일인지..... 그리고 죽은 동생을 위해, 허허벌판에서 변변한 도구도 없이 공부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정말로 의미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지 알리에게 한 약속이 평범했지만 이제는 그 누구보다도 더 가치있는 삶을 살게 된 그의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알립니다. "제가 학교를 지어드리겠습니다."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첫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그는, K2가 자신에게 부여했던 삶이 코르페에 학교 하나를 짓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열정 하나로 시작한 그의 삶은 후원자의 도움으로 두개, 세개, 네개..... 의 학교를 짓는 일로 이어졌고, 이제는 십년이 넘게 파키스탄에 학교를 지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9.11사태 이후로는 그의 사업영역이 아프가니스탄까지 이어집니다. "테러란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 어딘가의 사람들이 단순히 우리를 증오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죽음보다 삶을 선택해야 될 만큼 밝은 미래를 제공받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는 그의 말에 아마도 그가 하는 일의 진정한 가치가 담겨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단순한 테러에 대한 예방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죽음보다 삶이 더 가치 있다는, 너와 나를 구분해서 총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손내밀고 미래를 나눌 수 있는 공유의 삶이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과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짚어주고 있다는 면에서 그가 하는 일, 그가 사는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도 할 수 있어요'라는 속삭임을 들으며,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도 함께 얻게 됩니다. 그의 삶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발티스탄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우리 방식을 존중해주어야 하네. 발티 사람과 처음에 함께 차를 마실 때, 자네는 이방인일세. 두 번째로 차를 마실 때는 영예로운 손님이고, 세 번째로 차를 마시면 가족이 되지. 가족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네. 죽음도 마다하지 않아. 닥터 그레그, 세 잔의 차를 함께 마실 시간이 필요한 거야. 우리는 교육을 못 받았을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라네. 우리는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고 또 살아남을 사람들이야." - 그레그에게 일을 빨리 마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계 맺음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하지 알리의 조언 (p219) 

 "..... 전쟁이 벌어지면 기독교고, 유대교고, 이슬람교고 간에 지도자들이 '신은 우리 편'이라고 하는 말을 자주 듣잖아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신은 피난민과 미망인과 고아 편이에요." - 탈레반을 피해 국경을 넘어온 아프카니스탄 난민의 실상에 대해 무관심한 백악관과 의회, 유엔 등을 거론하며 그레그 모텐슨이 덧붙인 말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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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읽다 - 단숨에 통독하는 사복음서
김동준 엮음 / 두란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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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복음서를 읽다보면, 서로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지만 상호 미묘한 차이를 가지는 부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서로 겹치지 않고, 각 복음서에 독립적으로 기록된 사건이나 예수님의 말씀도 있습니다. 하지만 각각의 복음서가 가지는 나름의 개성이나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에 내용이나 분량, 또는 예수님에 대해 서술하는 시각의 차이 - 이스라엘의 왕, 인자, 하나님의 종 또는 하나님의 아들- 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 예수님의 일생에 대한 고찰의 의미가 있고, 또한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음과 가르침 등의 의미를 각자의 특성대로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매번 읽다보면, 특히 주석서나 강해서를 함께 보면서 서로 겹치는 사건들에 대해서 서로 다른 복음서의 내용들을 대하다 보면, 예수님의 탄생부터 십자가 사건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러한 바람을 알기라도 한 듯, 이 책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예고에서부터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일대기가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람들앞에 다시 나타나시고 승천하시고,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과 베드로의 설교까지....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초반부의 내용을 시간의 순서대로 배열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예수님의 일생에 대한 틀을 제대로 잡을 수 있게 인도해 주는 책입니다. 누가복음을 토대로 사건의 순서대로 사복음서의 내용을 중간중간에 삽입하여 예수님의 일대기를 완성하였는데, 미묘한 차이가 있는 사복음서 각각의 시각을 불협화음을 느끼지 않게 깔끔하게 정리한 점을 생각하면 엮은이의 노고가 쉽지만은 않았으리라는 짐작이 가는 부분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예수님의 일생을 성경에 의거해 연대기순으로 정리해 보고 싶다는 엮은이의 의욕에 앞서 먼저 무릎꿇고 간절히 구한 기도가 있었으리라고 믿습니다. 

 내용을 보면, 엮은이는 복음서의 내용을 한자도 훼손하지 않고, 내용 그대로를 이용하여 각각의 사건이나 이야기들을 정말로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연결해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 사복음서에 나오는 내용을 다 이용하여 사건을 재구성하여 놓았는데, 각 복음서의 몇몇 구절을 조금씩 이어붙여 이야기를 완성한 것이지만, 그대로 읽어간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가장 세세한 서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각각의 복음서가 가진 생략된 부분에 대한 보완이 되어 있다는 면에서는 후에 사복음서 각각을 읽을 때, 일일이 앞뒤를 뒤적이며 보지 않더라도 각 복음서의 특징적인 서술과 생략부분을 비교해 볼 수 있는 훌륭한 참고 서적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중간에 삽입된 삽화들이 성경 내용에 대한 이해를 더 풍요롭게 이끌어주는 장점도 있고, 성경을 읽으며 가장 난해함 중의 하나일 단조로움(?)이나 긴장감을 벗어나, 똑같은 내용의 성경을 읽으면서도, 한권의 책을 읽는 듯한 편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는 면에서는, 무작정 성경읽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초신자나 비신자, 또는 기존의 성도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생애가 복음이라는 동일한 사실을 근거로 기록된 것이기는 하지만, 나름이 특징적인 면이 있기에, 온전히 예수님의 생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복음서 각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이 책이 예수님의 일생을 사복음서를 통해 잘 엮어냈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복음서을 읽고 묵상할 이유들도 충분히 많을 것입니다. 각 복음서가 지닌 고유의 가치와 의미가 있을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일생을 알기위해서 또는 통독을 위해서 매번 4권의 복음서를 읽어야한다는 부담을 덜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리된 내용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성경읽기에 부담을 지니고 있을 많은 이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의 일생에 담긴 복음을 알고 믿고 전하는 데 그 바탕을 두고 있을테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남들이 다 알지 못할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리 책으로까지 만들어내는 삶의 노고를 아끼지 않은 엮은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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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을 리뷰해주세요.
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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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소개한 40여편 -정확하게는 37편-의 영화 중, 실제 진지하게 끝까지 보았던 영화들을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내가 <슈렉>이라는 영화를 아이들과 함께 보았을 때, 저자가 말한 쿨미디어의 하이퍼리얼리티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이나 해 보았을까?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움직임이 자연스럽다는데서, 그리고 장화신은 고양이를 보며 '쟤가 왜 여기 나오나?' 하는 정도의 물음표를 달았다는 데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이야기의 도입부를 붙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책에서 말한 것만큼 거창하게 생각하지는 못했고 그냥 아이들과 즐겁게 보며 그럴 듯 하다고 한바탕 웃어주었던 단순한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DVD로 <폴라 익스프레스>를 보았을 때도, 왠지 주인공 소년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에게서 느껴지던 차가움과 어색함에 대한 기억은 있지만, 이 영화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특성을 지닌 '섬뜩함의 계곡'에 빠져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습니다. <매트릭스>의 기막힌 장면들 속에서도, 건물들 사이를 누비는 <스파이더 맨>의 우아한 모습을 보면서도, 케이블 TV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는 <터미네이터>의 놀라운 장면들 속에서도, 그 영화만이 주는 독특함에 대한 느낌이 있었지만, 저자가 말하는 주제들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해보지는 못했던 듯 합니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영화 이야기들이 곳곳에 나오는 생소한 용어들과 함께 괜히 영화를 어렵게 뜯어보는 현학적인 글쓰기일 뿐이라는 오해를 사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대한 변명일수도, 소개일수도 있는 프롤로그에서마저 그 생소한  용어들이 튀어나오며 나의 지식과 상상력의 빈곤을 자극하니, 그러한 오해와 편견은 첫인상 효과처럼 그리 시작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디지털 기술이 시네마의 내용과 형식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지, 또 과학과 인문학의 담론이 어떻게 영화적 상상력으로 변용되는지 살펴보자는 막연한 생각으로 시작한' <씨네21>에 실렸던 글들이 이 책의 시작이었다는 저자의 글을 차분히 읽었다면, 분명 이 책을 대하며 '괜히 영화를 어렵게 본다'는 오해를 조금은 줄일 수 있었을테지만, 처음에는 그런 차분함보다는 명성있는 이의 뭔가 그럴듯한 체계잡힌 영화에 대한 해설이나 분석 -물론 저자는 프롤로그에 이것은 영화 비평이 아닌 인문학적인 상상을 담은 담론의 성격을 가진 글들이라고 밝히기는 하였지만 처음에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을 기대했으니, 제대로된 스토리에 대한 설명도 없이 이런 저런 지엽적인 것들로 한편의 영화를 뜯어 분해해 버리는 글들이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저자가 말한대로 더도말고 덜도 말고 디지털 기술과 인문학적인 담론이 영화와 만나 어떻게 표현되고 변화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는다면, 저자의 글쓰기 방식에 대한 이해의 폭을 조금더 넓혀 줄 수는 있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글자체가 지닌 난해함에 대한 감정까지 쉽게 풀릴 수 있는 것은 아닐 듯 합니다. 그만큼 저자가 말하는 주제들이 일상적인 소통의 범위를 넘어선, 과도한 테크놀러지와 인문학적인 용어와 개념들을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그것이 아니라면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나의 지식과 소양 부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내가 영화들을 보면서 느꼈던 미묘한 감정이나 느낌에 대해서 저자는 훨씬 구체적인 용어와 사례들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고, 그런 부분들이 내 앎의 영역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에 난해하다고 투덜대면서도 굳이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낸 이유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내 스스로에게 이런 식으로 영화를 뜯어볼 의향이 있냐고 묻는다면, 아직까지는 난 그냥 단순한 관객의 한사람으로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웃고 울며 자연스러운 감정을 표출하고 싶다는 대답을 하겠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인문학적인 지식과 상상력이 가미된 디지털 기술의 변신에 대한 명확한 이해- 책을 읽으며 순간순간 지적 사치와 호기심이 충족되는 만족감을 주었던 -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 느낌과 감정속에 묻혀서 알듯 모를 듯 모습을 숨길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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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영화만이 아니라 우리 주위의 많은 것들을 좀더 세밀하게 관찰한다면 얼마나 색다르고 깊이 있는 곳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자각을 준 것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영화를 좋아하는, 하지만 그냥 즐기고 말았던 사람들, 또는 영화 뿐 아니라 실제 삶속에 담긴 다른 의미들을 추구하는 사람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모든 이는 같은 영화를 보면서 각자 다른 영화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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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형인간 - 어떤 과학이나 기술보다 강하다
샥티 거웨인 지음, 고빛샘 옮김 / 뜰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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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직관에 따라 사는 법을 배우고 싶은가? 이 책에 그 방법이 나온다." 

 이 구절을 읽고서 책을 집어든 사람이라면 어찌하든지 끝까지 읽어낼 것입니다. <블링크>라는 책이 직관의 유용성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 뒤로 -물론 그 전에도 관심이 있었겠지만,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었다는 의미에서- 이에 동의하는 책이나 이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책을 여러 권 보았던 듯 합니다. 직관과 논리적인 사고. 각기 나름대로 장단점과 쓰임이 있고, 적절한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이용된다면 분명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리라는 생각을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직관보다는 논리적인 과정을 거친 사고를 더 중요시하고 존중하는 듯 합니다.  특히 교육과정의 대부분은 바로 그러한 논리적인 사고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니 우리들의 태도가 그러한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논리적인 사고와 직관을 반드시 대립항에 놓고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이러한 종류의 책을 대할 때마다 매번 머릿속을 맴도는 것도 사실입니다. 

 먼저 저자는 '직관형 인간'에 대한 정의를 '자신의 직관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이를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직관'이란 '1. 판단, 추리, 경험 등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파악하거나 지각할 수 있는 힘이나 능력, 2. 대상을 보거나 듣는 즉시 곧바로 깨닫는 통찰력'이라고 정의 하고 있습니다. '왜 직관을 개발해야 할까?' 이에 대해 저자는 '직관은 우리 인생에 성공과 충만감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자원'이며 '타고난 권리이자 특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생각에 직관은 인생이 모든 면에서 정확한 길잡이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감각으로, 특히 무수히 만나게 되는 인생의 선택 상황에서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주고, 내면의 영적인 본성과의 교류를 통해 매일매일 충만한 삶을 살게 도와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부처나 예수, 아인슈타인이나 에디슨 등이 직관형 인간이었는데, 그들의 훌륭한 업적은 직관과의 원할한 소통과 창의성의 발현에 기여한 직관의 역할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능력있고 창의력 넘치고, 에너지가  충만한 삶에 대한 약속이 직관력의 개발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지요. 

 본문의 내용은 직관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직관이 전하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직관력을 어떻게 기를 것이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직관력을 타고난 경우도 있지만,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개발할 수 있으며, 일상에서의 반복적인 적용과 성공을 통해서 더 깊이있는 직관력에 이를 수 있다는 저자의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 볼 수 있는 방법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직관력에 대한 관심과 유용성에 대한 믿음, 그리고 스스로 그러한 직관력을 갖추고 싶다는 욕구가 조화를 이루어야 시작할 수 있겠고, 또한 꾸준히 실천하고 열매도 얻을 수 있겠지요.   

 제 6감각이라고도 일컫는 직관력은 우리가 실생활에 잘 활용한다면, 이전의 여러 선인들이 보여주었듯이 분명 우리의 생활을 더 풍성하고 활력있게 이끌어 주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 못지 않게 직관이라는 감각의 한계점에 대해서도  나름의 기준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접근이 논리적인 사고 방식이라는 지적을 당할 수 있겠지만, 직관력이 가지는 풍성한 가능성은 많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로인한 실패와 문제들은 찾기 어려운 것은 그러한 실패와 문제가 없어서라기 보다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만한 주제가 못된다는 이유에서이겠지요.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방식들을 시도하고픈 이들은 저자의 말처럼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적용할 일 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세상은..... 직관과 논리적인 사고 뒤엉킨 곳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에 한 표를 던집니다. 즉 직관의 가치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이루는 신기루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 입니다. 그리고 내 스스로의 결론은 둘을 대립항에 놓을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는 사고의 방식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현명한 방식이지 않나 합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이 책의 많은 부분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기를 쓰고 배우려고 달려들 에너지는 이미 상실한 상태라는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건데..... 직관에 따라 사는 법에 관심이 있다면..... 가볍게 한 번 읽어볼 수 있는 책이기는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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