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영화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②

 

 2. 아마존의 눈물, 아바타의 비명 (2)

   
  신화는 한 집단의 인물들이 다른 집단의 인물들에게서 달아나고 도망치려고 하는 이야기를 펼쳐보여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추격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 이것은 천상의 권력과 지상의 권력, 하늘과 땅, 또는 태양과 지하의 권력 등등 사이에 초래된 갈등일 수 있습니다.
 - 레비 스트로스, 임옥희 역, <신화와 의미>, 이끌리오, 2000, 101쪽
 
   

 

 

   하반신 마비로 고통받는 전직 해병대 출신 제이크 설리는 ‘아바타 프로그램’의 일원으로 투입되어 머나먼 행성 판도라로 향한다. 에너지 고갈 문제로 신음하던 인류가 마지막 희망으로 점찍은 행성이 바로 판도라다. 판도라의 토착민 나비(Na’vi)족이 사는 영토에는 ‘언옵타늄’이라는 신비로운 물질이 있다. 언옵타늄은 1kg당 가격이 2천만 달러나 되는 엄청난 교환가치를 지닌 광물질인데, 이것을 채취하기 위해서는 나비족을 이주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비족에게는 아무런 뇌물도 회유도 통하지 않는다. 아바타 프로젝트팀은 ‘돈’은 물론이고 어떤 수단도 통하지 않는 나비족의 영토에 침투하기 위해 ‘아바타’, 즉 외형은 나비족이고 두뇌는 인간에게 연결된 생명체를 탄생시킨다.   
 

 

   “지옥도 이곳에 비하면 낙원일 것이다!” 아바타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쿼리치 대령은 아바타 프로그램에 지원한 젊은이들 앞에서 기세등등하게 연설을 시작한다. 나비족을 비롯한 토착민들과 온갖 신비로운 생명체들이 활보하는 판도라 행성에서 인간은 ‘산소마스크’ 없이는 숨을 쉴 수도 없다. 판도라의 자연환경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인간에게는 판도라가 공포와 야만의 현장일 뿐이다. 쿼리치 대령은 아바타 프로그램에 자원한 병사들뿐 아니라 아바타 프로젝트에 종사하는 모든 연구원과 스태프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는 전형적인 람보형 근육질 마초 남성이며,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부하들을 복종시키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아바타 프로그램에 관련된 과학자였던 쌍둥이 형이 불의의 사고로 살해당하자, 제이크는 형의 ‘대타’로 아바타 프로그램에 투입된다. 해병대 출신인 제이크는 처음에는 쿼리치 대령의 단순하고 직설적인 카리스마에 이끌린다. 판도라 행성의 생태계를 연구하는 과학자 그레이스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은 ‘과학자’이지 ‘군인’이 아니라며 제이크를 못마땅해한다. 형의 죽음이라는 커다란 충격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제이크의 억눌린 감정은 그레이스를 향한 공격적 태도로 표현된다. 쿼리치 대령은 제이크를 자신의 충실한 하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제이크가 덥석 물 수밖에 없는 탐스런 미끼를 제공한다. 나비족과 판도라에 대한 데이터를 자신에게 잘 전해주면 ‘건강한 다리’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언옵타늄을 ‘자원’으로만 바라보는 인간들에게 판도라는 단지 정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아직 판도라에 대한 정보를 ‘아바타 사용 매뉴얼’ 정도로만 습득한 제이크도 처음엔 그랬다. 그는 ‘건강한 다리’를 얻기 위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노동이 바로 아바타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비참했다. 형의 비명횡사를 제대로 아파할 틈도 없이 형의 ‘대체재’로 아바타 프로그램에 투입되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일(전투)도 이제는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가 형의 아바타, 아니 자신의 아바타가 될 생명체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연민과 비감이 교차한다. 너도 꼭 내 신세 같구나.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고, 그저 주어진 삶의 매뉴얼에 복종해야 하는구나. 그가 지금 원하는 것은 오로지 빨리 임무를 완수하고 ‘정상적 인간’으로 되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가 나비족을 추방하기 위한 스파이 노릇을 하기 위해 ‘아바타’의 육신과 링크되는 순간, 그리하여 3미터가 넘는 ‘나비족’의 육신으로 변모하는 순간, 그는 뜻하지 않은 엄청난 해방감을 만끽한다. 걷기는커녕 혼자서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었던 그가 아바타의 육신을 ‘입는’ 순간, 그는 인간의 육신으로 마음껏 걷고 뛰고 구를 수 있었던 그 어느 때보다도 격정적인 희열을 맛본다.
   그는 인간이 마실 수 없는 공기를 마시고, 인간이 뛸 수 없는 높이로 뛰고,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감각의 촉수를 내장하게 된 것이다. 야만적이고 열등한 부족이라고 믿었던 원주민의 몸속에 들어가자마자 샘은 완전히 돌변한다. 그는 두 다리로 멀쩡하게 걸어 다니던 ‘정상적 인간’일 때조차도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감각의 차원과 조우한 것이다.   



   
 

<신화학>의 초판을 쓰고 있을 때, 저는 너무나 신비스러운 문제와 마주쳤습니다. 대낮에도 샛별을 볼 수 있는 어떤 특별한 부족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벌건 대낮에 샛별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천문학 전문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대낮에 샛별이 내뿜는 빛의 양을 알면, 일부 사람들이 샛별을 본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나중에 항해술에 대한 오래된 논문을 조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문명사회에 속한 옛날 선원들도 환한 대낮에 유성을 완벽하게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눈을 훈련시켰다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그렇게 볼 수 있었을 겁니다. (……) 문자가 없는 사람들은 주변 환경과 천연자원에 대해 엄청나게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 레비스트로스, 임옥희 역, ,<신화와 의미., 이끌리오, 2000, 4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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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lsend 2010-01-23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람보의 후예, 쿼리치 대령 ㅋㅋㅋ

니모 2010-01-25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옥도 이곳에 비하면 낙원일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곳이 진짜 낙원이었죠....^^

doingnow 2010-02-01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ㅎㅎ나비족이 되어서 커~다란 키를 늘리며 일어나는 순간을 잊을수가 없어용+_+꺄올
 


 스포일러 주의!!


영화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

 

 1. 아마존의 눈물, 아바타의 비명 (1)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진 자라면 누구든 적(敵)으로 만들어 빼앗아야만 하는가?
 - 영화 <아바타> 중에서  

 
   


   
  신화적인 이야기는 변덕스럽고, 무의미하며, 불합리합니다. 또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전 세계적으로 반복해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임옥희 역, <신화와 의미>, 이끌리오, 2000, 32쪽.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아바타>를 본 후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관객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온 세계가 무의미해졌다”, “판도라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네티즌의 반응도 흥미롭다. 키는 3미터를 훌쩍 뛰어 넘고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육체적 감각과 운동신경을 타고난 나비족들이 자연과 진정으로 교감하며 살고 있는 머나먼 행성 판도라. 그곳은 엄청나게 낯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기시감을 자아내는, 환상 속의 공간이다. 무려 162분 동안 3D 입체 영상으로 펼쳐지는 판도라 행성의 삶은 스크린과 관객 사이의 장벽을 녹여버리며 단지 ‘관람’이 아닌 영화 속 세계의 ‘시뮬레이션’ 효과를 톡톡히 맛보게 해준다. <아바타>는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을 ‘머나먼 3인칭’의 이야기가 아닌 ‘철저한 1인칭’의 직접성으로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최첨단 SF영화가 흔히 보여주는 미래 사회의 화려한 스펙터클을 예상하고 <아바타>를 접하는 관객들은 오히려 나비족의 원시적 문명이 보여주는 ‘태고(太古)의 삶’에 매혹된다. ‘대단한 미래’를 감상하러 간 곳에서 오히려 ‘잃어버린 과거’를 만나는 셈이다. 매연으로 찌든 도로에서 자동차를 타고 있으면 나비족을 태우고 창공을 가르며 날아다니던 ‘이크란’이 부러워지고, 가로등 불빛과 네온사인 불빛으로 가득한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면 식물들 고유의 알록달록한 야광이 발산되어 진풍경을 자아내는 판도라 행성의 아름다운 밤이 그리워진다.

    나비족은 분명 제임스 카메론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부족이다. 나비족의 언어도 언어학자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낸 ‘인공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비족은 그리 낯설지가 않다. 관객들은 나비족에게서 저마다의 가슴 속에 숨 쉬고 있는 이상적인 원시문명의 공간을, 더 이상 ‘야만’이라 치부할 수 없는 태고의 삶을 향한 노스탤지어를 발견한다. 제임스 카메론이 눈부시게 창조해낸 ‘판도라’는 문명의 습격으로 눈물 흘리고 있는 ‘아마존’의 잃어버린 시간을 재현하는 듯한 슬픈 착시를 일으킨다.  
 


   <아바타>는 지금까지 만들어졌던 수많은 SF 영화들과 판타지 영화를 빈틈없이 모자이크하여 집대성한 듯한 극단적인 패러디로도 논란이 되고 있다. 놀라운 것은 ‘하늘 아래 새로울 것 없는’ 그 많은 스토리와 모티프를 과감하고도 노골적으로 패러디한 듯한 이 작품이 자아내는 아찔한 ‘새로움’이다. 말하자면 <아바타>에는 가장 오래된 것과 가장 새로운 것이 미묘하게 공존한다. <매트릭스>, <반지의 제왕>, <늑대와 춤을> 등의 영화는 물론이고 <천공의 성 라퓨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의 애니메이션까지 모두 떠올리게 만드는 낯익은 신화적 모티프들이 총출동한 <아바타>.




   동서양의 신화적 스토리들을 모두 잘게 썰어 믹싱한 듯한 <아바타>는 신기하게도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신화의 구조적 동형성을 떠올리게 만든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신화’와 ‘비(非)신화’로 나눌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신화 아닌 것’을 골라내기 힘들 정도로, 인류가 창조하고 향유해온 이야기들 속에는 신화적 요소들이 크고 작은 비율로 섞여 있다. 동서양 신화들이 갖추고 있는 가장 흥미로운 요소들을 오려 붙이면 신기하게도 레비스트로스를 비롯한 수많은 인류학자와 신화학자들이 도출해낸 ‘신화의 원형’에 접근하게 된다. 

   우리는 ‘판타지 영화’를 전형적인 ‘킬링 타임용’ 영화라고 생각하곤 한다. 현실과 거리가 머니까, 허황되니까, 그저 상상일 뿐이니까. 하지만 판타지 영화의 대부분이 전형적인 신화적 서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신화적 스토리는 언제나 ‘비현실적’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그때마다 매혹되는 이유는, 그 신화적 공간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이 숨어 사는 공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영혼이 시공간의 제약을 뚫고 자유롭게 비상하는 시간, 바로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 혹은 원시문명 속 야생의 사유가 꿈틀거리는 순간. 


   
    초현실주의는, 철저하게 ‘감각의 논리’에 충실하게 되면, 무의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논리가 마치 자동기계처럼 진행된다는 점을 명백하게 한 바 있습니다. 신화에서 종종 유사한 일이 일어납니다. 뇌 속의 논리에 가해지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최대한 제거되면, 신화 특유의 논리가 자유롭게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를 이야기하거나 듣고 있으면 엄청난 자유로 가득 차 있는 시공에 체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역,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동아시아, 2003,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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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10-01-21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앗, 이렇게 따끈따끈한 영화를....이번엔 또 어떻게 아바타를 잘게 썰어 믹싱하실지...궁금, 또 궁금....

chffkd 2010-01-21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래를 만나러 간 곳에서 오히려 과거를 만나다~! 저도 쫌 아바타 우울증 걸린 것 같아요. 꿈에서도 나비족과 판도라의 영상이 보인답니다, 쿠울럭...^^

doingnow 2010-02-01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맞아요 미래를 만난곳에서 만난 과거.. 전 아마존의 눈물을 보고나서 아바타를 보러가서 그런지 그런 생각이 번뜩 들었었어요 아이러니이~한거죵?!
 




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마지막 회

 

 13. ‘우울한 결핍’에서 ‘유쾌한 차이’로 (3) 

   
  여성적 윤리는 죽지 않는 것, 사랑이다.
 - 줄리아 크리스테바
 
   


   우리는 ‘아브젝트’가 추방되고 사형되고 사라지는 수많은 영화들을 감상한 경험이 있다. <조스>에서 끔찍한 식인 상어들은 인간의 단결된 힘으로 처치되었으며, <프랑켄슈타인>에서 인간의 시체에서 나온 잔해들로 만든 ‘괴물’은 인간의 지혜로 살해되었으며, <괴물>에서는 힘없는 소시민 가족의 좌충우돌 모험기를 통해 ‘어쨌든’ 괴물을 소탕했다. 혐오와 공포의 대상인 괴물은 영화의 종반부에서는 반드시 퇴치되는, 주인공에게 가장 ‘적대적’인 조연급 배우였다. ‘괴물’이 주로 ‘인간’이 아닌 존재로 등장하거나 누구나 분노할 만한 엄청난 죄를 지은 존재로 묘사되는 것은 괴물의 제거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곤 했다.




   그런데 영화관을 나올 때마다 우리는 매번 뒤통수가 따갑거나 먹은 것이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듯한 석연치 않은 감정을 느끼곤 하지 않았던가. 괴물을 소탕하고 살해하고 처치하는 인간들의 현란한 스펙타클에 집중한 나머지 우리는 막상 ‘괴물의 입장’을 듣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그 괴물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숨죽이고 웅크린 숨은 욕망 어딘가를 닮은 구석이 있지 않았던가.

   영화 <슈렉>의 급진성은 바로 언제나 관객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조연급 배우 ‘괴물’을 관객들의 폭발적인 사랑의 대상인 ‘주인공’의 자리에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영화의 러닝타임 동안 괴물의 관점에서, 괴물의 마음으로, 괴물의 시공간을 체험하는 기회를 맛보게 된 것이다. 아브젝트의 시점에서, 아브젝트의 삶과 사랑과 꿈을 체험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크리스테바의 철학적 기획과 <슈렉>의 급진성이 만나는 지점이 아닐까. 




   만약 <슈렉>의 결말이 ‘못생긴 피오나 공주’가 슈렉의 키스를 받아 ‘어여쁜 피오나 공주’의 본모습을 찾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미녀와 야수>에서 남녀의 위치만을 바꾼 결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슈렉>은 상대방의 야수성과 야생성을 반드시 교정해야만 획득되는 문명인의 사랑이 아니라, 그가 야수인 채로, 그가 ‘늪의 괴물’인 채로 사랑하는 법을 발견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슈렉>의 또 다른 미덕은 버려진 존재들, 짓밟히고 배제된 ‘아브젝트’의 이야기를 굳이 오싹한 공포물이나 손발이 오그라드는 멜로물로 만들지 않고 유쾌하고 산뜻한 ‘애니메이션’의 그릇에 담아냈다는 것이다.  



   <슈렉>에서 슈렉과 피오나 못지않은 드라마틱한 로맨스의 주인공은 바로 동키와 핑크 드래곤이다. 처음에는 거대한 핑크 드래곤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그녀의 ‘여성성’을 이용했던 동키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핑크 드래곤의 구애를 피하다가, 마침내 그녀의 도움을 받아 슈렉과 피오나를 구해내는 과정에서 그녀의 진정한 여성성을 발견해내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여자 생쥐와 남자 사자 사이의 슬픈 로맨스처럼, ‘생물학적 차이’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에피소드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슈렉>은 우리가 ‘어쩔 수 없다’고 믿었던 생물학적 차이마저 유쾌하게 넘어버린다. <슈렉 3>에서 핑크 드래곤과 동키 사이에서 태어난 귀여운 ‘하이브리드’들은 우울한 결핍 혹은 넘어설 수 없는 차이를 핑계로 헤어지는 사람들에게 통쾌한 해답을 제공한다. 너와 나의 차이가 인종의 차이든, 계급의 차이든, 더 나아가 ‘생물학적 종(種)의 차이’일지라도, 우리의 사랑이 그 차이를 끌어안을 만큼 크고 따스한 것이라면, 그 사랑의 결과물은 저토록 귀여운 ‘하이브리드’ 후손들일 것이라고 말이다. 
 

     동화들은 흔히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난다. 하지만 <슈렉2>와 <슈렉 3>는 간신히 서로의 사랑으로 맺어진 슈렉과 피오나 커플이 정말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장애물들이 남아 있음을 증언한다. 아무리 위대한 커플이라도 ‘결혼’만 했다 하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자동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여곡절과 산전수전을 ‘함께’ 했다는 수많은 추억의 퍼즐들이 모여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행복’이라는 커다란 모자이크로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행복’은 단지 주어진 유리한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아닐까. 그러므로 행복은 불행의 요소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과 위험과 불안과 공포까지 마침내 끌어안을 수 있는 감성의 스케일이 아닐까.




   모든 장애물은 ‘잠시’ 활동을 멈추었고, 드디어 아름다운 두 연인의 키스 타임이 시작된다. 마법이 풀리는 방식은 단지 괴물이 미남미녀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모습이 되는 것 또한 마법이 풀리는 ‘또 하나의 길’이니까. 두 사람의 키스가 끝나고 피오나가 거대한 빛의 소용돌이 속에 공중부양까지 당한 이후에도 피오나는 ‘낮의 미모’를 회복하지 못한다. 뭔가 내 안의 응어리가 한바탕 시원하게 씻겨나간 것 같은 느낌은 분명한데, ‘못생긴 외모’는 그대로다. 이럴 수가. 슈렉의 간절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끈질긴 마법이 풀리지 않은 것일까.




 슈렉 : 사랑해요, 피오나.
 피오나 : 슈렉, 나도 사랑해요. 그런데 이해가 안 되네요. 공주는 아름다워야 하는데, 난 왜 이렇죠?
 슈렉 : 당신은 이미 아름다워요. 

 


   우리가 버린 아브젝트를 우리 안의 창조적 혼돈으로 바꾸는 기술. 그것이야말로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여성적 힘, 바로 ‘사랑’의 기술일 것이다. 영원히 너의 사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지금은 네가 나를 사랑하지만 내 얼굴이 주름살로 뒤덮이거나 나보다 더 매혹적인 대상이 나타나면 네가 나를 떠날 것이 분명하다는 불안감, 나의 선천적인 결핍이 너의 밝은 미래에 어둠을 드리울지도 모른다는 공포……. 이런 것들은 사랑의 ‘아브젝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브젝트를 끌어안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고수들이 지향하는 ‘커플의 유토피아’가 아닐까.
   서로의 결핍을 통해 타자의 고통을 내 것처럼 앓게 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동키처럼, 슈렉처럼, 피오나처럼, 그 어떤 결핍이나 단점도 끝내 ‘사랑의 구실’로 변신시키는 연애의 기술을 배운다. 사랑이 원초적으로 품은 불안과 우울, 그 자체가 삶을 아름답게 요리하는 상상력의 에너지원이 되는 순간. 우리의 사랑은 나의 결핍이 도드라질수록, 너의 결점이 유난히 눈에 띌수록, 이상하게도 더욱 완전해지는 즐거운 신비다. 


 

   
 

 나는 여성을 회복할 수 없는 이방인으로 보는 관점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원하는 미국의 어떤 여성주의자들은 그러한 관점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의 동력인 이 영원한 주변성으로 시작하여 긍정적인 개념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성성이란, 달이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태양의 반대라는 점에서 바로 이 달의 형태와 같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 여성이 남성보다 주변성을 더 많이 소유할지는 몰라도, 남성 역시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화해시킬 수 없는 이 부분을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우리는 아마도 항상 헤겔이 말한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일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태양’의 반대편에 있는 ‘달’로서의 여성은〕 공동체가 폐쇄적이지 않도록 하고, 동질적이고 그래서 억압적이지 않도록 하는 불침번일 수 있다. 즉, 나는 여성의 역할을 일종의 불침번, 이질성, 그래서 항상 감시하고 경쟁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 <줄리아 크레스테바 인터뷰>(199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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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lsend 2010-01-19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휴~크리스테바와 함께 하니 <슈렉>이 이렇게 슬픈 영화가 될 수도 있는 거였군요...

니모 2010-01-20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의 결핍과 너의 결점이 넘쳐날 수록 더욱 차오르는 사랑의 신비~!^^

맨손체조 2010-01-20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괴물'의 입장을 듣는 것. 우리가 타자화한 것, 배제한 것들의 다름을 이해하는 것?
 



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⑫

 

12. ‘우울한 결핍’에서 ‘유쾌한 차이’로 (2) 

   
  슬픔은, 그 사람이 좌절감을 느끼기 때문에 적대적으로 생각되는 타인에 대한 숨겨진 공격이 아니라, 상처 입고 불완전하며 텅 빈 원초적 자아의 증거이다. 그러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공격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어떤 근본적인 결함, 선천적인 결여로 인해 고통받는다고 생각한다.
 - 줄리아 크리스테바, <스스로를 향한 타인들>(1989) 중에서
 
   




  슈렉은 슬픔을 방패로 삼아 타인의 접근을 불허하고, 마침내 거대한 슬픔의 커튼 뒤에 숨어버린다. 오랫동안 슈렉은 슬픔의 벽돌로 지은 마음의 성벽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슈렉은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이웃도 없이 오랫동안 자기만의 늪에 갇혀 지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절망은 처음에는 슬픔의 ‘원인’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 선택한 고립과 후천적 대인기피증의 ‘핑계’로 작용한다. 그에게 슬픔은 자신의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선천적인 결핍, ‘괴물’로 태어난 저주받은 운명 때문이라고 믿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 따윈 필요 없어’라고 결론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의 유일한 친구는 슬픔이었다.  





   그런 슈렉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아니 친구가 생겼기에 사랑하는 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모두가 꺼리는 슈렉의 늪에 처음 찾아와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하는 동키가 있었기에 슈렉은 모험을 떠날 수 있었고 피오나를 만날 수 있었으며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온갖 갈등과 혼란, 서로 다른 존재들로 가득 찬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는 한 자폐적 우울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슈렉은 자신을 둘러싼 슬픔의 장막을 스스로 거두고 그녀에게 다가가기를 원한다. 파쿼드와의 결혼을 앞두고 조바심과 두려움에 떠는 피오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진정한 사랑’으로 ‘마법’이 풀리게 될 것이라는 동화적 스토리에 대한 불안한 확신뿐이었다.  





   피오나와 파쿼드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듀록의 모든 시민이 모였다. 파쿼드 군주의 명령에 따라 웃으라면 웃고 박수 치라면 박수 쳐야 하는 듀록의 사람들. 드디어 만인 앞에서 결혼이 성사되었음을 선언하는 순간. 슈렉과 동키는 피오나를 구출하고 슈렉의 진심을 알리기 위해 결혼식장으로 잠입한다. 이 결혼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 앞으로 나오라는 의례적인 코멘트를 향하여 “불만 있습니다!”라고 선언하는 슈렉. 사람들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 게다가 모두가 두려워하는 괴물 오우거가 나타나자 술렁거리고, 피오나는 반가움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복잡한 표정으로 슈렉을 바라본다.



 
 슈렉 : 피오나 공주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혹시 제가 너무 늦지 않았나요? (……) 이 결혼은 안 됩니다.
 피오나 : (두려움 반 설렘 반이 뒤섞인 표정으로) 왜죠?
 슈렉 : 왜냐하면, 왜냐하면……. 파쿼드는 왕이 되기 위해서 당신과 결혼하려는 거예요. 그는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피오나 : (새치름한 표정으로)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당신이 뭘 아나요?
 슈렉 : 저……. 저는요.
 파쿼드 : (슈렉이 더듬거리는 틈을 타 슈렉을 조롱하며) 이거 정말 재미있군! 오우거 주제에 공주님을 사랑하다니! (좌중의 ‘폭소’를 억지로 유도하며 슈렉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괴물과 공주의 사랑이라니! 으하하!
 피오나 : (파쿼드의 ‘폭로’를 통해 드디어 슈렉의 진심을 알게 된 후) 저 사람의 말이 정말인가요? (저물어가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제 자신의 비밀을 밝힐 때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이윽고 해가 지고 석양과 함께 점점 변해가는 피오나의 ‘밤의 얼굴’이 드러난다) 저는 이렇게 낮에는 예쁘고 밤에는 못생긴 사람이에요. 이 비밀을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슈렉은 피오나의 ‘못생긴’ 얼굴에 전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표정이다. “이제야 모든 오해가 풀렸네요.” 공주가 슈렉을 밀어내는 것이 슈렉이 ‘오우거’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슈렉. 파쿼드는 피오나의 ‘밤의 얼굴’에 대경실색하지만 어쨌든 피오나를 아내로 맞아야 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슈렉을 추방하고 공주를 다시 성 안에 가두려 한다. “저놈들을 끌어내라! 당장 끌어내라! 이 결혼식은 끝났다. 이제 나는 왕이다! 너를 죽여버리겠다! 슈렉! 내 와이프는 피오나! 그 탑에 다시 갇혀서 여생을 보내도록 하겠다!”

   파쿼드는 분노와 광기에 사로잡혀 슈렉을 처치하고 피오나를 감금하려 하지만, 피오나와 슈렉 사이에는 이미 진정한 사랑을 확인한 커플 사이에서만 오가는 은밀한 환희의 눈짓이 오간다. 그들은 드디어 서로의 ‘우울한 결핍’을 ‘유쾌한 차이’로 탈바꿈시킨 유쾌한 사랑의 기적을 실현한 것이다. 이제 피오나의 평생의 굴레였던 마법의 저주는 드디어 풀릴 것인가.  




 

   
 

크리스테바의 진술에 따르자면, 모든 문학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이고, 작가가 이질적이고 불결한 것을 배출하는 시도이다. 모든 정화 의식을 가진 성경이 일찍이 이것을 예증했다. 그러나 20세기 문학은 서사적 조직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파열의 위협을 받는 얇은 필름인지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준다. 모든 서사물은 허구적 통일성, 즉 단일한 의미와 동일성을 창조하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통일성이 아브젝시옹의 효과인 한, 그것은 박약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것은 고통의 이야기가 된다.
 - 노엘 맥아피 지음, 이부순 역, <경계에 선 줄리아 크리스테바>, 앨피, 2007, 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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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fn 2010-01-18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쵸잉...슬픔이 장기화되면 그 원인은 더 이상 중요치 않게 되어버리죠. 슬픔 자체가 원인이 되어버리니...
 



영화 <슈렉>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⑪

 

11. ‘우울한 결핍’에서 ‘유쾌한 차이’로 (1)


 동키 : 슈렉, 난 너랑 같이 살고 싶어.
 슈렉 : 이봐, 내가 전에도 말했지! 나는 너랑 같이 살지 않아. 난 혼자 살아! 내 늪! 나! 딴 사람은 아냐! 알겠어? 다른 사람은 싫어! 특히 쓸모없고 짜증나는 말하는 당나귀는 필요 없어!  





   마침내 파쿼드 영주는 아름다운 피오나 공주의 ‘실물’을 보게 되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즉석에서 청혼한다. 전리품을 챙기듯 피오나 공주를 차지하려는 파쿼드의 부담스런 프러포즈. “아름다운 피오나 공주님, 완벽한 신랑의 완벽한 신부가 되어주시겠습니까?” 완벽한 신랑과 완벽한 신부의 조합. 파쿼드가 꿈꾸는 결혼은 신랑 신부의 계약을 통해 재산과 권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피오나 공주의 섹시함은 이 결혼으로 인해 쟁취할 경제적 ·정치적 가치의 ‘덤’인 셈이다.




   피오나 공주의 ‘밤의 얼굴’을 목격한 동키는 이미 서로 사랑에 빠지고서도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는 두 남녀의 ‘양파껍질’을 벗겨내고자 한다. 동키가 보기에 피오나와 슈렉은 더할 수 없는 찰떡궁합이다. 미녀가 야수를 구해내 야수를 기어이 왕자로 탈바꿈시킬 필요도 없고, 아름다운 미녀와 백마 탄 기사가 되기 위해 각종 재테크와 최첨단 성형수술에 목맬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동키의 눈에 비친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최상의 커플이다. 파쿼드가 피오나 공주를 납치하다시피 데려간 후 공황상태에 빠져 있는 슈렉을 보며 동키는 드디어 진심을 털어놓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슈렉이 늪 주변에 쌓고 있는 거대한 마음의 울타리, 자폐증의 성벽부터 부숴버려야 한다. 파쿼드로부터 돌려받은 늪이 몽땅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슈렉을 향해 동키는 이 늪에서 함께 살면 되지 않느냐고, ‘내 것’과 ‘네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동키 : 흥, 그래, 내 늪! 나도 같이 공주를 구했으니까, 절반의 대가는 내 거야.
 슈렉 : (……) 여긴 내 늪이야!
 동키 : 우리 늪이야!
 슈렉 : 포기해!
 동키 : 네가 포기해!
 슈렉 : 흥, 그럴 순 없지!
 동키 : 너는 항상 나, 나, 나만 챙겨. 이제 내 차례야! 넌 항상 날 못살게 굴고, 내가 하는 일을 전혀 고마워 안 해! 항상 막 대하거나 밀쳐내!
 슈렉 : 그래? 그렇게 못살게 굴었는데 왜 다시 온 거야?
 동키 : 친구란 그런 거기 때문이지. 서로 이해해 주고 용서하는 거야! 넌 너무 껍질이 많아, 양파 놈아!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도 몰라! (……) 공주님은 널 좋아했었고 어쩌면 사랑했었을 뿐인데.
 슈렉 : 사랑한다고? 내가 못생겼다고 했어! 괴물이랬어! 둘이 말하는 걸 들었어.
 동키 : 네 얘기한 게 아니었어. 그 얘긴, 다른 사람에 대한 거였어.

 


   ‘끔찍한 괴물’의 오명을 견뎌온 슈렉과 피오나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지만 아직 슈렉은 피오나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 동키는 자신이 말해줄 수도 있지만 슈렉이 그 비밀을 피오나에게서 직접 듣기를 바란다. 슈렉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동키의 우정을 깨닫고 비로소 ‘내 늪’과 ‘네 늪’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모두가 날 싫어해’라는 핑계를 대며 아무도 사랑하지 못했던 자신의 편협함을 깨닫는다.

   동키, 슈렉, 피오나는 서로의 결핍을 통해 배운다.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앓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아브젝트의 가냘픈 흔적을 더듬는다. ‘인간의 영지’와 ‘괴물의 늪’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우리 안의 ‘코라’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길은 없을까. 

 

   
  여성의 희열을 억압된 것으로 보는 라깡과 달리, 크리스테바는 희열과 모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어머니의 몸은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는 코라(chora)이며 희열의 장소, 즉 상징계에서 경험할 주체성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곳으로 강조된다. 이 모성적 육체는 상징계에서 경험할 자아와 타자의 분열, 언어적인 체험을 모두 내포하고 포괄하는 장이 된다. (……) 어머니의 몸은 주체와 분리된 후에도 주체의 무의식에 흔적으로 남아 상징계 질서의 ‘분리의 경계선’에 들어가 그 경계선을 와해하는 적극적인 힘이 된다.
 - 김진옥, <크리스테바와 델러웨이 부인>, 근대영미소설 제12집,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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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ny 2010-01-16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슈렉과 피오나는 굳이 아름다운 공주와 백마탄 왕자가 되기 위해 각종 재테크와 최첨단 성형수술에 목 맬 필요가 없다! ^.^정말 그렇군요ㅋ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