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강
올리버 색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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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이론이 낡은 이론을 무효화하거나 대체하는 게 아니라, 낡은 개념들을 좀 더 높은 수준에서 재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고 역설했다. 그는 유명한 직유법으로 이 개념을 확장했다.

 

비유법을 사용하여 설명해보겠다. 새로운 이론을 만든다는 것은 낡은 헛간을 부수고 그 자리에 마천루를 세우는 것과 다르며, 그보다는 산을 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은 위로 올라감에 따라 시야가 새롭고 넓어지며, 출발점과 다채로운 환경 사이에서 예기치 않았던 관련성을 발견하게 된다. 당신은 변화무쌍한 산행길에서 장애물을 통과하여 마침내 널따란 시야를 확보한다. 그러나 출발점은 아직 존재하며, 크기가 아무리 작아 보이고 시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더라도 여전히 시야에 들어온다. (p226)

 

 

올리버 색스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이 에세이는, 무엇보다 스쳐 지나간 것들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이 돋보였다. 많은 새로운 아이디어들은, 시대에 맞지 않아서 당시의 과학자들의 생각과 달라서 등등의 이유로 그냥 묻혀 있다가 오랜 세월 후에 다시금 대두되곤 한다. 어쩌면 여건이 맞아떨어져서 또 어쩌면 몇몇의 천재들이 이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아인슈타인의 위 말처럼 이 모든 것이 '발전'이라는 것의 진짜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발견되고 어쩌면 그 가는 길 중에 외면당하고 회피되고 거부당하기도 하면서 직선으로 쭉 가는 게 아니라 지그재그로 움직여가면서 어느 순간에 다시금 길을 찾아 그 출발점을 확인하게 되는 것. 그것은 누구 하나의 힘이 아니며 역사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온 토대 위에 누군가 벽돌 하나 더 올림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일 게다. 뉴턴마저도 이전 세대를 부정하고 자신의 이론이 독창적임을 강조했다고는 하지만, 누구든 "거인의 어깨"를 빌리지 않고는 발전이라는 것, 새로움이라는 것을 일구어내기 힘들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올리버 색스의 글을 읽으면서, 부럽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했다. 노익장으로도 끊임없이 이런 시선을 가질 수 있고 이런 글을 써낼 수 있었던 그가 평생 지녔던 것은 무엇일까. 한편으론 그가 가졌던 그 많은 지식들, 그 치밀한 시야들이 이젠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서글퍼지기도 한다. 글로써 여전히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으니, 나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고 그도 누군가에게는 '거인'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다시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기억은 고정되고 활기 없고 간편적인 수많은 흔적들을 고스란히 재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반응이나 경험들을 바라보는 전반적 태도‘와 ‘이미지나 언어의 형태로 저장된 세부 사항‘을 기초로 하여 상상력이 가미되어 구성되거나 재구성된다. 심지어 가장 기초적인 암기와 반복의 경우에도 기억이 늘 정확한 것은아니다. 따라서 기억의 정확성을 절대시할 필요는 없다. (p109)

인간의 기억은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취약하며 불완전하지만,굉장히 유연하고 창의적이다. 출처에 대한 혼동과 무차별성은 역설적으로 큰 힘을 발휘한다. 어디 한번 생각해보라! 만약 모든 지식에 출처가 표시된 꼬리표가 붙어 있다면, 우리는 종종 엄청난 양의 부적절한 정보에 압도당할 것이다. 출처에 무관심한 우리의 뇌는 ‘우리가 읽고 들은 것‘과 ‘타인들이 말하고 생각하고 쓰고 그린 것‘을 통합하여, 마치 1차기억인 것처럼 강렬하고 풍부하게 만든다. 덕분에 우리는 타인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고,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도 있으며, 예술, 과학, 종교가 포함된 문화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공동정신common mind에 참여하고 기여함으로써 보편적인 지식연방commonwealth of knowledge을 구성하게 된다. 기억은 개인의 경험뿐만이 아니라 많은 개인들 간의 교류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134)

멀린 도널드Merlin Donald는 <현대 정신의 기원Origins of the Modern Mind>에서, 모방문화mimetic culture를 문화와 인지능력 진화의 핵심 단계로 간주한다. 그는 흉내, 모방, 미메시스mimesis를 명확히 구분한다.

첫째, 흉내는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으로, 가능한 한 정확한 사본duplicate을 만들기 위한 시도다. 따라서 누군가의 얼굴 표정을 정확히 재현하거나 앵무새가 다른 새의 소리를 정확히 모사하는 것은 흉내에 해당한다. 둘째, 모방도 대상을 재현하지만, 똑같이 따라 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부모의 행동을 따라 하는 자녀들은 모방을 하는 것이지 흉내를 내는 것은 아니다. 셋째, 미메시스는 모방에 표상representation이라는 차원을 첨가한다. 그리하여 흉내와 모방을 통합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키며, 하나의 사건이나 관계를 재현하는 동시에 표상한다. (p148)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지 타인이나 주변의 문화로부터 아이디어를 차용한다. 아이디어는 늘 공중에 떠돌아다니며, 우리는 종종 의식하지 않고 오늘날 유행하는 구절과 언어들을 차용한다. 우리는 언어를 발견하고 그것을 빌려 와, 각자 개별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고 해석한다. 우리는 언어를 차용하는 것이지, 발명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왜 남의 것을 차용하거나 모방하거나 베끼거나 영향받는가‘가 아니라, ‘차용하거나 모방하거나 베낀 것을 갖고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다. 다시 말해서, ‘남의 것을 완전히 소화시켜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 자기 자신의 경험, 생각, 느낌, 입장과 혼합하여 얼마나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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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8-05-27 1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수고했어용, 토닥토닥^^*

비연 2018-05-27 21:32   좋아요 0 | URL
^_______^
 

 

 

 

 

 

 

 

 

 

 

 

 

 

 

 

책표지 정말 맘에 안 드네... 이 이유로 살까 말까 망설인 책이었다. 책 살 때 표지도 유심히 보는 나로서는, 아 이런 류의 책표지는 절망감에 가까운 느낌을 안겨 주곤 한다. 물론 저마다의 취향이 있으니 이 책표지가 맘에 드는 사람들도 있을테니 여기서 더 왈가왈부할 내용은 아닌 듯 하지만 말이다.

 

슬픈 이야기이다. 미국의 1920년부터 1950년까지 조재아 탠과 멤피스 산하 테네시 보육원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이야기는, 이게 전쟁 때도 아니고 그것도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가능했던 이야기인가 라는 현실부정적인 느낌을 가지게 한다. 미국이 잘나서가 아니라, 1950년대까지 이런 일들이 그냥 덮어진 채 자행되었다는 자체가 놀랍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릴과 그 오남매의 인생이야기는 허구이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내용이기도 하다. 강가에서 브라이니와 퀴니라는 엄마 아빠를 두고 아카디아라는 배 위에서 단란하게 살던 릴과 카멜리아, 라크, 펀, 가비언 오남매가 있었다. 이렇게 강가를 떠돌아다니며 사는 가족들이니 일종의 집시라고 할 수 있겠지. 퀴니가 쌍둥이를 낳는 와중에 위기가 닥쳐와 아빠와 근처에 사는 지드 아저씨와 함께 병원으로 가는 일이 벌어졌고 결국 쌍둥이는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이 아이들에게 들이닥친 것은 엄마와 아빠가 아니라 경찰들 비스므레한 낯선 남자들이었다. 엄마 아빠를 보러가게 해주겠다며 억지로 끌려간 아이들은 보육원에 갇히게 되고 학대와 폭행이 이어지는 현실에 맞부닥치게 된다.

 

과거의 이야기는 현실의 이야기와 맞물려, 70여년이 흐른 어느 날, 명문가인 스태포드의 막내딸 에이버리가 우연히 다녀간 요양원에서 아흔의 메이라는 할머니를 만나게 되면서 또 다른 이야기의 축이 돌아가게 된다. 할머니가 에이버리의 손을 잡으며 "펀?" 이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에이버리가 자신의 친할머니인 주디 할머니로부터 받은 팔찌를 메이라는 할머니가 자기 것이라고 얘기하면서부터, 그리고 메이 할머니의 방에서 발견한, 부부의 사진을, 주디 할머니와 빼닮은 여자의 얼굴을 보면서부터 과거에 대한 탐색은 시작되고, 결국 드러난 진실은... 아...

 

가난한 아이들, 집시들의 아이들 등을 유괴하거나 부모를 속여 서명을 하도록 하여 보육원에 가두고는 명망있고 돈 많은, 그러나 자식이 없거나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던 조지안 탠이라는 여자. 어려운 아이들을 구하는 데 삶을 바친 대단히 훌륭한 여성으로 칭송받던 그 여자. 나중에 이 악독한 일들이 세상에 드러난 직후 암으로 죽은 여자. 죄에 대한 벌조차 죽음으로 비껴간 여자. 그리고 이 일에 연루된 수많은 명망가들에 의해 스르르 덮여간 아이들, 그 친부모들... 이런 끔찍한 일이 20세기에 벌어졌었다니... 놀라움을 넘어서 슬픔이 밀어닥친다.

 

그리고 더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거다. 소설에서, 가난했던 그 아이들은 친부모와 형제들과 떨어져 부유하고 품위있는 집안에입양되어, 아마도 친부모와 형제들과 살았다면 누리지 못했을 삶을 누렸다는 것이다. 사랑을 받았고, 교육도 충분히 받았고, 좋은 집안의 사람과 결혼하여 평생 부족함 없이 살았다. 그냥 그대로 남겨졌더라면 어땠을까. 그리고 어느 순간 다른 행로를 탄 이 인생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잘 모르겠다. 여기에서 옳고 그름을 논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어쩌면, 입양되어 산 세월이 그들을 더 행복하게 했을 수도 있었을까... 하지만, 혈육이란 것을, 그들과의 이별을 잊을 수는 없었을 것 같다. 그건 확실한 것 같다. 인생이 바뀌어 좀더 풍요로와지고 좀더 품격은 있어졌을 지라도 마음으로 이어지는 가족의 사랑은, 늘 그들을 지배하지 않았을까. 외로움의 근원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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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8-04-29 1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화라고요. 음음... 잠시 생각해보니 울나라에선 더한 일도 일어났을 것 같네요. 리뷰 보니 저도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 마지막 대목이 많은 걸 생각하게 하네요. 친부모랑 살았으면 누리지 못할 삶.... 다시 태어나면, 그리고 친부모랑 사는 게 가능했다면 어떤 삶을 선택했을까요, 그들은.

비연 2018-04-29 20:47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 꺅. 오랫만이에요.

아마, 우리나라에서도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더한 일들이 일어났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고 하니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어요. 한번 읽어보실 것을 추천.
저도, 그들의 인생을 생각하면서, 어떤 것이 최선이었을까. 이 나쁜 짓의 결론에 대해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 아이를 유괴하고 부모에게서 억지로 빼앗고 학대하는 그 천인공노할 죄를 물어야 하는데, 결국 어쩌면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정말 아이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생각들 때문에 만감이 교차하더이다... 마태우스님 리뷰 보고 싶네요~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
앙투안 로랭 지음, 양영란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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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아주 고전 영화 중에 롤스로이스 라는 차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그 흑백 영화는 지금도 그 가치가 어마어마한 롤스로이스를 가지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었다. 처음에 롤스로이스를 산 사람은, 그 차 안에서 아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차를 팔아 치우고.. 뭐 이런 내용이었나. 아뭏든 비싼 차를 가진 사람들이, 그 차를 두고도 그닥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차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내 어린 심정엔 차가 가엾다, 무슨 운명으로 저런 주인들을 만났나 라는 느낌마저 가졌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 물건이란 건, 생명은 없을 지라도, 그렇게 사람들의 운명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지도 모르겠다는 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었던 것 같고.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 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 영화 생각이 났었다. 다니엘 메르시에라는, 그냥저냥 회사 생활 하면서 그닥 인정도 받지 못하는 한 남자가 어느날 가족들이 다들 자기 일을 하러 간 저녁 혼자 들렀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미테링' 대통령을 만나게 되는 사건이라면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미테랑이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미테랑이라는 프랑스 대통령이 상징하는 바는, 지금 생각해봐도 상당히 큰 것이었다. 레지스탕스 출신의 프랑스 최초 좌파 대통령. 잘할 수 있을까를 수없이 의심받았지만, 프랑스의 자긍심을 높이고 문화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평가받는 대통령. 그가 다니엘과 같은 공간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대통령이 식사를 다 마치고 나갈 때까지 천천히 식사시간을 가졌던 다니엘은, 문득 대통령이 그의 모자를 두고 나갔음을 알게 되고, 순간적인 충동으로 자기의 모자인 양 쓰고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 모자는 마술을 부리게 된다. 소극적이고 근근했던 다니엘 메르시에는 회사에서 딱 부러지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윗사람의 눈에 들게 되고 더 높은 자리에 임명이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그러니까, 그 모자가 주는 힘.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라는 권위가 그에게 모자랐던 2%를 채워준 셈이 된 것인가. 대통령의 머리 위에 얹어져 부여되었던 파워가, 그 모자를 쓴 사람에게도 작용한 것인지. 그러다가 그 모자를 우연히 기차칸에 놓아두고 내리게 되고 다시 그 모자는 파니 마르캉이라는 여자의 손으로 넘어가고... 그렇게 우연을 거듭하며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이동하던 모자는, 그 모자를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상상할 수 없는 자신감을 부여하게 된다. 아. 이게 무슨 조화인지. 알라딘의 요술램프란 말인가. 

 

이 소설은, '대통령의 모자'라는 상징적인 존재가 사람들에게 다가가면서 변화하고자 애쓰던 보통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모습들, 그러니까 소심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생 역전극을 보여주는 재미가 있다. 그것이 알라딘의 요술램프이든, 마녀의 유리구슬이든 간에, 사람들은 어쩌면 그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런 생활을 타파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그 무엇. 그것이 아마도 '대통령의 모자'라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 지. 무엇보다 미테랑 대통령이라는 실제 존재했던 인물,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손꼽히는 대통령을 소재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점이 가장 흥미진진하다. 마지막까지 가면, 작가가 미테랑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도 알 수 있을 것 같고.

 

 

그는 수수께끼와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프랑스 국민에게 보낸 마지막 신년 인사에서 그는 의례적인 대통령의 새해맞이 인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매우 당돌한 한 마디를 했다.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쿵저러쿵 논란이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만족할 만한 해석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 자신은 물론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이 문장엔 무려 461만 개의 댓글이 달려 있음을 구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94년 12월 31일 신년 인사를 마치기 2~3초 전, 그는 두 눈으로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한 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신의 힘을 믿으며, 여러분들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 p266

 

소설 말미에 있는 이 문장. 실제로 미테랑 대통령은 1995년 퇴임 후 1996년에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의 굿바이인사였을까. 그는 아직도 프랑스 국민들을 떠나지 않고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

 

문득, 부럽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처럼, 대통령의 모자가 나에게 이렇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려면, 그 대통령을 싫어해서는 안 되겠지. 그리고 이렇게 소설에서 대통령을 '마음대로' 묘사하려면 그만한 자유가 보장된 나라여야 하겠지. 그리고 나의 첫 소설에서 얘기하고 싶은 사람이 대통령이라니, 그 사람에게 애정이든 뭐든 그런 게 있어야 가능한 것이겠지... 우린 어떨까. 내가 식당에서 대통령의 모자를 주우면, 내 머리 위에 쓰고 싶을까. 심지어 그걸 쓰면 의기양양하게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까... 노 코멘트.

 

이 작가의 글솜씨가 마음에 든다. 나온 책 중에 <빨간 수첩의 여자>도 마저 사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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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디션 2016-09-18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읽겠다고 찜하신 책이
<빨간 수첩의 여자>라고 하시니.. 갑자기 개드립 하나가 생각납니다.(윽 비웃지 마세여) 우리나라엔 `수첩공주`가 있잖아요...

비연 2016-09-19 09:06   좋아요 0 | URL
앗. 컨디션님.... 대통령에 이어... 수첩... 앙투안 로랭은...혹시 우리나라를 염두에.. 두고..? =.=;;;;
 
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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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에서 나온 나쓰메 소세키의 책 뒷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이야기"

동감한다. 매우, 깊이.

 

소세키 소세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얘기하고 강상중이 얘기할 땐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만, 한 권 두 권 소세키의 책을 읽다 보면, 이런 게 고전이구나 라는 걸 느끼게 된다.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사람의 마음의 이야기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지금도 하나 어색하지 않게 묘사하고 있는 그의 소설들이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예전에 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발을 올리게 하는 거라네. 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은 거지. 난 지금보다 한층 외로울 미래의 나를 견디는 대신에 외로운 지금의 나를 견디고 싶은 거야.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 이 외로움을 맛봐야 하는 거겠지. (p50)

 

이 구절이 나쓰메 소세키의 경향을, 그리고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요약해 나타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주인공 '나'는 어느 해변가에서 '선생님'을 만나 친분을 쌓게 된다. 도쿄제국대학까지 나왔지만 별로 하는 일 없이 지내고 있는 선생님은 부인과 단둘이 살고 있는데 '상. 선생님과 나'에서는 이러한 선생님을 미스터리하게 그림과 동시에 '나'가 바라보는 선생님에 대한 모습이 자세히 나와 있다. 뭔가 비밀이 있는 듯한, 전부 보여지지 않는 선생님에 대해 존경심과 의구심 등등 복합적인 심경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잘 되어 있다.

 

'중. 부모님과 나' 에서는, 편찮으신 아버지와 그 옆에서 돌보시는 어머니, 그리고 나의 관계가 여러 각도로 조명된다. 아들이 대학을 나왔으니 뭔가 버젓한 직장을 바로 잡기를 원하는 부모와 조금은 태평한 아들의 모습, 아들이 직장을 잡고 제대로 살고 있다는 걸 남들에게 얘기하고 싶어하고 그런 일로 부끄럽고 싶지 않은 부모와 그런 것이 괜히 귀찮은 아들의 모습... 이런 모습들의 내면에 깔린 감정의 흐름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편찮으셔서 점점 죽음에 가까와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자식의 시선들도 마찬가지. 죽음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버지와 이제 아버지는 죽을 것이다 라는 것을 전제로 다음의 계획을 생각하는 자식들... 요즘 주변에 그런 일이 있어서인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하. 선생님과 유서' 에서는 선생님이 지면을 빌어 주인공 '나'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일인칭적 내용이다. 어렸을 때부터, 왜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는 지, 왜 별다른 일 없이 다 포기한 것처럼 살게 되었는 지.. 자신 안의 악마가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는 지에 대한 고백들이 이어진다. 이 부분에서, 소세키에게 참으로 감탄하게 된다. 사람 마음의 미세한 움직임들을 어찌나 잘 묘사하는 지,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고백을 받는 느낌을 부여하니 말이다. 사랑과 질투, 신뢰와 배신, 기만, 그리고 죄책감... 그 속에 위치하는 자아라는 그림자. 그리고 작품 전면에 깔려 있는 외로움. 내가 나를 마주 대할 때 느껴지는 외로움. 그 누구에게 이해를 구하기도 어렵고 그저 자기 자신만이 직면해야 하는 그 기저의 감정들. 그러한 내용들은 읽는 사람에게도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자신의 자아를 어쩌면 외롭고 쓸쓸한 대상으로 바라보게 함과 동시에 그것이 진정, 사람이라는 것이구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절감하게 한다.

 

현암사에서 나오는 이 시리즈는 다 사서 두어야 겠다. 현재 내게 있는 것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풀베개>, 그리고 이 책 <마음>. 전부 14권 나와 있는 책들을 하나씩 둘씩 사모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어 본다. 신기하게도 계속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들이고... 아마 이런 것이 고전의 힘이 아닐까 싶다. 고전은 고전. 언제 읽어도 오늘에 비추어 퇴색해 보이지 않는 본질을 거울 처럼 명징하게 드러내주는 것. 재삼 느끼게 된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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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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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하루 만에 다 읽은 후 방금 책장을 탁 덮으면서 든 생각. 아니 내가 이 책을 왜 이제야 발견했지? 그리고 나서는, 이제 정유정의 책을 다 사봐야겠군... 이라는 생각으로 옮겨갔고, 마지막에는 '난 이제 정유정 팬이야' 라고 생각을 마무리지었다. 우리나라 소설가의 책을 읽고 팬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게 언제? 꼬무작꼬무작... 있긴 있었나...

 

쫀득쫀득한 문체와 앞 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구성, 그리고 강렬한 흡인력. 또 뭘 말할 수 있을까. 유려한 단어를 구태여 골라 쓰지 않아서 화려한 느낌보다는 담백한 느낌. 우리나라 소설에서 흔히 보여지는 장광설이 없이 내용으로 승부하는 책. 또 또... 뭘 말할 수 있을까. 사람의 심연을 바닥까지 다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통찰력.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것의 긍정적인 방향성을 구차하지 않게 제시하고 있는 스타일... 내가 이 작가의 다른 책을 뒤지는 것이, 하나 이상하지 않다.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죄책감. 그 크고 작음을 떠나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특히나 부모, 가족에 대한 애증의 느낌. 아이에게는 이런 것들이 가슴에 큰 구멍을 남기고 때로 헤어나지 못하는 우울함을 커서까지 끌고 가게 하기도 한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전부,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최현수가 그랬고 강은주가 그랬고 안승환이 그랬고 심지어 오영제도 그랬다. 그리고 그 모든 상처는 살아남은 사람, 최현수의 아들인 최서원에게로 응집된다.

 

어쩌다 벌어진 사건에는, 많은 원인들이 있었다. 그냥 그렇게 그날 잘못된 에너지들이 모여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아버지에게 학대받던 오서령이라는 아이가 그날 따라 엄마 흉내를 내며 엄마의 옷을 입고 화장을 짙게 하고 있지 않았다면, 오영제가 도망치는 딸아이를 일찍 발견만 했더라면, 강은주가 괜히 집보러 다녀오라고 최현수에게 시키지만 않았더라면, 최현수가 그날 따라 술을 그렇게 진탕 마시지 않았더라면, 안승환이 저수지에 들어가 수몰된 마을을 찍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수많은 가정들이 그냥 다 '그래 버렸기' 때문에, 그것들이 맞닥뜨린 지점에서 아이가 희생된다. 그리고 그 잘못된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두의 인생이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그걸 우연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왜 이렇게 운명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인지.

 

그렇게 세령호에서의 이 주는, 살인의 죄로 망가져 가는 한 남자와, 악착같이 돈을 벌어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루고 싶어하는 그의 아내와, 아버지를 사랑하고 믿지만 점점 마음이 멍들어가는 한 아이와  '내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또 한 남자에게 가혹한 세월로 매김하게 된다. 결국 여자아이를 죽이고 아내를 죽였다는 죄명과 함께, 한 마을을 통째로 물 속에 가라앉게 만들었다는 괴물로서 '최현수'는 아들 최서원에게 돌이킬 수 있는 시커먼 구멍을 남기게 된다. 살인마의 아들은 견뎌낼 수 밖에 없었고 그걸 쳐다보는 세간의 시선이나 친척들의 눈길은 곱지 않았으며 어딜 가나 따라다니며 정착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어떤 세력으로 인해 결국 '아저씨'에게 의탁하여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게 되고. 그리고 지난 세월, 그 속에 숨겨진 비밀들이 하나 둘씩 벗겨지는 드라마틱한 전개가 이어진다.

 

저 젊은 눈동자는 그때 무엇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을까. (p512)

마지막 즈음에 이 대목에서 사실 눈물이 났음을 고백한다. 인생의 한치 앞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 때 그랬던 해맑은 미소의 청년은 44살에 할아버지의 몰골이 되어 교도소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게 된다고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사는 것에 대한 회한이 불현듯 밀려와 이 대목을 두번 세번 읽게 된다.

 

대기화면에 깔린 사진을 들여다봤다. 안개낀 별채앞길. 불 켜진 가로등들, 측백나무 울타리 옆을 나란히 걷는 거구의 남자와 사내아이. 남자는 사내아이의 책가방을 들었고 사내아이는 남자의 바지뒷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였다. 열흘 전 아침, 아저씨가 찍었을 우리의 뒷모습이었다. (p8)

아들을 사랑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좋아했던 아들. 참 아름다운 정경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상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훼방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린, 공포, 불안, 죄책감... 이런 것이 아닐까. 떠났다고 다 털어 버렸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거기에 휘말려 버린 스스로를 발견한다는 것은, 두려움을 넘어서 경악이다. 남겨진 아이는 정면으로 맞부딪히고 그래서 자기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기를, 어쩌면 그 아이에게 말한다고는 하지만, 내게 말하는 듯한 느낌으로 빌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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