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12)

 

  12. 꿈의 시체로 만든 별자리들 (2)

 

   
 

맥스: 언제까지 이 냄새나는 거리에서 살 거야?
 누들스: 난, 이 거리가 좋아.

 
   
 

 

  금주법의 감시망을 피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맥스의 서재는 값비싼 수집품으로 가득하다. 그는 황금 으로 만들어진 휘황찬란한 의자에 앉아 스스로를 암흑가의 제왕으로 임명하는 우스꽝스런 제스쳐도  서슴지 않는다. 오직 한 여자의 사랑을 얻을 정도만큼의 재산 이상은 바라지 않는 낭만주의자 누들스에  비 해 맥스의 물욕은 퇴폐와 광기로 얼룩져 있다. 그는 강간이나 살인뿐 아니라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악행을 빠짐없이 저지르면서도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처럼 행동한다. 맥스의 데보라에 대한 마음 또한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값비싼 물건’을 손에 넣고자 하는 수집가의 집착과  다르지 않다.  

 



  언뜻 보기에 누들스와 맥스는 모두 척박한 뉴욕의 빈민가가 낳은 실패자의 전형처럼 보이지만, 빈털터 리 노인네가 되어 고향땅을 유령처럼 서성이는 누들스보다도 오히려 맥스가 처절한 실패의 주인공이다. 누들스는 소년시절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애늙은이였지만 감옥에 다녀와서도 여전히 때가 묻지 않은 순 애보의 주인공이었다. 누들스는 뉴욕의 뒷골목에서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여전히 그 남루한 뒷골목에   서린 추억들을 사랑한다. 누들스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평생 곱씹어도 매번 새로운 아 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추억의 장면들이 상영되고 있다. 돌아온 탕아 누들스의 눈에 비친 고향의 새로운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초고층 빌딩으로 가득한 뉴욕의 뒷골목 풍경은 어린 시절 누들스가 소매치기의   무대로 삼았던, 마차와 행인으로 가득한 사람냄새 물씬 나는 거리 풍경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작은 기억의 파편만으로도 누들스는 어린 시절 전체를 손쉽게 복원해  낼 수 있다. 고향의 거리 풍경 모든 것이 터무니없이 변했지만 딱 한 곳 변하지 않은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데보라의 오빠 뚱보의 술집이었다. 뚱보네 술집은 여전히 외로운 사람들의 안식처였고, 시간의 광풍  에도 훼손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추억의 장소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뚱보네 술집에 찾아온 누들 스는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했던 운명의 장소, 뚱보네 술집의 화장실 뒤편으로 들어간다. 깨진 벽 돌의 틈새로 보이던 데보라의 아름다운 몸짓. 그녀의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던 세상에서 가장 달콤  한 음악소리. 몰래 자신을 훔쳐보는 누들스의 시선을 분명히 느끼면서도 보란 듯이 옷을 후르륵 벗어 자 신의  아 름 다운 몸을 보여주던 데보라의 도발적인 눈빛. 닳고 닳은 그 벽돌의 틈새가 이 세상에 존재하 는 한, 누들스는 언제든 추억의 한가운데로 순식간에 돌진하여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누들스에 비하면 맥스는 불행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다. 그는 그리워할 추억조차 없는 인간 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엄연히 존재하던 아름다운 추억들조차 짓밟아 추억의 가치를 스스로 말   소시켜버린 인간이다. 그는 추억조차 소유하려 했고 타인의 추억조차 수집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리하 여 그 어떤 추억의 페이지에서도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그는 누들스의 추억을 욕보이고, 누들스의 꿈조차 영원히 짓밟아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도 꿋꿋이 살아남아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생의 끝자락에   와서야 누들스에게 공소시효조차 만료되어 버린 용서를 빈다.  



 
 

 

  맥스는 뉴욕의 기념비적인 골동품을 싹쓸이할 만한 재력을 가졌지만 그 휘황찬란한 수집품들 속에 스  며있는 그 어떤 내밀한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그는 그토록 아름다운 여자와 그토록 소중한  친구와 그토록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꿈의 별자리도 그리지 못한다. 그에   비해 누들스는 빈털터리 노신사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향한 존엄을 잃지 않는다. 그는 데보라와의 추억이 스민 음악의 단 한 구절, 그녀를 엿보기 위해 들어올려야 했던 작은 벽돌 조각, 그녀에게  사 랑을 고백하기 위해 암송했던 성경 구절 단 몇 줄만으로도 충분히, 오래 전에 부서져버린 꿈의 별자리를 재구성해낸다. 아주 작은 기억의 파편만으로도,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옛 도시의 끔찍한 ‘폐허’  속에서조차 누들스는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꿈의 별자리를 그려낸다.  

 
 
  

 

   
 

  자신의 위대함에 저 혼자 반해 법석을 떠는 인류는 스스로를 우주라고 믿고, 끝없이 펼쳐진 곳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감옥 안에 살고 있다.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아케이드 프로젝트』, 새물결, 2005, 13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⑪

 

  11. 꿈의 시체로 만든 별자리들 (1)  

 

   
 

   시간은 순간순간 나를 삼킨다. 마치 그치지 않고 내리는 눈이 굳은 몸을 덮듯이.
 - 발터 벤야민

 
   
 
   
   이 사회는 동물처럼 우둔하지만 동시에 동물이 가진 희미한 직관은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들은 맹목적인 대중으로서 온갖 위험, 바로 코앞에 닥쳐온 위험에조차 희생당하게 되며, 개인들의 목표와 다양성은 개인들을 규정하는 힘들의 동일성 앞에서는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
 -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일방통행로』, 새물결, 2007, 43쪽.
 
   



   가장 아름다운 것조차 가장 추악한 것 속에 고여 있다. 추악한 것을 도려내는 순간 아름다운 것도 함께 사라진다. 누들스의 삶 자체가 그렇다. 누들스에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은 그의 가장 추악한 기억, 즉 맥스와의 기억과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누들스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그 무엇도 맥스와 연관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누들스가 사랑한 모든 것이 곧 맥스가 누들스에게서 빼앗고 싶었던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삶의 끝자락에 와서야 자신의 비열한 만행을 속죄하려는 맥스. 그가 누들스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구했을 때, 누들스에게 떠오른 것은 역설적으로 맥스와 함께 했던 가장 아름다운 추억들이었다. 맥스를 제거하는 것은 곧 자신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맥스: (백발이 성성해진 누들스를 바라보며, 이제 모든 마음의 준비를 끝낸 표정으로) 나는 네 삶 전체를 송두리째 빼앗았어.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항상 내가 있었던 거야. 나는 네 모든 걸 빼앗았지. 네 돈을 빼앗았고, 네 여자를 빼앗았지.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네가 나를 죽였다는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었어. 자, 이제 나를 쏴버려.
 -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중에서
 
   




   맥스가 누들스에게 ‘나를 죽여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하는 순간, 누들스에게 떠오른 것은 이제는 누들스의 아련한 기억의 창고 속에서조차 죽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어린 시절의 맥스’였다. 뒷골목을 누비며 온갖 나쁜 짓을 도맡아 저질렀던 어린 시절, 따스하게 울타리가 될 만한 가족도 본받을 만한 어른도 없었던 어린 시절. 맥스는 누들스의 ‘모든 첫 경험’을 함께 했던 친구였다. 여자와 처음 잔 것도, 갱단과의 첫 번째 밀수품 운반도, 첫 번째 감옥행도. 운명을 좌우하는 그 모든 결정적인 순간에는 맥스가 함께 있었다. 맥스는 누들스의 인생 전체의 증인이었고, 길 위의 스승이었고, 혈육보다 애틋한 타인이었다. 맥스를 부정하는 것은 곧 누들스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데보라와 맥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어린 시절의 맥스를 빼다 박았고, 데보라가 누들스에게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그 아들의 얼굴을 마주친 순간 누들스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 잃어버린 삶을 이제 와서 맥스와 데보라에게서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맥스는 누들스에 대한 죄책감으로 몸부림치며 자신을 죽음으로 ‘단죄’해주길 바라지만, 누들스는 맥스를 죽일 이유를 찾지 못한다. 이미 오래전에 그의 마음속에서 맥스는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신은 매순간 셀 수 없는 새로운 천사들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무(無)로 돌아가기 전에 신의 옥좌 앞에서 한 순간 신을 찬송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
 - 발터 벤야민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퐁퐁 2010-07-06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간은 순간순간 나를 삼킨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⑩

 

  10. 멜랑콜리의 도시 (3) 

 

   
 

  산책자의 마지막 여행. 그것은 죽음으로의 여행이다.
 - 발터 벤야민

 
   
 


   그에게는 ‘현재’가 없다. 그에게는 ‘미래’ 또한 없다. 그에게는 오직 되돌아오는 과거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과거야말로 그의 유일한 ‘현재’다. 문제는 ‘그의 과거’와 ‘사람들의 현재’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들스는 해묵은 과거의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지만, 사람들은 이미 각자의 생생한 현재 속에서 과거 따위는 잊고 살아간다. 그래서 노인이 된 누들스를 뜻하지 않게 재회한 옛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길을 걷다 유령과 마주친 듯 놀란 표정이다. 누들스는 그가 자라난 도시에서 사실 이제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철지난 유령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에게는 여전히 생생한 ‘과거=현재’가 사람들에게는 묻어버리고 싶은 과거일 뿐이다. 그리하여 누들스는 세상에서 가장 낯익은 ‘고향’을 세상에서 가장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는 산책자가 되었다.    


   누들스의 우울한 시대착오. 그에게 과거는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지금 앓고 있는 우울증’의 대상이다. 누들스의 안타까운 시대착오적 성격은 그의 연애를 통해 가장 잘 나타난다. 누들스와 데보라는 서로에게 아련한 첫사랑의 설렘으로 남아 있지만 이들의 사랑에는 항상 ‘현재’가 없었다. 누들스는 ‘데보라’라는 이름의 지칠 줄 모르는 환상의 필름을 마음속에서 매일 재생하지만, 데보라는 사랑보다 성공을, 과거보다는 미래를 선택한다. 그가 평생 동안 부여잡을 아름다운 기억은, 평생 동안 안타깝게 그리워할 한 여인은, 그의 앞에서 달콤한 사랑의 기미를 보여주자마자 뒤돌아서버린다. 그에게 사랑은 시작되자마자 끝나는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가 잃은 것은 단지 어린 시절의 데보라가 아니다.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기억에 매몰되지 않고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용기조차 그는 잃어버린다. 그는 오랜 시간 감옥이라 불리는 ‘세상 바깥’에 머물렀지만 데보라와 맥스는 언제나 ‘세상 속’에 있었다. 감옥에서도 오직 데보라가 패러디했던 <아가서>를 연구하며 어떻게 데보라에게 멋지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누들스. 그는 멈춰진 시간 속에서 자아가 대상을 삼켜버림으로써 대상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소위 자기애적 퇴행으로 치닫는다. 이런 식의 시대착오적 관계 맺기는 그의 절친한 벗이었던 맥스와의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가장 성공적인 인간형으로 성장한 맥스. 이제 그에게는 뒷골목 좀도둑 소년의 얼굴에서 풍겨 나오던 배고픔과 눈칫밥의 흔적이 사라졌다. 대신 친구를 배신하고 친구의 여자를 가로챈 자 특유의 비열한 눈빛, 자신의 누추한 과거를 모두 지우고 오직 화려한 현재만을 긍정하는 자의 뻔뻔한 눈빛이 남았다. 그런 맥스를 회한과 그리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는 누들스 또한 한때 ‘같은 꿈’의 소유자였다. 두 사람은 각자 자본의 찬란한 빛과 자본의 음습한 어둠을 대변하는 존재이지만 두 사람 모두 으슥한 뒷골목 자본의 부산물이라는 점에서 ‘승리자’ 맥스 또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누들스 또한 단지 맥스의 협잡이 만들어낸 ‘희생자’에 그치지 않는다. 누들스 또한 맥스의 불법 행위를 ‘밀고’하려는 적극적 주체였다는 점에서 누들스 또한 뒤틀린 운명의 공범이다. 누들스와 맥스는 브루클린 거리의 어둠이 낳은 형제들이었다. 


   
 

  스스로의 환상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 그것이 바로 현대성이다.
 - 발터 벤야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⑨

 

  9. 멜랑콜리의 도시 (2) 

 

   
 

 세계를 완전히 분해해 다시 조립해보려고 했지만 고립무원 속에서 진행되다가 결국 우주론적 ‘실패’로 끝나고 만 그(벤야민)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과 작업은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실패한’ 20세기를 정직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새로운 사유의 용광로가 되어줄 것이다.
 - 조형준, 『아케이드 프로젝트』, 한국어판 옮긴이 서문 중에서

 
   

 




   보시오, 그러나 만지지 마시오! 이것이 벤야민의 ‘만보객’ 혹은 ‘산책자’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이었다. 마음껏 바라볼 수는 있지만 결코 만져서는 안 될 무엇. 마음껏 바라볼 수 있기에 만질 수 없는 고통이 더욱 커지는 대상. ‘화폐’로 구입하여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다면 쉽게 만져볼 수 없는 상품들. 누들스에게 더없이 소중했던 추억이 묻어 있는 고향, 브루클린의 거리 또한 그랬다. 이제는 이방인이 되어버린 그에게 고향의 추억이 묻어 있는 모든 것들은 그에게 접근금지를 요구한다. 한때 당신의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제는 다른 사람의 소유이니까. 거대한 쇼윈도의 화려한 상품처럼 변해버린 데보라야말로 누들스가 바라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는 대상이었다.

   데보라는 평생에 걸쳐 세 번 누들스를 거절했다. 누들스가 맥스의 부름에 응해 패싸움에 휘말렸을 때, 누들스가 감옥에서 돌아와 큰 돈을 번 후 그녀에게 프러포즈했을 때, 그리고 초라한 노인이 된 누들스가 무대 뒤편 분장실로 찾아가 그녀를 만났을 때. 감옥에 다녀온 누들스가 ‘떳떳치 못한 방법’으로 큰 부자가 되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데보라는 누들스의 절절한 사랑 고백을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듣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싸늘한 표정으로 누들스의 프러포즈를 거절한다. “난 헐리웃으로 갈 거야. 건달 사모님으로 만족할 수는 없잖아. 너도 알잖아.” 세월이 흘러 그녀는 어느덧 브로드웨이의 스타가 되었지만 무대 뒤편의 그녀는 쓸쓸하고 초라하기만 하다. 언제 ‘퇴물’로 전락하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늙어가는, 안쓰러운 여자.  

 







   아직도 데보라를 포기하지 못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누들스의 눈에는 그녀가 여전히 아름답다. 매일 브라운관을 통해 볼 수 있지만 좀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만질 수 없는 존재로 신비화되는 연예인처럼. 그녀는 누들스에게 평생 다가갈 수 없는 신비였다. 아케이드들을 통해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상품들의 스펙터클을 구경한 현대인의 마음 또한 그랬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매일 눈앞에서 볼 수 있는데 가질 수 없다니.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만져볼 수 없다니. 누들스에게 데보라 또한 그런 존재다. 그녀의 아름다운 춤은 언제나 누들스의 마음 속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지만,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데보라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대상이다. 

   
 

 아도르노는 라디오 청취자가 채널을 돌리는 행위가 일종의 청각적 만보임을 지적했다. 우리 시대에는 텔레비전이 시각적/비보행적 만보를 제공한다. 특히 미국에서 텔레비전 뉴스 프로그램의 포맷은 산만하고, 인상주의적이고, 관상적인 만보객의 구경과 비슷하다. 조달된 구경거리들이 시청자를 전 세계로 데려가는 것이다. 한편, 세계 여행과 관련하여 대중 관광 산업은 이제 만보를 2주나 4주로 묶어서 판매한다.
 - 수잔 벅 모스, 김정아 옮김,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문학동네, 2005, 440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raincoat 2010-06-29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계를 완전히 분해해 다시 조립하고 싶은 욕망과 그 비극적인 실패라. 벤야민은 정말 매력적이군요.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⑧ 

 

  8. 멜랑콜리의 도시 (1)

   
 

 바로 지금 삶을 구성하는 힘은 신념이 아니라 사실이다.
 -발터 벤야민

 
   

 



   아마도 누들스의 삶을 구성하는 ‘사실’만을 모아, 아무런 은유도 해석도 없이 건조한 다큐멘터리로 만든다면, 그의 삶은 ‘실패한 갱스터의 나쁜 예’에 불과할 것이다. 그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관객의 동경과 누들스 그 자신의 덧없는 기억에 대한 짙은 멜랑콜리다. 동경이 자  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어려운 머나먼 존재에 대한 물증 없는 판타지라면, 멜랑콜리는 자신의 것일    수밖에 없는 슬픔에 대한 뼛속 깊은 자기연민이 아닐까.  

 



   누들스가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향한 깊은 멜랑콜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사회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기억에 포박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기억의 만유인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오직 기억의 힘으로 살아가고 기억의 공격으로 상처받고 기억의 동력으로 삶을 해석하는 인간. 그의 멜랑콜리는 화려했던 한 시대의 몰락, 자기가 창조한 한 세계의 붕괴, 자신이 속한 세계의 궁극적 몰락을 눈앞에서 바라보는 자의 뼈아픈 비애다.  




   누들스는 어린 시절 패거리의 막내를 죽인 자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갱단의 일원을 살해하고 감옥에 들 어가 어른이 되어서야 출소한다. 사춘기 소년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의 기억을 오랜 감옥생활 동안 그 대로 간직하고 어른이 되어버린 누들스. 그에게 시간은 멈춰 있었고, 어린 시절을 향한 그리움은 머나먼 과거를 향한 덧없는 열정이 아니라 바로 어제처럼 생생한 실체였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맥스와 데보라와 친구들이 겪었던 생의 결정적인 사건들, 그 사건의 의미들을 누들스는 알 수 없다. 누들스는 ‘아가서’를 패러디한 데보라의 사랑 고백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암흑가에서 잔뼈가 굵어가던 맥스와의 기 억 또한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는 기억의 힘으로 고된 감옥생활을 간신히 버텼겠지만, 기억으로 꽉 찬 그의 영혼의 창고에는 다른 무엇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는 기억에 사로잡힌 인간, 기억의 블랙홀 속으로 현재와 미래 또한  모조리 흡입해버린 인간이 되어간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데보라만을 생각했고, 데보라를 잃고 멀리 떠나 있을 동안에도 데보라만을 생각했다. 그가 실제로 경험한 사건들은 고향 밖에서 더 많이 일어나지만, 그의 삶을 지배하는 결정적인 기억들은 모두 고향에 있다. 그리하여 그의 일상과 그의 진심은 유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소중한 모든 것은 고향에 있는데, 그를 움직이는 실제 동력은 모두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향한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꽃’이라 불렀을 때 우리에게 오는 꽃은 블랑쇼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실제의 꽃⦆이 아니며, 꽃의 이미지도 아니며, 꽃에 대한 기억도 아니고 사실은 꽃의 부재 그 자체’이다. 실제의 꽃이 ‘물질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만 꽃이라는 상징은 사용가능한 무엇이 된다. 말과 사물, 상징과 실체 그리고 문화와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간극이 발생시키는 정조가 바로 멜랑콜리이다. 인간은 사투르누스로부터 경작 배움으로써 자연으로부터 벗어나고 글자를 배움으로써(토성은 글쓰기를 관장한다) 기호를 통해 사물들을 배제시키는 문화인으로 탄생하는 것은 멜랑콜리라는 트라우마를 낳는다.
 - 김홍중, <모더니티와 멜랑콜리> , 《한국사회학》, 2006, 1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