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선뎐
김점선 지음 / 시작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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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매일 정답을 찾아 헤맨다. 무엇인가에 끌려다니며 사는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이 자주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분과 초를 다투는 정신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누우면, ’이건 아닌데!’ 하는 공허한 목소리가 가슴 가득 차오른다. 내면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이건 아닌데’라고 외치고 있지만, 정작 나의 일상은 모두가 옳다고 믿으며 걷는 그 평범한 궤도에서 한발짝도 옆으로 빗겨나지 못하고 있다. 때때로 멈춰 서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나를 사로잡지만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하고 또 그렇게 하루를 산다. 모두가 보기에 안전하게!

그래서인지 학교 다닐 때, 늘 튀는 행동으로 '명물'이라거나 '기인'으로 분류되는 독특한 친구들을 유독 좋아했었다. 고등학교 때, 기껏해야 몇 번 야간자율학습을 빼먹고 연극을 보러 가거나, 
수업시간에 몰래 책상 아래 소설책을 숨겨 놓고 읽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반항이었다. 그런 내게 자신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고 개성 강하게 살아가는 친구들이나, 금기와 일탈을 거침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친구들은 그야말로 내게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화가 김점선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글이요, 또 자신의 전기라는 뜻에서 [점선뎐]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옥단춘뎐, 숙영낭자뎐과 같은 맥락에서 스스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내가 읽은 그 어떤 위인의 전기보다 감동이 있고, 내가 읽은 그 어떤 소설보다 드라마틱하면서 재밌다. 책을 읽은 뒤, 나의 모든 화제의 중심에는 늘 그녀가 있다.

화가 김점선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기이한 사람 중에 가장 매력적인 기인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상만으로는 아무도 만들어내지 못할 독보적인 캐릭터이다. 충동은 있지만, 내면과 실행력이 약한 나는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삶을 그녀는 과감하게 살아냈다. 색감을 중요시한다는 그녀의 그림은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가 돋보인다. 이 화려한 색채와 함께 내가 화가 김전선의 그림에 끌리는 것은, 평면적 구성으로 담아낸 그림의 대상들이 어린 아이가 그려내는 상상의 세계처럼 천진함을 가득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일상도 이런 기발함과 천진함으로 가득하다.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한 뒤, 처음 본 남자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저 사람과 결혼해야지 결정을 해버린다. 그리고 그날 함께 자고, 그 사람의 이름은 며칠 뒤에 알고, 그냥 그렇게 집을 나와 함께 살았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산을 더듬으며 풀을 캐다 데쳐 먹었다. 그러면서도 종일 그림을 그렸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들이 학교 갈 준비를 하는데 교과서가 보이지 않았다. 가족은 정신 없이 교보문고로 달려가 교과서를 샀고, 책을 한아름 안고 학교에 간 아들을 보고 학급 친구들은 깜짝 놀란다. 아직 학교에서 교과서를 나눠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식을 꼭 올려야 한다는 며느리를 메스꺼워하고, 아들 결혼식 날 친구들과 함께 하객의 자리에 앉아 있는다. 그러나 이런 돌출 행동 때문에 그녀가 매력적인 기인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화가 김점선은 자의식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그녀의 돌발행동은 객기가 아니다. 그녀는 현대 화가들의 화법을 의도적으로 철저히 무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녀의 배움과 미술 이론이 빈약해서가 아니다. 그녀의 자의식은 지독한 독서에서 우러나온 오래 숙성된 사고의 퇴적층이 만들어낸 내면의 힘이다. 독서하면서 고민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옳다고 믿는대로, 자신을 속이지 않고 확고하게 살았을 뿐이다. 그녀에게서 가장 존경스러운 점은 독서에 관한 지론이다. "사람들은 독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히 덜 떨어진 자들은 그 가치를 과대평가한다. 독서는 숨쉬기 같아서 그 진행과정이나 결과에 대해서 의식이 없는 것이 건강한 징후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화제로 삼아서 떠들어대는 자들이 종종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병증이 있다는 것이다."(p. 185). 

화가 김점선은 이미 이 땅을 떠났지만, 이제 막 팬이 된 나의 가슴 속에서 나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저 그리고, 또 그리다 보면 어느새 그림이 자신을 인도했다는 김점선. 그리고 또 그렸지만, 한 번도 영감이 있어서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라는 그녀의 고백에 나는 감동한다. 세상살이에 무심한 듯 주류에서 한발짝 떨어져 산 듯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사는 일에 부지런했고, 최선을 다했고, 성실했다.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암조차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황홀해 했던 김점선, 그 어떤 위인보다 진정으로 그녀가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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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2009-05-21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는 그래서 고 김점선씨를 무진장 존경할겁니다! 지저분하게 빗질안한 빗자루커트머리! 언제나 검은티셔츠에 반바지! 화장끼도 없고 털털하다못해 솔직한 그분! 저도 결혼하면 외국인이면서 홀어머니(반드시 미혼모)에 외아들! 학력은 초졸에서 고졸정도! 아니면 홈스쿨링이나 독학을 한 그런사람을 신랑감으로 점찍고 싶습니다!

신의딸 2009-05-21 15:05   좋아요 0 | URL
헉.. 정말요? 조건이 꽤 까다로운데요(!) ^^; 저도 김점선씨 존경하는 마음입니다. 닮고 싶은데 행동으로 잘 옮겨지지 않는 저의 나약함을 탓하고 있습니다.. 박혜연씨 대단하시네요~ 관심과 덧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 알라딘에서 서재 만들고 나서 첫 덧글 달려서 오늘 기분 아주 좋네요^^
 
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위로 받기를 거절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로일지라도 거절합니다.
하나님께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께 가장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었는데,
나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심에도,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해주실 수 있는데 해주지 않은 것,
그 거절이 저에게는 가장 큰 상처입니다.
그래서 무기력한 사람에게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더 화가 납니다.
복음서에 가득한 기적은 그때뿐인 기적이었나요?
기적은 예수님 공생애 기간으로 막을 내리고
이제 유효한 것은 내게 요구하는 온갖 계명과 율법들뿐인 겁니까?
 

‘맥’이 찾아간 ‘오두막’에서 삼위 하나님을 맞닥뜨렸을 때, 나도 모르게 원망의 말들이 터져 나왔다. 책을 읽기 바로 직전, 나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또 한 번 외면하셨기 때문이다. ‘맥’을 따라 좇아간 ‘오두막’에서 이렇게 실재적인 하나님을 마주할 줄 미리 알았다면, 나는 책장을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
미안하지만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아요.
아니 적어도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삼위 하나님께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 ‘오두막’ 안에서 도망쳐 나오고 싶었다. 하나님과 직접 해결하지 않은 채, 묻어둔 나의 상처가 다시 건드려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나의 방식대로 알아서 처리하고 겨우 진정하고 있는데,
결과를 바꿔주실 것도 아니면서,
왜 상처의 한 가운데로 나를 부르십니까.
잔인하십니다.
더구나 내가 쓰러진 그 자리에서 그렇게 친근하고 인자한 모습이라니!
 

나는 월리엄 폴 영의 은밀한 ‘오두막’을 엿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오두막]의 저자인 월리엄 폴 영은 부모가 선교사로 활동하던 뉴기니에서 자랐고, 그곳 원주민들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경험이 있다고 소개된다. 그런 월리엄 폴 영에게 ‘오두막’은 모든 비밀, 아픔, 치욕적 기억들을 묻어두는 마음속 깊은 곳을 상징한다고. 나는 이 소개 글을 읽자마자 흠칫 놀라 내 마음 안의 오두막이 안전한지 확인했다. 아직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니 안심이 된다. 그러면서 스스로 놀란다. ‘내 안에도 오두막이 존재하는구나!’ 잊은 기억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 집 짓고 살고 있는 은밀한 고통들. 나는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누구에게도 꺼내놓고 싶지 않은, 내 안의 비밀스런 오두막을 안전하게 숨겨둔 채, 단지 월리엄 폴 영의 은밀한 오두막을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에 사로잡혔을 뿐이다.
 

그의 이야기 안에는 이러한 ‘오두막’이 실재한다. ‘맥’이라고 불리는 주인공 ‘매켄지’에게 ‘오두막’은 사랑하는 딸이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살해된 장소이다. 즉, 그의 ‘거대한 슬픔’이 시작된 곳이다. 그런데 어느 날, 맥은 ‘파파’(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파파’라고 부른다)로부터 쪽지를 받는다. 「매켄지, 오랜만이군요. 보고 싶었어요. 다음 주말에 오두막에 갈 예정이니까 같이 있고 싶으면 찾아와요. -파파.」 이 장난 같은 쪽지의 진위를 맥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다시 기억조차 하기 싫은 그 ‘오두막’을 찾아간다. 마침내 그가 찾은 ‘오두막’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쪽지보다 더 황당한 세 사람과의 만남이다. ‘파파’(성부 하나님)와 ‘예수’(성자 하나님)와 ‘사라유’(성령 하나님),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오두막]에서 만난 삼위 하나님은 그들과의 교제 가운데로 맥을 초대하며, 그에게 말을 걸어오신다.
 

나는 구약의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대면하고자 하실 때에는 ‘원점상황’, 즉 아무것도 없는 광야(사막)로 그의 백성을 불러내신다고 배웠다. 하나님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곳, 그리하여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는 곳으로 말이다.
그런데 [오두막]에서 만난 하나님은 내가 쓰러진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상처를 재료로 스스로 마음 안에 지은 집, 하나님과의 대화를 거절한 채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린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와계셨다. 더 달아날 데도 없고, 숨을 데도 없고, 감출 것도 없는 바로 나의 가장 은밀한 그곳에 말이다.
 

신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 사람이든, 부정하는 사람이든 살면서 한 번쯤은 신에 대한 실망을 경험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부조리와 불행은 신, 특히 ‘창조주 하나님’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많은 신학자, 설교가, 철학자, 저술가들이 이 문제를 고민해왔고 답해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여러 대답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오두막]에서 만난 삼위 하나님과 ‘맥’의 대화를 통해 지금 내가 얻은 대답보다 역동적인 답변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신학적 이론을 초월하면서도 논리적이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개념이면서도 명확한 이해를 제공한다.
 

삼위 하나님을 알 때, 그분의 일하심을 이해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나의 경험에 의하면, 치료와 자유함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나는 하나님을 이해함으로 비로소 나와 내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맥은 자신의 딸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한다! 맥이 경험한 치유와 자유함의 신비,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내가 경험한 치유의 신비가 궁금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나는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에게 부어지는 자유와 평강의 충만함! 그는 아신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아신다. 내가 겪는 고통과 쓰라림을 아신다. 그분이 아신다는 그 사실 자체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뜨거운 사랑과 손에 잡힐 듯한 실재적인 소망 가운데 내 안의 상처에 새살이 돋고, 오두막은 막 피어난 꽃향기로 가득한 정원처럼 비로소 생기를 얻는다. 그것은 맛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신비이다.
 

나는 책을 덮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하나님을 향했던 나의 원망과 분노 위로, 예수님을 욕하며 죽어간 좌편 강도의 모습이 겹쳐진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시고 고통 가운데 죽으신 예수님.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역사였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그 예수님께 끊임없이 메시아이심을 증명해보라고 외치는 나를 발견한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위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나는 [오두막]을 읽은 사람들이 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것은 치유와 용서와 자유를 선물하는 축복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선물하는 것이다. 나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오두막지기가 되고 싶다. 그 은밀한 [오두막]에서의 만남. 하나님과의 만남, 그 자체가 대답임을 모두가 알게 되기를 바란다. 나의 영혼은 [오두막]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감지한다. 그리고 고백할 수 있다. 그는 보이지 않아도 나를 위해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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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의 개 - 삶과 죽음의 뫼비우스의 띠
후지와라 신야 지음,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제목뿐만 아니라, 표지의 느낌까지도 음침하기 그지없는 이 책을 읽기로 선택한 것은 저자 ’후지와라 신야’에 대한 자자한 명성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하는지 알고 싶었다.

처음 접하는 ’후지와라 산야’의 글을 읽으며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문체이다. 그의 글은 쉽다! 그는 횡으로, 종으로 예리하게 도려내 듯 시대의 단면을 날카롭게 읽어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지식이나 사상을 자랑하려는 허영이 전혀 없다. 현란한 묘사를 남발하지도 않는다. 단순한 문장과 단어의 적확성이 그의 예민한 통찰력을 더욱 빛나게 해준다. 과장이나 꾸밈이 없는 그의 문체는 그의 지식이 아니라, 사람됨과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터넷 서점에서 확인하니 [황천의 개]는 여행과 기행으로 분류되고 있다. 내가 읽기에 이 책은 칼럼과 에세이(특수한 주제에 관한 논설) 같은 성격도 강하다. 그의 여행은 유희가 목적이 아니다. 그의 기록은 주관적인 깨달음과 감상을 넘어, 사건과 사람과 세대와 시대를 분석하고 추적하는 삶의 긴 여정이다.

[황천의 개], 나는 그가 추적하는 소재에 당황한다. 그가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관찰하고, 추적하는 대상은 ’옴진리교’ 라는 일본의 신흥종교이다. 인도의 힌두교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며, 현세에의 절대 부정을 추구하는 ’옴진리교’는 청년들이 조직한 신흥종교이다. 그런데 1995년, 이 사이비 종교의 신도들이 도쿄 시내의 전동차 다섯 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사린 가스 테러를 감행하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진다. 

후지와라 신야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잡지인 <주간 플레이보이>를 선택하여 1년간 이 ’옴진교’에 관한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주간 플레이보이> 1995년 7월 18일호부터 1996년 5월 28일호까지 ’세기말 항해록’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글을 모은 것이다. 그가 이 잡지를 선택한 이유는, "옴진리교의 젊은 신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젊은이들의 여행이 점차 나약해지고, 쉽사리 신앙 등에 빠지는 위험을 지적하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그의 글은 젊은이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책 속에서 그는 실제, 삶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한 젊은이와 만난다. 풍경과 햇살이 좋은 창가 자리를 주로 찾아 앉았던 젊은 날의 자신과는 달리, 창가 자리를 두고도 어두운 자리에 앉아있는 한 젊은이를 보고 그가 읽어낸 것은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외부라든가 풍경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창밖이란 외부이며, 타자이며, 사회이며, 풍경이며,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자연이다. 그는 "미디어를 통해 가상 환경에 생존을 의지해온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그 시작부터 현실과 자연으로부터 단절되었다"고 본다(p .99). 외부 세계는 그들에게 돌아갈 고향이 아니다. 젊은 세대들도 외형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바다, 혹은 산을 찾지만, 그것은 삶의 터전이 아닌 일시적인 유희의 대상임을 짚어낸다. 불현듯 요즘 젊은이들은 월급보다 더 많은 휴가를 원한다는 통계자료가 담고 있는 의미가 내 머릿속에서 해석되어진다.

"이처럼 외부 세계에 대한 단념이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인생을 살아가는 생존 양식이 되었다면 호텔 레스토랑에서 어두컴컴한 테이블을 선택하는 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그들만의 생존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p. 100)

후지와라 신야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가장 오래도록 머물러 서 있었던 지점은, 인도 여행에서 체험한 ’시체 태우는 장면’에서이다. 나는 그 느낌을 축약하여 전달할 자신이 없어, 여기에 그대로 인용해본다.
"처음 그 광경을 봤을 때는 정말 이렇게 해도 상관없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어.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보여줘도 괜찮다는 건가, 하고. 그때까지 내가 자라난 일본에서는 인간이 좀 더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고. 인간의 목숨은 지구보다 무겁다는 말을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 목숨을 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의 목숨이 최우선이라는 과대평가 때문에 과보호와 에고이즘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나약하게 만든 것인지 우리는 알고 있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과 시체를 금기로 여기고 철저히 은폐해왔지. 어리석은 선택이었어. (...) 우리는 지나치게 목숨을 과대평가했고, 죽음이 우리 곁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믿어왔지. 그 믿음이 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희석시킨 주범이었어. 부모의 기대와 과보호에 노출된 아이들이 커갈수록 자신의 소중함을 증명하려고 초조해하듯,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살아 있다는 진실 앞에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게 된 거야."(p. 132)

살아 있다는 진실 앞에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게 된 거라는 그의 설명처럼, 그래, 나도 그랬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자꾸 초조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자꾸 초조해진다. 그것이 내가 가끔 불면의 밤을 보내는 이유이다. 후지와라 신야는 사회가 발전할수록 이 같은 경향은 확대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초조함 때문에 인도로 갔다고 한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출산율이 감소되면서 부모와 사회는 하나뿐인 자식을 과잉된 기대와 과보호 속에서 키우고 있는데 인간은 우리가 그토록 많은 기대와 희망을 걸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냐. 동물이나 곤충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거야." (p. 144)

후지와라 신야는 점점 더 가상화되는 현실 속에서 젊은 청년들은 자신의 신체 감각을 조금씩 상실하고 있다고 말한다. 요즘 우리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리얼리티에 의해 잠식 당하고 있는데, 그는 TV가 보여주는 리얼리티는 진정한 리얼리티가 아니라, 현실을 반쯤 픽션화시킨 가상 리얼티라고 설명한다. 갑자기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스며들며 섬뜩해진다.

실제와 가상의 모호한 경계에서 내가 삶을 사는지, 시간이 나를 좀먹고 있는지 정신이 차려지지 않는다. 출근 길에 창 밖으로 보았던 목련꽃에 오늘 나는 슬퍼졌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씨름하는 나의 반복되는 일상이 갑갑하게 조여오며, 문득 깨달아지는 진실은 이 좁은 사무실 공간 안에서 내 젊은 날이 다 가고 있다는 것이다. 

"외관만 기능하는 도시 문명의 인간들로부터 공감을 얻어내려면 허망한 연기를 계속해야 하는 법"이라고 했던 후지와라 신야의 통찰처럼, 인간 조직 안에서 마음을 속이며 웃고,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통제하며 허망한 연기를 계속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상과 신념과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후지와라 신야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여행이 점차 나약해지고 있고, 쉽사리 신앙에 빠지는 위험을 지적하고자 이 글을 썼다고 하는데,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과대망상에 가까운 정신 행동이지 신념이나 신앙이 아니다. 우리는 저마다 무엇인가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 지위를 믿기도 하고, 지식을 믿기도 하고, 돈을 믿기도 하고, ’너’를 믿기도 하고, ’나’를 믿기도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은 내가 존재하는 목적에 대한 신념이다. 이제는 때때로 나를 괴롭히는 초조함과 결판을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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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밥상 이야기 - 거친 밥과 슴슴한 나물이 주는 행복
윤혜신 지음 / 동녘라이프(친구미디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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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침엔 우유 한잔 점심엔 FAST FOOD~!"
신해철은 ’도시인’의 고단한 삶을 노래하는 첫마디에서 
’밥상’ 앞에 앉을 새도 없는 도시인의 분주한 생활을 포착해냈다.
순전히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먹는 생활’을 첫 번째 은유 대상으로 삼은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칭찬해주고 싶다.

’우유 한 잔’은 턱없이 가난한 식사를, 
’FAST FOOD’는 쓰레기 음식(junk food)을 섭취하는  병든 삶을 은유한다.
우리는 ’밥상’에 둘러앉을 여유를 잃어버림으로써,
원초적인 즐거움, 즉 먹는 즐거움과 사귐의 즐거움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이게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다"라는 자조 섞인 푸념 뒤에는
제대로 먹고 살지 못하는 우리의 가난한 오늘에 대한 고백이 들어있는 것이다.
집(house)을 얻으려다 가정(home)을 잃어리는 형세이다.

여기 용기 있는 한 여인이 있다.
어릴 적 꿈은 시인이자 화가였지만, 커서는 ’독립적인 여성’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는
궁중요리 전문가이면서도 건강요리 전문가인 윤혜신(요리가, 시인, 작가, 선생님)!
[착한 밥상이야기]는 먹지 못할 것을 먹으며 미친 속도로 돌아가는 도시를 벗어나,
텃밭에서 나물을 캐고, 꽃밭을 가꾸며, 직접 소박하지만 정갈한 음식을 차려내는
사람 좋은 시골 밥집 아줌마의 이야기이다.
[착한 밥상이야기]에는 이 독특한 시골 밥집 아줌마의 생(生) 철학이 곧 요리 철학이 된다.
건강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음식 이야기, 사람 이야기, 
거기에 팁으로 요리법까지, 읽을 거리가 한 상 가득하다.

윤혜신 님의 건강한 밥상 이야기는 그대로 시가 되고,
맛있는 음식 이야기는 그대로 예술이 되고,
정다운 시골 식당 이야기는 그대로 영화가 되고,
그리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대로 향수가 된다.

윤혜신 님은 심하게 편식한다고 고백한다.
고기도 먹지 않고, 생선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해물도 그다지 먹지 않고, 유제품도 즐기지 않는다.
게다가, 나의 식습관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특이 체질이다.
라면과 자장면을 먹으면 속이 울렁거리고 뱃속에서 전쟁이 나고,
도넛을 먹으면 혓바늘이 돋아 따끔거리고,
단 케이크나 튀긴 과자를 먹으면 속이 느글거려서 김칫국을 마신다.
탄산음료는 물론 오렌지 주스도 마시지 않는다.
그럼 도대체 뭘 먹고 산다는 말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주식은 "그 밥에 그 나물"이다.
"시커먼 보리밥에 배춧잎을 넣은 슴슴한 된장국, 신 김치를 숭숭 썰어 넣은 비지찌개."

내 주변에 아이들의 아토피로 고생하는 엄마들이 꽤 많은데,
이렇게 "그 밥에 그 나물"로 식단을 바꾼 후, 아이의 증세가 호전되었다는 간증을 많이 한다.

[착한 밥상이야기]는 우리에게도 편식을 권한다.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은 아니지만, 농약으로 범벅이 된 수입 농수산물, 
성장호르몬과 항생제로 사육된 고기, 식품 첨가물이 듬뿍 들어간 가공식품, 
기름지고 단 음식들에 대한 먼 거리 유지와 투쟁이 필요하다.
착한 밥상은 바로 "편식하는 밥상"이다.

’윤혜신이 권하는 소박한 음식 이야기’에서 내가 제일 행복했던 음식은
바로 ’슬플 때 먹는 비빔밥’이다.
사춘기 시절 단짝의 심한 경멸의 말에 마음이 고통스러웠을 때도,
첫아이를 유산하고 다시 유산의 기미가 보여 절망스러웠을 때도, 
비빔밥을 먹었다고 한다.
큰 양푼에 찬밥과 김치를 넣고 슥슥 비며 큰 숟가락으로 밥을 밀어 넣었던
삼순이의 분노의 비빔밥이 그려진다.
마이클잭슨도 반했다고 하는 우리의 비빔밥, 나는 이 비빔밥에 가장 정이 많이 간다.

"밥을 짓고 살림하는 것이 나와 이웃을 살리는 아름다운 노동이자,
생명을 살리는 재미난 놀이"라고 말하는 [착한 밥상이야기]는
건강한 밥상이요, 사귐이 있는 밥상이요, 그리움의 밥상이다.
윤혜신 씨의 맛난 밥상을 대할 수 있는 가족과 이웃들이 이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어쩌다 한 번 들린 손님으로라도 부러 찾아가야겠다.

음식은 곧 ’권력’이다. 
언제나 좋은 것은 가진 자의 몫이다.
그러나 [착한 밥상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소박한 시골 밥상에 진정한 건강과 낭만과 사랑이 있다는 사실에
뿌듯했고, 또 감사했다.
물론, 지금은 그 ’시골 밥상’이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차별화 되고, 권력화 되고 있어
부자이거나 아니면 시골에 사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호사여서,
나처럼 어중간하게 도시에 사는 사람은 예외지만 말이다.

(이 글의 부제를 "나의 못된 밥상을 엎어버릴까?"로 했다가 수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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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동안 버려야 할 60가지 나쁜 습관
뤼슈춘 지음, 홍민경 옮김 / 정민미디어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자기계발서를 잘 읽지 않는 내가 [사는 동안 버려야 할 60가지 나쁜 습관]을 선택한 것은
나쁜 습관에 주목했다는 점 때문이다.
좋은 습관만큼이나 나쁜 습관도 무궁무진할텐데,  
저자가 나쁜 습관으로 지목한 60가지가 궁금했고, 
그중에 나에게 있는 것이 몇 개나 될지 헤아려보고 싶었다.
게다가, 보통 자기계발서는 이렇게 부정적인 접근을 잘 하지 않는데,
배짱 좋은 저자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내용을 살펴보면, 저자가 지목한 60가지는 '습관'이라고 하기보다,
'처세'에 더 가까운 기술이 아닌가 생각된다.
솔직히 깊은 통찰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이론이 아니라,
갖가지 성공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Tip' 정도를 모아놓은 것같다.
재밌게 읽기는 했지만, 공감할 수 없을만큼 당황스러운 처세도 몇몇 등장한다.
게다가, 등장하는 사례는 나무랄 데 없이 재밌는데,
저자가 그것을 적용하기 위해 해석하는 데서 약간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예를 들면,
사는 동안 버려야 할 나쁜 습관 7번으로 지목된 것은 '겸손이 미덕이다'라는 습관(?)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버려야 할 나쁜 습관인가 하면,
"몸값을 높이기에 능해야 대접받는 시대"이기 때문이란다.
몸값이 높아야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고 존중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것이 현실이라며,
몸값을 높이는 기술 세 가지를 제시하는데,
첫째, 자신의 가치에 맞는 적정선을 찾아라.
둘째, 몸값을 높이려 할 때는 시장 상황을 고려하라.
셋째, 몸값을 높일 절호의 타이밍을 잡아라.
잘 살펴보면 눈치챌 수 있겠지만, 몸값을 높이는 노하우라기보다는 꼼수에 가깝다.
너무 앏팍한 처세아닌가.

버는 동안 버려야 할 나쁜 습관 1번으로, "원수를 갚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다"를 지목하며,
중국인에게 그렇게 중요하다는 복수관(은원관)사상, 
즉 복수의 문제를 첫 번째로 건드리는 것을 보고 역시 중국인 저자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저자가 나쁜 습관이라고 지목한 것들이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에게는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들이여서 이런 식의 접근과 해석이 중국 독자들에게는
발상의 전환이며, 그래서 굉장히 신선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격언 같은 멋진 표현도 많이 등장한다.
"산이 푸르고 무성하면 땔나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호랑이는 위엄을 보이지 않아도 호랑이다."
"훌륭한 신하는 군주를 가려 섬긴다."

재밌는 사례나 교훈적인 내용도 많아서 이야기 듣듯이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저자가 목표하는 바가 삶에 대한 깊은 성찰보다 오로지 성공지향적이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받아들인지 얼마 되지 않은 혼란함에서
성공하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얇팍한 처세술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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