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⑩

    10. 자신을 소중히 다루는 법 (2)



   
     버림받음은 (……) 뿌리 뽑힌 잉여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 뿌리 뽑혔다는 것은 타자가 인정하고 보장하는 장소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잉여자란 세상에 전혀 속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한나 아렌트, 이진우/박미애 옮김, <전체주의의 기원> 2, 한길사, 2006, 279쪽.
 
   

 



   비즐러는 비로소 자신에게는 없지만 드라이만 부부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그는 남부러울 것 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자신의 말을 믿고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오직 자신에게로만 쏟아지는 친밀한 시선의 따스함을 느끼지 못한다. 아렌트는 이 친밀한 시선이 미치는 공간, 즉 친밀권(intimate sphere)을 ‘사회적인 것’의 위력, 그 획일주의의 힘에 저항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재발견한다. ‘인간의 마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왜곡하는 사회의 힘, 인간의 내적 영역에 침입해오는 사회’에 대항하여, 자기가 ‘자기다움’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 존재와 외관이 분열되지 않은 투명한 공간, 그것이 바로 ‘친밀권’이었다.  

 



   비즐러는 드라이만 부부를 감시하는 자신의 임무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크리스타에게 가장 소중한 무엇을 지켜줘야 한다고 느낀다. 본능적으로 크리스타의 예술 또한 드라이만과 그녀만이 나눌 수 있는 그 아름다운 시선 속에서 가능함을 깨달은 것일까. 그는 드디어 도청용 헤드폰을 벗고 거리로 나와 크리스타의 ‘진짜 육신’과 만나기로 한다. ‘오프라인’의 세계에서 바라본 그녀는 ‘온라인’의 세계에서 훔쳐본 그녀보다 훨씬 아름답고, 쓸쓸하고, 무참하다.   

 



크리스타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자신을 향해 낯선 남자 비즐러가 다가오자 크리스타의 얼굴에는 불쾌한 표정이 역력하다.)귀찮게 하지 말아요.
비즐러 : 질란드 부인.
크리스타 : (자신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자 놀라며) 우리 아는 사이인가요?
비즐러 : 당신은 절 모르지만 전 당신을 잘 압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진짜니까요.  
크리스타 : (체념한 듯이) 배우는 진짜가 아니에요.
비즐러 : 하지만 당신은 진짜예요. 당신을 무대에서 봤어요. 당신 자신의 모습 그대로였죠. 지금 당신처럼요. 
크리스타 :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이 알아요?
비즐러 : 난, 당신의 관객이에요.
크리스타 : 이만 가봐야겠어요.
비즐러 : 어디 가십니까?
크리스타 : 옛날 동창을 만나러요.
비즐러 : 그래요? 거짓말할 땐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군요.
크리스타 : (비로소 비즐러에게 흥미가 생긴 표정으로) 그래요?
비즐러 : 네. 
크리스타 : 제가 아직도 당신이 아는 크리스타-마리아 질란드일까요? 당신이라면 당신 목숨보다도 중요한 사람을 떠나겠어요? 예술을 위해 몸을 버리겠어요?
비즐러 : 예술을 위해 몸을 버려요? 별로 좋은 거래는 아니군요. (진심을 가득 담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따스하게 응시한다) 당신은 최고의 배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크리스타 : (비로소 그녀의 얼굴에 가득하던 우울의 커튼이 걷힌 듯하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군요.     

 



    비즐러는 그날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을 본다. 크리스타가 비즐러와 헤어진 후, 비즐러의 눈앞에는 듣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 보지 않아도 보이는 장면이 펼쳐진다. 크리스타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달려간 것이다. 비즐러가 진짜 크리스타를 만나기 위해 외출한 동안, 그 대신 드라이만의 집을 도청하던 동료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들은 드라이만 부인이 동창을 만나러 가는 문제를 두고 싸웠고 그녀는 결국 만나러 갔다. 드라이만은 집에서 괴로워했다. 약 20분 후, 드라이만 부인이 돌아왔는데 드라이만뿐만이 아니라 내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둘은 사랑을 나눴다. 그녀는 다시는 드라이만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그는 ‘이제야 영감을 되찾았어’라고 말했다. 곧 새 희곡을 만나게 되리라 사료된다. 왜 그녀는 갑자기 변했을까? 난 지금 그녀가 드라이만을 더욱 사랑하게 됐다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고 있다.” 비즐러는 흐뭇한 눈빛으로 동료의 보고서를 읽으며 짧게 코멘트를 덧붙인다. “훌륭한 보고서군.”   

 



   비즐러는 크리스타의 눈에 스쳐가는 두려움과 절망을 응시했다. 그가 그녀의 ‘관객’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중의적으로 들린다. 그는 그녀의 연기를 감상하는 최고의 관객이기도 하지만, 연극 밖 그녀의 진짜 삶을 훔쳐보는 파파라치적 관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즐러는 이제 그 두 가지 역할을 넘어선 또 하나의 응시를 발견한다. 바로 크리스타의 눈에 스쳐가는 두려움과 절망을 응시하는 것, 그녀가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사랑과 예술의 힘을 꿰뚫어 보는 것. 비즐러는 인간을 정보의 창고로만 생각해온 자신의 ‘무사유’를 깨닫는다. 두 사람의 감동적인 재회 이후, 완전히 꺼진 줄로만 알았던 그의 인간적인 영혼의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타인의 고통을, 예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각기관이 깨어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무사유’가 초래한 타인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으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비로소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감시하는 대상의 삶은 과연 어떤 빛깔로 둘러싸여 있을까. 그들은 어떻게 저토록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내가 버린 세상의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자기 말이 타자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응답받는다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경험이다. 이 경험으로 회복되는 자존 또는 명예의 감정은, 타자로부터의 멸시나 부인의 시선, 혹은 일방적인 보호의 시선을 물리칠 수 있게 한다. 자기 주장을 실행하고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장소에서는 긍정되고 있다는 감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사이토 준이치 지음, 윤대석․류수연․윤미란 옮김, <민주적 공공성>, 이음, 2009,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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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10-05-14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가 버린 세상의 저편!!!
 


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⑨

    9. 자신을 소중히 다루는 법 (1)



   
     정부는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
 동독인들은 일인당 평균 매년 2.3켤레의 신발을 사고 3.2권의 책을 읽는다
 매년 6,743명의 학생들이 올A로 졸업한다
 하지만 공개되지 않는 단 하나의 통계가 있다
 자살률. 그건 아마도 자연사로 합산되어 발표될 것이다
 국가안보부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라 
 서독과 비교하여 얼마나 많은 용의자들이 자살을 했는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신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적을 것이다
 이것이 모두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 모두가 국가의 안전과 안녕을 위한 것이다
 -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남편 드라이만의 눈을 피해 거물급 정치인 헴프 장관을 만나며 자신의 예술적 생명을 보호받는 크리스타. 드라이만은 아내의 불륜을 알면서도 눈감아준다. 그는 심약한 아내가 자신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워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는 함부로 아내를 단죄하지 않고 아내를 이해하려 한다. 그는 아내의 사랑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아내가 사라진다면 자신의 삶도 예술도 사랑도 끝나리라는 점을 알기에 더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아내가 또 다시 헴프 장관과 밀회를 가지기 위해 집을 나가려는 순간, 드라이만은 아내의 불안한 움직임을 눈치 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붙잡고 싶다. 

 



 드라이만 : 집에 혼자 있는 것도 싫고 아무것도 써지지 않아. 예르스카가 죽은 후로 더 이상 글을 못 쓰겠어. (잠시 머뭇거리며) 당신도 날 떠나 버릴까 봐 두려워.
 크리스타 : (애써 태연한 척하며) 어린애처럼 왜 그래? 그래도 오늘밤엔 나가야 돼.
 드라이만 : (짐짓 모르는 척) 어디?
 크리스타 : 옛 동창이 오기로 했어. 
 드라이만 :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그게 사실이야?
 크리스타 :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무슨 소리야?
 드라이만 : (체념한 듯, 그러나 간절한 표정으로) 다 알아.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제발 가지 마. 당신은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 없어. 모든 게 날 위해서라는 거 알아. 당신의 연기생활을 위해서라는 것도. 날 믿어줘. 크리스타 마리아. 당신은 여전히 훌륭한 예술가야. 앞으로도 항상 그럴 거야, 난 알아. 관중들도 알고 있어. 다른 사람의 비위 따위 맞춰주지 않아도 돼. 가지 마……. 그 사람한테 가지 마.

 



   크리스타의 눈빛은 남편의 절절한 고백을 듣고 심하게 흔들린다. 그녀는 자신의 두려움과 수치심조차 끌어안는, 남편의 더 큰 사랑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녀는 현실적인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한다. 자신이 헴프 장관의 요구를 거절하면 자신의 연기생활도 남편의 작가 생활도 위협받을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마치 남편의 인내심을 실험하듯 그를 다그친다. “그래. 당신은 마음껏 글만 쓰면서 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지? 당신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사람은 신념만으로 살 수는 없어.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도 예르스카처럼 되고 싶어? 난 싫어! 그러니까 가야 돼.” 

 


   예르스카의 자살 이후 두 사람에게는 건널 수 없는 마음의 장벽이 생겨버린 것 같다. 저 비참한 죽음이 우리의 말로(末路)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목숨을 걸고 자유를 선택할 정도로 우리의 신념이 견고한지, 예술의 끈을 놓치고도 우리가 여전히 인간답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불확실해져버렸다. 크리스타는 드라이만의 영혼 가장 밑바닥에 있는 두려움까지 끌어내어 그를 압박하지만, 그는 그 두려움마저 그녀의 사랑의 방식이라는 것을 안다. “당신 말도 일리가 있어. 내가 마음대로 당신 마음을 바꿀 수는 없겠지. 하지만 부탁할게. 가지 마. 당신 자신을 소중히 여겨줘.” 크리스타는 이미 가장 소중한 사람 앞에서 철저히 무너진 자존심을 수습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버린다.   




   한편 이 조용한 부부싸움마저 낱낱이 엿듣고 있는 비즐러의 마음속에서는 전에 없던 갈등의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그는 처음으로 주저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무)의식 깊은 곳까지 침투한 자동화된 국가의 명령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의 정당성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는 자동인형처럼 순종적으로 자신의 신체에 입력된 명령 프로그램대로 행동해왔던 과거를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비즐러는 이제 진심으로 ‘자신의 머리’로 사유하고 ‘자신의 마음’으로 고뇌하며 망설이고 머뭇거리기 시작한다. 이 주저함, 망설임, 머뭇거림이야말로 그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문턱이 아닐까. 
 

   
 

    아렌트는 발견한다. 전쟁, 학살, 감금, 절멸, 박해, 나치스가 행한 이 모든 절대적인 악의 근원에는 괴물성이나 마성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악의 근원에는 (……) 지독한 평범함과 진부함, 나치라는 대타자의 언어와 법에 대한 고착에 다름 아닌 ‘파시스트적’ 스노비즘이 있었던 것이다. 악은 평범하다. 악은 악에 대한 의지나 열정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의 의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 즉 아렌트가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라 명명하게 되는, 그런 능력의 결여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9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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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두콩 2010-05-13 0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악은 평범하다!
 


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⑧

    8. 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대리인’일 뿐인가 (2)



   
     우리가 함께 먹는 식사 때마다 ‘자유’도 합석하도록 초대를 받는다. 비록 의자는 빈 채로 있지만 자리만큼은 마련되어 있다.
 - 한나 아렌트, 서유경 옮김, <과거와 미래 사이>, 푸른숲, 2005, 11쪽.
 
   




   우리 사회의 각종 갈등 처리비용이 무려 300조라고 한다. 공익광고는 이 무시무시한 갈등의 해결 방안이 서로를 향한 따뜻한 배려와 이해심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말 우리 모두 생글생글 웃으며 친절하게 서로를 존중해주면 저 엄청난 갈등들이 해결될 수 있을까. 갈등은 단지 따스한 휴머니즘의 악수로 망각될 수 있을까. 우리가 각종 공공기관에 ‘민원’을 호소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저희 부서 관할이 아닌데요’ 같은 회피의 낱말들이다. 그렇게 ‘모두의 책임’은 ‘아무의 책임’도 아니라면, 과연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우리가 하는 일들을 ‘얼굴 없는 사무적 행위’로 만드는 순간, 우리는 매순간 아직 보이지 않는 갈등의 전초전을 준비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모든 책임의 화살을 회피하면서.  



   비즐러는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게 이행하면서, 처음에는 자신이 ‘한 짓’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드라이만에게서 체제를 위협하는 저항의 기미를 찾는 동안, 정작 무너지는 것은 크리스타의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즐러는 단지 ‘정보’를 채취해야 했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동경하던 타인의 ‘삶 자체’를 착취하는 결과를 낳는다. 비즐러는 타인의 삶을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가장 존재 가장 밑바닥에 숨어 있던 공포와 고독을 만나게 된다.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의 대리인일 뿐인가. 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임무를 완수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누구를 위한 ‘공인된 범죄’ 행위인가.  





   드라이든과 크리스타를 향한 비즐러의 격정은 단순한 질투를 넘어 자신이 오랫동안 억압해온 ‘외로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콜걸과 사무적인 섹스를 나누지만 그런 건조한 관계는 그의 지독한 외로움을 오히려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비즐러는 콜걸에게 “조금만 더 함께 있어줘”라고 부탁해보지만, 그녀는 다른 손님이 있다며 “나랑 함께 있으려면 한 시간 더 예약하세요”라는 무미건조한 거절의 신호만 남기고 떠난다. 기계적인 섹스를 넘어, 단지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자신의 벌거벗은 외로움을 알게 된 비즐러는 비로소 조금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 자신이 놓여 있는 자리를, 자신을 그곳까지 밀어낸 세상의 중력을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즐러가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소년을 만나는 장면은 그  첫걸음이다.

 소년 : 아저씨, 정말 국가안보부에서 일하세요?  
 비즐러 : 국가안보부가 뭐하는 곳인지 아니?
 소년 : 네. 나쁜 놈들이에요, 우리 아빠를 잡아갔어요. 
 비즐러 : 그래? 이름이……?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 잡혀, 소년의 아버지 이름을 물어보려다가 그만둔다. 그는 괜스레 아이가 안고 있는 공을 물끄러미 가리킨다.) 네 공 말이다, 네 공의 이름이 뭐니?
 소년 : 아저씨 이상해요, 왜 공에 이름을 붙여요?  






   그는 처음으로 ‘내 눈에 비친 타인의 삶’을 넘어 ‘타인의 눈에 비친 나의 삶’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자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모든 행위들이 확연히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소년과의 만남에서 그는 자신이 모든 것에 번호를 매겨 그것에 관한 정보를 목록화하는 데 길들여져 있는, 타인의 삶을 감시하는 기계장치가 되어버렸음을 알게 된다. 관객은 감시 기계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비즐러를 보며 질문하게 된다. 그는 아마도 ‘천인공노할 악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의도하지 않은 모든 악행 또한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인가. 그가 직접 통치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는 지배의 권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인가. 진정 아무도 통치하지 않는 통치는 가능한가. 관련 법률이 없고 범행의 증거가 없으면 처벌받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완전히 사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선 진정한 인간적 삶을 영위하는 데 본질적인 것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 타자에게 보여지고 들려진다는 경험에서 생기는 현실성이 박탈됨을 의미한다. 사적인 삶에서 박탈된 것은 타자의 존재이다. 타자의 시점에서 보면 사적인 삶을 사는 인간은 현상하지 않으며, 따라서 마치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된다.
 - 한나 아렌트, 이진우·태정호 옮김, <인간의 조건>, 한길사, 1996,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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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bara 2010-05-06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텅 빈 의자에 '자유'를 앉히고 싶은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가슴 시립니당...
 


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⑦

    7. 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대리인’일 뿐인가 (1)



   
  존경받을 만한 사회 전체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히틀러에게 굴복했기 때문에 사회적 행위를 결정할 도덕적 준칙들과 양심을 인도할 종교적 계명들(“살인하지 말라”)은 사실상 소멸해버렸다. 옳고 그름을 여전히 구별할 수 있었던 그 소수의 사람들은 실로 그들 자신의 판단들을 따라서만 나아갔고, 그래서 그들은 아주 자유롭게 행했다.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개별 사건들을 적용할 수 있는, 그들이 지켜야할 규칙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각의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왜냐하면 선례가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규칙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 한나 아렌트, 김선욱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400쪽.
 
   




   유대인 학살의 핵심 책임자 아이히만이 체포된 후 예루살렘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자, 한나 아렌트는 모든 일을 중단하고 예루살렘에 체류하며 이 엄청난 ‘세기의 재판’에 대한 보고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한다. 이 책의 부제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다. 끔찍한 대량학살과 참혹한 전쟁, 이 모든 것이 과연 히틀러 한 사람만의 책임일까. 한나 아렌트는 뚜렷한 목적을 지닌 거대한 악행만큼이나 소름 끼치는 인간 본성 중 하나로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를 들었다. 무사유, 그것은 어리석음이나 사악함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인간성 내부에 존재하는 극악무도함을 초래한다. 어쩌면 ‘비범한 한 사람’의 엄청난 악행보다 무서운 것은 ‘주어진 의무로서의 악행’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성실하게 자행하는 대다수의 평범한 인간들의 ‘무사유’가 아닐까. 

 



  <타인의 삶>의 주인공 비즐러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닮았다. 그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만 바라보았을 때 관객들은 그에게서 특별히 사악한 본성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답답할 만큼 성실하고 우직하며 책임감 있는 인간이다. 이런 사람은 그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에 따라 그 운명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 자신 앞에 주어지는 어떤 미션도 훌륭하게 완수할 수 있는 유능함, 그것이야말로 그의 최대 장점이면서도 동시에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다. 그는 드라이만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지나치게 성실하게 완수한 나머지, 자신의 ‘한계’ 그 이상의 영역을 침범하고 만다. 



   헴프 장관과 매주 목요일마다 밀회를 나누는 크리스타. 크리스타는 최고의 여배우로서의 사회적 위치를 잃지 않기 위해, 원치 않는 관계까지도 불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남편 드라이만을 깊이 사랑하는 그녀는 자신의 육체를 갈망하는 헴프의 탐욕 앞에서 매번 괴로워한다. 크리스타의 부부생활뿐 아니라 혼외정사까지 속속들이 알게 되어버린 비즐러는 비로소 ‘타인의 삶’을 엿보는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깨닫게 된다. 그는 자신이 더없이 사랑하고 아끼는 대상이 눈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비즐러는 질투와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으로 그녀의 은밀한 사생활이 차라리 드라이든에게 노출되어버리기를 바라게 된다. 

 



   비즐러는 마침내 ‘선’을 넘는다. 타인의 정보를 착취하되 타인의 삶을 바꿔서는 안 된다는 작업의 불문율이 깨져버린다. 그는 ‘지나치게’ 크리스타를 동경했고, ‘지나치게’ 드라이든을 질투한 것이다. 그는 도청장치를 사용해 드라이든의 집에 초인종이 울리게 하고, 마침내 드라이든이 아내 크리스타의 불륜 장면을 목격하도록 만든다. 드라이든은 말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이지만 비즐러의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는다. 드라이든의 서늘한 침묵은 비즐러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는 어떤 놀라운 ‘사건’이 자신의 ‘헤드폰’을 통해 들리기를 바라지만, 드라이든의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속마음은 어떤 최첨단 도청장치로도 전해지지 않는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멕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 원칙적으로 그는 이 모든 일의 의미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고, (……)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 한나 아렌트, 김선욱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3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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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10-05-04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직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고, 여기에 더해 매일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속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비즐러보다 더 무서울 듯^^*
 


영화 <타인의 삶>과 한나 아렌트 ⑥

    6. 타인의 내면을 파괴하는 기술 (2)  

  

알버트 : (드라이든의 생일 파티에 참가한 사람들의 모습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이 사람들은 이제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군。
 드라이든 : (체념한 표정으로) 이 상황에서 우리가 뭘 하겠어요? 사람들은 모든 것에 익숙해져요.
 알버트 : 그래, 예전엔 참지 못하던 것도 결국 다 받아들이지. 이젠 아무도 변화를 기대하지 않아…….



  흔히 예술가의 영감은 저마다의 권태와 절망의 ‘바닥’을 치고 나서 폭발하곤 한다. 루쉰이 오랫동안 절필한 끝에 써낸 걸작 <광인일기>를 쓰기 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는 오랜 칩거 생활에 익숙해졌고, 아무리 혼신의 힘을 다해 글을 써도 아무런 메아리도 돌아오지 않는 세상에 절망했으며, 절망 자체에 익숙해져버려 그 어떤 사회적 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루쉰에게 친구가 찾아와 중국의 청년들을 일깨우기 위한 잡지 <신청년>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친구가 루쉰의 글이 필요하다며 간곡히 그를 설득하자, 더 이상 어떤 희망도 갖고 싶지 않았던 루쉰은 단칼에 친구의 제안을 거절하고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가령 말이야, 쇠로 만든 방이 있다 치자고. 창문은 하나도 없고 부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야.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데, 머지않아 모두 숨이 막혀 죽을 거야. 하지만 혼수상태에서 죽어가는 거니까 죽음의 비애는 조금도 느끼지 않지. 지금 자네가 큰소리를 질러서 비교적 정신이 있는 사람 몇 명을 깨운다면 말이야. 그 불행한 소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임종의 고통을 주게 될 텐데,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어?”

“하지만 몇 사람이 일어난 이상, 그 쇠로 만든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루쉰, 유세종/전형준 편역, <투창과 비수>, 솔, 1997, 89~90쪽.
 
   




   친구의 반박을 듣는 그 순간, 루쉰의 마음속에서는 섬광 같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간다. 희망의 거처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라는 것을. 그는 ‘희망이 있을 수도 있다’고 믿는 타인의 가녀린 희망까지 빼앗을 수는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절망을 미래의 세대까지 전염시킬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실로 오랜만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절망조차 손쉽게 말살할 수 없는 희망의 존재 이유를 깨달은 직후 루쉰이 쓴 작품이 바로 <광인일기>다. 절망의 심연에서 비로소 움트는 냉정한 희망의 목소리가 거기 담겨 있다.  





 
   루쉰이 말한 ‘쇠로 만든 방’은 그가 생각하는 ‘출구 없는 중국’이었고, 당시 그 암울한 중국의 상황은 <타인의 삶>이 묘사하는 동독의 상황과도 닮았다. 아무런 출구도 희망도 없는, 그리하여 희망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던. <타인의 삶>의 주인공 드라이든에게도 이렇게 절망의 맨얼굴을 대면하는 일이 일어난다. 당국의 감시와 검열이 격화되자 드라이든은 점점 지쳐가고, 창작에 대한 정열도 점차 잦아든다. 그러던 어느 날, 존경하는 선배 작가 알버트가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사실 드라이든은 볼 때마다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있는 듯한 알버트를 만나는 것이 편치 않았다. 드라이든은 아직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는 것을 모를 뿐 아니라 명실공히 성공한 작가였고 모두가 선망하는 아름다운 아내와 살고 있었다. 예술가에게 ‘산소’만큼이나 중요한 ‘창작의 자유’가 없다는 것, 그로 인해 알버트가 그토록 고통받고 있었다는 것을 드라이든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드라이든은 알버트의 쓸쓸한 장례식에서 비로소 지금까지 자신이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예술가에게 창작의 자유가 없다는 것은 ‘진짜 공기’가 아닌 인공호흡장치로 수동적인 호흡을 하며 살아남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홀로 안고 죽어간 알버트의 처절한 고독을 비로소 이해한다. 그는 잃어버린 자유라는 무형의 산소를 되찾는 싸움을, 그 누구에게도 ‘위임’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관객은 드라이든과 함께 깨닫는다. 어떤 경우에는, 자유를 찾기 위한 싸움 자체가 더없이 아름다운 예술작품일 수 있음을.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 물론, 나는 아직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믿어다오,
 그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내가 하고 있는 그 어떤 행위도
 나에게 배불리 먹을 권리를 주지 못한다.

 우연히 나는 살아남은 것이다.
 (하지만 나의 행운이 다하면 나도 그만이다.)

 그러나 내가 먹는 것이
 굶주린 자에게서 빼앗은 것이고
 내가 마시는 물이
 목마른 자에게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내가 먹고 마실 수 있겠는가.

 - 브레히트, <후손들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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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 2010-05-09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루쉰과 한나 아렌트가 의외로 잘 어울리는 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