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⑮

   15. 이젠 행복해요, 이별 없이……



   
    시인은 지겹도록, 님과의 이별을 그렸다. 그것이 이 시인(김소월)에게는 슬픔을 슬픔으로써 해소하는 것이며, 슬픔의 표현이 슬픔의 해방이 되는 것으로써, 시는 자기 탐닉의 도구가 된다.
 - 김준오, <김소월 연구>, 새문사, 1989, 45쪽.

 다리와 팔은 잠들어 있는 기억으로 가득하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슬픔의 치료책은 달콤한 행복의 마취제를 이용한 일시적 대증요법이 아니다. 슬픔은 슬픔의 ‘적절한’ 표현으로만 치유된다. 슬픔은 슬픔인 채로 승화되어야 한다. 슬픔이라는 고체가 혼란이라는 액체를 거쳐 기쁨이라는 기체로 변화하는 점진적 마술은 스스로를 향한 눈속임이다. 슬픔의 바다에 빠져 익사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아무리 호흡이 힘들더라도, 헤엄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식의 거짓 위안을, 누군가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에게 구명조끼를 던져줄 것이라는 환상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가 대상의 결핍을 냉정하게 인정할 때, 좌절된 삶은, 포기된 사랑은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슬픔을 승화시킨 표현 행위를 통해 슬픔을 해방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루디에게 주어진 마지막 숙제였다.  




   루디의 병세가 악화되어 밤새도록 사경을 헤맨 날. 그날 새벽 마침내, 그토록 수줍음을 타던 후지산은 그 장대한 위용을 드러낸다. 루디는 이제 ‘그날’이 왔음을 직감한다. 그는 세상과의 아름다운 작별을 위해, 죽은 아내와의 가슴 설레는 재회를 위해, 정성껏 분장을 하기 시작한다. 마치 오랫동안 부토 공연을 해온 무용수처럼 스스로의 얼굴을 새하얗게 분장한 루디는 아내가 가장 아끼던 일본 의상 유카타를 걸친 채 후지산이 가장 잘 보이는 물가로 숨 가쁜 발걸음을 옮긴다. 조금만 더 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다. 쇠약해진 나머지 걷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루디는 안간힘 끝에 후지산이 마치 거대한 병풍처럼 펼쳐진 물가에 선다. 마침내 생애 최초이자 최후로, 한 남자의 장엄한 독무(獨舞)가 시작된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그녀가 가장 사랑하던 곳에서, 마침내 그녀와 함께 부토의 춤사위를 그려내는 것이었다. 이승과 저승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먼저 간 그녀가 못다 한 춤을 대신 추듯이, 그는 슬픔조차 잊고 부토에 열중한다. 그는 그녀의 옷을 입고 그녀라는 배역을 연기하며 위대한 자연의 풍광을 거대한 애도의 무대 장치로 연출한다. 도대체 언제 저토록 아름다운 춤 동작을 연마했나, 관객이 놀라는 사이, 어느새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쌍무(雙舞)를 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비로소 만난 두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미처 함께 하지 못한 춤사위를 이제 마음껏 함께 나눈다. 부토 소녀의 개인교습과 아내의 어깨너머로 배운 춤사위는 지금 지상과 천상을 잇는 부토의 무지개를 만들고 있다. 비장한 애도의 제의가 접신(接神)의 축제적 희열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그의 슬픔은 마침내 불가능한 춤으로 승화되었다. 생을 다 태워도 모자랄 사랑은 그렇게 아름다운 춤으로 남김없이 연소되었다. 아내의 죽음으로 좌절된 사랑은 억압과 고착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승화라는 탈출구를 찾게 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든 창조적 예술은 본질적으로 좌절된 리비도의 ‘승화(sublimation)’라는 측면을 지닌다. 창조적 예술 활동을 통한 승화는 결국 ‘불가능’을 받아들이는 것, 사랑하는 대상의 결핍과 공백의 필연성을 인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가 예술에서 ‘구원’을 볼 때 우리는 누군가의 억압된 욕망이 승화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행복한 기시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루디의 뻣뻣한 팔과 다리에 꼭꼭 숨어 있던 아름다운 춤사위의 해방으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은 비로소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게 비상한다.  



   한편, 남겨진 가족들은 여전히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관에서 열여덟 살 여자애와, 여자 옷을 입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괴상한 죽음’을, 자식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어머니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아비의 심정을 이해하는 자식은 없고, “반년 사이에 우린 천애 고아가 됐네”라는 이기적인 한탄만이 남는다. 먼 훗날 그들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면, 그때쯤엔 비로소 죽음의 춤을 통해 하나가 된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아내의 유카타를 입은 채 숨진 루디를 직접 발견한 ‘유’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이 아름다운 춤을 직접 관람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죽은 어머니와 매일 스스럼없이 통화하듯 루디 또한 그렇게 죽은 아내와 행복하게 쌍무를 춘 것이다. 루디는 오갈 데 없이 떠도는 유를 위해, 아니 온 마음을 다하여 자신과 함께 아내의 죽음을 슬퍼해준 유를 위해, 자신에게 아내와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부토의 길을 가르쳐준 유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현금을 선물로 남긴다. 어린 소녀는 의연하게 할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족의 품에 무사히 할아버지를 인도한다. 이제 슬픔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 되었다. 그녀는 죽은 어머니는 물론, 루디 할아버지와도 매일 통화하기 위해 변함없이 발랄하고 상큼한 그녀만의 부토를 공연한다. 그녀의 부토는 흩날리는 벚꽃을 닮았다. 그녀의 부토는 꽃잎처럼 하늘하늘 흩어져서, 이토록 무거운 죽음의 고통조차 가뿐하게 날려버릴 듯하다. 
   



   마지막 순간, 어느덧 자연스럽게 그와 함께 춤추고 있던 아내를 만나는 순간, 아마도 루디는 평생을 합친 희열을 넘어서는 극도의 쾌락을 맛보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것만큼이나 슬픈 것은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는 부토를 통해 비로소 새로운 사랑의 능력을 회복한다. 당신이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첫사랑을 시작하듯 다시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사랑하는 능력, 그것이야말로 ‘애도’가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멋진 피날레가 아닐까. 이제 그는 전화기 없이도 그녀와 통화할 수 없다. ‘춤’이라는 아름다운 마음속의 베네치아를 찾았으므로. 날개 없이 나는 법을, 죽음에 대한 공포 없이 사랑하는 법을 깨달았으므로. 피그말리온에게 갈라테이아가 ‘걸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각상’이었던 것처럼, 루디에게 트루디는 ‘죽어서도 춤출 수 있는 단 하나의 무용수’였던 것이다. 슬픔조차 구원이었던 당신을, 이제는 놓아드린다. 


 





   
 

 정신분석의 지식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은 충동과 충동의 변형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부터 정신분석은 생물학적 탐구에 자리를 양보한다. (……) 타고난 예술적 재능과 구체적인 제작능력은 ‘승화’(sublimation) 과정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들로서는 예술 창작의 본질 또한 정신분석적으로는 접근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장진 옮김, <예술, 문학, 정신분석>, 열린책들, 1999, 260쪽.

 이젠 행복해요, 이별 없이……
 -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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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sing sun 2010-04-16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젠 행복해요, 이별 없이...

맨손체조 2010-04-19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날개 없이 나는 법, 가르쳐 줘요^^* 스트레스를 해방시키는 방법두요^^*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⑭

   14.  그림자의 춤 : 나를 벗어 너를 입다 (4)



   
   상실된 대상의 그림자가 주체에게 드리워진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애도와 우울증> 중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의 리비도의 상당 부분을 탐구에 대한 충동으로 승화하는 데 성공했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년의 기억> 중에서 
 
   





     ‘애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어쩌면 ‘함께 슬퍼할 사람’을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와 가장 비슷한 고통을 앓고 있는 사람 혹은 나의 아픔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지 않고 다만 그 끝나지 않는 슬픔의 통로를 함께 나란히 걸어줄 사람을 만나는 것. 애도의 소울메이트를 만나는 것은 이 슬픔의 늪을 건너가는 데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루디는 비로소 그 ‘슬픔의 친구’를 찾아낸 것이다. 부토 소녀 유와 함께 루디는 아내를 찾아 떠나는 마지막 여행을 준비하기로 한다. 그녀와 함께라면, 이 마지막 여행이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내 아내가 여행하고 싶어 해.  너도 같이 가줄래?” 소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루디는 잠든 막내아들 칼에게 말없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아내의 유품과 자신의 짐을 모두 챙겨 생의 마지막 여행길에 오른다.  




   죽은 후에야 남편으로부터 비로소 진정으로 자신의 꿈을 이해받게 된 아내 트루디. 트루디가 평생 가보고 싶어 했던 그 후지산. 루디는 후지산이야말로 루디가 죽은 아내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소임을 깨닫는다. 아내와 평생 살아온 집 곳곳에 남아 있던 후지산의 풍경화는 어쩌면 아내가 끝내 추지 못한 부토의 이상적 무대가 아니었을까. 소녀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며 루디는 아내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 그러나 후지산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부토 소녀 유는 후지산이 ‘아주 수줍음이 많은 남자’라고 소개한다. “구름 속에서 잘 나오지도 않아요.” 정말 후지산은 그토록 기다리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설렘을 등 뒤로 한 채 구름 속에 한사코 그 눈부신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후지산 근처의 숙소에 묵으며 두 사람은 후지산이 수줍은 얼굴을 내미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창문부터 열어젖히지만 후지산은 여전히 구름 속에 숨어 그 찬란한 자태를 숨기고 있다. 그러는 동안 루디의 병세는 점점 악화된다. 아내는 남편의 병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이제 루디는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녀에게 가는 길인데,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녀와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혼자만의 축제를 준비하는 루디, 이 세상에 하나뿐인 애도의 제의를 준비하는 그의 마음은 1분 1초가 아쉽다.



   
 

 장송 블루스(Funeral Blues)
                                 W.H. 오든

 세상 모든 시계를 멈추고, 전화선도 끊어버려라.
 개들에게 뼈다귀를 주어, 더 이상 짖어대지 않게 하라.
 피아노를 침묵하게 하고, 북은 감싸버려라.
 관을 가져오고, 조문객을 부르라.

 비행기를 머리 위에 띄워 탄식하며
 하늘에 글자를 쓰게 만들어라. ‘그는 죽었노라’고.
 비둘기의 흰 목에 검은 상장(喪章)을 두르고,
 교통순경에게 검정 목장갑을 끼워주어라.

 그는 나의 동, 서, 남, 북이었고
 나의 월, 화, 수, 목, 금이었고, 일요일의 휴식이었네.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나의 대화, 나의 노래였네.
 사랑은 영원하리라 생각한 나는 틀렸으니, 

 이제 별들도 필요 없다. 별빛도 모두 꺼버려라.
 달은 감싸버리고 해도 없애버리라.
 바닷물은 쏟아버리고 숲은 쓸어버려라.
 이제 그 무엇도 소용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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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10-04-14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벚꽃과 후지산과 장송 블루스라....

비틀주스 2010-04-15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장송 블루스. 휴 그랜트와 앤디 맥도웰의 <네 번 결혼식 한 번 장례식>에도 나왔던 시였죠. 뭉클...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⑬

   13.  그림자의 춤 : 나를 벗어 너를 입다 (3)




 루디 : (길을 걷다가 ‘Free Hug’팻말을 든 젊은이가 사람들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것을 본다.)
 젊은이 :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프리 허그! 공짜로 안아드립니다.
 루디 : 정말 공짜라고요?
 젊은이 : (웃으며) 네. 
 루디 : (그래도 의심이 가지지 않은 듯 주춤주춤 서성거린다)
 젊은이 : (자신도 쑥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팔을 벌린다)
 루디 : (주춤주춤 다가가 젊은이에게 안긴다)
 젊은이 : (루디를 따뜻하게 안아 준다)
 루디 :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맙습니다.  




   평생 집과 직장만을 오갔던 모범 사원 루디, 아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부토를 함께 관람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던 루디, 춤이나 노래 같은 유희와는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루디. 그가 변하고 있다. 그는 부토 소녀 ‘유’에게 춤을 배운 후부터 타인을 향해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야말로 평생 러닝머신을 달리듯 똑같은 인생만 고집했던 루디에게 아내가 보여주고 싶어 했던 세상인지도 모른다. ‘프리 허그’라는 생소한 퍼포먼스에 불현듯 몸을 맡기는 루디의 입가에는 어색하지만 뿌듯한 미소가 스쳐간다.

   단지 아름답게 흩날리는 벚꽃을 보기 위해 모여든 수천의 인파들, 그 속에서 마치 타고난 천직인 양 부토를 추고 있는 어린 소녀, ‘프리 허그’가 자신의 소명인 듯 열심히 낯선 행인들을 안아주는 젊은이. 어쩌면 이런 것들이야말로 죽은 아내가 진정 보여주고 싶어 했던 ‘다른 세상’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들, 다른 사람이 아파하는 것들, 다른 사람이 행복해하는 것들을 보며 루디는 매일 똑같이 살아온 자신의 삶이 다른 무늬로 재조립되는 것을 느낀다. 죽은 아내를 이해하는 길은 곧 이 세상 사람들, 나와 다른 타인들을 이해하는 길이 아니었을까. 

 


 루디 : 넌 이름이 뭐니?
  : 유(Yu)!
 루디 : (소녀가 you라고 말한 것으로 착각하고) 아니, 나 말고 너(you)말이야.
  : 제 이름이 유(yu)에요! (‘I am yu!’라는 소녀의 문장은 관객에게 ‘I am you!’로 들린다.)
 루디 : 네가 나라고?(You are me?)
  : 제 이름이 유라고요.
 루디 : 하, 그래?
  : 할아버지는요?
 루디 : 루디!
  : 루디? 루, 디. 루디! 기차가 와요. 어서 타세요!

 
 

   소녀의 이름이 ‘you’라는 단어와 발음이 같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루디가 잘못 알아들은 문장, ‘I am you’야말로 이 영화 전체에 아련하게 깔린 복화술이기 때문이다. 루디는 생면부지의 소녀 ‘유(yu=you)’에게서 ‘나’를 본다. 루디는 소녀를 처음 보지만, 죽은 엄마와 매일 통화한다는 이 소녀의 슬픔을 너무도 잘 안다. 죽음의 고통을 차라리 아름다운 춤으로 승화시킨 이 소녀에게 얼마나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남들에게는 그저 춤으로 밥을 버는 걸인처럼 보이겠지만 그녀에겐 이 덧없는 춤이 엄마와 소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루디는 알아준다. 



    루디는 저 어린 소녀가 도대체 집도 절도 없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그녀를 미행한 루디는 공원에서 천막을 치고 살아가는 유를 발견한다. 몸 하나 간신히 들어갈 만한 천막이지만 안팎을 깔끔하게 청소하는 소녀의 침착하고도 경건한 표정을 보자 마음이 시려온다. 루디는 이 소녀에게 묵을 곳을 마련해주고 싶다. 내 아픔을 진정으로 알아준 이 소녀를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 루디는 앞뒤 잴 것도 없이 소녀를 무작정 아들의 집으로 데려온다. 하지만 막내아들 칼은 강경하다.“집에선 저만의 공간이 필요해요! 저 나이에 거리로 나왔다면, 그건 자기가 선택한 거라고요.”루디는 소녀가 아직 어린 아이라며 아들의 인정에 호소하지만 칼은 단호하다.“절 믿으세요. 저 아이가 선택한 삶이라고요!”두 사람이 싸우는 동안 유는 말없이 떠난다. 
 



   루디는 아들이 허락하지 않더라도 소녀와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다. 한때 그의 눈에는 아내가 떠나버린 세상이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폐허처럼 보였다. 그는 평생 해온 대로 각종 쓰레기를 재활용 등급에 따라 정확히 분류할 수는 있었지만, 자신의 삶에 남은 아내의 유품을 어떻게 분류하고 처리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랬던 그가 소녀의 부토를 보며 비로소 깨닫는다. 우리는 저 소녀의 춤에 등장하는 저 코드 뽑힌 전화기처럼, 저렇게 연결될 수 있겠구나. 굳이 전화선에 연결되지 않고도 얼마든지 통화할 수 있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아득한 거리. 당신을 기억하는 내가 아직 살아 있는 한, 당신이 남긴 모든 흔적은 아름답게 재활용될 수 있겠구나. 이제야 알 거 같다. 모든 버려진 것들, 이제는 ‘쓸모’를 잃어버린 모든 유품들, 한 사람의 삶이 남기고 간 덧없는 잔해들이야말로 죽은 이의 흔적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아늑한 거처임을. 당신이 남긴 아주 작은 흔적조차도 당신의 부재가 아니라 당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내 작업은 아주 간단하다. 내가 뉴욕에 온 이유는 이곳이 가장 황량하고 가망이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도처에 깨진 것과 무질서가 보편화되어 있다. 당신은 그것을 보기 위해 눈만 뜨면 된다. 파멸된 사람들, 깨어진 것들, 파편화된 생각들. 도시 전체가 쓰레기더미다. 하지만 내게는 그곳이 최적의 장소다. 나는 거리를 끝없는 물질의 원천으로, 부서진 물건들의 끝없는 저장고로 발견했다. 매일 나는 종이봉투를 들고 옮겨 다녔고 연구할 가치 있는 대상들을 수집했다. 내가 발견한 물건들은 그 사이에 수백 가지로, 폭발한 것에서부터 터진 것, 조각이 난 것에서부터 쥐어짜진 것, 짓눌러 부서진 것에서 썩어빠진 것에 이르기까지 쌓였다. 그럼 당신은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실 건가요? 나는 그 물건들의 이름을 지어주지요. 이름을요? 나는 그 물건들에 딱 맞는 말들을 만들어내지요.
 - 폴 오스터, <뉴욕 3부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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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파이 2010-04-13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부토 소녀 너무 귀엽다 ^^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⑫

   12.  그림자의 춤 : 나를 벗어 너를 입다 (2)

 


 
  : 난 죽은 사람과 춤을 춰요.
 루디 : 그게 누군데?
  : 우리 엄마요
 루디 : 언제 돌아가셨니?
  : 일 년 전 어제요. 엄만 늘 전화를 좋아했어요. 분홍색 전화기요. 엄마는 항상 통화중, 가족들과요.
 루디 : 우리 집사람도 엄청 전화를 했지. 애들 셋과, 항상 통화중.
  : 이제 전 엄마와 통화중이에요. 언제나요. 엄만 제 속에 있어요.




   열일곱 살 소녀 ‘유’는 집도 절도 없고 의지할 만한 사람도 전혀 없어 보이지만, 늘 밝고 명랑한 미소로 춤을 춘다. 그녀에게서 스며 나오는 이상하리만치 따스한 기운은 아내가 죽은 이후로 늘 춥고 외로웠던 루디의 마음을 감싸준다. 분홍색 전화기로 엄마와 통화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소녀의 춤. 그 사랑스런 광경을 보며 루디는 전에 없이 환한 미소를 짓는다. 나도 이 소녀처럼 부토를 출 수 있다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은 아내와 통화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이제 깨닫는다. 이 소녀의 부토야말로 죽은 아내가 오래 전에 자신에게 보냈지만 이제야 도착한, 너무 늦게 개봉한 편지라는 것을. 아내는 늘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는 그 편지를 한 번도 주의 깊게 뜯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야 주춤주춤 소녀에게 다가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춤을 배우는 루디. 그는 소녀의 춤사위를 통해 점점 가벼워지는 자신의 몸을 느낀다. 살면서 한 번도 꿈꿔본 적이 없던 춤의 세계. 아내가 아무리 좋아해도 함께 관람조차 해주지 않았던 부토. 그는 소녀를 만난 후 집안에서 청소를 하다가도 빗자루를 들어 부토의 동작을 연습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마치 그 평범한 빗자루가 죽은 아내와 교신하는 마법의 안테나라도 된 듯. 그는 빗자루를 높이 추어올려, 수줍지만 분명하게 부토의 춤사위를 빚어낸다.




  : 할머닌 어디 계세요?
 루디 : 난, 몰라……. 그 사람은 도대체 어디 있는지…….
  : (춤 동작을 가르쳐주며) 느껴보세요, 할머니의 기억을요. 할머니와 나눴던 예전의 추억을요. 그리고 천천히 바람을 느껴요. 그리고 저기 저 꽃들을 봐요. 만발한 꽃들. (품안에 안는 동작을 하며) 그 꽃들을 이 품 안에, 안고, 안고, 또 안아요. 네, 그렇게, 안아요! 그러면, 많은 그림자가 보이죠? 할아버지 안에요. 이렇게 하면, 그림자가 사라져요. 그 그림자를 잡아요. 그림자를, 잡아요, 잡아요, 잡았다! 그림자를 붙잡고, 그림자를 느껴요. (루디가 무거운 코트를 입어 더욱 춤동작을 어려워하는 것 같아 웃으며 코트를 벗겨 주려 한다) 춤을 출 때 코트는 벗는 게 나아요. 
 루디 : (코트를 벗으면 큰일이라도 날 듯이 한사코 거부하며) 안 돼, 안 돼!
  : (살포시 웃으며 할아버지의 코트를 벗겨드린다. 좀더 편안하게 춤출 수 있도록. 그런데 할아버지의 코트 속에 숨겨진 여자용 스웨터와 치마를 보자 흠칫 놀란다.) 
 루디 : (치부를 들킨 듯 당황하며) 이건……. 내가 아니라, 내 아내야…….

 


   소녀는 할아버지를 전혀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고, 곧바로 이해한다. 내 안에 돌아가신 엄마가 여전히 살고 있듯이, 할아버지의 마음에도 할머니가 언제나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이제 루디에게 소녀의 부토는 아내와 좀더 가까이, 길고 수다스럽게 통화할 수 있는 영혼의 메신저가 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한탄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다. 아내와의 교신에 언제든 성공할 수 있는 ‘직통 라인’을 찾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는 ‘여보, 내가 여기 있는데 당신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라고 항변하는 듯 애처로운 눈길로 사물을 바라보았다. 이제 소녀를 만난 후 루디는 편안해졌다. 여보, 당신이 아직 여기 있구나. 내 온몸 구석구석이 당신이 사는 장소이구나.  




   
 

 프로이트의 유용한 개념들

 애도 : 실제 상실의 반응
 우울증 : 상상된 상실의 반응
 동일시 : 누군가가 다른 누구 혹은 무언가(상실한 대상)와 동일시하는 과정. 동일시는 투사 혹은 기입을 통해 발생한다.
 투사 : 외부 세계의 대상이 에고로 옮겨지고 보관되는 과정
 기입(incorporation) : 대상들이 육체의 표면에 보존되는 과정
 - 사라 살리, 김정경 옮김,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앨피, 2007,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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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러 2010-04-10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프로이트의 유용한 개념들, 정리 쏙쏙 됩니다 ^^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⑪

   11.  그림자의 춤 : 나를 벗어 너를 입다 (1)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의 국면을 지배하는 주권자로 존재했다. 인간은 오늘날 그런 존재의 모습을 중단했다. (……) 오늘날에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거나 생각해야 할 개념도, 죽음의 순간이 지니고 있던 공적인 장엄한 성격도, 어느 것 하나 남아 있지 않다. (……) 당연히 가족들과 의사의 첫번째 임무는, 죽음을 면할 길 없는 환자에게 용태의 위중함을 은폐하는 것이었다. 환자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더 이상 알아서는 안 되었다. 새로운 관습은 그가 자신의 죽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죽는 것을 요구했다. (……) “나는 적어도 그가 결코 죽음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라는 한 남편이나 한 친척의 말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가?
 - 필립 아리에스, 이종민 옮김, <죽음의 역사>, 동문선, 1998, 196~201쪽. 
 
   


 

   첨단의학이 발달하여 죽음의 주권을 ‘의학’이 쟁탈하기 이전. 전근대사회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일찍 죽거나 ‘사소한’ 질병으로 죽곤 했지만 자신의 죽음을 명확히 감지하여 죽음의 의식을 스스로 연출하는 주인공이기도 했다. 많은 친지들의 마지막 배웅 속에 자신의 못다 한 말을 차례대로 남기고, 자신이 믿는 종교적 의례의 든든한 비호 속에 죽어가는 수많은 영화 속 주인공들을 우리는 보았다. 필립 아리에스의 말에 따르면 근대인의 죽음은 개인의 주체적 체험이라기보다는 ‘진료의 중단’을 통해 획득되는 ‘기술적 현상’이 되었다. ‘고통 없이 죽는 것, 혹은 잠자면서 죽는 것’은 죽음의 이상형이 되었고 우리는 죽음과 독대하는 ‘바로 그 순간’을 꺼리는 문화 속에서 살게 되었다. 

 

   박탈당한 죽음의 주권. 그것은 특히 불치병을 선고받은 환자에게 더욱 치명적인 고통으로 나타난다. 전근대사회에서 죽는 사람도 물론 철저히 혼자였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의 듬직한 배웅 속에 이승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들은 ‘혼자’ 죽는다. 오래 앓던 노인들은 가족의 배웅이 아니라 전문 호스피스의 간병 속에서 죽어간다. 의학의 도움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독거노인들의 죽음은 말할 것도 없다. 철저히 혼자라는 느낌 속에 죽어가는 것은 죽음이 임박했다는 느낌보다 더욱 큰 고통이 아닐까. 죽음의 감지자도 죽는 자 스스로가 아니라 죽음을 선고하는 의사일 경우가 많다. 병을 앓던 이들은 병원의 감시 하에 ‘사망선고’를 받아야 죽음을 ‘인정’받는다. 죽음의 시점을 결정하는 권력은 의료기관에 있고 죽음의 뒤처리는 상조 회사들이 도맡게 되었으며 남겨진 자의 슬픔은 지나치게 간소화된, ‘촌스럽고 감정적인’ 애도를 배제한 절제된 격식에 가둬진다. 

 


   아내 트루디의 본심은 아니었지만, 루디 또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알지 못하기에 죽음의 주권을 본의 아니게 박탈당한다. 그는 점점 쇠약해지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직감한다. 공원에서 부토를 추는 17살 소녀 ‘유’와의 만남은 그가 이 많지 않은 시간을 가장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인도하는 안내자가 된다. ‘유’에게 자연스럽게 부토를 배우면서 루디는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몸의 자유’를 느끼게 된다. 팔다리를 오직 노동과 일상생활에만 사용해왔던 루디에게 ‘춤’이란 상상하기 힘든 유희였다.

   그러나 부토를 추는 일본 소녀 ‘유’와 서툰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루디는 처음으로 자신의 새로운 신체 사용법을 익히게 된다. 끊임없는 노동으로 소모되는 피로와 권태에 찌든 신체가 아니라 춤을 추며 해방되는 신체의 기쁨을 배우게 된다. 그는 부토를 배우면서 조금씩 죽은 아내의 못다 한 꿈에 다가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의 꿈을 향한 미메시스, 그녀의 못다 한 꿈에 빙의되기. 애도는 어쩌면 떠나간 이의 부재로 인해 황폐화된 ‘나의 삶’을 되살리는 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떠난 자의 못다 한 삶’을 뒤늦게나마 다시 살아내는 부활의 제의가 아닐까.

 



  : (자신의 춤사위를 보여주며 루디가 그녀의 실물이 아니라 그림자를 보도록 유도한다) 부토는 그림자의 춤이에요. 내가 아니라 그림자가 추는 거예요. 보세요. (루디에게 가벼운 춤동작을 가르쳐준다.) 이렇게 할아버지 그림자가 춤춰요. 난 그림자가 누군지 몰라요. (분홍색 수화기를 귀에 대며) 여보세요! 누구세요? 대답이 없네요. (뻣뻣한 루디의 몸이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루디의 팔을 잡고 함께 움직여주며) 누구든 부토를 출 수 있어요.
 루디 : (한 번도 춤을 춘 적 없는 듯 난감한 몸치의 표정으로) 난 안 돼.  
  : (천진하게 웃으며) 아뇨, 돼요, 누구든 돼요. 다들 그림자가 있잖아요. 젊은이와 늙은이, 여자와 남자……. 다들 살아 있으면서 다들 죽어 있어요……. 동시에요.



   
 

 상실한 대상을 그녀/그 자신에 옮겨놓고 간직하는 우울증 환자처럼, 에고는 상실한 대상을 투사하고 간직한다. 프로이트는 ‘잃어버린 대상은 에고 안에서 다시 자리를 잡는다. 즉 대상 리비도 집중은 동일시로 대체된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에고는 그것이 포기해야만 했던 모든 욕망의 저장소이다. 또한 프로이트가 말하듯 ‘에고의 특징은 그것이 포기된 대상 리비도 집중들의 침전물이며 그러한 대상-선택들의 역사를 담고 있다’.
 - 사라 살리, 김정경 옮김,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앨피, 2007, 99~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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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러 2010-04-08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실 이 영화를 통해 부토를 처음 봤어요. 서늘하기도 하면서 둔중한 그 느낌. 자꾸 눈에 아른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