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 다이어리> 연재를 마치며
 

   

   10대 시절에는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20대 시절에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어엿한(?) 30대가 되자 문득‘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굳이 순위를 따진다면 저는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고, ‘사랑 받는 사람’이 되고 싶기보다는 ‘결국,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이제는 대단한 사람이나 사랑 받는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시네필 다이어리>를 연재하면서 저는 미처 ‘좋은 사람’이 되기도 전에 덜컥 ‘행복한 사람’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너무 빨리 글 쓰는 사람의 행복을 알아버린 것 같아, 그 행복만큼 커다란 마음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시네필 다이어리>와 함께 하면서, 영화가 끝난 후에도 우리 마음속에서 상영되는 무의식의 필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 무의식의 필름 속에서만은, 우리는 누구나 영화 속 주인공이 됩니다. 한 땀 한 땀 느릿느릿 글을 쓰면서, 한 시대의 집단적 무의식을 생산하고 그 시대에 지울 수 없는 작품의 아우라를 각인하는 영화의 힘을 느꼈습니다. 제가 직접 발로 뛴 경험이란 보잘 것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의 체험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제 것처럼 느껴지고, 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건 못지않게 영화 속 사건들이 어느덧 내밀한 추억으로 전이되어, 그 자체로 아프고 그 자체로 소중한 ‘기억’의 집을 짓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의 추억을 훔쳐보는 우리는, 그 훔쳐보기의 짜릿한 쾌락이 끝난 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오래 전 영화 속 주인공이 변해버린 우리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한 서글픈 환각을 느끼곤 합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우리들과 ‘닮은 상처’를 앓아본 영혼의 샴쌍둥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수많은 영화 속 주인공들과 함께 지울 수 없는 상처의 끈으로 연대합니다. 현대인은 가상화된 캐릭터의 고통과 슬픔을 마치 자기 것처럼 절실하게 앓는 재능을 가지게 되었지요. 영화 속 캐릭터의 추억까지 자신의 추억으로 공유하면서, 우리는 직접 몸으로 체험할 수 없는 타인의 추억까지 함께 앓게 되었습니다. ‘옛날 옛적에’의 문화적 파괴력을 되살린 것도 영화가 가진 스토리텔링의 힘일 것입니다. 분명히 실제로 있었던 일도 ‘옛날 옛적에’있었던 일로 만들어 버리면 신화적 아우라를 지니게 되고, 아무리 심각한 사건도 우화적으로 에둘러 말하기가 가능하게 됩니다. ‘옛날 옛적에’의 아득한 프레임 속에, 아직도 아가미를 퍼덕이는 생생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오려 넣는 순간, 도저히 표현하기 힘들었던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조차도 뭔가 전달 가능하고 소통 가능하고 교감 가능한 것이 됩니다. 이야기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혹은 이야기하기조차 금지된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바로 ‘옛날 옛적에(once upon a time)’의 문화적 파워가 아닐까요.   
 

 

   철학자와 영화 사이의 커플 매니저를 자청한 것도, 어쩌면 제 자신이 아주 서툰 이야기꾼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네필 다이어리>는 아직 자기만의 이야기를 창조하지 못한 한 젊은이가, 세상에 대한 끝없는 짝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마음의 보청장치였습니다. <시네필 다이어리>가 커다랗게 구멍을 내버린 제 마음의 창 너머로, 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세상을 향해 제 자신의 부끄러운 속내를 속속들이 내보이고야 말았습니다. 제가 사랑한 철학자들과 함께 관람한 이 영화들이 우리가 이룬 ‘성취’가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것, 우리가 미처 꿈조차 꾸지 못한 꿈들의 잔해를 모아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꿈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감히 상상해 봅니다.      

 

 

   누군가 실제로 살 수 있었던 삶만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야했던, 그러나 살지 못했던 삶까지, 인간의 언어 속에 살아가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야기의 힘 아닐까요. 우리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우리들의 ‘이야기’만은 살아남아 아스라한 기억의 별자리를 그려낼 것입니다. 영화는 생생한 현재를 단 두 시간의 러닝타임에 담아 ‘옛날옛적에’로 만드는 시간의 마법이니까요. 우리는 그 시간의 마법 덕분에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타인의 시공간을 ‘우리들의 시공간’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제 기나긴 방황의 여정을 고독하지 않게 만들어준 16명의 철학자들과 16편의 영화를 향해, 그리고 가끔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네필 다이어리>의 갈팡질팡한 걸음걸이조차 밉지 않게 바라봐 준 소중한 독자님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과 함께 한 시간이 비틀거리는 저를 버티게 했습니다. <시네필 다이어리>는 우리가 함께 탄 소중한 시간의 나룻배였습니다. 

 
 p.s. 하나
 <시네필 다이어리 2>의 출간은 깊어가는 가을쯤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제 마음 속에서 <시네필 다이어리>의 충분한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친 뒤, 행복한 반성과 달콤한 자기비판의 시간을 보낸 뒤(^^) 2권을 출간할 것입니다. 아직 마음속에 고여 있는 못다 한 작별인사는 그때 다시 책 속에서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p.s. 둘
 ‘시네필 다이어리’라 불리는 이 마음의 뗏목을 끝까지 저어나갈 수 있게 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자음과 모음’의 멋진 에디터 임선영님과 배성은님과 이진아님, 디자이너 배현정님, <시네필 다이어리>라는 무모한 프로젝트를 망설임 없이 떠맡아주신 강병철 사장님과 정은영 주간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닥치는 원고마감과 숨길 수 없는 사유의 빈곤으로 만신창이가 된 게으름뱅이 룸메이트를 향해 변함없이 순하게 웃어준, 나의 영원한 토토로 이승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정여울 화이팅 ~~ 2010-07-26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여울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
발터 벤야민 편이 끝나고 어떤 영화로 시작할까 설레이는 마음으로 들어왔는데
연재를 이젠 끝내시는 군요 ...많이 아쉽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시네필 때문에 많이 행복했습니다
철학과 인문학 막연히 너무 어려워 전공이 아닌 저같은 사람에게
발터 벤야민,한나 아렌트 등등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던 사람들이
이토록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매혹적으로 만들어 주는가
감탄감탄을 했습니다
정여울님의 치열하게 지성적이면서도 결코 울림을 잊지 않는
그 글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__)

도도새 2010-07-28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울님- 좋은 글 감사해요-
두근대고 흥미롭고 즐겁고 풍요로운 만남이었습니다-
여울~여울 읽어나가는 재미가 있었는데 어느새 연재를 마무리 하는 글을 읽게 됐네요
웹상이라서 더 그런것이었을까요? 여울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함께 무성해져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아쉽워요-ㅠ
항상 건강하시고
단행본이나 다른 글에서 다시 만나뵙기를 기대할께윳

doingnow 2010-07-28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동안 방문하지 못했었는데 벌써 마지막이라니 너무너무 아쉽습니다.
여기서 다 읽지 못한 이야기는 책으로!만나도록 하겠습니다..ㅎㅎ
마지막까지 가슴 뭉클한 글을 써주셨네용..매일매일 하는 일은 아무리 좋고 재미있어도 '일'이 되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당.
하루 하루 연재하시느라 정말로 고생많으셨습니다.^^

어릴 때는 영화에서 세상을 배웠지만 어른이 되고나니, 세상을 잊고 싶을 때 영화를 보곤 합니다. 그 두시간 남짓 동안에는 몰입하느라 머리가 비워지거나, 의미없이 헛헛한 웃음을 짓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던 2시간의 기억을 여울쌤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한번 들춰볼 수 있었습니다.(정말로 글을 읽고나서 다시 본 영화도 있답니당)고럼 가을에 짠!하고 나타날 2탄을 기다리며 저는 가끔씩 방문해서 못다한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당 고생많으셨어요!!


빵가게재습격 2010-07-28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댓글이 마지막 댓글이 됩니다. 발터 벤야민이 마지막이 아닐까 예감하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맞아버렸네요. T.T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늘 건강하세요.

맨손체조 2010-07-30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 바이 시네필 다이어리, 앤 굿 럭!!!!

괴도백호 2014-04-22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여울님 덕분에 하루가 즐겁고 행복합니다 진정한 사람에 대한 애정을 느끼고 가요. 덕분에 살아갈 힘이 생깁니다 감사합니다 복 받으세요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마지막회
 

  17. 타인의 추억을 앓는 산책자를 위하여   

   
 

 내가 보고 있는 사물들은, 내가 그 사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폴 발레리

 
   
 


   우리는 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 그리워하는 것일까. 뚜렷한 그리움의 대상이 없이도 무언가 아득히 멀리 있는 것을 향한 그리움이 강렬하게 솟구칠 때, 그 그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세상 어디에도 없지만 소설 속에서만은 생생하게 묘사된 도시, ‘무진’을 그리워하듯이, 우리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통해 각인된 머나먼 타인의 체험을 그리워할 수 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ome in America>의 시대 또한 ‘체험하지 못했지만 얼마든지 그리워할 수 있는’, 현대인의 노스탤지어를 아프게 건드린다. 100년 후에도 1000년 후에도 변함없이 ‘머나먼 옛날 옛적 미국에서’ 일어난 것으로 상상된 어떤 삶. 우리는 그 삶의 흔적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얼마든지 ‘내 삶처럼’ 그리워할 수 있다. 마치 어딘가에 살아있지만 결코 만날 수 없는 첫사랑을 그리워하듯, 우리는 영화 속의 인물을, 사건을, 도시를, 그리워한다. 그것이 바로 영화의 힘이다. 그리움의 대상을 발명해내는 힘. 사라져간 삶, 지워져 간 삶을 향한 집단적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마력 말이다.     


   도시는 고향이 되기엔 너무 척박한 공간이 아닐까. 하지만 도시가 고향일 수밖에 없는 수많은 현대인들에게, 도시는 또 하나의 고향이 되었다. 어릴 적 뛰놀던 아파트 놀이터가 고향의 향수를 자아낼 수도 있고, 정들었던 건물이 철거된 후 뼈만 남은 철골과 콘크리트가 나뒹구는 폐허조차도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누군가의 폐허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향이 될 수도 있다. ‘재개발’은 현대인이 추억의 증거로 삼을 만한 모든 흔적들을 말살한다. ‘리뉴얼’이라는 명목으로, ‘리모델링’이라는 목적으로, 모든 것이 너무 쉽게 사라지는 세상에서 우리의 그리움은 손쉽게 억압된다.

   그러나 어떤 사물의 아우라가 뒤늦게 발견되는 순간도 바로 그 사물이 사라질 위협에 처했을 때다. 철거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머릿속에라도 희미하게 남아 있는 아주 작은 흔적, 그 폐허의 흔적만으로도 우리는 과거를 향한 쾌속 타임머신을 탄다. 누들스가 데보라의 춤을 훔쳐보던, 옛날 옛적 뚱보네 집 화장실의 벽돌 하나를 들어내는 그 순간, 그 사소한 촉감만으로도 사라져 간 모든 세월을 되찾았듯이.   



   예술작품의 본래적 아우라를 앗아간 ‘주범’으로 복제예술의 대표주자인 사진과 영화가 지목되곤 했다. 그런데 그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들은 더욱 아우라 그 자체를 열망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아우라 파괴의 주범으로 내몰린 복제예술 속에서도 거침없이 아우라를 찾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의미 있는’ 존재들에게서 아우라를 찾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 같다. 우리는 이제 아우라 삭제의 원흉으로 불리던 영화에서조차 절실한 아우라를 느끼는 인간으로 진화해 간다. 영화가 뿜어내는 아우라의 존재는 ‘오마주’를 통해 증명된다. 어떤 영화만이 지닌 감동을‘되살이’하고 싶은 욕망이 오마주가 아닌가. 복제하고 싶지만 결코 100퍼센트 복제할 수 없는 감동의 원천, 즉 아우라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 오마주가 아닐까.   



   맥스는 누들스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이 냄새나는 거리에서 살아갈 거냐고. 이 더러운 거리의 넝마주이 같은 삶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믿었던 맥스는 뉴욕의 화려한 스카이뷰에 감춰진 뒷골목의 기억, 그 거리를 지나간 모든 사람들의 흔적을 담고 있는 더러운 땅바닥의 냄새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 더럽고 시끄럽고 정신없는 뒷골목의 분위기야말로 누들스가 그 거리에서 느꼈던 소중한 아우라의 일부였다. 마약에 흠뻑 취해서라도, 그 허망한 환각과 도취 속에서라도 되찾고 싶은 세계의 아우라는 <섹스 앤 더 시티>식의 화려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거리에 단지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거나 소매치기 대상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거리의 부산스러움 자체를 사랑하고, 그 거리만이 지닌 아우라 속에서 아늑하게 기거할 수 있는 것은 누들스의 재능이기도 했다. 누들스에게는 있지만 맥스에게는 없는 것은, 그 잡다하고 번잡스러운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도 사랑을 보고 희망을 보고 미래를 볼 수 있었던 순수한 혜안이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라도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생생한 현재를 아득한 옛날이야기로 만드는 마법, 그것은 바로 영화의 힘이고 소설의 힘이고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1000년 쯤 지나면 누들스와 맥스의 고통스러운 복수와 회한의 이야기가 100살 쯤 먹은 총명한 할머니의 입술에서 이렇게 구술될지도 모른다.“옛날 옛적에, 미국이라 불리는 커다란 나라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 소년은 한 소녀를 짝사랑했어. 춤을 추는 소녀였지. 누구든 그 소녀가 춤추는 모습을 봤다면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방도가 없었단다…….”우리가 아직도 이야기를 읽고 쓰고 말할 수 있다면, 누군가 이야기로 만들어 우리의 아픔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구원의 발걸음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소설이 의미를 갖는 것은, 소설이 이를테면 제 3자의 운명을 우리들에게 제시해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제 3자의 운명이, 그 운명을 불태우는 불꽃을 통해서 우리들 스스로의 운명으로부터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따뜻함을 우리들에게 안겨주기 때문이다. 독자가 소설에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은, 한기에 떨고 있는 삶을, 그가 읽고 있는 죽음을 통해 따뜻하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인 것이다
 - 벤야민, 반성완 옮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92, 185~6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dpzh 2010-07-25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타인의 추억을 내 것처럼 앓는 우리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16)

 

 16. 길을 잃어야만 포착할 수 있는 풍경 (2)
 

   
 

 나는 비 많이 내리는 나라의 왕 같아.
 부자이지만 무력하고 아직 젊지만 늙어버려.
 (……) 사냥가도, 매도, 아무것도 그에게 즐거움 되지 못한다.
 발코니 앞에서 죽어가는 자기 백성마저도.
 총애 받던 광대의 우스꽝스런 노랫가락도
 이 견디기 어려운 병자의 이맛살을 펴지 못한다.
 나리꽃으로 수놓은 그의 침상은 무덤으로 바뀌고,
 왕이라면 아무나 반해버리는 치장 담당 시녀들이
 제 아무리 음란한 치장술을 만들어내도
 이 젊은 해골로부터 미소를 끌어내지는 못한다.
 그에게 금을 만들어주는 학자마저도
 그의 몸에서 썩은 독소를 뽑아내지 못한다.
 권력자들이 말년에 갈망하는
 로마인들이 전해준 피의 목욕도
 그 속에 피 대신 푸른 ‘망각의 강’이 흐르는
 이 마비된 송장을 데울 수 없다.
 - 보들레르, 「우울」중에서(윤영애 옮김, 『악의 꽃』, 문학과 지성사, 162쪽)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 것에서도 안식을 찾지 못하는 자. 보들레르는 그런 사람을 일컬어 견딜 수 없이 비가 많이 내리는 나라의 왕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 어떤 아름다움도, 쾌락도, 지식도, 권력도, 그에게 미소를 끌어내지 못하기에 그는 살아 있어도 이미 ‘마비된 송장’ 같은 피폐한 영혼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맥스 또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친구의 삶까지 송두리째 빼앗아가며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의 왕국은 1년 365일 내내 비만 내리는 나라처럼 질척한 우울과 음습한 불안으로 가득하다.  


 


   가면무도회에서 한껏 떨쳐입고 저마다 최고의 모습으로 분장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마치 맨눈으로 엑스레이를 찍듯 끔찍한 ‘해골’의 모습을 투시했던 보들레르.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상품과 유행과 소비자가 넘쳐나는 새로운 도시 파리에서 생명의 몸짓을 가장한 죽음의 이미지들을 포착했다. 보들레르나 벤야민이라면 첫눈에 맥스 같은 불행한 인간의 몸 전체에서 뿜어나오는 처연한 죽음의 냄새를 포착해낼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적 성공을 송두리째 거머쥔 맥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행복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한 후, 그 끊임없는 불안과 우울의 뿌리에 옛 친구 누들스가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맥스가 진정으로 소유한 것은 ‘우울’뿐이었다. 맥스는 이 거대한 도시가 허락하는 모든 재화를 소유해봤지만, 그가 생의 끝자락에서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은 오직 자신의 생 전체를 검은 휘장으로 감싸는 듯한 끔찍한 우울이었다. 맥스는 ‘나를 죽여달라’는 자신의 요구를 누들스가 들어주지 않자, 모든 것을 잘디잘게 분해해버리는 거대한 쓰레기차에 자신의 몸을 던져버리고 만다. 스스로 쓰레기를 자처하며 흔적조차 식별해낼 수 없이 분해되어버린 맥스……. 이 충격을 가눌 수 있는 균형감각도, 이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친구도 이제는 없어진 누들스는 또 다시 마약이 약속하는 덧없는 환각의 나락으로 추락한다. 

 

 
 

 

   영화는 그렇게 덧없이 끝나지만, 이 영화의 복잡다단한 욕망의 퍼즐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기묘한 활기를 띠며 관객의 마음속에서 새로 조립되기 시작한다. 누들스가 꿈꾸던 화려한 삶을 소유한 것은 맥스와 데보라였지만, 정작 그들의 삶을 ‘옛날 옛적 이야기’로 발화할 수 있는 사람은 누들스가 아닐까. 부르주아에도 노동자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이 도시의 ‘산책자’로 이 도시의 삶을 슬쩍 엿보되 결코 참여하지 못하는 누들스. 그야말로 그들의 삶이 그려내는 욕망의 별자리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읽어낼 수 있는 내면의 망원경을 지녔으므로.  

 

 

 

   
   모든 것이 내게는 알레고리가 되고.
 - 보들레르, 「백조」
 
   
 
   
 

우울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보들레르의 천재성은 알레고리의 천재성이다. 보들레르에게 와서 파리는 최초의 서정시의 대상이 된다. 이 시는 결코 고향 찬가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도시를 응시하는 알레고리 시인의 시선, 소외된 자의 시선이다. 그것은 또한 산책자의 시선으로, 그의 생활 형태는 마음을 달래는 어슴푸레한 빛 뒤로 대도시 주민에게 다가오고 있는 비참함을 감추고 있다. 산책자는 여전히 문턱 위에, 대도시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의 문턱 위에 서 있다. 아직 어느 쪽도 완전히 그를 수중에 넣지는 못하고 있다. 그는 어느 쪽에도 안주하지 못한다. 그는 군중 속에서 피신처를 찾는다. (……) 군중이란 베일로서, 그것을 통해 보면 산책자에게 익숙한 도시는 환(등)상으로 비쳐진다. 군중 속에서 도시는 때로는 풍경이, 때로는 거실이 된다. 곧 이 두 가지는 백화점의 요소가 되며, 백화점은 정처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조차 상품 판매에 이용한다. 백화점은 산책자가 마지막으로 다다르는 곳이다.
 -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아케이드프로젝트』, 새물결, 2005, 104~105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daniel 2010-07-22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군중이라는 베일에 비친 세상... 요새는 인터넷이라는 베일에 비친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15)

 

  15. 길을 잃어야만 포착할 수 있는 풍경 (1)

 

   
 

 완전히 같으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감조차 잡지 못하고 지나쳐 가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을 줄이야!
 - 발터 벤야민

 
   
 



 
  이 영화는 범죄 스릴러 특유의 퍼즐 맞추기식 긴장감을 조성하지도, 남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팜므 파탈을 미화하지도, 마초적 의리와 무책임한 순수를 강조하지도 않는다. 멀리서 바라본다면 그저 암흑가의 갱스터나 할리우드의 셀러브리티로서 확실한 성공가도를 달려온 사람들, 혹은 멀리서 본다면 그저 인생의 실패자이자 뒷골목 룸펜의 전형인 사람들의 삶을 ‘성공 신화’나 ‘피해자의 넋두리’로 그려내지도 않는다. 이 영화는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 남부러울 것 없는 인간이나 남에게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인간, 행복해 보이는 인간이나 불행해 보이는 인간, 그 모두의 삶을 공통적으로 꿰뚫고 있는 어떤 원초적 상실감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이 영화는 그들이 가진 것이나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버린 것들 때문에 겪는 맹렬한 허무를 그려낸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잔인하도록 노골적으로, 타인의 삶을 은밀하게 엿보는 관음증적 시선으로 주인공들의 과거-현재-미래를 재구성해낸다. 
 



  이룰 수는 없지만 한때 가졌던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꿈이 사라지고 난 후. 가질 순 없지만 한 때 사랑했던 것만으로도 내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사랑의 기억들.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폐허와 허무 위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시선은 영화 속 남성들의 노리개였던 거리의 창녀부터 그들이 가장 갈망했던 꿈의 여인 데보라까지, 안 해 본 범죄의 종류가 거의 없어 보이는 천하의 파렴치한 맥스부터 여인을 얻기 위해 범죄도 불사하는 파괴적 로맨티스트 누들스에 이르기까지, 그들 어느 누구의 기억도 우아하게 미화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차분해서 오히려 잔혹해 보이는 감독의 냉철한 시선은 가장 순수한 인간부터 가장 추악한 인간에 이르기까지, 이 더러운 욕망의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욕망의 피투성이 문턱을 최대한 ‘줌인(zoom in)’하여 가장 밝은 조명으로 비춘다. 그 눈부신 조명 앞에서는 그 어떤 소박한 욕망도 추악해져버린다.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기에 오히려 모두의 편일 수 있는 욕망의 시선. 그것은 자본주의를 선과 악의 관점이 아닌, 윤리와 욕망의 관점에서가 아닌, 모두를 향한 ‘유혹’ 그 자체로서 바라보려 했던 벤야민의 시선과 닮아 있다. 세계 최대의 갑부에서 갈 곳 잃은 홈리스까지, 거리를 쓸쓸히 배회하는 창녀부터 초호화 세단을 타고 하루 종일 흙 한 톨 신발에 묻히지 않는 귀부인에 이르기까지, 아직 욕망과 자본에 대해 무지한 어린 아이부터 모든 종류의 욕망을 이미 섭렵하여 욕망 자체를 달관해버린 노인까지. 감독은 그들 모두를 빠짐없이 어김없이 뒤흔들고 있는 상품과 유행과 죽음과 섹스의 도시, 그 욕망의 만화경적 파노라마를 그려낸다. 길가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껍질 하나만으로도 그 도시의 풍경을 재구성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벤야민처럼, 누들스 또한 뚱보네 술집의 간판이나 여배우의 공연을 선전하는 찢어진 포스터 한 장 만으로도 그가 잃어버린 시공간의 총체를 복원해낼 수 있다. 
 

 

   
 

내겐 천 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추억이 있다.

 계산서들, 시의 원고와 연애편지, 소송 서류, 연가들,
 영수증에 돌돌 말린 무거운 머리타래로
 가득 찬 서랍 달린 장롱도
 내 서글픈 두뇌만큼 비밀을 감추지 못하리.
 그것은 피라미드, 거대한 지하매장소,
 공동묘지보다 더 많은 시체를 간직하고 있는 곳.
 -나는 달빛마저 싫어하는 공동묘지.

 - 보들레르, 「우울」 중에서(윤영애 옮김, 『악의 꽃』, 문학과 지성사, 2003, 160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블라블라 2010-07-16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천년을 산 것보다 더많은 추억을 업고 살아가려니 오늘도 등허리가 쑤십니다. 쿨럭^^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발터 벤야민 (13)

 

  13. 꿈의 시체로 만든 별자리들 (3)

 

   
 

나는 성스러운 교향곡 속에
 잘못 끼어든 불협화음이 아닌가.
 (……) 나는 상처이며 칼!
 나는 따귀 때리기이자 뺨!
 나는 깔리는 팔다리이자 짓누르는 바퀴.
 또 사형수이자 사형집행관!

 나는 내 심장의 흡혈귀,
 영원한 웃음의 선고를 받고도
 미소 짓지도 못하는
 버림받은 중죄인!
 - 보들레르, 「자신을 벌하는 사람」 중에서(윤영애 옮김, 『악의 꽃』, 문학과지성사, 2003)

 
   
 

 
  가장 친한 친구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너무 일찍 삶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누들스. 그가 현실의 고통을 잊는 유일한 방책은 바로 마약이었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아편굴에서 환각에 빠져 있는 누들스는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함으로써 고통을 잊으려 한다. 맥스가 연방은행을 털자는 황당한 계획을 털어놓자, 광기 어린 맥스의 굳은 결심을 돌릴 수 없어 적어도 맥스의 죽음만은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금주법 위반 혐의로 맥스를 신고했던 그날 밤. 그날 예고 없이 갑자기 일어난 화재 사건 때문에 맥스가 죽었다고 믿으며 살아온 지난 삼십 년. 그 뼈아픈 죄책감이야말로 누들스의 끊임없는 자기학대의 원흉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맥스의 치밀한 계략이었음을 알게 된 30년 후에도, 누들스의 마음은 편치 않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 그것도 모자라 친구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안고 평생을 괴로워하게 만들었던 맥스가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맥스는 정신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었으며 자신이 죽인 자들의 망령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누들스에게, 고통으로 가득한 현실과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유일한 도피처는 마약이 약속하는 환각이었다. 그 달콤한 환각 속에서만은, 누들스는 초라한 패배자가 아닐 수 있었기에. ‘자신을 학대하는 고통’과 ‘현실을 망각하는 쾌락’의 이중주 속에서 누들스는 자기모순적 쾌감을 느낀 것일까.   

 


   
  벤야민이 쓴 글들 중에는 자기가 꾼 꿈의 기록이 많은데, 당시 그는 또한 각종 마약으로 실험을 시도했다. 공업적 생산의 압력 하에서 사유나 사유의 대상, 즉 주체나 객체가 모두 경직되는데, 꿈의 기록과 마약에 의한 실험 모두 이처럼 경직화되고 겉 딱지가 앉는 상태를 타파하기 위한 시도였다. 꿈속에서뿐만 아니라 약물에 의한 도취를 통해서도 벤야민은 ‘특히 은밀한 친밀성들로 가득 찬 세계’가 열리는 것을 보았는데, 이 세계 속에서 사물들은 ‘극히 모순적인 방식으로 상호 결합해’ ‘온갖 형태의 친화성들’을 보여준다. 꿈과 도취는 자아가 아직도 사물들과 미메시즉어로 생동감 있게 교류할 수 있는 경험의 영역을 열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 롤프 티데만,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편집자 서문(벤야민 지음, 조형준 옮김, 『아케이드 프로젝트』, 새물결, 2005, 54~55쪽.)
 
   



 
  그러나 누들스는 그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사랑과 이상을 마약을 통한 환각 속에서는 결코 찾지 못했다. 그의 꿈은 저 거짓말 같이 달콤한 약속, 아메리칸 드림보다도 훨씬 더 허황되다. 그가 꿈꾸던 세상 속에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약의 환각 속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내가 결코 가질 수 없었던 꿈과 사랑과 우정은 그 환각 속에서만 생생한 현재이니까. 내 꿈을 비웃는 이 모든 냉혹한 현실을 아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공간 아닌 공간, 환각. 망각만이 누들스의 유일한 도피처이지만, 환각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는 또 다시 제자리다. 그는 아무 것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평생 붙잡을 수 없는 꿈과 가질 수 없는 사랑과 이루어질 수 없는 우정만을 갈망했다. 

 

 

   
 

 종교적 계시를 진정으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마약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진정한 극복은 세속의 계시에 있다. 즉, 유물론적이고 인간학적인 영감 속에 있는데, 해시시나 아편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그와 비슷한 것들은 그저 그러한 영감의 예비단계를 이루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 발터 벤야민, 조형준 옮김, 『아케이드 프로젝트』, 새물결, 2005, 54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퐁퐁 2010-07-13 0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정한 극복은 세속의 계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