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 

 

 

   

부풀어 오른 달은 점점 쭈그러지다 다시 부풀고

이 별의 가슴 한복판을 벗어날 수 없다

이 별에서 저 달로 촘촘히 징검다리를 놓겠다는

미친 새들은 아름다웠지만

부풀어 오른 바퀴는 슬픔으로 굴러도

시계추처럼 선로를 일탈할 수 없다

 

환한 세상, 빤한 세상

다투어 고속열차 고속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새 역사를 만들기에 바쁜, 분명한

시작과 끝만 보는, 보이는 빛나는 도시

이별과 만남과 이별만

손 흔들고, 으스러지게 끌어안는 포옹만 있는

사막, 선인장은 소금기 수액을 뿜어 내며 무엇을 기다리는가

 

누구도 가지 않아 빈혈 앓는 역

빠르게 지나치는 속도를 눈에 담을 수는 없어

느린 풀을 곱씹는 순한 소처럼 엎드려

나 홀로 간이역을 지킨다

다 해진 신발을 벗고

따스한 햇살 속에 몸을 풀고 있는 기차 등을 핥는다

 

 

 

--- 일상의 속도가 너무나 빠르게 내 삶을 관통할 때면... 저는 조용한 곳을 홀로 찾아가 한참을 머물다 오곤 합니다. 지금은 더 이상 기적 소리도... 고단한 생의 짐을 지고 이고 오가는 사람들의 흔적도 오랜 전설처럼 사라져 버린 간이역은 바로 그 머묾에 가장 걸맞게 고요한 공간이었습니다.

 

  녹이 잔뜩 슨 철로의 늙은 몸을 지는 햇살이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풍경 속에서 이제는 가고 오지 않는 한 세월을 추억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한 때 사랑하는 사람과 청량리를 출발한 무궁화호에서 종착역도 아닌 어느 간이역에 무작정 내려 철로의 간격만큼 떨어져서 철로의 동선을 따라 느리게 걸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아니면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가슴 아파

정처없던 걸음을 멈추고 서서...  간이역의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다시는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려 본 적이 있으신지요?

 

  세상의 속도가 빈혈을 앓을 정도로 당신을 어지럽게 한다면...

  누군가의 부재가 당신의 가슴을 저미도록 도려내고 있다면...

  느린 풀을 곱씹는 소처럼 간이역의 철로에 엎드려 보십시오. 더 이상 달리지 않는 기차의 등에 저무는 햇살이 서서히 내려 앉을 때 그 느린 소의 혀처럼 추억을 곱씹고 또 추억해 보십시오. 

 

  어쩌면 멀리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가 당신에게로 다가설 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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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무엇도 깊어지면 다 신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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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빨리 가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천천히 가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한다는 이정표도 없고

어디에서 떠나야 한다는 출발점도 없다

 

길은 집을 나선다 집을 나선 아이처럼, 해질 무렵

마을 어귀에 다다른 지친 발걸음이

그렇게 돌아오고 있다

 

끊어졌던 뼈가 이어지기도 하고

추억 속으로 사라졌던

기억을 이어주기도 하며 그렇게 천천히

지나온 길들을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길들은 엎드려 풀을 뜯고 있다

 

길이 길임을 알려주는 경계도 없다

억새와 유채는 길을 따라 피어 있고

대문도 없는 빈집, 구멍 송송 뚫린

돌담만이 바람을 흘리며 이곳이 집이라며 속삭이고

 

고봉밥으로 솟은 묘비

없는 무덤들 사이, 길은 잠시 머뭇거리다

긴 그림자를 끌고서 다시 길을 걷는다

 

종착역이 없는 기차는 쓸쓸하지만 온통

길은 땀냄새나는

삶의 간이역만을 통과하며 말한다

 

길에 어찌 종착역이 있느냐고

마침표를 경배하는 자는

이 길에 오지 말라고

 

 

 

--- 요즘 전국 어느 지역에 가 보아도 '올레길'이라는 말을 흔하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올레길을 걸으면서도 '올레'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2011년에 유네스코에서는 우리나라의 가장 유명한 섬 '제주'의 언어(제주어)를 소멸 위기의 언어로 분류한 적이 있는데요...

 

  이 '올레'란 말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섬 '제주'의 언어(방언)입니다. 보통 큰 길에서 집까지 이어지는 좁은 골목과 그 길들을 이 섬에서는  '올레'라고 했습니다. 지금 전국적으로 가장 유명해진 제주 올레길은 제주의 해안 지역을 따라 해안길, 산길, 들길, 각종 오름, 그리고 마을의 골목길 들을 마치 등뼈처럼 연결하면서 이 섬을 도는 뭍사람들의 여행 코스처럼 인식되고 있습니다만... 원래 이 말의 본래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제주도의 마을 곳곳의 좁은 골목길들과 여러 큰 길들이 만나는 곳곳의 풍경, 그리고 그 길 위의 모든 만남들을 의미한다고 보아야겠지요.

 

  억새와 유채가 바람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길가 곳곳에 끊임없이 집을 나섰다가 해질 무렵 돌아오곤 하는 길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 곳곳에 땀냄새나는 사람들의 노동과 그 노동을 넉넉히 받아주는 땅들이 있습니다. 이 길은 절대로 직선의 고속도로가 아니랍니다. 꾸불꾸불 등뼈처럼 이어지고, 이어진 줄도 모르게 연결된 미세한 인드라망의 길이랍니다.

 

  올 겨울,이 길 위에서 저는 생의 운명과 길 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었습니다. 어떤 단 한 사람을 떠올리면서요~.

  삶이란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순간순간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한다 하더라도... 삶의 매 순간 순간은 그 어떤 종착역을 향해 가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발 한 발 디디고 디디는 발자국들은 항상 느낌표를 찍으며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에도... 살아가며 만나는 그 어떤 사랑의 순간들에도 마침표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오늘도 저 '제주 올레' 길이 멀리 있는 제 귀에 속삭입니다.

 

  "마침표를 경배하는 사람은 결코 이 길에 오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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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서  -열쇠
                                                          


모두가 잠들어 가는,
모처럼 기분 좋게 달렸지만

피곤이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새벽

이영훈의 옛사랑을 흥얼거리며
돌아오는 길

문 앞에서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른다

식은 땀을 흘리며 자꾸만
익숙한 몸의 구석구석을 더듬어도
너무나 익숙하다고 믿었던

네가 없다 결코 내곁을
떠나지 못할거라 믿었던

네가 없다 가만히 웅크린 채
평온한 등불을 켜고 나를 기다리는
저 안의 세계처럼

내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
뒤돌아보지 않고 저 어두운 생의 손잡이를
열고 닫아줄 거라고만 생각했던

네가, 네 작은 몸이 없다
텅 빈 벽처럼 문 앞에 서서

공포에 떠는 이
깊은 밤,

 

 

 

- 끊임없이 바람 부는 먼 섬에서 대학이란 곳에 발 디디려고 허름한 자취방을 전전하던 오래 전 그날들.

  김광석과 안치환의 노래를 즐겨 틀어주던 눅눅한 지하의 퀘퀘한 주점, 그 곳에서 주거니 받거니 소주를 거나하게 마시고 아무도 없는 빈 방으로 터벅터벅 돌아오곤 했습니다. 

  사람의 따스한 온기가 이 누추한 몸을 기다리고 있진 않았지만, 그저 이 지구별의 지상 위에... 외롭고 높고 쓸쓸한 몸을 고단하게라도 누일 방 한 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참 눈물겹게 고맙던 시절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예기치 않은 운명이나 일상이 우리네 삶을 끊임없이 방문하듯

그 반복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심야의 귀갓길... 휘파람을 불며 이문세의 노래들을 부르며 기분 좋게 방문 앞에 섰던 2월의 어느 눈 내리는 밤이었습니다.

  어느새 부턴가 모든 것들이 간편하게 숫자를 누르면 띡~~ 하고 열리는 번호키 문으로 거의 바뀌고 말았지만, 그 시절은 거의 모든 집이 쇠를 깎아 만든 열쇠를 품 안에 품고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여튼 저는 방문 앞에서 그 작은 열쇠 하나가 없어 차운 바닥에 철퍼덕 주저 앉아... 조금 과장스럽게 말한다면 한참을 넋놓고 알 수 없는 공포에 몸과 마음을 떨어야 했습니다. 내 가까이에 늘 있다고 아니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지극히 평범한 존재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의 그 당혹스러움과 낭패감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때 열쇠집에 전화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한참을 오들오들 떨던 아픈 기억은 무슨 꿈을 꾸듯이 가끔... 불시에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 기억이 어느새 그리움이 되어 버린 시절입니다. 그래서 시의 언어로 반드시 새겨두고 오래오래 그 문 앞에서 느꼈던 여러 감정을 붙잡아 두고 싶었습니다.

  늘 익숙하기만 했던 것들이 불현듯 사라졌을 때의 그 아픔과 따스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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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

 

사람들은

나를 탄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타는 게 아니라

나를 타고

돌고 싶은 거다

 

커다랗고 아름다운

원을 그리며

 

돌고 돌고 돌아

돌고 돌고 돌아

 

자기(自己)의 바깥으로

한 번쯤 튕겨져 나가

 

저 하늘의 어깨 위로

슬며시 오르기 위해

 

저 별의 눈빛에

빠져들기 위해

 

저 우주의 사랑으로

떠돌기 위해

 

 

 

 

--- 해가 지는 저물 무렵을 지나 어둠이 서서히 내려 앉는 시간에 어슬렁 어슬렁 산책을 나섰습니다. 머그컵에 탄 커피 한 잔을 조금씩 마시며 서서히 몸을 지우는 길들에 서성였습니다. 그러다 한 아파트 안의 작은 놀이터에 이르렀구요.

 

  놀이터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내아이 두엇과 그 아이의 어머니일 듯한 여인 둘이 네모난 스마트폰에 시선을 붙박고 간간이 노는 아이들을 쳐다보곤 하는 풍경이 조용히 펼쳐지고 있었지요. 구석 한 켠에 그네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조용히 그네에게로 다가갔습니다. 머그컵의 식은 커피는 잠시 나무의자에 내려놓고... 저는 좀 전까지 어린 소녀가 힘차게 탔을 것만 같은 그네의 작은 몸에 제 몸을 포개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뒤로 최대한 뒷걸음쳐서 두 발을 허공으로 띄웠습니다. 메트로놈처럼 그네는 왔다 갔다 갔다 왔다 하며 제 몸을 띄웠다 가라앉혔다 반복했습니다. 달이 뜨고 있는 밤이구요...

 

  누군가가 제 등 뒤로 다가와 저와 그네를 따스한 손으로 밀어주고 있다고 순간 느꼈습니다.

아~! 그리곤 저 역시 사랑하는 누군가의 등 뒤로 고요히 다가가 제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힘껏 그 사람과 그네를 밀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단 한 사람과 서로 그네를 타고 그네를 밀어주는 그런 고요한 밤이라면

  그 그네에 탄 나와 당신은 분명 저 별의 눈빛에 닿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어쩌면 우주의 사랑으로 떠돈다 해도 슬프지 않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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