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영화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마지막회


15. I will fly with you…… (2)  

   
  고고학은 수만 년 동안 현생인류의 마음의 구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는 것을 밝혀왔다. 인류의 마음 밑바닥에는 야생의 꽃이 피는 들판이 지금도 존재하는 것이다.
-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옮김, <대칭성 인류학>, 동아시아, 2005, 323쪽. 
 
   


    이 전쟁에 지더라도 ‘배신자’ 제이크만은 확실히 처단할 태세인 쿼리치 대령은 사력을 다해 제이크에게 돌진한다. 쿼리치는 ‘아바타’와 ‘원본’ 사이의 링크를 끊어버리고 원본의 제이크마저 판도라의 유독가스에 노출시켜 죽이려 한다. 제이크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네이티리는 목숨을 걸고 쿼리치에 맞서 그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아바타’의 링크가 끊어졌지만, 네이티리는 ‘원본’인 제이크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그 얼굴을 본능적으로 알아본다.




   그가 나의 제이크임을, 그가 나의 운명임을 알아본 네이티리는 다시 한 번 부족의 샤먼이자 어머니인 ‘모앗’의 힘을 빌려 더 이상 ‘아바타’가 아닌 이제는 원본 그 자체인 ‘나비족의 전사 제이크’를 살려낸다. 그 순간 네이티리는 죽어가는 예수를 품에 안은 마리아처럼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네이티리의 사랑으로 인해, 아니 나비족 전체의 기도와 믿음으로 다시 태어난 제이크. 이제 ‘인간의 육체’를 벗어던진 제이크는, 인간의 육신으로서의 제이크가 죽고 나비족으로 ‘부활’한 바로 그날을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마침내 인간들은 판도라의 ‘언옵타늄’을 포기하고 에너지 고갈 문제로 허덕이는 상처투성이 지구로 돌아간다. 하지만 인간들은 진심으로 나비족의 세계관에 동의한 눈치가 아니다. 나비족 ‘따위’에게 패배한 굴욕과 분노의 눈길은 이 초유의 전쟁이 잠시 휴전상태일 뿐임을 예고한다. 판도라처럼 머나먼 행성, 존재하지도 않는 행성까지 확장하지 않더라도 당장 현대인이 처한 자원 문제는 심각하다. 에너지 문제와 시장의 확장 문제로 인한 끝나지 않는 신제국주의의 행보는 영화 <아바타>의 총력전을 능가하는 처절한 장기전을 예고하는 것이 아닐까. 아직 빼앗길 것이 남아 있는 지구상의 모든 마이너리티들은 철저히 무방비상태의 또 다른 나비족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강자들은 언제든 갖은 명분을 조작하여 약자들을 원수로 만들고, 그들이 소중히 지켜온 ‘언옵타늄’을 빼앗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지구에 거주하지만 여전히 지구를 향하여 이방인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지구를 죽이지 않고 지구와 공존하는 방법을, 아니 지구를 비롯한 이 세계 전체의 거대한 시스템을 파괴하지 않고 그것과 교신하는 방식을 찾지 못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망은 그렇게 먼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네이티리의 샤헤일루와 제이크의 미메시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한 영화감독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평생 동안 연구했던 ‘지구라는 별’의 온갖 신화들, 브라질 원시부족의 신화뿐 아니라 유럽이나 한중일의 신화 속에서도 발견되는 현생인류의 사유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화된 현대의 인간들은 점점 동물처럼 변해간다고들 말한다. 그런 경우의 동물이란 ‘가축화된 동물’을 뜻하므로, 결국 인간의 삶은 점점 가축의 삶과 비슷해지고 있다는 의미인 셈이다. 교육이나 미디어나 가정환경을 통해, 우리의 감각이나 사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정한 관리 수준에 맞도록 길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감각이나 사고가 ‘야생’ 의 상태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러나 단지 잊었을 뿐, 그 야생은 생명과 연결된 무의식 속에 분명 여전히 살아 있다.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옮김, <대칭성 인류학>, 동아시아, 2005, 322쪽.  
 
   




   신화적 사유, 혹은 대칭성의 사유는 아무리 작은 부분에도 전체를 투영하며, 그 어떤 대립과 불평등 속에서도 궁극적인 조화와 균형의 지점을 기어이 찾아내는 의지가 아닐까. 신화적 사유는 인간 조건을 침해하는 시간의 불가역성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것, 타자에 대한 공감의 능력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각자의 판도라를, 우리가 가진 모든 사유의 재료를 동원해 리메이크해내는 영혼의 교감능력이 아닐까. 레비스트로스는 바로 이 능력을, 우리 주변의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재료들 속에서 우리 무의식에 여전히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신화적 사유를 발견해내는 힘을, ‘브리콜라주’라고 불렀다.



   
 

 나는 <야생의 사고>에서 소위 원시인의 사고와 우리 현대인의 사고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려 했어요. 우리 사회에서 상식을 벗어나는 이상한 신앙이나 관습을 목격할 때면, 사람들은 흔히 그것을 고대적 사고의 흔적 혹은 잔존이라고 설명하곤 했지요. 내가 보기엔, 그와 반대로, 이런 사고 형태들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여전히 현존해 있고 생존해 있습니다. (……) 나는 특유한 고유성을 지닌 사고방식의 예로서 브리콜라주를 제시했는데, 사람들은 그러한 사고방식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익하고 부차적으로 보이기에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사고방식이 정신 활동의 본질적인 메커니즘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가 근대적 사고방식이라 믿는 것과는 거리가 먼 지적인 활동과 단도직입적으로 만나게 해줍니다. 사색의 영역에서, 신화적 사고는 블리콜라주처럼 실제적인 측면에서 작동합니다. 그것은 자연계를 관찰하면서 축적한 수많은 이미지들, 즉 동식물들과 그들의 서식 환경, 그들의 특징들, 특정 문화에서 그것들을 사용하는 이미지들을 활용합니다. 신화적 사고는 이러한 요소들을 결합해서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이는 마치 작업거리가 생긴 브리콜뢰르(특정한 목적을 위해 준비된 연장이나 재료가 아닌 아무것이나 사용해 자기 손으로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만드는 사람)가 가까이 있는 재료들을 사용해서 원래 의도했던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그 재료들에게 부여하는 것과도 같지요.
-레비스트로스· 디디에 에리봉 대담,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강, 2003, 172~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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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콩콩 2010-02-19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바타의 대장정이 끝났네요. 제이크의 마지막 대사, 오늘은 내 생일이닷!^^

맨손체조 2010-02-19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제, 4D만 보면 되는데.... 다음에도 최신 영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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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⑭


14. I will fly with you…… (1) 

 제이크 : 쯔테이. 당신 도움이 필요해. 나와 함께 싸워 주겠나?
 쯔테이 : 당신과 함께 날겠소.(I will fly with you)  

   
  신화는 인간과 풍토가, 시간과 공간이 빚어낸 영혼의 성감대지.
 - 최인훈, <회색인> 중에서
 
   


 

   제이크는 자신의 힘으로 제6대 토루크 막토가 됨과 동시에 드디어 나비족의 일원이 된다. 그는 쯔테이와 함께 인간들과의 총력전을 지휘하며 나비족뿐 아니라 판도라 행성에 사는 다양한 부족들을 연합하는 데 성공한다. 급속도로 늘어나는 판도라의 전사들을 보면서 당황한 쿼리치 대령은 총력전을 계획하며 부하들을 다그친다. 그는 나비족의 믿음의 원천인 영혼의 나무를 공격하여 나비족들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충격과 공포’를 심어 주려 한다.  





   쿼리치 대령은 나비족의 믿음의 원천을 조롱한다. 그 파란 원숭이들은 ‘여신 따위’가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나비족의 가치체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병사들도 쿼리치와 함께 나비족의 믿음을 비웃는다. 인간들의 첨단 무기에 활과 화살로 맞설 수 있겠느냐는 걱정으로 노심초사하는 친구 노엄을 향해 제이크는 말한다. 인간들은 판도라의 독성 가스 때문에 숨도 쉴 수 없지만 나비족은 판도라의 지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첨단 기술과 무기에 의존하는 인간들 vs 오직 자신의 몸만이 무기인 나비족 사이의 총력전이 시작된다.  




   인간들의 일방적인 우위로 점쳐지던 전세는 뚜껑을 열어보니 막상막하다. 신기하게도 이크란을 타고 오직 한 명씩 움직이는 나비족의 공군은 결코 거대한 헬리콥터와 미사일에 밀리지 않는다. 오직 기계에 의지하는 인간들과 달리, 진심 어린 절박함 때문이 아니라 나비족에 대한 혐오와 적개심만으로 일방적인 살육의 행렬에 나선 인간들과 달리, 나비족은 한 명 한 명이 극한의 절박함과 극한의 전투의지로 충만하다. 나비족은 오직 혼자 날고 오직 혼자 죽을 준비가 되어 있기에, 판도라를 지켜야 자신의 가족과 부족을 지킬 수 있기에, 명령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인간 병사들의 마음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움직인다. 나비족은 미약한 개인을 거대한 조직으로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부족 그 자체의 힘을 발휘한다. 무엇보다도 나비족은 ‘샤헤일루’를 통해 주변의 모든 생물을 자신의 영혼과 링크시킨다. 판도라의 동식물 하나하나, 돌멩이 하나까지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한 명 한 명의 전사가 곧 나비족이며 판도라이며 세계 그 자체인 것이다. 




   나비족의 전사들은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쿼리치가 이끄는 공군의 무차별 폭격이 시작되자 속수무책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비족 최고의 전사 쯔테이도, ‘아름다운 배신’으로 나비족의 편이 된 트루디도, 노엄이 조종하던 아바타도 죽었다. 쿼리치 대령과 싸우던 네이티리와 제이크마저 위험에 처했을 때, 이제 네이티리마저 의연한 죽음을 준비한 순간, 이제 모든 희망이 사라진 듯한 바로 그 순간,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기적의 손길이 뻗쳐온다. 평화롭던 판도라에 들리기 시작한 전쟁의 괴성에 분노한 판도라의 동물들이 떨쳐 일어난 것이다. 거대한 공룡이나 맘모스의 원시적 힘과 놀라운 유연성을 연상시키는 판도라의 동물들은 얼어붙은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다.

 

   
 

 근대 이전의 전장에서는 말을 탄 전사가 내달리는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전사는 멋들어진 기마술로 말의 속도와 움직임을 조절하고, 속도와 유동성으로 전장을 유동적이며 속도로 가득한 장으로 바꾸어버립니다. 또한 전사의 손에서 날아가는 화기나 화살은 인간의 물리적 힘을 넘어선 거대한 파괴력을 펼쳐냅니다.
 그러나 근대의 기술은 카농포(포신의 길이가 구경의 30~50배에 달하는 긴 포. 단순히 대포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를 발명하고 말았습니다. 유동적이며 재빠른 운동이 지배하던 전장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정지 상태로 향하게 됩니다. (……) 고속도의 화기가 전장을 움직임 없는 심리전의 장으로 바꾸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철포에서 카농포로 이어지는 화기의 역사에서 기마대는 점점 그 의미를 잃고, 병사는 전장을 내달리지 않고 참호 속에 틀어박히고 맙니다. 그때까지 전장은 동물적인 움직임으로 가득한 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참호를 파고 서로를 노려보는 정지된 내성의 장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 나카자와 신이치, 양억관 옮김, <성화 이야기>, 교양인, 2004, 87~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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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10-02-17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새해 첫 시네필~~. 나와 함께 싸워 주겠나? 당신과 함께 날겠소. 싸우다와 날다. 절묘한 궁합이다!!!

rose 2010-02-17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일 플라이 위드 유. 멋진 대사였죠!^^
 


 스포일러 주의!!


영화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⑬


13. I see you……  (3)  

 제이크 : (영화가 시작된 직후, 제이크의 내레이션) 형은 대단한 과학자이지만 나는 부상당해 다리도 못 쓰는 퇴역 군인일 뿐이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내가 받는 연금으론 다리를 고칠 수 없다. 지구에선 자유를 위해 싸우던 군인이었지만 여기선 회사에 고용된 용병일 뿐이다.
 쿼리치 대령 : (아바타 프로그램에 지원한 병사들을 겁주며) 지옥도 여기에 비하면 휴양지나 다름없지.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가 제군들을 간식으로 먹어치울 것이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 중얼거리던 제이크가 이제는 자신이 ‘박멸’해야 할 적군의 리더, 나비족의 열혈 전사가 되었다. 판도라에서 나비족의 일원이 되지 않았다면, 제이크는 ‘다리도 쓰지 못하는 퇴역군인’이라는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제이크는 나비족이라는 진정한 타자를 만남으로써, 사회적 시선의 네트워크가 구성한 강요된 정체성을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접근해 온 제이크를 용서한 네이티리. 그에게 이제 진심으로 “I see you”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지금 제이크 자신이 보지 못한 ‘제이크보다 더 큰 제이크’를 보는 중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 속에서 우리 자신의 육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우리 자신 이상의 것을 본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가 스스로 보여준다고 의식하는 것 이상을 볼 수 있다. ‘그가 보여주는 것’과 ‘내가 볼 수 있는, 당신 이상의 당신’ 사이, 그 거대한 차이가 탄생하는 순간이야말로 그와 나, 우리와 그들의 접속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차이야말로 통계적 수치나 과학의 공식으로 계산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잉여성, 인간의 아우라이기도 하다. 타자의 눈을 통해서만 비치는 나의 모습이야말로 내가 ‘단속’할 수 없는 나의 진정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문명’의 이름으로 타자를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 우리가 아마존뿐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는 판도라들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비족의 샤먼이자 네이티리의 어머니인 모앗은 온힘을 다해 그레이스 박사를 살려보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모앗이 부족 전체가 모인 가운데 치유의 의식을 주관하는 모습은 영화 <아바타> 최고의 장엄한 스펙터클을 연출한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부족 전체가 한 자리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고 노래하는 모습, 천상의 존재와 지상의 존재를 연결하게 하는 샤먼의 거부할 수 없는 위엄. 특히 3D 영상이 연출하는 생생한 현장감에 도취된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서로 어깨를 걸고 단 한 사람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나비족의 일원이 된 듯한 행복한 착시에 빠진다. 우리도 저 수많은 손들 중 하나를 잡고 싶은 마음, 우리도 그녀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된다. “그녀가 부족의 일원으로 다시 걷게 해주소서…….”



 
   하지만 모앗의 걱정이 현실화되었다. 그레이스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이승의 경계를 넘어 에이와 여신을 접견하고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와야만 하는데,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던 것이다. 죽어가면서도 영혼의 나무를 바라보며 “샘플 채취해야 하는데…….”라고 속삭이던, 천상 과학자이던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과학의 힘을 믿었기에 판도라의 생태계를 연구했고, 교육의 힘을 믿었기에 나비족과 소통하기 위해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레이스의 과학은 인간이라는 부족만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의 균형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레이스는 사력을 다해 과학을 추구했고 그 과학의 길 끝에서 신화를 만난다. 레비스트로스 또한 과학의 부재 상태가 신화가 아니라 과학의 힘을 빌려 비로소 신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죽어가면서 문명과 자연 사이, 과학과 신비 사이, 인류와 나비족 사이의 메신저가 되었다. 그녀는 죽어가면서도 더없이 기쁜 표정을, 지금껏 보여준 적이 없던 희열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말한다. “그녀를 만났어. 에이와는 정말 존재해.” 그녀가 에이와를 믿는 한, 그녀는 죽어 사라지지 않고 ‘영혼의 나무’에 깃들어 나비족의 역사와 신화 속에 늘 함께 할 것이다.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판도라의 자연 속으로 저물어갈 것이다. 



                  

   
 

 내 무덤 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고, 잠들지 않았답니다.
 나는 천 갈래 만 갈래로 부는 바람이며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눈이며
 무르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빛이며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당신이 숨죽인 듯 고요한 아침에 잠이 깨면
 나는 원을 그리며 포르르
 말없이 날아오르는 새들이고
 밤에 부드럽게 빛나는 별입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니까요.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I am not there. I do not sleep.
 I am a thousand winds that blow.
 I am the diamond glints on snow.
 I am the sunlight on ripened grain.
 I am the gentle autumn rain.
 When you awaken in the morning's hush
 I am the swift uplifting rush
 Of quiet birds in circled flight.
 I am the soft stars that shine at night.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cry;
 I am not there. I did not die. 

 - 메리 엘리자벳 프라이(Mary Elizabeth Frye), <내 무덤 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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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ing you 2010-02-11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 무덤 가에 서서 울지 말아요. 미드에서도 몇 번 나온 시지요. 넘 좋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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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10-02-09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네필 다이어리> 재밌게 보았습니다만, 하필이면 목요일 저녁이군요, 흑흑흑.....

doingnow 2010-02-1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키키키 저도 갈래요 저요저요

doingnow 2010-02-1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이버 카페 아이디는 ybnormal211이구요~ 영화가 보여주는 환상보다 작가님의 해몽을 통해 영화를 더욱 찐~하게 느끼게 된 것 같아 즐거웠습니다.. 기대할게요

희망 2010-02-1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doingnow님, 오늘 저녁에 카페에서 뵙겠습니다. 8시 40분부터 채팅방이 개설될 예정이며, 정여울 선생님과의 채팅은 9시부터 시작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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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⑫


12. I see you……  (2) 

   
   에리봉 : 당신은 자신의 자아를 잘 모른다고 생각합니까?
 레비스트로스 : 거의 몰라요.
 에리봉 : 그 점은 당신에게만 고유한 것인가요, 아니면 인류 정신의 특성인가요?
 레비스트로스 : 그게 나만의 특성이라고 자부하진 않겠어요. 개인적인 정체성의 감정을 우리에게 부과한 것은 바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 사회는 당신이 어떠 어떠한 사람이기를 원하며, 그 사람이 자신이 행하고 말하는 바의 책임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회적인 압력이 없다면, 개인적인 정체성의 감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험한다고 믿는 것처럼 강렬하지는 않다고 확신해요.
 -디디에 에리봉 대담, 송태현 옮김,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강, 2003, 257~258쪽.
 
   
 




   사경을 헤매는 그레이스 박사를 바라보며 제이크는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 하면 나비족의 도움을 받아 그레이스를 살릴 수 있을까. 에이와의 계시를 믿고 자신을 살려준 네이티리의 신뢰를 어떻게 다시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비족과 함께 판도라를 지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비족의 일원이 될 수 있을까. 그 순간 섬광처럼 지나가는 거대한 새의 이미지. 적수가 없는 하늘의 강자, 토루크. 네이티리가 가르쳐준 바에 따르면 토루크는 ‘마지막 그림자’라는 의미로 이 거대한 새의 주인이 되는 것은 슬픔의 시대에 부족을 이끈 위대한 리더들의 특권이었다.  




   나비족의 역사상 딱 다섯 번밖에 나타나지 않았던 토루크 막토에 대한 나비족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제이크는 나비족의 ‘믿음의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비족이 되는 가장 빠른 길임을 알고 있다. 제이크의 눈빛이 반짝인다. ‘토루크 막토’(마지막 그림자의 라이더, 탑승자)에 대한 그들의 믿음 속으로 온몸을 던지자. “토루크는 하늘의 절대 강자. 그런 그가 머리 위를 보진 않겠지?” 

   인간들과 나비족 모두가 제이크를 버렸지만 이크란만은 제이크의 기운을 감지하고 날아와 자신의 등을 내어준다. 제이크는 이크란과 함께 아무도 길들일 수 없다는 토루크의 머리 위로 날아가 마침내 ‘토루크 막토’가 되는 데 성공한다. 거대한 시조새와 익룡의 형상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이 무시무시한 토루크는 사력을 다해 몸부림치다가 자신보다 더욱 필사적인 제이크의 영혼과 마침내 교감하게 된다. 나비족의 제6대 토루크 막토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난데없는 인간들의 침략으로 하루아침에 살아갈 터전을 잃고 유랑하는 나비족. 부족장의 딸 네이티리는 피난 중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만다. 부족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을 물려받은 네이티리는 막중한 책임감과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 네이티리의 약혼자였던 쯔테이는 나비족의 전사들을 이끌어 인간들과의 총력전을 준비한다. 그러나 그들의 화살과 창만으로는 인간들의 최첨단 무기와 맞서기에 역부족이다. 나비족의 비상 캠프에는 결전의 비장함보다는 갈데없는 난민촌의 절망감이 깃든다. 이때 멀리서 토루크의 괴성이 들려오자 비상 캠프에는 더욱 끔찍한 공포가 엄습한다. 거대한 토루크의 등위에는 바로 나비족의 배신자였던 제이크가 타고 있었다.   


 
   토루크의 등위에서 내려와 보무당당하게 걸어오는 제이크를 보자 나비족 사람들은 마치 ‘메시아의 현현’을 본 것처럼 압도된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제이크를 ‘토루크 막토’라고 부른다. 그들 앞에 나타난 토루크 막토의 몸 여기저기를 만지며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 네이티리의 눈에서도 가눌 수 없는 그리움과 놀라움과 깨달음의 눈빛이 동시에 일렁인다. 저것이 바로 에이와의 계시였던가. 내 손으로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활시위를 놓게 만든 에이와의 마음이 저것이었나. 네이티리는 다시 그를 사랑할 수 있게 해준 운명에 감사한다. “제이크, 나는 너무 두려웠어. 부족의 안전이……. 이젠 아냐. 두렵지 않아.” 그리고 마음을 다해 말한다. “I see you…….” 그것은 단지 ‘당신을 본다’는 의미를 넘어 당신의 영혼과 나의 영혼이 완전히 샤헤일루(교감)를 이루는 순간의 언어적 표현이다.   





   이제 아바타와 조종사 사이의 ‘링크’란 필요 없게 되었다. 아바타와 원본 사이의 구분도 없어져버렸다. 네이티리가 완전한 믿음의 눈빛으로 제이크를 바라보는 순간, 그녀가 “I see you”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인간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으로 만들어진 ‘제이크’가 아니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너를 너 자체로 본다. 인간이었던 너, 문명의 도구였던 너, 문명의 낙오자였던 너, 스파이였던 너, 불구자였던 너, 그 모두를 잊고 나만을 바라보는 너를, 내가 이렇게 보고 있다. 온 힘을 다해. 온 마음을 다해. “I see you”는 닳고 닳은 “I love you”보다 훨씬 깊고 넓은 파장으로 관객의 가슴 속에 새로운 감성의 우물을 파헤친다. 누군가 그런 눈빛으로 “I see you”를 속삭여준다면, 우리는 정말이지 그 눈빛에 기꺼이 익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은 자신이 창조계에서 미천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과, 창조계가 자신보다 더 풍부하다는 것과, 그 어떤 미학적인 창작도 광물이나 곤충이나 꽃이 제공하는 미학적 창작과는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 풍뎅이, 나비는 우리가 틴토레토나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보는 것과 동일한 열렬하고 주의 깊은 관찰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신선함을 잃어버려, 더 이상 제대로 볼 줄을 모릅니다.
 - 디디에 에리봉 대담, 송태현 옮김,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강, 2003,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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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10-02-09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I see cinephile-diary.....^^*

니모 2010-02-09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I see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