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부터 현대까지 뛰어난 지적게임을 선보이는 추리소설들을 보면서 인간 내면의 깊숙한 기저에 깔린 본성과 그 발현에 대해 느낀다. 내가 읽고 좋았던 책들이 위주다,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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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5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2005년 07월 24일에 저장
절판

사실..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지적게임과는 거리가 멀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머리만이 아니라 감성과 몸으로 세상에 부딪혀 나가는 필립 말로의 모습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며 작가의 글솜씨가 어떤 문학작품에 비겨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빛나기 때문이다.
결백
G. K. 체스터튼 지음, 홍희정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7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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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1월 03일에 저장

브라운 신부의 얘기 중에서도 이 책이 내게는 가장 재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체스터튼이 창조해낸 탐정이 아니면서도 탐정인 브라운 신부는 내가 아는 추리소설의 등장인물 중 가장 매력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소름
로스 맥도날드 지음, 강영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7월
7,800원 → 7,020원(10%할인) / 마일리지 39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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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7월 21일에 저장

현재에 일어난 살인사건을 통해 과거에 일어났던 각각의 살인사건을 추적해나가는 경로가 너무나 리얼하고 재미있는 소설이다. 범인의 캐릭터도 독특하고 루 아처 탐정의 매력이 돋보인다. 누구나 추리소설을 좋아하든 안하든 읽고 흥미를 느낄만한 수작이다.
지혜
G. K. 체스터튼 지음, 봉명화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7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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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은 어눌한 브라운 신부가 인간의 내면을 통찰하는 그 방법은 정말 예리하고..명쾌하다. 하지만, 이 책들이 명작일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을 잃지 않는 브라운 신부라는 사람의 캐릭터때문일 것이다.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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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에 이르는 병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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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근 한 달 여만의 리뷰다. 읽은 책들은 쌓이는데, 그게 타이밍이라는 걸 놓치면 리뷰 쓰는 게 영 요원해진다. 내내 께름칙한 심정으로 밀린 리뷰에 대해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탁 놓아버렸다. 에고. 이제부터 읽는 걸로 쓰자구. 그렇게 해서 손에 든 두 개의 추리소설이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 과 이 책, <살육에 이르는 병>이다. 둘 다 워낙 회자되고 있는 책이긴 하지만, 사실 후자를 고르는 데에는 나름 많은 고민이 있었다. 제목도 그렇고('살육'이라니...평생 한번 쓸까말까한 단어 아닌가) 표지도 그렇고 들려오는 소문에 따른 내용들도 그렇고 이걸 꼭 읽어야 할까 수차례 망설이다가 그래도 '신본격'이라 하고 이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의 대표작이라는데 안 읽을 수야 있겠는가 하면서 장바구니에 넣었다. 결국 정말 오랜만의 리뷰를 이 책으로 택한 걸 보면, 그 선택이 좋았는 지 나빴는 지는 몰라도 대단히 인상적인(?) 책인 것만은 분명한가보다.

연쇄살인사건. 그것도 죽은 여자의 시체를 상대로 성교를 하고 성기를 잘라 가져가는 범인은, 책의 첫 부분부터 밝혀진다. "...정말로 네가 죽인건가?" "예?.....아아. 그래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소설은 시간을 교차해가며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바꾸어가며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전직 경부였지만 지금은 은퇴하고 아내를 먼저 보낸채 외로이 살고 있는 히구치 다케오. 그를 사랑했던 여자가 이 연쇄살인사건의 희생양이 되자 죄책감에 사건에 깊게 개입하게 되고, 결국....우여곡절 끝에 범인을 잡게 되는데...

책 앞 표지 오른쪽 상단에 "19세 미만 구독 불가"라고 빨간 박스 안에 쓰인 글자를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정말, 읽는 내내 속에서 욕지기가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구체적인 상황 묘사, 엽기적인 살인자의 심리구조와 행각, 그리고 마지막에 드러나는 사건의 실체(반전이라고 말하는 그것. 정말 예측하기 힘들다..). 읽지 말아버릴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하면서 끝까지 읽은 건, 작가의 뛰어난 역량 덕분이기도 하지만, 결국 말하려는 게 뭘까라는 단순한 호기심도 한 몫했다.

그런 생각하기도 싫은 내용을 차치하고라면, 이 책은 잘 짜여진 플롯과 작가 나름의 사회 문제에 대한 치밀한 분석, 트릭을 숨긴 채 여기저기 암시만을 두는 작법, 한 방에 독자들의 머릿 속을 날려버릴 정도로 마지막까지 예측을 불허하는(물론 예측은 한다. 맞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내용의 전개 등으로 매우 잘 된 추리소설이다. 별 다섯개를 주어도 충분하겠으나, 정말이지 책을 덮고 나서도 남는 이 찝찝함, 아니 그것을 넘어선 구토가 별 한 개를 확 지워버리게 한다.

현대 사회의 뒤틀린 억압의 구조. 가족관계의 변질. 부모와 자식과의 왜곡된 관계들. 이런 것들이 결국 한 사람의 살인자 머릿 속에서 얼키고 설키고 알 수 없는 것들로 변모하여 살인이 일어났지만, 종래에는 이것이 살인자 하나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잔인한 양태로만 드러나는 것도 아니나 기실은 사회의 곳곳에 알게 모르게 숨겨져 우리의 정신을 왜곡시키는 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나는 아무래도 이런 류의 추리소설은 인정은 하지만 썩 내키지는 않는 것 같다. 현실적인 것도 좋고 예리한 것도 좋고 사회심층적인 분석능력도 좋고 다 좋은데, 마치 지옥에 쑤욱 빠져버려 더 이상 다른 데로 갈 수 없는 것만 같은 기괴함과 절망을 안겨주어 그게 생각보다 오래오래 마음 속에 박혀지는 듯 해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 책을 지금부터 들고 읽으실 분들이 있다면, 아마 조금은 각오하고 읽어나가는 게 좋을 듯 하다. 나처럼 속이 부글부글 끓어 점심도 거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지 말라고 붙잡지도 않는 이유는, 어쩌면 이렇게 충격적인 내용과 결말을 말하지 않으면 우리가 느껴야 할 것들,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을 그냥 손가락 사이에 빠지는 모래알마냥 쳐다보기만 하거나 혹은 모른 체하기만 할 수도 있어서이다. 살인 하나하나의 엽기적인 행태들에 집중하는 바람에 진정한 본질을 흐리지 말고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족을 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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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7-03-25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하네요 님.

비연 2007-03-25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흠..궁금하실 거에요...^^;;;; 추리소설 좋아하시면 한번 읽어보심도..
(정말 엽기적인 거 못 견디신다면, 권해드리고 싶진 않구요...ㅜㅜ)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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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데에 다시 들어가려면 대들보와 금속틀들을 잔뜩 쌓아놓은 공터를 지나가야 한다. 기중기의 강철 케이블이 길을 가로막는다. 알렉스가 뛰어넘으려고 그것을 잡는다. 'Donnerwetter(제기랄)', 그는 자기 손에 검은 기름이 묻은 것을 본다. 그 사이 내가 그에게 다가갔다. 알렉스는 증오의 말도 조소도 하지 않은 채 내 어깨에 손바닥과 손등을 문질러 깨끗이 닦는다. 만일 누군가 알렉스에게 내가 오늘날 바로 그 행동을 토대로 그를, 판비츠를, 그리고 아우슈비츠와 도처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크고 작은 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다고 말해준다면, 그 가엽고 잔인한 알렉스는 굉장히 놀랄 것이다. (pp165)

이것이 인간인가. 나는 이 대목에서 전율을 느꼈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방법은 참으로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사랑, 애정, 우정과 같이 듣기만 해도 푸근함과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적대, 증오, 혐오, 경멸 등과 같이 내가 제발 그 대상이지는 말기를 이라고 속으로 바라게 되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알렉스가 주인공인 프리모 레비를 대하는 건,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그 수많은 종류의 방법들 중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과 사물, 아니 생명을 지닌 것과 생명을 지니지 않은 것 사이에서나 일어날 법한 상황이다. 나는 프리모 레비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정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이 책은 널리 알려진 대로(나는 많은 사람들처럼 서경식 선생의 글을 통해 프리모 레비를 알게 되었다) 그 지옥같다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인이자 화학자이며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생존 수기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지낸 14개월동안 그가 실제로 본 것, 느낀 것,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며 담담한 필치로 써내려간 그런 글이다.

이런 류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 그 때의 경험을 얘기할 때 이렇게 냉정을 유지하기란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마치 제3자의 입장인 것처럼, 어떠한 적의나 어떠한 분노도 찾아볼 수 없이, 관찰하는 듯이 이야기한다는 것. 일상 생활에서 당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소홀한 처사에도 쉽게 화내고 잊지 못해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가능한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레비는 했다. 그래서 이 책은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21세기의 문턱에 있는 현재에도 그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현상적으로가 아니라도 우리의 마음 속에 상존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책은 신랄한 경고이다.

예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 본 적이 있다(물론 레비는 전시실이 잘 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지 않았고 제3수용소인 모노비츠에 있었지만). 그 때, 그 음침하고 썰렁한 전시실에서 보았던 것들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영화로 드라마로 책으로 듣고 읽어왔던 진실들이 내 앞에 마치 과거인 것처럼 펼쳐져 있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일들이 산더미같이 쌓인 머리카락과, 누군가의 발에 곱게 신겨져 있었을 신발 무더기와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책을 보는 데 썼을 안경 더미 속에 잔인하게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시절 그 곳에 있었던 파시즘의 망령이 아직도 도처에서 발견된다는 사실 만으로도 혐오감이 일었었다.

따라서, 이 책은 그냥 수용소 생활을 그린 수기라는 호칭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그 무엇이다. 끔찍하고 참혹하고 도저히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바닥의 바닥인 생활 속에서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았고, 인간에 대한 애정도 함께 포기하지 않았으며, 증언하기 위해 살아남고자 했던 한 사람을 통해,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수용소 체제를 향해 가게 된다. 이것은 막기 힘든 과정이다(pp285, 독자에게 답한다 중)."라고 했던 레비의 말대로, 우리의 심정 저 끝에 또아리를 틀고 있고, 또한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파시즘을 영원히 경고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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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고무줄 2008-11-13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소중한 책을 알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 정운영의 마지막 칼럼집
정운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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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무엄한 생각을 하면 안되는 거겠지만, 가끔은 일찍 죽어야 할 사람은 끈질기게 살고 좀 살아줬으면 하는 사람은 속절없이 너무 빨리 떠나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염라대왕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니 누구에게 면죄부를 주며 누구를 정죄할 것인가 만은 그냥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발상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이나 오주석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그랬고 김광석이 저 세상으로 갔을 때도 그랬다. 신문 지상에서 괄호 안에 든 나이를 보며 아깝다, 아깝다 속으로 쓰라렸던 기분이 아직까지도 느껴질 정도이니.

이 책의 저자인 정운영 교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기에 서두에 뜬금없이 이런 말을 꺼내는 게다. 돌아가셨을 때가 아마 우리나라 나이로 예순 셋. 예전엔 환갑이 넘은 노인으로 볼 수 있겠지만, 요즘처럼 평균 수명이 늘어난 시대에는 옛날 마흔 정도로밖엔 여겨지지 않는 연세에 유명을 달리 하셨다. 작년 가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또 한 사람이 사라졌구나 여겼었던 게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일년이 훌쩍 넘어가버렸다. 세월은 이렇게 덧없다.

이 책은 신문에 연재되던 칼럼과 서평을 한데 엮어낸 것으로, 찔끔찔끔 일주일에 한 번씩 읽던 그의 글을 한 몫에 모아 볼 수 있는 행운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 책을 좋아해서 장서만 2만권이 넘고 '귀인을 대하듯 책을 다루셨던' 그 분의 글은 항상 우리를 시퍼렇게 날서게 해주었었다. 누구나 중도를 걷고 싶어하나 어느 한 쪽에 기울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침없이 날카로운 지적을 통해 원칙을 잊지 않게 하는 글들은 앉은 자리에서 두번 세번 읽게끔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글이 우리의 마음에 와닿는 것은 비단 날카롭기만 해서는 아니다. 김남주 시인이 남긴 칼과 피의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욕심의 한 줌을 전하기도 하고(pp40, 그가 남긴 칼과 피의 사랑), 장영희 교수의 책을 읽으며 눈시울을 붉히고 "내 이 아줌씨, 이럴 줄 알았다니까."를 말하기도 하고(pp52, 10월의 크리스마스), 가난 한 아이들의 눈물을 기적으로 닦아주자 호소하기도 하는(pp103, 우리 모두 '도시락'을 풀자)  글들 속에서 저자의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들이 느껴져서 좋다. 그는 올림픽 마라톤에서 넘어져서 3등을 한 반데를레이 리마를 기억하면서 많이 아팠던 사우를 위해 있었던 위로연을 기억에 담아두는(pp305, 정치 올인에서 경제올인으로) 그런 분이셨다.

뿐만 아니라, 보수와 개혁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누가누가 나쁜가를 드러내고자 경쟁하듯이 서로 욕하고 시비하는 정치인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냉정한 자세로 무엇이 근원이며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가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시원한 글들이 또한 좋다. 미군의 용산기지 이전이나, 이라크전 참전이나,  현 정권의 개혁 내용 등등의 지금 현재의 사회상들에 대해 명쾌하게 진단하고 발전적인 제언을 하는 글들을 읽고 있으면 이거야! 하며 무릎을 치게 하니 그것도 좋다.

살아계셨다면, 지금 나라 돌아가는 꼴을 뭐라고 하셨을까. 아이들은 매일 학원으로 내몰린 채 논술 전쟁에 온 열정을 불사르고,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뛰는 바람에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기회를 놓칠세라 돈을 뭉터기로 빌려가며 집을 사고 있고, 간첩사건이며 헌재소장 임명건이며 FTA며 뭐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야 찾기 어려운 작금에 대해 뭐라고 하셨을까. 아마도 마지막 칼럼에 쓰셨던  "여기 눈을 감은 채 더 높은 보수를 받고, 여기 눈을 감은 채 더 헐거운 정직성의 기준을 요구하는 데서 나는 286이니 386이니 하는 인위적 패거리가 만들어내는 실패의 교훈을 느낀다...(중략)...그럴수록 이 시대에 더욱 절박한 제목이 정치적 정직성이라고 믿는다" (pp238, 영웅본색) 라는 말들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책을 읽는 내내 너무나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운영 교수만이 쓸 수 있는 글들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었지만. 아마도, 이 칼럼집을 읽는 동안 나를 지배했던 것은 그래서 '그리움'이었던 것 같다. 통찰력과 지성으로 우리를 일깨우던 목소리에 대한 깊은 그리움. 도대체 왜 그리 허무하게도 빨리 신께 가버리셨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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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2-02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카롭되 따뜻한 글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정치적 정직성, 잘 읽었습니다.

비연 2006-12-02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안 읽어보셨으면..꼭 권해드려요^^

마늘빵 2006-12-02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정말 보고 싶군요.

마태우스 2006-12-03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운영님 책은 죄다 샀지요. 읽고나면 아주 대단한 교양을 얻은 느낌을 주는 책들이죠. 피사, 레테.... 이번 책은 사놓고 아직 못읽었어요. 저 역시 그분의 글이 벌써부터 그립네요.

비연 2006-12-03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꼭 추천드려요^^

마태우스님) 저도 정운영님 책을 하나씩 사보고 싶어지더군요~ 이 책도 꼭 보시구요^^ 마태우스님이 읽으셨다면 더 좋은 리뷰를 써주셨을텐데요..

Kel님) 네~ 꼭 보시길 추천!
 
모방범 3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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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을 읽고 나니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중 우리나라에 출판된 것은 이제 '마술은 속삭인다'만 남기고 다 읽은 셈이 되고 말았다. 정말 정신없이 그녀의 글에 빠져들어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평범한 아줌마처럼 생기고 별다른 이력도 없어 보이는 그녀가 어떻게 이런 글들을 쓸 수 있는 지 궁금해하면서, 자꾸만 다 읽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 읽었지만, 그럼에도 이 '모방범'을 손에 들 때는 상당히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이 세 권이라니. 보기만 해도 헉! 소리가 나서 연말까지 다 읽어낼 수는 있을려나 하는 마음과 그래도 미야베 미유키의 글을 다 읽어버리겠다는 괴상한 집념이 복합되어 드디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 일주일 만에 1500 페이지의 방대한 이 책을 다 읽었고, 난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전율을 느낌과 동시에 당분간 미야베 미유키의 글은 읽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지금 내 책장에 남은 한 권의 책이 버젓이 꽂혀 있음을 보면서도 말이다.

왜냐고 묻고 싶다면, 일단 읽어보라고 말할 도리밖엔 없다. 미야베 미유키의 사회추리소설(나는 그녀의 책들을 추리소설 분류에 넣고 싶지 않지만)은 너무나 예리하고 너무나 재미있어서 일본 작가들을 썩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도 대단히 매력적이다.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 속에, 내가 그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자신의 세계로 확 잡아당기는 미야베 미유키의 글은, 한마디로 마약같다. 어떻게 이다지도 인간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지, 어떻게 그 이해하는 부분을 이리 잘 묘사할 수 있는 지, 모든 작품을 대할 때마다 난 경탄해마지 않았다. 하지만,  '모방범'에 와서는 그 경탄을 넘어서서 완전히 질려버렸기에 더이상은 무서워서 그녀의 작품을 다시 집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뭘 그렇게까지 말하냐고 핀잔 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좋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연속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이기도 하고, 그 피해자들이기도 하고, 그 피해자들의 남겨진 유족이기도 하며 근원적으로는 나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끔찍한 연속여성살인사건을 둘러싸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유족의 입장에서, 범죄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형사의 입장에서, 르뽀 작가의 입장에서 유기적으로 구술되는 이야기들이 얼기설기 이어지는 구석도 느껴지지 않을만치 자연스럽게 엮어져서 하나의 세상이 보여지고 거기에 나의, 혹은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너무나도 다양한 선과 악들이 실감나게 아니 소름끼치게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서라고 말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상황들 속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다가온다. 불행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는 살인자들의 심리와 갈등이 그들이 한 행동을 이해하게는 못해도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의 가장 사악한 일면들에 대해 가닥가닥 느끼게 한다. 또한, 아리마 요시오와 같이 사랑하는 손녀를 그들의 손에 잃고 딸까지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도 연륜과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끝내는 살인자들에게 마지막 일격의 말을 남기는 유족의 모습에서 사람 하나 죽는 것이 그냥 한 명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절감하게 한다. 한 명이 스러지면, 그들이 이제까지 지내온 세월과 인연들이 함께 스러지는 것이고 그와 함께 그들과 가까왔던 많은 사람들의 지나온 인생도 함께 소진시키는구나..했다. 그러한 사건들 속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이 가지는 편견들, 뒷얘기들, 그리고 그것을 악용하는 언론과 사람들의 모습은 현재의 우리 사회가 내몰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했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동안, 내내 마음이 무겁고 쓰라렸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인물들의 생명력 때문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의 심리가 내게로 전이되어 범죄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며 유족인 동시에 황색언론인 나를 발견하게 하는 건, 두말할 것없이 작가의 뛰어난 역량 덕분이기도 하다. 그저 아무 생각말고 지금 바로 미야베 미유키의 세계로 들어가길 권한다. 다 읽은 후 나처럼 너무 소진되어 거리를 두고 싶다고 말하게 될 지언정, 이 책은 꼭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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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아이 2006-11-30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간 꼭 읽고 말겠어요.(두 주먹 불끈 쥐며)

비연 2006-11-30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친아이님) '언젠간'이 아니라 '지금' 이면 좋을텐데요..ㅋㅋ

플레져 2006-11-30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비연님의 강력한 리뷰!
미야베 미유키가 이 글을 읽는다면 참 좋아하겠어요 ^^
한명이 스러지면 그들이 이제까지 지내온 세월과 인연들이 함께 쓰러지는 것...
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추천합니다.

Mephistopheles 2006-12-01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털썩...읽어야 겠군요...왜이리 읽어야 할 책들이 밀리는 건지....

비연 2006-12-01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미야베 미유키가 이 글을 읽는다면 전 넘 좋아 쓰러질 거에요..ㅋㅋ
추천 넘 감사하구요~^^

Mephiso님) 네! 꼭 읽으시길 권해요. 정말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나 밀려 있어서 저도 책장을 보며 압박을 느끼고 있지요...^^;;

상복의랑데뷰 2006-12-03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본좌님이시죠. ^^ 전 나츠오여사님을 더 선호합니다만, 아직 3대 걸작을 읽어보지 못했으니...부당한 선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연 2006-12-03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복의 랑데뷰님) 나츠오 여사의 책을 전 하나도 읽어보지 못했네요! ㅜㅜ
님께서 선호하신다니 '아임 소리 마마'부터 시작해볼까 싶어요~

블랙홀 2007-05-0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이런 리뷰를 남기시면...지금당장 읽을 수 밖에 없잖아요..좀 참으려고 했는데 참을 수 가 없네요...좋은리뷰 감사합니다^^

비연 2007-05-03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랙홀님) ㅋㅋㅋ 그럼 저로선 성공이네요~ 미미여사 전도사죠 제가...^^
좀 두껍고 길긴 해도 읽어보시면 아마 꼭 좋아하게 되실거에요~~

블랙홀 2007-05-03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배달온책을 봤는데...헉..정말 두껍네요..500쪽이 넘는데 세권씩이나..헉소리나네요 ㅎㅎ지금 살인의해석을 읽고있어서 그런지(이책도 만만치 않게 두껍죠-_-;) 이 두꺼움도 웬지 친근하네요..그나마 무겁지 않아서 다행이예요^^ 비연님이 이렇게 칭찬을 하는 작품이니 저도 재밌게 읽어봐야겠어요^^

비연 2007-07-05 00:08   좋아요 0 | URL
블랙홀님) 아..지금에야 이 댓글을 보았네요..죄송. 아마 지금쯤 잘된 선택이었어..라는 마음으로 미야베 미유키에게 흠뻑 빠져 계시지 않을까 하는..매우 주관적인 상상이..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