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가을을 타기로 마음 먹어본다. 가을 타는 걸 마음 먹는 걸로 되나, 라고 속으로 반문하면서도, 그냥 타버리지 뭐. 그런 막무가내의 마음이 생긴다. 근데 가을을 탄다는 건 어때야 하는 거지? .... 마음이 싱숭생숭, 엉덩이가 들썩들썩, 하늘만 봐도 센치해진 마음에 속으로 쭈욱 잠입해 들어가고.... 흠... 생각해보니 내 일상이네. 그러니까 난 일년 365일 가을 타는 여자. 이런.

 

아침에 북스피어의 공지사항을 보았다.

 

http://www.booksfear.com/bbs/m/mcb_data_view.php?type=mcb&ep=ep1470802059594b58a669de8&gp=all&item=md12495425595b90780dea173

 

2차 서점 유랑단을 모집한다는 건데, 아마 이걸 보고 나서 마음이 더 동했는 지도 모른다. 지난 1차 때도 못 가서 섭섭했던 기억이 남아 있는 지라 이번엔 꼭 가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 같다. 열흘이고 비용이... 좀 크네. 그래도 재밌겠지? 이런 건 혼자 가면 보는 것도 효율적으로 못 보고 내용도 심도 깊지 않아서 패키지 같은 여행은 싫지만, 함께 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다. 게다가 책과 서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같이 가니까 더 재미있지 않을까. 아. 무지하게 땡기는 이 마음.

 

어제는 대학 선배들과 만났다. 대학 때는 정말이지 이렇게 마주앉아서 얘기할 만큼 친하지도 않았고 그냥 얼굴 정도 알고 가벼운 농담 정도 하는 사이였는데 말이다. 나이들어 만나지는 사람들이 따로 있구나 싶다. 페이스북 하다가 우연히 한번 볼까 해서 보게 된 것이고 사실 가면서는 아 할 말이 없으면 어쩌지 불편하면 어쩌지 여러가지 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었건만 막상 자리에 앉아 이자카야 음식과 산토리니 프리미엄 골드 (으악 맛나) 를 같이 먹으며 수다 떠는 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남녀 혼성이었는데도 3시간 넘게 수다 떨다가 헤어져서 집에 오니 자정에 가깝더라 뭐 그런 이야기.

 

나이가 어릴 떄 만난 사람들. 이해관계 없이 시작된 인연. 그리고 지금도 별다른 이해관계 없는 사이. 그런 관계가 참 필요해지는 나이대가 아닌가 그런 말들을 했다. 어디서나 긴장하게 되고 머릿속으로 계산하게 되고 이 말 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말을 해도 될까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는 사회생활 속에서 뭔가 나를 편하게 놓아둘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한 나이대. 그래서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여유가 생길수록,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들을 찾고 동창회를 만들고 대학교 동문회에 빠짐없이 나가고 그러는 거구나... 다 마찬가지인 거구나..라는 생각까지.

 

그래서, 이런 패키지라든가 단체여행이라든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많이 망설이게 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친분을 나누고 웃고 떠들고 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역시 여행이라는 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교감을 나누며 다녀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들 때문이다. 물론 북스피어의 기획여행이야, 이런 여행을 함께 할 사람을 주위에서 구한다는 게 쉽지 않고, 또 아무 서점이나 가는 게 아니라 가볼만한 곳을 골라서 가는 일정을 짠다는 자체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나을 것 같고.. 그래서 고려를 해보고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여행은 같이 가는 사람이 중요한데 말이다.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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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9-06 1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 괜히 링크 타고 가봐가지고........ 뭔가 엄청 가고 싶어지네요 ㅜㅜ 갈 수 없는 현실이지만 ㅠㅠㅠㅠㅠ

비연 2018-09-06 12:11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ㅜ 괜히 아침부터 이걸 봐서 마음이 싱숭생숭해요.

다락방 2018-09-06 12:13   좋아요 0 | URL
뭔가 서점들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고, 책 좋아하는 사람들과 서점을 함께 가는 건 얼마나 좋을까 싶고, 호텔 조식도 먹고 싶고, 석식 후에 자유시간..이라니, 자유시간 동안 술 마시면 좋겠네, 막 이런 생각도 들고 ㅠㅠ 아 비연님 말씀대로 마음이 싱숭생숭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비연 2018-09-06 12:17   좋아요 0 | URL
확 저질러? 뭐 이런 ㅠㅜ 괴롭네요. 으으...
 

 

TV가 설치되었다. 사실, TV를 보는 경우는.. 야구 볼 때 빼고는 별로 없어서 안 사려고 끝까지 버텼는데... 일단 마루가 너무 텅 비어 허전하고, 또 하나는, 집에 사람 소리가 안 나니 적적하다 뭐 이런 이유로 포기하고 구입을 했다. 그게 오늘 들어왔다. TV 설치했으니, 케이블도 해야지. 야구를 보려면. 뭐 그렇게 해서 BTV도 설치하고. 구색을 다 갖춘 꼴이 되었다.

 

오늘은, 새로 달린 (벽걸이다) TV로 우리나라와 우즈베키스탄 축구를 보았다. 좋은 화질에, 노트북보다는 훨씬 큰 화면으로 보니 보는 맛이 나는 건 사실. 무엇보다 사람의 소리가 들리니 이제 '집같다' 라는 느낌이 크다. 집에 있으면 소리가 너무 없으니 내가 혼자 독백을 할 수도 없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가 되지 않은 다음에야) 라디오를 틀거나 음악을 틀거나 해서 그 적막함을 무마하곤 했는데, 역시 TV에서 나는 끊임없는 사람 소리가 집에 묘한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예전 직장에서, 30대 후반까지 혼자 살던 젊은 남자가 있었는데, 자취방에서 소주상을 차리고는 거울을 보고 건배를 외치며 먹는다고 했었다. 저런. 면벽을 그렇게 하시면 큰일 나십니다.. 하면서 크게 (비)웃어 주었더랬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게 좀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 사람은, 대학때부터 자취를 해서 근 20년 가까이 혼자 산 셈이니 집에 갔을 때 아무도 없는 방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게 참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니 거울을 보고 '쨍'을 외치며 술을 먹지. 그래서 집에 안 가려고 늘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 하고 싶어했었다. 저녁은 술자리로 이어지고.... 그 덕분에 꽤 재미있는 직장생활을 했었던 추억은 있다.

 

혼자 살면,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게 된다더니, 내가 딱 질색을 하던 그것도 슬슬 이해가 되기도 한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럴 생각이 일도 없지만, 혼자 쭈욱 살려면 뭔가 '온기'라든가 '생명의 움직임'이라든가 하는 것이 절실해질 때가 올 수도 있겠다 싶다. 그것도 안 되는 사람들은 로봇 모양의 기계를 앉혀 놓고 "외로와, 음악 틀어줘", "오늘 덥다, 에어컨 이쪽으로" 이렇고 있는 거지. 그런 광고를 보면 나는 사실 많이 섬짓하다. 저건 그냥 공식적인 독백 아닌가. 우리가 예전에 인형 붙잡고 놀 때처럼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 그리 단언해서 앞뒤 다 자르고 칼날같이 대응해서는 안되는 거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 이유라는 것에서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상황에 가면 나도 그렇게 된다.. 가 정답이기도 하다. 나이가 젊을 때는 건강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고 어쩌고 저쩌고 해서 허전할 틈도 없을 지 모르지만, 나이가 한살 두살 먹어가면 같이 말할 사람이 필요하고 같이 뭔가를 할 사람이 필요하고... 사람, 사람이 필요한 것인데 주변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남아나는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요즘 몇 년만에 본방사수하는 '라이프'라는 드라마를 오늘부터 TV로 볼 수 있다는 게 작은 기쁨이다. 여기 오고 한달 동안 노트북으로 보느라 나쁜 화질과 작은 화면에 애먹었었는데, 이제는 대문짝만하게 하고 볼 수 있겠네. 아. 이 드라마 좋다. 혹시 요즘 드라마 뭐 볼 지 모르겠어요 하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비밀의 숲> 작가가 지은 병원 드라마이고 조승우, 이동욱, 유재명, 문소리, 문성근 등등이 나오는 웰메이드 드라마이다. 의사들의 감추어진 면면을 아주 예리하게 파고든다고나 할까. 병원이라는 조직이, 그 폐쇄된 조직이, 어떻게 기능을 하는 지, 그 안에서 인간 군상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 지, 혹은 하려고 하는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매우 재미있게 보고 있다.... 아... 혼자 사는 적적함과 TV 구입한 얘기로 시작해서 드라마로 끝내는 이 삼천포 신공이라니. 휘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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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7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8 0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8-08-28 0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이프 저도 닥본사 중이에요! (와 이 말 오랜만에 쓰네요.... 유행이 지난 유행어란 참... 민망스런 존재로군요 ㅎㅎ)
진짜 드라마 챙겨보기가 얼마만인지... ‘비밀의 숲’ 이후 처음입니다ㅎㅎ

비연 2018-08-28 08:13   좋아요 0 | URL
어제 정말 조마조마하더라구요~ 시나리오를 참 쫀득하게 쓰는 듯^^
 

오븐을 샀기에 시험삼아 군고구마를 해봤다.
모양새나 맛이나 그럭저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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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8-21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슬슬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군요.. ㅎㅎㅎ

비연 2018-08-21 17:5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그러게요. 가을에 군고구마나 잔뜩 해서 먹어야 할까봐요 ㅋ

카스피 2018-08-21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맛나 보이네요^^

비연 2018-08-21 22:51   좋아요 0 | URL
ㅋㅋㅋ 맛났답니다 ~

KSW 2018-08-23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랑 비슷한 시기에 자취를 시작하셨군요. ㅎㅎ
저는 해먹는게 없는 수준이지만. ㅋㅋ

비연 2018-08-23 22:12   좋아요 0 | URL
ㅎㅎㅎ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만...
저도 곧 사먹기로 돌입할 듯 싶습니다 ㅠㅠ
(너무 힘들어요 ㅠㅠ)
 

 

혼자 살면서 뭔가를 해먹는다는 건, 사실 피해야 할 일 중의 하나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밖에서 먹는 것도 지겹고 집에서 그냥 한 상 대충 차려서 먹고 싶은데, 뭔가 밑반찬 밖에 없어서 허전할 때 뭔가를 해먹어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다. 어제오늘 내가 그랬고, 그래서 어제는 삼겹살을 구워 먹고 오늘은 전을 부쳐 먹었다.

 

그 맛나디 맛난 삼겹살은 먹을 땐 매우 흡족하지만, 먹고 나서는 후회막급. 일단 집에 삼겹살 냄새가 여기저기 배게 되고, 기름투성이의 그릇과 후라이팬을 닦아대야 하는 일이 남는다. 그래도 삼겹살은 양반이다. 드는 장비가 그거 정도니까. 전은.. 아 이건 실수였다. 어제 마트에서 호박과 가지와 부침가루를 사면서, 대충 부쳐먹지 라는 안이한 생각에 빠졌던 게 실수다.

 

전을 부치기 위해서는 여러 장비가 필요하다. 우선 밀가루를 풀어 둘 약간 깊이가 있는 그릇, 계란을 풀어야 할 또 약간 깊이가 있는 그릇, 그리고 기름을 담뿍 쳐야 할 후라이팬, 호박과 가지를 잘 씻어서 잘라내어야 할 도마와 칼,.. 호박과 가지를 자르고, 밀가루를 묻히려고 하니, 부침가루가 사방에 튄다. 이건 개인적인 행위의 차이도 있겠지만, 가벼우니까 여기저기 흩뜨려지는 건 인지상정일 게다. 털털 털어넣고 비닐장갑을 낀 후 호박과 가지에 부침가루를 묻힌다. 그 전에 계란 두 개 정도를 탁 깨어 잘 섞은 후 소금으로 간을 한 게 필요하겠지. 부침가루를 잔뜩 묻힌 호박과 가지를 계란 푼 것에 넣어서 계란옷을 입힌 후 기름을 잔뜩 두른 후라이팬에 얹으면 자글자글 기름소리와 함께 익어간다. 그러고보니 다 부치고 난후 이 기름투성이를 담아둘 그릇이 필요한데 그냥 얹으면 접시가 기름 범벅이 될테니, 키친타올을 톡톡 뽑아 깔고는 다 부친 전들을 올려둔다. 이 때가 하이라이트. 조금 뿌듯하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전이 접시 위에 이쁘게 담길 때의 희열.

 

 

* 오늘의, 조촐한 건강식 저녁식사

 

그러나 이것도 잠시. 부엌을 애써 외면하며 밥상을 차려 밥을 먹는다. 맛나다. 다 먹고 나서 부엌쪽을 바라보니.. 으악. 설겆이더미가 한무더기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밥먹어 든든한 팔뚝을 가지고 설겆이를 시작한다. 하다보면 다시 배가 고파진다. 가사도 노동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 배가 자꾸 고프다. 설겆이를 다 하고 나니 씽크대 위에 기름이 여기저기 튄 게 보인다. 행주를 짜서 닦기 시작. 여기저기 이곳저곳. 아이고 팔이야. 아이고 손목이야. 끙끙.

 

다 하고 나서도 뭔가 찝찝한 것은 이눔의 기름들. 뭔가 다 닦이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 성질을 고쳐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는 내공을 키워야 하고. 온 몸이 쑤셔서 (세상 태어나 이런 노동에 시달려본 적이 있었던가) 드러누워버린다. 자고 싶은데, 시간이 시간이니 자서는 안되겠고 아이고 삭신이야 이러면서 데굴데굴.

 

한끼 식사를 위해 이런 소모전을 하는 것은 그만해야 겠다. 그것도 나 혼자 먹는데 어째서 이런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밖에 식당도 많고 다 조리된 음식도 지천에 팔고 있는데 말이다. 이건 시간낭비, 능력낭비, 체력낭비 ... 궁시렁궁시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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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8-08-20 2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박전 가지전 맛나 보입니다.
노릇노릇 예쁘게 음식 하셨군요.
혼밥이어도 가끔은 자신을 위해 대접받는 기분으로 한 끼를 먹고 싶을때가 있어요.
그걸 남이 차려준다면 당연하게 더 대접받는 기분이 드는데~~^^

설거지는 모두의 골칫덩어리이긴 합니다만ㅜㅜ

비연 2018-08-20 22:52   좋아요 0 | URL
정성을 들인 거에 비해 조촐해 보이는데.. 예쁘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ㅎㅎ
어떤 일이든 누릴 때는 좋은데 앞뒤 준비하고 처리하는 과정이 함께 하면 참 지난해지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뭔가 해먹어보겠다 생각은 하고 있지만... 설겆이 땜에 엄두가 안 나네요ㅜ

2018-08-20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0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가 독립.. 부모로부터 독립.. 하여 나만의 공간을 가진다고 했을 때 가지는 생각들은... 분홍빛 그 자체이다. 사실 송도에서 몇 달 살았을 때 익히 깨달은 바 있기는 했지만... 그 환상이 불과 일주일도 가지 않음을 다시 절감하고 있다. 그러니까, 집이라는 공간, 오롯한 나만의 공간은... 실제로는 '가사노동의 현장' 이다.

 

아침에 일어난다. 혼자 자면 늦게까지 자기도 힘들다. 뭔가 허전한 느낌이 날 아침부터 일으켜 세운다. 방을 나서면... 아... 휑함.. 은 뒷전으로 날리고라도 그 전날 밥을 안 해두었을 경우 밥을 지금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습한다. 밥은 한다고 쳐도 아.. 먹고 나서 설겆이. 에라 빵이나 구워. 하고는 아침에 밥 안 먹으면 출근 안한다가 모토인 나, 비연은 빵쪼가리와 커피로 아침을 대신한다. 설겆이는 후다닥. 밥먹을 때마다 느껴지는 압박, 설겆이.

 

그래도 설겆이는 나은 편이다.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니 괜챦겠지.. 물론 세탁기에 넣는 건 괜챦다. 끝나고 나면 세탁기에서 빨래감들을 빼내어 건조대에 널고... 하루 정도 지난 후에 걷어야 하고 개야 하고. 살림이 크지도 않은데 왠놈의 빨래는 이리 자주 해야 하는가. 건조기를 사라고 했던 살림고수들의 말들이 뾰롱뾰롱 머릿속에 떠오르지만 애써 무시. 일단 버텨보자.

 

그래도 설겆이와 빨래는 약과다. 내가 보니 가장 큰 문제는 청소와 쓰레기다. 청소는 해도해도 끝이 없다. 인간 하나 몸 붙이고 사는데 먼지는 계속 나오고 머리카락.. 그 징한 머리카락들은 늘 바닥에 산재한다. 화장실은 어떤가. 물때 생기고 변기와 욕조와 세면대가 더러워지면.. 내가 씻어야 한다. 욕실 청소도구만 몇 개를 샀는 지 모른다. 창틀이나 이런 데 쌓이는 먼지들은 또 어떤가. 눈에 보일 때마다 참을 수 없어 쓸고 닦고 하니 아주 진이 다 빠진다. 오마니 왈, 대충 살아라. 지친다... 살림 초보는 아직 그게 안된다. 포기가 안된다... 이제 한 3주 되니 슬슬 포기라는 걸 해야 하나 싶다.

 

냉장고는 왜 그리 비는 지. 물 떨어지면 물 채워야 하고 반찬 떨어지면 반찬 채워야 하고... 조미료나 이런 것들은 요리도 안 하는데 필요한 게 한두 개가 아니고. 밥만 겨우 해서 먹는데도 인간의 식욕이란... 먹고 채우고 먹고 채우고. 이걸 떨어지지 않게 관리하는 것도 나의 일. 뭐 냉장고만 그렇겠나. 비누, 치솔, 치약, 샴푸 등등이 떨어지면 채워야 하고, 뭐 하나라도 없으면 사다가 채워야 한다. 안 그러면 너무나 불편하니까. 하다못해 수세미 하나라도 내 손으로 사다 놓아야 하니 정신이 산란해서 (물론 살림 초보니까 그렇겠지만) 우아하게 앉아서 커피 한잔 할 시간이 없다.

 

그러니까... 이 집이, 마치 노동의 현장 같은 느낌이 들어서, 부모님 집에 가 있으면 거기가 내 집 같고.. 여기는 다시 일하러 온 느낌이라는 거. 이를 어쩌냐는 거지. 내가 돈 들여 노력 들여 시간 들여... 생고생을 택했구나 라는 좌절감이 엄습한다.

 

일단 저질렀으니 버텨서 익숙해지기만을,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래도 좋을 때는, (텔레비젼도 없어서) 노트북으로 영화나 한편 보며 고즈넉히 맥주 한캔 딸때. 딱 그 때는 좋다. 이걸 위해 독립했다면... 미친 짓이 아닌가. 생각해보니, 나에게 필요한 건 힘센 집사다. 친구들이 남편이 아니라 집사가 필요하다고 하더니, 딱 그 느낌을 알겠다. 으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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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8-14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절절하네요. 공감합니다.
혼자 살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가 해야하는데
쉽지 않죠. 자취를 오래 전부터 그랬다면 모를까...
이번에 울엄니 이모네 집에서 며칠 지내다 올거라고 해서
그러라고 말로는 그랬지만
한 편으론 좋고, 한 편으로 좀 걱정되더군요.
저는 레토르트 음식 먹어 본 적이 거의 없는데
이번에 큰맘 먹고 사 봤다는 거 아닙니까?ㅋ
사면서 자취생 맘을 좀 알겠더군요.
물론 울엄니께선 하루도 못 버티고 다시 오는 바람에
저의 자취 모드는 막을 내렸지만...ㅋㅋ

비연 2018-08-15 10:00   좋아요 0 | URL
사람이 혼자 생활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한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절감하네요 ㅎㅎ 삼주쯤 되니 조금 익숙해지기는 하는데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하고.. 잘 버텨봐야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