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불명 야샤르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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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을 들고 일단 밖으로 나갔다. 잠깐 누굴 좀 만나고 머리가 부시시 해보여서 미용실에나 가야겠다 했다. 그리고 미용실에서 여타의 다른 잡지들을 권하기에 쓸만해 보이는 게 별로 눈에 안 띄어 (난 도대체 패션잡지는 머리에 잘 안 들어온다..쩝) 이 책을 보기 시작했다. 머리 하는 내내 눈을 못 떼고 정신없이 읽었다. 간간히 남들 시선 의식해서 입을 가리며 웃어대니까 헤어디자이너(요즘 미용사라고 하면 혼난다..) 언니가 그런다. "그렇게 재밌으세요? 굉장히 열심히 읽으시네요. 뭐에요?" 그런다. 자신있게 대답해주었다. "네! 이 책 꼭 읽어보세요!"

요즘 읽은 책 중에 가장 유쾌한 책이다. 아지즈 네신이라는 작가. 촌철살인의 글솜씨가 사람을 매혹시키고 터키라는 나라나 우리나라나 어쩌면 수없이 많은 나라들에서의 고장난 시스템을 통렬하게 묘사한 내용이 또한 읽는 이로 하여금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주인공 야샤르는 '살아 있으나 죽었다고 하는' 사람이다. 주민등록이 잘못 되어 주민등록증을 발급 못 받아 학교도 못 가고 일자리도 못 찾고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게 없는 인생이다. 그넘의 주민등록증 하나 받아서 사람 구실 해보겠다고 군대도 가고 국회의원 옮겨다 나르는 일도 하고 별의별 수모를 다 겪지만 결국은 감옥까지 가게 된다. 하지만, 그 갑갑하고 힘든 여정을 야샤르는 감옥 동료들에게 밤마다 너무나 재미있게 너무나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음으로써 인기를 끌게 된다. 야샤르라는 주인공이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아마 그런 이유일 거다. 힘든 일 어려운 일 당했지만, 그걸 해학으로 풀어내는 재주가 있어서라고.

"정부기관? 공공기관이라고? 그래, 그럼 공공기관이 하는 일이 뭐요? 학교에 입학하려고 했더니 '넌 죽었어' 라고 하고, 군대에 끌고 갈 때는 '넌 살아있어' 라고 하더니, 또 유산을 상속받으려고 할 때는 '넌 죽었어' 라고 하고, 세금을 거두어 갈 때는 다시 또 '넌 살아있어' 라고 하는, 도대체 씨도 안 먹히는 이야기들을 해대는 공공기관이라는 곳은 뭘 하는 곳이냐고!"

야샤르의 이 말에서 대부분이 공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할아버지에게 없는 아이들이 버젓이 호적에 올라있어 이혼 지경까지 몰린다거나 일흔이 넘은 할머니에게 징집 기피자라는 누명을 씌워 이 기관 저 기관으로 옮겨 다니게 하는 일, 야샤르처럼 세금 낼 때는 절차가 간편하더니 유산 좀 받으려고 하니까 도대체가 너무 복잡해서 보통 사람은 지쳐 나가떨어질 정도인 것 등등 우리가 실제 이렇게 당하진 않아도 비슷한 억울함들이 안에서 솟구치는 게 느껴진다. 특히나 요즘처럼 부동산값이 하늘을 치닫고 있는 즈음엔 더더군다나 이런 말도 안되는 시스템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저 그렇게 수다스러운 소설만으로 그치는 건 아닌 것 같다. 나를 웃게 하고 나를 즐겁게 하고 그래서 유쾌한 기분을 주지만, 다 읽고 나면 왠지 모를 씁쓸함이나 울컥함이 남는 그런 소설이다. 난 읽으면서 내내 노신의 '아큐정전'을 떠올렸다. 물론, 동일한 내용도 아니고 분위기도 많이 틀리지만, 시스템이나 시대 상황에 희생되는 개인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무조건 읽어볼 것을 권한다. 들기만 하면 반나절도 안 되어 단숨에 읽을만큼 재미있는 책이며, 너무나 적절한 표현과 유머에 즐거워질만한 책일 뿐 아니라, 덮고 나면 바로 공허함이 밀려오는 그런 류의 그저 웃기기만 한 책이 아니라 머릿 속이 꽉 채워질만큼 어떤 느낌까지 안겨주는 책이라는 점에서 적극 추천이다. 아지즈 네신의 다른 글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강렬하게 든다, 지금 내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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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1-14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조건 무조건입니다^^

놀자 2006-11-14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볼게요~~~

비연 2006-11-1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그렇죠? 그렇죠? ^^
놀자님) 꼬옥 읽어보세요...꼬옥! 근데...바뀌신 모습이...^^;;;

비로그인 2006-12-09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리뷰 역시 쾌활하니 좋네요. 책 자체가 워낙 웃음꽃 피울만한 필체를 자랑하니 ^^

비연 2006-12-09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콸츠님) 이 책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슬며시 나요^^ ㅋㅋㅋ
 
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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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행 가기 전에 어떤 책을 가져갈까 매우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기실은 마음 속에 정해져있었는데 시늉만 한 거라고 생각된다. 난 알랭 드 보통의 이 책, '동물원에 가기'를 계속 읽지 않고 이번 여행에서 읽어야지 내심 결심하고 있었던 거다. 얇고 작고 더군다나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작가의 에센스 같은 책. 낙점.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손에 든 건, 오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공항에서였다. 가서는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다니고 저녁에는 혼자 낭만에 취해보겠다고 수첩과 펜을 손에 딱 쥔 때 시내의 어느 바에 가서 죽치고 있었기에 책을 펼 여력은 없었다. 드디어 그 곳을 떠나는 날. 공항에 조금 일찍 가서 수속을 마친 후 게이트 앞의 의자에 자리를 잡고, 난 이 책을 펼쳐들었다.

알랭 드 보통이란 사람. 사람의 본질적인 마음을 꿰뚫어보는, 흔치않은 작가 중의 하나다. 그저 표피적으로 남에게 들은 것을 내 것인 양 포장하거나 느끼긴 느꼈으되 마음의 겉을 돌아다니는 감정 한 가락 잡아서 낭설을 퍼부어대는 작가들과는 달리(물론 모든 작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말해두는 바이다) 이 사람은 하나를 보아도 아주 깊숙히, 아주 섬세하게 느끼고 쓴다. 그래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누군가에게 나의 마음을 스캔당한 듯한 느낌에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가지게 하는, 그런 '놀라운' 사람이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를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은 상관관계가 있다. 때떄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어 술술 풀려나가곤 한다. 정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생각 뿐일 때는 제대로 그 일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마치 남의 요구에 따라 농담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투를 흉내 내야 할 때처럼 몸이 굳어버린다. 그러나 정신의 일부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외려 생각이 쉬워진다. <슬픔이 주는 기쁨, pp18~19>

비행기 창 너머로 뭉게뭉게 빠져들 것 같은 구름을 쳐다보고 있으면 나는 나와 대화를 하게 된다. 혼자 여행을 하든, 누구와 함께이든, 그 순간은 세상에 나 혼자인 듯 싶다. 왜냐하면 바깥에 펼쳐진 세상이 너무 크고 믿기지 않아서 주변의 '작은' 인간들이 보이지 않고 대신 내 속의 '큰' 이야기들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호퍼의 그림처럼, 일상 속에서 스쳐가는 것들과 운송 수단은 사람을 사색하게 한다.

..그러는 동안 내내 우리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우리 눈에 감추어져 있었다 뿐이지, 사실 우리 삶은 저렇게 작았다는 것.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살고는 있지만 실제로 볼 기회는 드문 세상이다. 그러나 매나 신에게는 우리가 늘 그렇게 보일 것이다. <공항에 가기, pp35~36>

그렇다. 창 밖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땅과 인간들이 세워둔 갖가지 장난감같은 모형들을 보면서 나는 가끔 신이 된 듯한 느낌을 가진다. 아니, 신의 눈을 느끼게 된다. 앙코르 와트의 3층에서 아래를 바라볼 때도 그러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바라본다는 것. 그 속에서 느껴지는 것. 그것은 우리는 가끔 느끼지만, 위에 늘 상주하시는 신에겐 항상 보여지는 광경이고...참으로 우습기까지 한 인간사다.

많은 글쓰기가 그런 식이다. 맞춤법은 시간이 가면 정확해지지만, 우리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도록 단어들을 배열하는 데는 꽤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 글로 쓴 이야기는 보통 사건의 거족만 훑고 간다. 석양을 본 뒤, 나중에 일기를 쓸 때는 뭔가 적당한 것을 더듬더듬 찾아보다가 그냥  '아름다웠다'고만 적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글로 고정해놓을 수가 없어 곧 잊고 만다. 우리는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붙들어두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어디에 갔고 무엇을 보았는지 목록을 작성한다. 그러나 다 적고 펜을 내려놓을 때면 우리가 묘사하지 못한 것, 덧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사라져버린 것이 하루의 진실의 열쇠를 쥐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와 송어), pp123~124>

여행하는 내내 부끄러웠다. 내 펜끝에서 나오는 단어들의 미천함. '좋았다'. '굉장했다'. '멋지다'....초등학교 1학년 수준의 단어들로 내 느낌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나의 능력을 비난했다. 그리고 마치 뭔가가 있는 듯 말도 안되는 얘기들을 주절주절 읊어놓음으로써 나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했다. 그런데, 보통은 알고 있었다. 글쓰는 것을 충실하게 하지 못하는 이의 비애를, 그리고 그 행태를. 들켜버렸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이 평소에 자신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대목들만 추려서 완결지은 에세이집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전에 읽은 알랭 드 보통의 책들과 가끔 겹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지루함으로 느낀다면 보통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보통이 정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언가를 이 책 한권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책이다. 읽는 내내, 동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이라는 사람이 우리가 보는 시선을 너무나 말끔히 정리해서 알려준다는 것에 찬탄하였고 아울러 뿌듯했다. 어려운 말들로 그의 글들을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의 글은, 이전과는 다른 인류인 현대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솔직하게 누구보다 충실하게 말해주는 보기드문 작가라는 말 외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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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1-25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해요.

비연 2006-11-25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감사해요..님도 축하드리구요!^^

상복의랑데뷰 2006-11-25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

비연 2006-11-26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복의 랑데뷰님) 감사해요...^^
 
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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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우울하다. 아니 우울하다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지 모른다. 말하자면, 범인이 범인으로 느껴지지 않고 그냥 하나의 인간으로서 가슴 아프게 다가오도록 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고나 할까. 예전에 읽었던 '백야행'도 그랬고 이번에 접한 이 '용의자 X의 헌신'도 마찬가지였다.

한때는 천재 소리를 들었으나 지금은 그저 평범한 고등학교 선생님인 이시가미는 40대의 독신 남성이다. 우연히 옆집에 살게 된 야스코라는 여자에게 남다른 호의를 가지고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러다가 야스코가 자신을 계속 못살게 굴던 전남편 도미가시를 살해하게 되고 이를 알게 된 이시가미는 야스코와 그 딸 미사토 모녀를 구하기 위해 '헌신'하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형사 시리즈물에나 나올 법한 이 평범한 내용은 마지막으로 갈수록 묘한 반전을 예고한다. 그리고 마지막 몇 페이지를 읽는 동안에는 누가 누구를 죽이고 누가 누구를 감싸고 하는 단순한 문제는 아랑곳없고 그저 한 남자의 더할 나위없는 '헌신'에 대한 가슴 아픔만이 읽는 사람을 지배하게 된다. 결말을 말한다면 스포일러가 될테니 더 이상의 언급은 할 수 없으나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누구나 마지막에선 다 같은 심정에 사로잡혔을 게다.

사람이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누구는 그 재능을 몰라서, 또 누구는 그 재능을 확실하게 알면서도 여건이 안되어 그렇게 살도록 허락되어지지 않는다. 아마 대부분은 전자에 속하겠지만, 이시가미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자신의 관심사와 재능을 썩일 수 밖에 없는 불운한 천재의 경우는 전자에 비해 사는 것이 훨씬 고통스러우리라. 그 외로움과 덧없음에 힘들어하다가 어느날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준(사실 그들은 그냥 한 일이지만 말이다) 두 모녀를 만나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바보같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딱히 천재가 아니라도 사람 사는 게 그리 녹녹하지 않고 또 숱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늘 외로울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에서 낯선 사람의 따스함과 미소가 어떤 순간엔 우주보다 크게 다가올 수도 있으리라는 걸 동감한다. 그래서 이시가미가 한 그 어처구니없는(현실적으로 보면 그리고 그 친구인 유가와가 볼 때도 참 어이없는 행동이 아니겠는가) 행동과 계획이 머리로는 이해가 안되어도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 하면 말이 안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본 추리소설은 참 여러 부류가 있지만, 특히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들은 여타의 것들과는 좀 다르게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것 같아 볼 때마다 아릿하다. 추리소설이 그냥 추리에만 그쳐서 트릭을 해결하는 쟝르로만 구실한다면 인간적인 매력이 떨어지겠지만 이렇게 삶과 사람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풀어나가는 추리소설들은 그 얄팍한 쟝르를 뛰어넘는 그 무엇을 우리에게 안겨주어 추천할 만 하다. 

다만 좋은 책임에도 몇 가지 지적할 것은, 오타와 역자의 글이다.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오는 오타들은 늘 그렇듯 책에 대한 호감도를 절대적으로 떨어뜨린다. 또한 아무리 책의 말미에 있다고는 해도 역자의 글이 스포일러성 글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한다. 이 책의 묘미는 그 마지막의 몇 장에 다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역자는 그 내용을 너무나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아차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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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9 0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06-09-29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이따가 몇 가지 물어볼께용...^^ 기대만빵 비연~
 
라비린토스 1 - 세 권의 책, 두 명의 여자, 하나의 비밀
케이트 모스 지음, 이창식 옮김 / 해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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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두 권을 다 읽고 난 느낌은, 그저 허탈이다. 요즘 읽는 것마다 감흥이 적은 것은 선정이 잘못된 탓일까 아니면 내 감성이 너무 메말라서일까 아니면 추리소설류를 쉴새없이 읽어댄 부작용인 것일까. 아뭏든 길고 길었던 이 책의 마지막장을 넘기며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것에 실망해서 나 혼자 잠깐 고민해본 사항이다.

800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역사를 배경으로 라비린토스 3부작의 책을 지키기 위한, 혹은 상대의 입장이라면 빼앗기 위한 긴 여정이 담겨진 책이다. 1200년대의 알라이스라는 여자는 2000년대의 앨리스라는 여자에게 영적으로 다가가 있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시간을 뛰어넘어 비슷한 관계와 굴레를 가지고 얽혀 있게 된다. 비밀의 책이 3권이나 되는 바람에, 그리고 그 3권을 다 가져야 비밀이 완수되는 바람에 남은 한 권을 차지하기 위한 사투는 결국 피를 부르고 시대의 단절을 초래한다.

사실, 이 책이 얘기하고자 했던 건 그런 '책'에 대한 건 아니었을 게다. 그 당시에 이루어졌던 십자군 전쟁, 그리고 그 속에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 죄목은 있으나 그 죄로 인해서라기 보다는 정치적으로 혹은 제국주의적인 영토확장으로 인해, 또는 그냥 인간의 기저에 깔린 잔학성 때문에 뜻없이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과연 산다는 것, 그리고 성배라는 것이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고민해가며 지은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가서 오드리크 배야가 말하던 이야기들은 그런 걸 뜻하는 게 아닐까.

이런 소설을 역사추리소설이라고들 분류한다. 아마도 최근에 가장 인기가 많았고 논란의 여지가 되었던 것도 (역시 성배를 다룬) 다빈치 코드라는 비슷한 부류의 책이었다. 역사추리소설의 시초는, 내가 생각하기엔 뭐니뭐니 해도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라는 책이고 나는 그 이후에 숱한 동종의 책들을 읽었지만 이만한 책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새로운 것을 접했던 예전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서 역치 수준이 높아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책만한 깊이를 선사하는 작품은 별로 없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많은 역사적인 사실들과 있었거나 없었던 사람들을 등장시켜 근사한 얼개를 만들어두었기에 읽는 내내 뭔가를 알아간다는 기쁨은 있었다. 하지만 일단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킨 것이 좀 산만했고 연계가 가끔 헐거워지기도 했다. 과거의 그(녀)와 현재의 그(녀)를 어떻게든 연결시키려다 보니 좀 억지스러운 부분도 눈에 띄였다. 무엇보다 사랑과 신의와 그 모든 것을 다루었음에도 내 마음에 남기는 흔적은 미미하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 같다. 어쩌면 비슷한 얘기들을 많이 들어서였을까. 처음부터 얘기의 전개가 어떻게 될 지 너무 뻔하게 보여서 2권이라는 길이가 상당히 지루하게 느껴졌다.

물론 작품의 완성도나 작가의 능력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은 아니나 기대에 못 미쳤다는 것 뿐이다. 과거의 감흥에 상대적인 비교를 하는 내게도 잘못이 있는, 매우 주관적인 서운함이라는 걸 밝혀두고자 한다. 역사추리소설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번쯤 접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는 책이다. 다만 '여자 댄 브라운' 어쩌고 하는 선전 문구에 너무 혹하지 말고, 전체적인 내용을 추리라는 거에만 집착하지 않고 본다면 말이다.

가을 하늘 아래, 가끔씩 팔랑이는 낙엽들을 바라보며 인생의 '성배'는 무엇일까를 곱씹어보기에 좋은 책이지 대단한 역사적 진실이나 신비주의가 담겨있는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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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번의 시선 1 모중석 스릴러 클럽 2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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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다. 다들 찬사가 쏟아지는 책이라 읽고 나서 그렇게 큰 충격이 없었음을, 그리고 그다지 감흥이 없었음을 고백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아뭏든 난 평범하게 잘된 책이라는 생각 뿐이다.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걸까. 망치로 때리는 듯한 반전을 기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반적인 스릴감이 예상보다 별로 큰 임팩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 그레이스 로슨이라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만한 주부이자 화가가 우연히 사진 현상소에서 받아든 사진 한장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파만파의 사건들이 흥미진진하다고 볼 수 있다. 15년 전의 과거와 현재의 얼개들이 정교하게 들어맞고 소소한 일상생활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거기에서 비롯될 수 있는 공포들이 마음에 와닿게 그려지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감성들이 전해지면서 작품을 읽는 내내 감미로움과 두려움을 오고가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이 작가에겐. 처음 읽는 작품이지만, 충분한 역량이 있는 작가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반전의 충격이 크진 않았다. 작품 내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실마리들을 제공하고 있었고 사소한 일들로 인해 일이 크게 번지는 류의 작품들은 이전에도 많았기에 대충 그 반전이라는 것이 어떤 류라는 것을 중간부터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시시한 마음으로 약간은 지루한 마음으로 대했던 것 같다.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마지막 페이지의 다소 충격적인 반전이 낭만적인 그것이라는 점은 끌리는 면이다. 보다 사악하고 보다 악랄한 이면을 드러내기 보다는 사랑을, 운명을 드러내고 있어 책의 말미 무렵에서는 가슴 한켠에 뭉클함을 느끼게 하는 무엇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있음에도 나는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다지 길지 않은 장편을 두 권으로 분권했다는 매우 소심스러운 반감도 있다. 또한, 우리의 일상이 언제 허물어질 지 모르는 위선과 기만 위에 기초한 아주 유약한 것임을 느끼게 해주기에는 매우 적절한 전개임에도 무언가 빠져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게 뭐냐고 구체적으로 묻는다면 설명하기가 매우 곤란하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요즘 하도 반전반전하니까 반전에만 집중하여 홍보하는 경향이 추리소설계에 짙게 깔려있는데 그런 거 기대하고 보지 말아달라고 말하련다. 이 작품은 반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 대한 가련한 반기를 드는 것에 더 집중한 작품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 신경써서 읽는다면 훨씬 더 큰 감흥을 불러일으켜 줄 거라 믿는다. 내가 그러지 못한 아쉬움이 커서 붙이는 사족일 수도 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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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의랑데뷰 2006-07-31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연님의 생각과 제다이님의 생각에 걸쳐 있습니다. ^^ 잘 짜여졌긴 한데 별로 감흥이 없습니다. 밀약보다 몰입도가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비연 2006-07-31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복의 랑데뷰님) 밀약은 괜챦나요? 흠....좀 실망이라 어쩔까 고민 중입니다
마지막 기회니 밀약이니..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말이죠...

상복의랑데뷰 2006-07-31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반적으로 마지막 기회가 평이 제일 좋은데 그건 저도 안 읽어봐서 모르겠고, 밀약은 책의 상태에 재미가 좌우되는 편이시라면 절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_-; 하지만 결말이 더 깔금하고 좋았습니다.

비연 2006-07-31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의 상태? 흠....마지막 기회를 한번 봐야겠군요...밀약도 고려 중~
좋은 책 소개 감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