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⑤

    5. 타인의 내면을 파괴하는 기술 (1) 

   
  게슈타포는 신체적인 폭력으로 인간을 파괴했습니다. 게슈타포의 선발 기준은 누가 가장 먼저 노년 여성의 얼굴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주먹으로 칠 수 있는가였지요. 하지만 동독의 국가보안부는 달랐어요. 심리학적으로 재능 있고 똑똑한 사람을 선별해서 뽑았죠. 사람들의 내면을 부서뜨릴 수 있는 사람을 뽑았어요. 국가보안부는 내면을 파괴하는 사람들이었고 게슈타포는 몸을 파괴하는 사람들이었죠. 국가보안부에게 감시를 당한 사람들은 사실 희생양으로 인정받기도 힘듭니다. 화려한 상처 같은 게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이 내적인 상처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어요. 겉으로 안 보이는 상처들이 얼마나 정교한 계략에 의해서 생긴 것들이었는지 말이죠.
- 플로리아 헨켈 폰 도너스 마르크(영화 <타인의 삶> 감독)
 
   




   드라이만 부부를 향한 국가보안부의 감시체계는 물샐틈없다. 드라이만의 집 곳곳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동안 국가보안부의 만행을 본의 아니게 지켜본 이웃, 마이네케 부인이 있었다. 비즐러는 마이네케 부인이 드라이만 부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효과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차단한다. “마이네케 부인, 입이라도 벙긋하면 평생 가족을 못 보게 될 겁니다.”

 겁에 질린 마이네케 부인은 의대에 다니고 있는 딸이 혹여 위험에 처할까 봐 그 어떤 양심의 목소리도 낼 수 없게 된다. 마이네케 부인은 변함없이 자신에게 친절과 우정을 베푸는 드라이만의 따스한 태도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비공식 파파라치가 되어야 하는 시스템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안의 가장 소중한 본능, 예를 들어 이웃의 친절에 감사하는 마음까지 도륙당한다. 마이네케 부인은 드라이만에게 차마 비즐러의 도청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녀의 표정은 스스로를 향한 치욕으로 일그러진다. 
 



   결국 국가보안부의 정교한 감시망은 드라이만 부부의 치명적인 사생활의 영역까지 기어이 침투하고 만다. 남편 드라이만도 전혀 모르는 아내 크리스타의 비밀. 크리스타는 이 모든 작전의 배후 조종자라고 할 수 있는 문화부장관 브루노 헴프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타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헴프 장관의 말 한 마디면 ‘배우’로서의 삶을 순식간에 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모두가 부러워하는 잉꼬커플이었던 드라이만 부부에게는 이렇게 결정적인 위기가 찾아왔고, 이 우울한 비밀을 가장 먼저 탐지해낸 것은 바로 비즐러였다. 

 


   비즐러는 자신이 동경해마지않는 아름다운 여배우 크리스타가 결코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내연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이 충격은 ‘감시자 비즐러’에게 결코 ‘이득’이 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의 충격은 그의 ‘임무’ 리스트에 속해 있지 않다. 그는 단지 충실히 감시하고, 분석하고, 보고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도 모르게 자율적인 감성의 회로를 작동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고통이 마치 자신의 굴욕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래된 양철로봇처럼 무표정하기만 하던 비즐러의 얼굴에 짙은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지금껏 살아왔고 현재 살고 있으며 앞으로 살게 될 다른 그 누구와도 동일하지 않다.
 - 한나 아렌트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예인 2010-04-29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백수인지라 인터넷에서 글을 볼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영화 '타인의 삶'은푸코의 권력과 시선의 관점에서 설명하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건필하세요.~~
 


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④

   4. 악당과 영웅이 ‘한 사람’의 몸에 공생하는 법 (2) 

   
  영웅에게는 어떠한 영웅적 자질도 필요 없다.   
- 한나 아렌트
 
   




  

   아렌트는 ‘역사의 법칙’ 같은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인간의 우연적 행위’야말로 중요한 정치적 변수라고 믿었다. 인간을 법칙이나 시스템에 구속시킬수록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여하는 행위의 중요성은 약화된다. 사람들은 시스템의 가면 뒤에 숨어서 자신이 짊어져야할 책임감을 잊기 쉽다. 더구나 ‘국가’라는 커다란 단위로 이루어지는 정치 공간 속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직접 살갗을 부대끼면서 서로를 이해해가는 ‘대면성’의 정치가 실종된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태도는 결국 ‘나 하나’의 가치를 스스로 격하시키는 정치적 행위가 된다. 아렌트는 시민 각각의 ‘대면적’ 참여야말로 탈정치화되고 사생활 중심주의에 빠진 사회의 정치적 대안이라고 보았다.  




    영화 <타인의 삶>에서 비즐러는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방패막이 삼아 한 예술가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을 마음껏 감시한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가 살고 있는 집 모든 곳의 구조를 비즐러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 거실과 서재뿐 아니라 침실과 화장실까지, 그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소리’는 비즐러의 헤드폰으로 흘러들어간다. 비즐러는 자신의 귓가에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공적 언어’로 번역하고 정리하여 보고할 의무를 지닌다. 작가 드라이만과 배우 크리스타의 모든 ‘사적 활동’이 ‘공적 언어’로 변형될 필요는 없다. 비즐러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정보만을 ‘편집’하고 ‘가공’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셈이다. ‘국가’라는 시스템과 ‘개인’이라는 감시대상 사이에서 비즐러는 잔혹한 메신저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바로 이 메신저의 ‘매우 사소한 행위’와 ‘극히 주관적인 감정’에서 예기치 못한 시스템의 균열이 탄생한다. 개인은 시스템을 ‘체화’할 수는 있지만 개인의 존재 전체가 시스템 자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직 특별히 ‘수집할 정보’가 없는 영화 초반부에서 비즐러는 ‘감시자’라기보다는 ‘엿보는 자’에 가깝다. 드라이만의 아내 크리스타의 미모와 연기력에 매혹된 비즐러는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그녀의 몸이 내는 각종 ‘소리’로 그녀의 생생한 이미지를 상상한다. 드라이만의 생일 파티가 있던 날. 비즐러는 변함없이 드라이만과 크리스타 부부의 대화를 엿들으며 보고서를 작성한다. 사람들이 남기고 간 선물을 하나하나 풀어보며 즐거워하는 부부의 대화를 들으며 비즐러는 아련한 감상에 젖는다. 아름다운 여배우 크리스타를 향한 그의 동경이 드라이만에 대한 은밀한 질투와 뒤섞인다. 그는 동독 경찰의 일분자로서 냉철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그의 공적인 역할이 연극을 사랑하고 배우를 동경하는 ‘한 사람’의 자유까지 말살하지는 못한 것이다.  




 크리스타 : (누군가 드라이만의 생일 선물로 준 포크를 만지작거리며 미소 짓는다) 이 포크 좀 봐, 예쁘지 않아? 샐러드 만들 때 쓰는 거야.
 드라이만 : (아내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어디에 쓰는 거든 예쁘잖아.
 크리스타 : (드라이만의 친구가 선물한 만년필을 바라보며) 이것 좀 봐, 이걸로 글을 쓰면 되겠군. 
 드라이만 : 그건 토마스가 준 거야, 그의 취향은 믿을 수가 없다니까.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섞인 얼굴로 악보 하나를 들어올리며)  이건 알버트가 준 거야.
 크리스타 : (작가 알버트에 대한 드라이만의 신뢰와 부채의식을 알기에) 그럼 당신 맘에 꼭 들겠네.
 드라이만 : (알버트가 준 악보의 제목을 읽는다) 선한 사람들의 소나타!

  드라이만은 존경하는 작가 알버트가 국가의 검열 때문에 작품 활동을 계속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한다. 알버트는 여전히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하는 드라이만을 바라보며 더욱 자괴감에 빠져 있다. 그런 알버트의 고통이 남의 일 같지 않은 드라이만은 알버트가 자신에게 준 악보가 어떤 불가능한 구원을 향한 절박한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선한 사람들의 소나타’를 직접 피아노로 연주하는 드라이만. 그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으며 비즐러의 가슴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의 해일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그 불가해한 격정의 진원지를 알 수 없는 그는 여전히 사무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한다. “11시 04분 p.m. 라즐로와 CMS(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암호)는 선물을 풀었고 그 후에 두 사람은 섹스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여러분이 혼자였을 때 발견한 무엇인가를 말로 하든지 글로 쓰든지 어떻게든 다른 이들이 검토할 수 있도록 알려주거나 보여주지 않으면 고독 속에 쏟아부었던 모든 노력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야스퍼스의 말을 빌리자면, 진실은 내가 전달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 철학적 진실에 일반적인 타당성은 없습니다. 철학적 진실이 가져야만 하는 것은 ”일반적 의사 소통 가능성(general communicability)“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명입니다. 특히 그런 인간에 관한 모든 문제를 다룰 때에.
 - 한나 아렌트, 칸트에 대한 강의 중에서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affelatte 2010-04-2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한 사람들의 소나타. ost도 너무 좋다^^
 


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③

   3. 악당과 영웅이 ‘한 사람’의 몸에 공생하는 법 (1)



   
  더 이상 이 나라를 참을 수가 없어,
 인권도 없고 언론의 자유도 없지
 모든 시스템이 날 미치게 해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실제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글을 쓰도록
 영감을 주는 것도 같은 시스템이지
 우리의 양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진정한 걸작이야
 -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영웅에게는 어떠한 영웅적 자질도 필요 없다.   
- 한나 아렌트
 
   





   <슈퍼맨>, <007>, <스파이더맨> 등 각종 액션 히어로 무비를 보고 난 후 극장을 나오면 갑자기 부쩍 ‘작아지는 나’를 느낀다. 이런 영화들은 현란한 스펙터클로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하찮게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한다. 우리가 얼마나 무력하고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헐리웃 블록버스터들은 한 사람의 영웅을 무한대로 확장시키면서 수많은 관객을 무한소로 축소시킨다. 요컨대 액션 히어로 무비들은 ‘한 사람’의 탁월함을 강조하느라 모든 사람을 ‘무의미한 군중’으로 전락시키곤 한다.
 




   그리하여 ‘영웅’이라 하면 우선 헐리웃 액션 히어로를 떠올리게 되는 많은 현대인들은 영웅에 대한 매우 천편일률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타인의 삶>은 그런 의미에서 영웅의 고정된 이미지를 깨뜨리는 영화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 거대한 운명과의 전투, 동시에 우리 모두가 자기도 모르게 저지를 수 있는,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잔혹행위들. 한 사람이 어디까지 잔인하게 타인의 삶을 붕괴시킬 수 있는지, 동시에 한 사람이 어디까지 타인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영화. <타인의 삶>은 인간의 최대치와 인간의 최소치를 ‘동시에 한 몸으로’ 구현하는 매력적인 주인공 비즐러의 이야기다.  


 



   한나 아렌트에게 영웅이란 ‘탁월성’ 자체에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아렌트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능력’에서 영웅의 본성이 비롯된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모든 이에게 영웅의 기질은 잠재되어 있는데, 영웅적 탁월성의 표현이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잠재적 기질을 폭발시킬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모든 이가 지닌 잠재적 영웅을 깨우는 무기는 바로 용기다. 여기서 용기란 자아의 잠재력을 표현하는 의지, 즉 ‘기꺼이 행위하고 말하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또한 영웅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작가’와 ‘관중’이다. 말하자면 아킬레스의 영웅성은 그것을 증언할 ‘그리스인들’의 사랑과 인정, 그리고 그의 행위를 영원히 기억되게 만든 호머 같은 시인들의 존재가 없었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영웅의 삶을 이야기하는 관객’의 존재 없이는 영웅이 결코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요컨대 영웅보다 더 영웅적인, 평범한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항상-이미 내재하고 있는 영웅성에 주목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영웅에게는 본래 그 어떤 특별한 영웅적 본능도 없다고. 오히려 영웅을 영웅이게 하는 것은 ‘관객’의 눈이다. 한 사람의 삶에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포착해내는 능력. 그것을 자기 안에서 끝없이 증폭시키고 확장하는 힘.  


 



   
 

 공연 예술은 정치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공연 예술가들-무용수, 배우, 음악가 등-은 자신들의 탁월함(virtuosity)을 보여줄 관객을 필요로 하며 이는 바로 행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그 앞에 나타날 타인들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과 같다. 이 둘은 모두 자신들의 ‘활동(work)’을 위해서 공적으로 조직된 공간을 필요로 하며, 이 둘은 모두 행위(performance) 자체를 위해서 타인들에게 의존한다.
 - 한나 아렌트, <과거와 미래 사이>, Penguin Book, 1997, 154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qlsend 2010-04-26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비즐러의 연기는 정말 소름끼쳤지요. 그분의 마지막 연기.

맨손체조 2010-04-27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늘도 '작아지는 나'.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의지가 부족해서, 나를 믿지 못해서, 그래서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②

   2. 타인의 삶을 빼앗는 기술 (2)



   
  폭력은 항상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총구로부터, 가장 빠르고 완전한 복종을 가져오는, 가장 효과적인 명령이 나올 수 있다.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권력이다.
 - 한나 아렌트
 
   






   서로가 서로에게 ‘잠재적 파파라치’가 되는 사회. 개인의 자발적 행위 하나하나가 시스템의 질서로 환원되어버리는 세계. 이런 세계에서는 의미 있는 공동체(meaningful community)가 만들어지기 어렵다. 사람들은 타인을 바라볼 때 우선 경계심과 의혹을 먼저 갖게 되며 타인에 대한 선의의 호기심이나 기본적인 배려조차 상실하기 쉽다. <타인의 삶>이 묘사하고 있는 동독사회뿐 아니라 ‘www’ 시스템으로 이제 실시간으로 서로의 삶을 지치지도 않고 탐색하고 있는 ‘자유세계의 세계시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인터넷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해 전 세계 네티즌은 타인의 삶을 향한 일종의 관음증 상태에 빠지곤 한다. 개인이 스스로를 공동체로부터 소외시키는 이러한 상황은 ‘감시받는 자’뿐 아니라 ‘감시하는 자’에게도 해당된다. 권력을 휘두르는 자조차도 권력의 감시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의 주인공 비즐러에게도 이 ‘감시하는 자의 역설적인 부자유’는 더욱 뼛속 깊이 인식된다. 감시당하는 자인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는 아직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도청과 감시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아직 마음껏 서로를 사랑하고, 마음껏 자신들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비즐러는 아직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갇혀 있는 상태’인지 모른다. 그는 ‘타인의 삶’을 감시하고 타인의 정보를 착취하는 것이 자신의 빛나는 재능이라 믿고 있다. 그는 영혼의 자유를 빼앗긴 고통을 아직 깨닫지 못하기에 정체성의 마비 상태에 빠져 있다. 그는 자유의 필요성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를 되찾기까지 더욱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할 것만 같다.

   요컨대 누가 더 갇혀 있는가. 자유로운 창작을 금지당한 극작가 드라이만, 혹은 자신이 원하는 배역을 마음껏 고를 수 없는 여배우 크리스타, 혹은 예술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보고서를 작성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비밀경찰? 이들 중 누가 더 갇혀 있는가. 누가 더 자유를 얻기 위해 더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비즐러가 예술가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사생활에 도청장치를 들이대는 순간, 그는 이미 두 예술가의 모든 욕망을 통제하는 폭력의 미시정치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우리는 매순간 어떤 권리를 지키거나 포기하거나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되찾아주는 크고 작은 욕망의 네트워크 속에서 움직인다. 이 모든 규범화된 ‘행위behavior’들이 정치적 ‘행동action’ 혹은 ‘실천praxis’의 요소가 될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개인의 정체성이 정치 행위의 ‘전제’가 아니라 정치행위의 ‘결과’라고 믿었다. 즉 내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크고 작은 정치적 선택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매순간 ‘만들어지고’ 있다. 예술가의 창조 행위를 감시하는 비밀경찰 비즐러, 정부의 감시망을 뚫고 창작의 자유를 찾아 헤매는 극작가 드라이만, 수많은 남성들의 이상형이자 창작의 뮤즈가 되어온 연극배우 크리스타. 이 세 사람은 각각 어떤 정치적 행동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실현하게 될까.   

 

   
 

  공통감각(common sense)은 사적인 감각과 다르게, 인간이 인위적으로 구축한 세계에 기반하여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공통 감각은 개별적인 오감을 통해 획득한 지각 내용을 세계성(worldiness)의 현실성과 사실성에 적합하도록 만들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므로 주어진 공동체에서 공통 감각의 감소나 상실, 그에 비례하는 미신이나 기만의 증가는 세계로부터의 인간 소외를 나타내는 징표이다.
 - 한나 아렌트, 김정한 옮김, <폭력의 세기>, 이후, 1999, 13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tarsailor 2010-04-25 0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로가 서로에게 파파라치가 되는 사회!
 


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①

   1. 타인의 삶을 빼앗는 기술 (1)



   
   결백한 사람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로 오랫동안 심문을 받으면 분노에 휩싸이거나 자살을 하려고 하지.  
 반면에 죄가 있는 사람은 종종 말하기를 거부하거나 울어댄다.
 자신이 그곳에 있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기 때문이지.
 유죄인지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걸 인정할 때까지 계속 신문하는 거야.
 -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이곳에서는 모든 시민들에게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그들은 이름이나 성격이 아니라 번호와 기호로 대상화된다. 이곳에서는 누군가의 잘못이 곧 누군가의 감시와 처벌로 즉각 처결된다. 이곳에 예술은 있지만 예술가의 자유는 없다. 영화 <타인의 삶>은 1984년 동독, 정보국 요원 비즐러가 학생들에게 ‘효과적으로 용의자의 자백을 받아내는 법’을 가르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곳은 ‘동독’으로 형상화되어 있지만 자유로운 삶이 불가능한 모든 장소의 알레고리처럼 느껴진다. <타인의 삶>이 그려내는 ‘자유 없는 도시’의 분위기는 익숙한 음산함, 친밀한 불쾌감을 자아낸다.
 




   이곳에서는 모든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인덱스카드로 분류한다. 이곳에서는 국가의 감시체제가 개인의 정체성을 관리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 이럴 때 영리한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 시스템을 자기 잘못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다. 약삭빠른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시스템’ 탓으로 돌리는 데 눈부신 재능을 발휘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자신의 모든 잘못을 조직 탓으로 돌리고 자신의 역할을 전체 시스템의 하찮은 부속품으로 축소시키는 일이 쉬워진다. 그렇게 개인의 윤리적 책임은 ‘시스템’이라는 알리바이 뒤로 숨어버린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안정된 삶’을 얻는 대신 스스로를 ‘무책임한, 무의미한, 그리하여 아무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사회에서는 아무리 다양한 욕망과 개성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빼곡하게 모여 살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nobody’로 전락해버린다. 


 



   당시 동독에는 10만 명의 비밀경찰과 20만 명이 넘는 밀고자가 있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비밀경찰의 감시 문제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 잿빛 도시에서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비밀경찰 스타지(STASI: 구동독 시절 인민을 감시하던 비밀경찰)는 시인이자 극작가인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이자 유명 배우인 크리스타의 예술 활동이 서방국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이유로 최고의 요원 비즐러를 투입하여 이들을 감시하게 만든다. 비즐러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는 문화부 장관 브루노 헴프다. 그는 드라이든의 작품을 공연한 크리스타가 파티에서 춤추는 모습을 보며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 그는 크리스타에 대한 사적인 욕망을 은밀하게 감춘 채 드라이만에게 접근한다.    


   “난 문화 행사에 수도 없이 금지 조처를 내린 사람이거든. 그래도 난 예술을 아주 좋아하지. 정부는 예술가들을 보호할 걸세. 동시에 그들도 정부에 빚을 갚아야지?” 드라이덴은 자신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들을 이미 감지하고 있다. “당신이 제 연극을 꼭 좋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전 이 나라를 사랑합니다. 연극을 볼 때, 정치는 잠시 잊으실 수 없겠습니까? 모두가 같은 신념을 공유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헴프는 작가로서 마음대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도 없는 드라이덴의 고통을 마음껏 조롱한다. “한 사람의 사랑과 신념이 연극 하나로 바뀌지는 않소. 어디 당신 마음대로 써봐, 사람들의 마음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거든.” 

 

 
   이런 상황에서는 ‘한 사람’의 힘이 지나치게 과소평가되거나 터무니없이 과대평가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의 능력이 과소평가된다. 익명의 공동체 vs 파편화된 개인의 대립. 이 대립이 극대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유력인사의 영향력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성실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저력은 터무니없이 과소평가된다. 사람들은 나 하나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한 사람의 치명적인 질병이나 사고는 주변사람들의 삶 자체를 뿌리째 뒤흔들어놓지 않는가. 또한 스쳐가는 타인과의 우연한 만남이나 책 속의 문장 하나만으로도 우리 인생의 방향타가 완전히 바뀔 때도 많다. 우리는 셀러브리티 중심으로만 돌아가는 뉴스에, 검색어 순위 다툼으로 얼룩진 인터넷에 온순하게 길들여져, 자꾸만 이토록 중요한 사실을 망각한다. ‘한 사람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고, 위대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
 

 

   
 

 행위(behavior)가 사회적으로 규범화된 활동이라면, 행동(action)은 기존 삶의 양태를 일정하게 벗어나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자발적인 활동이다. 이런 맥락에서 행동(action)은 실천(praxis)에 상응하는 용어로서, 현 상태의 변화를 지향하는 실천적 함의를 갖고 있다. (……) 한나 아렌트는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과 활동적 삶 (vita activa)을 대비시키고, 활동적 삶을 구성하는 근본 활동을 노동, 작업, 행동으로 개념화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그중에서도 행동, 즉 정치적 행동이 가장 중요한 인간의 활동이다.
 - 한나 아렌트, <폭력의 세기>, 12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꼬꼬 2010-04-20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파워풀한 영화지요. 한 신 한 신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장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