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⑮

 15. ‘what’을 넘어 ‘who’가 되는 법 (2)
 

   
   아렌트가 학생들에게 했던 첫마디는 “이론은 없습니다. 모든 이론을 잊으세요(No theories. Forget all theories.)”였다. 그리고 곧바로, “생각을 중지하라”는 것이 자신이 우리에게 한 말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왜냐하면 “사유와 이론은       같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한 사건에 대한 생각은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은 잊혀지고” 그러한 망각은 우리 세계의 유의미성을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제롬 콘, <정치의 약속> 편집자 서문 중에서
 
   




   비즐러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크리스타와 드라이만을 도왔지만, 죽어가는 크리스타를 살리지는 못했다. 트럭에 치여 죽어가는 크리스타를 가장 먼저 발견한 비즐러는 괜찮다고, 당신은 괜찮을 거라고, 타자기는 이미 옮겨놓았으니 당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만 크리스타는 남편에 대한 죄책감을 씻어내지 못한다. 아직 비즐러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드라이만은 크리스타의 사고현장으로 달려와 그녀에게 사죄한다. 용서해줘, 제발 나를 용서해줘. 당신을 의심한 나를, 당신을 한순간이나마 증오했던 나를. 크리스타는 사랑하는 남편의 품에 안겨 더 이상 감시도 처벌도 도청도 취조도 없는 저 세상으로 홀로 떠난다.    

 



   크리스타는 비즐러의 비밀을 간직한 채 안타까운 희생양이 되어버리고, 드라이만은 모든 혐의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비즐러는 강력한 문책을 받은 후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한다. 비즐러의 상사는 눈에 띄는 증거는 잡을 수 없지만 이 모든 것이 비즐러의 솜씨임을 직감한다. “이번 임무는 실패야! 자네의 도청 경력도 끝이고! 자네는 편지 감시부로 좌천될 거야. 편지봉투를 열고 그게 조사되기만을 기다리는 게 자네 일이지. 그 짓을 앞으로 20년간 하게 될 거야. 20년! 더럽게 긴 시간이지.” 비즐러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이제 자신이 ‘무엇’이 아니라 ‘누구’로 살아가야만 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유를 얻었다.  

 



   타인의 가치를 그 사람의 지위로 판단하는 ‘표상의 세계’로부터 타인의 삶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현상의 세계’로 옮겨간 비즐러.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크리스타를 구하려는 한 그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아무것도 없다. 그는 사회적 지위를 잃고, ‘표상의 세계’에는 완전히 무력한 존재로 전락한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누군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도청하여 밥을 버는 악몽 같은 일상의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된다. 타인의 가치를 그 사람의 지위나 그가 가진 정보나 재산으로 평가하는 ‘표상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타자 앞에 진정으로 ‘나타나는(현상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타인 또한 나의 사회적 위치를 통해 나를 판단할 것이며, 그렇게 갖가지 복잡한 ‘표상’이 우리의 정체성을 은폐하는 한, 나의 진정한 자아는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인간이 ‘서로에게 나타나기’ 위해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공공적 공간’임을 강조했다. 서로에게 자신의 진정을 표현함으로써 그 무엇으로도 교환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공공의 공간. 그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공공적 공간을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who)인가를 리얼하고도 교환 불가능한 방법으로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정의한다.  


 

 

   
 

   아렌트는 인간의 삶을 두 가지 위상으로 구별하고 있다. 바로 ‘비오스’와 ‘조에’가 그것이다. ‘비오스’는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개체의 삶이고, 가사성(可死性)을 조건으로 하는 일회적 성격을 띤다. 인간의 삶은 이 ‘비오스’의 위상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삶에 대하여 ‘유례없는 것’이고, 이 개인적 삶의 유례없음이 공공적 공간에서의 복수성을 구성한다. “인간의 복수성이란 달리 유례가 없는 존재자들로 이루어진 역설적인 복수성이다.” 공공적 공간은 비오스의 공간, 정치적인 삶이 생겨나는 공간이다. 한편 ‘조에’는 ‘생물학적인 생명’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조에’의 위상에서는 ‘인간이라는 일자성’을, 즉 동물로서의 인간 모두에게 공통되는 생명을 살고 있다.
 - 사이토 준이치 지음, 윤대석․류수연․윤미란 옮김, <민주적 공공성>, 이음, 2009,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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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초코 2010-05-26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론은 없습니다. 모든 이론은 잊으세요. 멋집니다...
 


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⑭

 14. ‘what’을 넘어 ‘who’가 되는 법 (1)
 

   
  근대에 무세계성(worldlessness)이 증가한 것, 즉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소멸한 것은 사막의 확산으로도 묘사할 수 있다. (……) 우리가 사막의 조건에서 고통받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인간적이며 여전히 본래적이다. 위험한 것은 사막의 진정한 거주자가 되어 거기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 한나 아렌트, 제롬 콘 편집, 김선욱 옮김, <정치의 약속>, 푸른숲, 2007, 246~247쪽.
 
   




   만신창이가 된 영혼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크리스타.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억지로 씻어내는 몸짓으로, 남편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샤워실에서 목욕을 한다. 말없이 이틀 동안 외박을 하고도 변명조차 하지 않는 아내를 향해, 드라이만은 대화를 시도하지만 크리스타는 절망적인 몸짓으로 자신의 몸을 씻어낼 뿐이다. 그들이 서로를 향한 소통의 주파수를 찾지 못하고 있는 동안, 안보부 요원들이 또다시 들이닥친다. 그들은 이미 드라이만이 타자기를 숨긴 곳을 알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타의 얼굴은 공포로 얼어붙는다. 이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내가 남편을 밀고했다는 것, 내가 내 삶의 마지막 자존심을 팔아버렸다는 것, 이제 더 이상 사랑하는 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  

 



   안보부 요원들은 마침내 마룻바닥을 뜯어낸다. 이제 모든 것이 밝혀지는 순간. 허둥지둥 목욕을 마친 후, 샤워가운만 입은 채 겁먹은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는 크리스타. 아내의 배신을 직감한 남편은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다.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무언의 항변을 그대로 담아 아내를 쏘아보는 드라이만. 크리스타가 지금까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던, 완전한 증오의 시선. 남편의 눈에 담긴 경멸과 저주의 뉘앙스를 한눈에 알아차린 크리스타는 샤워가운만 입은 채로 무작정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드라이만의 집 근처에 있었던 비즐러는, 산발을 한 채 맨발로 뛰쳐나오는 크리스타의 모습을 발견한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크리스타는 차도로 뛰어나오다가 마침 달려오던 트럭에 치이고 만다. 그 순간, 드라이만의 집안에서 마룻바닥을 뜯어낸 안보부 요원들은 아연실색한다. 크리스타가 분명히 거기 있다고 진술했던 타자기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다. 비즐러는 크리스타를 위해, 드라이만을 위해, 그들이 사랑했던 예술과 자유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위해, 타자기를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던 것이다.     

    



   비즐러는 안보부가 드라이만의 집을 수색하기 직전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바꿔놓는 커다란 결단을 내린 것이다. 비즐러는 ‘안보부 요원으로서의 정체성’과 ‘예술을 사랑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존재의 분열을 경험했고, 마침내 후자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는 자신이 평생 동안 외면해왔던 또 다른 세상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것일까. 아렌트 식으로 말하면 그는 ‘무엇(what)’을 넘어 ‘누구(who)’의 세계로 이전한 셈이다. ‘무엇(what)’으로 규정되는 존재는 성별, 국적, 직업, 주소 등의 외적 역할로 규정되는 인간의 정체성이다. 이러한 객관적 속성이나 사회적 지위로 인간을 묘사할 때, 사람들은 타인과 ‘공약 가능한 위상’에 놓이게 된다. 즉 공무원 A는 공무원 B로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표상의 공간’이라 한다.

   반면 ‘누구(who)’로 규정되는 존재는 공약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하며, 환원 불가능한 존재의 유일무이성을 인정받는다. 조직 내에서 똑같은 업무를 똑같은 완성도로 처리할 수 있는 타인이 나타나도, 유전자배열이 완전히 동일한 쌍둥이가 나타나도, 지금 여기에 있는 비즐러 한 사람을 대체할 수 없는 세계. 이것이 바로 ‘현상의 세계’다. 서로를 ‘무엇’으로 처우하는 공간이 ‘표상의 공간’이라면, 서로를 ‘누구’로 처우하는 공간이 바로 ‘현상의 공간’이다. 비즐러는 마침내 언제든 대체 가능한 ‘무엇’의 존재에서, 누구로도 교환할 수 없는 ‘누구’의 존재로 비약한 것이다.  

 

 

   
 

   ‘누구’는 ‘무엇’과는 다르게 공약(共約)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내가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이고, 또 타인에게도 귀결시킬 수 없는 것이다. ‘현상의 공간’은 내가 소유할 수 없는 것, 우리가 공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관심에 의해 성립된다. (……)타자의 현상에 흥미를 갖는 것은 우리가 그 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자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타자의 행위와 말을 보고 들으려고 하는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현상의 공간’을 성립시키는 것은, 타자의 ‘세계’의 한 자락이 드러나는 것, 그러한 세계개시(世界開示)에의 욕구이다. ‘현상의 공간’에서 우리는 완전하게 비대칭적인 위치에 있다. (이 경우의 비대칭성은 누구도 결코 타자의 위치를 차지할 수 없고 위치 교환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 사람의 ‘세계’는 그 사람 자신에 의해 보여질 수밖에 없다. 공공성의 이러한 차원에서는 우리가 그 사람의 ‘세계’를 표상(represent)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그 사람을 대리=대표(represent)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 사이토 준이치 지음, 윤대석/류수연/윤미란 옮김, <민주적 공공성>, 이음, 2009, 6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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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⑫

 13. ‘사이’에 존재하는 법 (3)
 

   
   완전한 이해를 포기하는 것, 타자가 타자로서 존재하고 타자로 존재하려고 하는 것을 긍정하는 것,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거리를 줄이지 않는 것, 친밀권은 그러한 타자와의 느슨한 관계의 지속도 가능하게 한다.
 - 사이토 준이치 지음, 윤대석‧루수연‧윤미란 옮김, <민주적 공공성>, 이음, 2009, 110쪽.
 
   





   국가안보부는 끝내 크리스타를 체포하여 그녀가 남편을 밀고하도록 종용한다. 그들은 시작부터 치명적인 발언으로 심약한 크리스타의 감정을 자극한다. “당신은 멍청한 남자와 결혼했어요. 그래서 당신이 누려야 할 자유를 많이 빼앗겼죠.” 크리스타가 불안한 눈망울을 굴리며 신문을 받는 동안, 드라이만은 집안을 수색당하고 있다. 목표물은 바로 드라이만이 <미러>지에 발표한 글을 쓰기 위해 사용했던,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작은 타자기.

   안보부 직원들은 마룻바닥을 뜯을 생각까지는 하지 못한 채 집안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나서야 드라이만의 집을 떠난다. 크리스타는 그날 밤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는 안보부에 감금된 것이다. 집안을 수색당했다는 드라이만의 말을 듣자 친구들은 단번에 ‘범인’으로 크리스타를 지목한다. “크리스타가 자넬 팔아먹은 거야. 자넬 팔고 어디로 숨어버린 거라고.” 드라이만은 진심으로 크리스타를 변호한다. “크리스타는 아무것도 몰라. 알더라도 말하지 않을 거야.” 그는 아내를 전적으로 신뢰하지만 친구들은 모두 크리스타를 의심한다.    

 



   한편, 비즐러는 드라이만을 24시간 감시했으면서도 ‘동독의 치명적인 비밀’을 서방세계에 유포한 드라이만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죄로 문책을 당한다. 비즐러의 직속 상사는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 바로 크리스타를 직접 신문하도록 하는 것이다. 취조의 달인, 협박의 달인으로 명성이 드높은 비즐러에게 크리스타를 직접 맡긴 것이다. 상사는 비즐러에게 ‘정체성의 확인절차’를 잊지 않는다. “자네가 어느 편인지는 알겠지? 그럼 마지막 기회를 주지.”

   비즐러는 장시간 취조로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는 크리스타를 바라보며, 자신이 흠모해마지않았던 아름다운 여배우의 처참한 몰골을 눈앞에서 확인하며, 자신이 이 여성의 인격을 붕괴시켰음을 깨닫는다. 비즐러는 술집에서 마주쳤던 자신을 금세 알아보는 크리스타의 떨리는 눈빛을 바라보며, 자신이 이 더러운 정치적 음모의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그러나 밖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상사의 눈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취조의 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한다. 그는 드라이만은 어떤 경우에라도 구속될 수밖에 없으며, 크리스타만은 드라이만의 비밀을 누설하면 ‘살아날 수 있다’고 협박한다.

 



비즐러 : 사소한 실수로 주연배우를 바꿨으면 좋겠습니까? 관객은 앞으로 당신 이름을 듣지 못하게 될 겁니다. 당신이 협력만 한다면…….
크리스타 : 기사 같은 건 없어요. 타자기도 없어요, 내가 지어낸 거예요.
비즐러 : 그런 게 아니길 바랍니다. 누군가 그 사실을 조사한다면 당신은 위증죄로 적어도 2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겁니다. 당신의 증언이 없더라도 드라이만은 구속됩니다. 우리에겐 이미 유죄를 받아낼 충분한 증거가 있어요. 당신 자신을 생각해요.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너졌는지 아마 모를 겁니다. 이 나라가 당신에게 뭘 해줬는지 생각해봐요. 당신의 삶은 국가로부터 양도받은 겁니다. 이제 그 보답을 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묻는다는 표정으로) 타자기는 어디 있습니까? (회유하는 표정으로) 이 일로 드라이만이 구속되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은 즉시 풀려나게 될 거고요. 우리가 당신을 보호하겠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당신은 집에 먼저 들른 후에 예정대로 오늘밤 연극무대에 설 수도 있어요. 무대, 조명, 당신을 사랑하는 관객들……. 자, 드라이만이 타자기를 어디다 숨겼습니까? 어서 말해요.
크리스타 :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비즐러의 회유 작전에 완전히 넘어가버린 채) 우리 아파트에 있어요. 침실과 복도 사이의 문턱이요. 문턱에 판자가 있는데 바닥에서 떨어져요.  

 



   비즐러는 이 순간 크리스타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두 가지를 한꺼번에 빼앗는다. 사랑과 예술. 그녀의 목숨 같은 예술을 볼모로 하여,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의 비밀을 밀고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국가는 ‘안보’를 빌미로 하여 한 개인의 인생 전체를 붕괴시키는 데 성공한다. 크리스타는 오늘밤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무대에 설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사랑과 자존과 존엄을 잃은 그녀에게서 훌륭한 예술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마침내 비즐러는 존재의 결단을 내린 것인가. ‘안보부의 하수인’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느끼는 한 사람의 관객’이 될 수도 있었던, 새로운 변신의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해버린 것인가.  

 

 

   
 

   친밀권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공간’으로서, 특히 그 외부에서 부인 혹은 멸시의 시선에 노출되기 쉬운 사람들에게는 자존 혹은 명예의 감정을 회복하고, 저항의 힘을 획득‧재획득하기 위한 의지처일 수도 있다. 친밀권이 공공적 공간을 향한 커밍아웃을 지지하고, 발화하는 사람을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정치적 기능을 수행함을, 우리는 예를 들면 ‘종군위안부’ 여성들의 행위 등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친밀권은 담론의 공간임과 동시에 감정의 공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 그것은 공포를 느끼지 않고 말할 수 있다는 감정, 거기서 물러날 수 있다는 감정, 거기에서는 자신이 여러 번 느낀 감각이 이해받을 수 있다(받을지도 모른다)는 감정, 즉 배척되지는 않는다는 감정이다.
 - 사이토 준이치 지음, 윤대석‧루수연‧윤미란 옮김, <민주적 공공성>, 이음, 2009, 111~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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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⑫

   12. ‘사이’에 존재하는 법 (2)


   
   드라이만: (자살한 예르스카에 관한 글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내  원고 괜찮을 것 같지 않나?
 친구 1 :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어.  
 친구 2 : 이런 글을 여기서는 펴낼 수 없다니, 말도 안 돼. 신이 우릴 버렸나 봐.
 친구 1 : 서독의 잡지사에 보내보는 건 어떻겠나? 거기는 제한규정이 별로 없으니 말야.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드라이만은 드디어 ‘행동’을 감행한다. 모든 것을 걸고 예술가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몸짓, 그것은 글쓰기였다. 이제 이 글쓰기의 ‘수신자’가 바뀐다. 국내의 삼엄한 검열장치를 통과하지 않고 직접 외국의 독자들에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알리는 것이다. 드라이만은 언론계 및 예술계에 있는 친구들과 상의 끝에 서독의 <미러>지에 자신의 글을 싣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한다. 그 과정에서 필자의 신원을 숨기기 위해 동독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매우 희귀한 타자기를 구해 사용하며, 그 ‘위험한 타자기’를 아내 크리스타도 모르게 거실과 서재 사이의 ‘문지방’에 감춰둔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드라이만의 글이 서독뿐 아니라 유럽 각지의 언론에 전파되고, 드라이만의 ‘익명의 글쓰기’는 동독의 자유를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와 연민을 자아내게 된다.    

 




   
   동서독의 관계가 긴장 국면입니다.
 최근 <미러>지는 동독의 익명의 작가가 쓴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이 기사는 동독의 자살 상태를 조사한 것으로 가장 충격적인 것은 유명한 연출가 예르스카가 5년간의 연금 생활 끝에 자살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르스카는 올해 3월 5일 자살했으며 1977년 이래로, 동독 정부는 자살자 수를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유럽에서는 오직 헝가리만이 동독보다 자살자 수가 많다고 합니다.
 -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드라이만의 원고는 부메랑이 되어 동독 내부로 다시 전파되고, 마침내 동독의 문화계 관리들은 이 ‘위험한 글쓰기’의 주인공으로 드라이만을 지목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증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더 이상 자신과 만나주지 않는 크리스타에 대한 사심을 끊어내지 못한 헴프 장관은 마치 복수라도 하듯 크리스타를 직접 수사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크리스타를 구속하고 심문해봐. 뭔가 아는 게 있을 거야. 뭐든 정보를 알아내면 그녀는 풀어주게. 어찌됐든, 그녀를 무대에서 보고 싶으니까.” 헴프 장관의 비열한 명령의 의미를 알아챈 비즐러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그들은 크리스타의 입에서 드라이만의 비밀을 밝혀내려 할 것이고, 아내의 입으로 남편의 삶을 붕괴시키는 잔인한 형벌을 크리스타에게 내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비즐러에게는 적당히 윗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크리스타의 신원을 보호할 수 있는 미봉책을 넘어서는, 존재의 결단이 필요해진다. 어떻게 눈에 띄지 않게 크리스타를 보호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어떻게 내 삶의 모든 안전을 버리고 한 사람, 아니 두 사람, 아니 그들에게 걸린 모든 예술가의 자유를 지켜줄 수 있는가의 문제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비즐러 한 사람의 손아귀에는 지금 동독 예술가들의 자유 전체가 걸려 있다. 이 한 사람의 결단으로 역사가 바뀔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대단한’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명령의 결정권자가 아니라 명령의 수동적인 실행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역사의 행로를 결정하는 기로 위에 서 있다.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의 힘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행위’의 힘을 과소평가하지만 어느 순간 한 사람의 힘은 이토록 커질 수 있다. 비즐러는 지금 자신도 모르게 커져버린 스스로의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역사의 구원자가 될 수도 있고, 역사의 살해자가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행위하고 말하는 것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내보이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능동적으로 드러내며 인간 세계에 현상한다.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 1996,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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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10-05-19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 사람'의 '힘'이 여로모로 생각나는 오월....
 


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⑪

   11. ‘사이’에 존재하는 법 (1)



   
    독일민주공화국은 1977년 이후로 자살자의 통계를 내지 않고 있다.
 스스로 죽음에 이른 사람들, 그들은 피 흘리지 않는, 열정이 없는 삶을 참지 못했다.
 죽음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9년 전, 자살통계를 중단한 후, 유럽에서 동독보다 사망률이 높은 나라는 단 하나, 헝가리이다. (……) 오늘 내가 쓰려는 것은 얼마 전 자살한 위대한 극작가 예르스카에 대한 것이다.
 -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드라이만의 독백
 
   




   

   이제 비즐러가 사용하던 ‘도청용 헤드폰’에서는 단지 ‘감시당하는 자의 신상정보’를 넘어서서, 그 이상의 것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자살한 예술가 예르스카가 선물한 악보를 피아노로 직접 연주하는 드라이만. 드라이만이 연주하는 <선한 사람들을 위한 소나타>는 비즐러가 완전히 잊고 있었던, 그의 마음속에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선한 사람’을 이끌어낸다. 그 순간 도청용 헤드폰은 얼어붙은 한 남자의 감수성을 일깨워 사랑의 음악을 연주하는 훌륭한 악기가 된다. 비즐러는 자신의 진정한 결핍이 어디서 우러나오는가를 깨닫는다. 그는 이제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구에게도 정치적 필요 이상으로, 긍정되고 배려되고 응답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그는 국가권력의 충직한 하인으로 인정받지만 그 어떤 ‘친밀권’에도 편입되지 못한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는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타인을 배려하며 타인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다.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에게 사랑받는 행위 속에서 그들의 예술적 영감이 잉태되는 것임을, 비즐러는 이제야 깨닫는다.  



   비즐러의 질투는 단지 아름다운 여성 크리스타를 향한 욕망이 아니라 한 예술가를 향한 경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드라이만을 향한 비즐러의 질투는 자신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선함’과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워주는 존재에 대한 순수한 동경에서 비롯한다. 단지 크리스타의 미모와 연기력에서 나오는 빛이 아니라 드라이만의 사랑과 드라이만의 예술 작품에서 함께 우러나오는, 두 남녀의 사랑이 빚어내는 예술작품들. 그것이야말로 비즐러가 동경하던, 비즐러가 버린 세상 너머에 있던 잃어버린 감수성의 진원지였다. 국가보안부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아름다움에 감사하고,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한 인간의 마음마저 길들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사랑은 비즐러의 도청과 국가안보부의 감시로도 파괴되지 않았다. 비즐러는 역설적으로 그들 내부의 훼손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일깨웠고 그들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열렬하게, 낭만적 사랑의 열정을 넘어서 더욱 깊은 영혼의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 비즐러는 이들의 사랑에서 국가도, 법률도, 도청도 파괴할 수 없는 무언의 힘을 감지한다. 이 아름다운 사랑은 드디어 예술가 드라이만에게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 된다. 그는 ‘바깥세상’을 향해, 위대한 예술가 예르스카의 ‘자살을 위장한 사회적 타살’의 의미를 알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예술가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와의 목숨을 건 투쟁이, 이제 드라이만의 새로운 예술작품 그 자체가 되기 시작한다. 
 

 

   
 

    완전한 침묵과 수동성에서만 인격은 은폐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성질을 소유하고 처분하는 방식으로 인격을 소유하고 처분할 수는 없는 것처럼, 인격의 현시는 의도적으로 할 수 없다. 반대로 타인에게 분명하고 착오 없이 나타나는 인격이 자신에게는 은폐되기 쉽다. 이것은 마치 한 사람을 일생동안 동행하는 그리스 종교의 다이몬처럼 뒤에서 어깨너머로 바라보기 때문에 각자가 조우하는 사람들만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 1996,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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