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와 형식을 중시하던 조선의 유학자들은 정해진 형식이 없는 소설문학을  

일반 평민이나 아녀자들이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읽는 잡스러운 글로 치부하며 시문학에 비해 경시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시대 소설의 주요 독자층은 왕실 사람들이었다.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궁궐내 사람들에게 ‘소설’은 답답한 생활을 잠시 잊는 최고의 재미거리였으며,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것은 물론 바깥세상을 엿볼 수 있는 ‘창’이 되기도 했다.   

낙선재에는 궁중 여인들이 즐겨 읽던 한글 고전소설이 보관돼 있었다.

  (1847년 헌종이 각별히 아끼던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곳으로  김씨가 죽은 후에 한동안 고종의 편전(便殿)으로 사용됐고,  1926년 순종이 죽은 뒤부터는 계속 순종의 계비(繼妃)에 의해 사용돼왔다.) 

조선 왕실의 소설, 일명 ‘낙선재본’이라고 불린 이 소설들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직계 자손인 이해청이  낙선재에 드나들면서 접한 뒤 가람 이병기에게 귀띔해 연구자들 사이에 알려졌고,  김태준의 <고전소설사>(1933)에도 일부 소개됐다.  광복 이후 소설의 행방이 묘연했다가 1965년 창경궁 장서각에서 정병욱 서울대 교수가 발견하고 이듬해 학계에 발표했다.  

일부 분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83종 2000여 책의 낙선재본 소설은 모두 한글필사본으로 번역소설이 700여 책이며 창작소설이 1300여 책으로 구성돼 있으며  
남녀 간의 사랑, 영웅의 일대기, 전쟁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내용으로 이뤄졌다.
대부분 작품이 당시의 획기적인 사회의식을 보여준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돼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보관하다가  그간 출판요구가 많았던 낙선재본 소설을 현대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기획해 조선 왕실의 소설’ 시리즈를 내놓았다.  

낙선재본 소설의 마지막 독자는 순조의 딸인 덕온 공주의 증외손녀인 윤백영 노파다.  <징세비태록> 등 몇 권의 소설에 자신의 해제를 단정한 한글 서예로 붙여 놓기도 한 윤 노파는  낙선재본 발견 당시인 1960년대의 인터뷰(1966년 8월 25일자 중앙일보)에서 “<춘향전>은 유식치 못하고 깊은 뜻이 없고 잡되다. 조선 왕실의 소설은 문자가 좋고 윤곽이 크고 감정 표현이 풍부하며 일거일동을 섬세하게 그려 읽을수록 끌려든다”고 말했다.  

이 작품들은 유식하지만 출세하지 못한 선비들이 생계 수단으로 썼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국내소설뿐만 아니라 중국소설도 많이 번역됐다. 이들 작품은 중국 역사를 교양 수준으로 섭렵할 수 있게 해 준다.


임치균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학부 교수 등 4명이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현대 어휘로 풀어쓰고 주석을 달았다.   

낙선재본 전문가인 임 교수는 “민간이 읽었던 홍길동전이나 춘향전처럼 ‘전’으로 끝나는 소설과 달리 왕실에서는 이념 지향적이고 가문 의식이 뚜렷한 ‘록’자류 소설을 읽었다” “낯선 중국 고사를 인용하는 등 까다로운 부분이 많아서 한 작품을 읽는데 약 6개월 걸린다”면서 “번역 과정에서도 고어의 맛을 살리면서 현대어로 바꾸는 게 무척 힘들었다”"한국소설만 모두 현대어로 번역하는 데도 30년은 걸릴 텐데 우선 앞으로 한 10년 동안 흥미로운 작품 순으로 번역 작업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현대어본과 함께 원문 이미지와 함께 원문의 어휘를 그대로 사용하고 주석을 붙인 영인ㆍ교주본을  동시에 출간했다. 

교주본이 현대어본보다 판형이 크다. 개인적으로 교주본 판형이 더 맘에 들더라. 책 디자인도 깔끔한게 예쁘다.

현재 4번째책까지 출간되었고 2011년에는 화씨 집안의 처첩 간의 갈등을 다루는 가정소설인 '화문록'을 출간할 예정이다.


                                                                                                                                                  
'                                       그 시리즈 첫번째책으로  

작자 미상의 조선시대 소설로 분량이 비교적 짧은 '낙성비룡(洛城飛龍) ', '문장풍류삼대록(文章風流三代錄)', '징세비태록(懲世否泰錄)'을 한 권으로 묶었다 

 낙성비룡'은  어쩌면 실리와 기회를 쫓으며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뒤통수를 강타할 인물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이경모’는 미련할 정도로 참을성을 가진 사람으로 과거와 입신양명을 위한 것이 아닌 즐기는 ‘진짜 공부’를 한다. 우정과 사랑, 기본적인 예의를 중시한 그는 실리만 좇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일침을 가할 예정이다.과거에 장원급제해 입신 후에도 겸손하게 선비의 자세를 잃지 않는 인물을 그렸다.

'문장풍류삼대록'은 중국 송대의 유명한 시인이자 문장가인 소동파 집안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가정에서 벌어지는 혼인 전후의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예나 지금이나 평생의 배우자를 구하는 데에는 여간 깐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동파의 조카 소원의 황당한 혼인담은 흥미롭다.

'징세비태록'은 청나라를 배경으로 충신과 간신 간의 대립과 전쟁, 사랑 등을 묘사했다.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것은 조선 후기 청나라를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론을 반영한 것으로 당시 소설로는 획기적인 일로 평가된다.
 

 

 '조선 왕실의 소설' 시리즈. <태원지>는 그 두 번째 책으로,  

오랑캐의 원나라를 물리치고 천하를 되찾고자 하는 임성 일행이 바닷길에 나선 후 겪게 되는 모험담이다. 조선에서 창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에서 중국 아닌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의식을 반영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해양판타지로
천명을 받은 ‘임성’이 자신을 따르는 호걸들과 함께 조선을 찾아가다가 풍랑을 만나 대양을 표류하면서 여러 섬들을 탐험하고, 온갖 요괴들을 물리쳐 고난을 극복한 후, 신대륙 태원에 도착해 통일을 이루고 건국하는 이야기다.  


  

 

 세번째 책으로 영이록은
 재상가의 귀한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서른이 되도록 바보 취급을 받던 주인공이 어느 날 하늘의 기밀이 담긴 천서(天書)를 공부한 뒤 신기한 능력을 갖게 된다는 내용이다.


바보에서 신선으로 환골탈태한 주인공이 행하는 갖가지 이적들은, 결국 지상세계의 길흉화복이 모두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세계관을 전한다.

하늘에는 신선이 있고 지상에는 재상이 있으니
천상천하에 그 귀함이 다를 바가 없다

나이 서른이 되도록 행색이 변변치 못해 바보 취급을 당하던 손기는 어느 날 빼어난 재상인 손아랫동서로부터 크게 모욕을 당한 후 집을 나가 깊은 산중에 있는 도관을 찾는다. 그곳에서 하늘의 기밀이 담긴 천서(天書) 세 권을 공부하고 영이(靈異)로운 능력을 지니게 되는데…. 6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온 손기는 더 이상 바보사위가 아닌 지상세계 온갖 요물을 굴복시키는 능력자 손 천사(天使)로 거듭난다.

 

네번째 책으로 낙천등운은 


 집안이 몰락하면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신분을 속이고 사창가로 숨어 들어간 왕석작은 포주의 양아들 노릇을 하던 중 동예아를 만난다. 원래 양가집 처자인 동예아는 돈이 궁했던 삼촌 때문에 처음에는 팔리다시피 왕석작과 맺어진다.

이들은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변함 없는 사랑을 지켜내고 '낙천등운'이란 제목처럼 나락을 벗어나 청운에 오른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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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언문)은 천대받은 글인가? 

사대부가 쓰면 안되는글? 왕실에서도 안쓰는 글? 

그래서 여인들이나 쓰는 문자가 한글? 

역사속 한글의 모습........진짜인가?  

반포450년후에나 우리 글로 인정받은 한글... 

‘조선언문실록’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에서 한글과 관련된 이야기를 추려 내 엮은 것이다.   

한글이 창제된 세종 25년(1443)부터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 때까지의 기록 중에서 한글과 관련된 내용을 뽑아내 구성하였다. 

이 책은 창제 이후 우리글이 어떻게 쓰여 왔는지를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구체적인 장면 속에서 살펴봄으로써 한글에 대한 오해를 풀고 우리말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을 이끌어 낸다는 데 의의가 있다.  

책의 제목을 ‘한글실록’이라 하지 않고 ‘언문실록’이라 붙인 이유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부터 <실록>에 ‘언문’이라는 이름이 쓰였기 때문이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_<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에서는 언문을 ‘상말을 적는 문자라는 뜻으로, 한글을 속되게 이르던 말’이라 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 의미를 넘어 <실록>에 담긴 용어를 그대로 살린다는 뜻에서 ‘언문’을 사용하고 책 제목을 ‘조선언문실록’이라 하였다 

 이 책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록>을 살펴보면 사용하는 사람의 신분이나 계층에 따라 언문을 사용한 목적과 내용에 차이가 나는데, 사용자층은 크게 왕과 왕족, 사대부와 관리, 왕실 여성, 백성으로 구분된다. 이에 따라 1장에서는 왕과 언문을, 2장에서는 사대부의 언문 사용을, 3장에서는 여성과 언문을, 4장에서는 백성과 언문 사용을 다루었다. 그리고 5장에서는 언문이 국문으로 되기까지의 과정에 있었던 다양한 언문 정책들을 살펴보았다.

언문을 사랑한 임금
세종은 재위 28년(1446) 10월 10일에 왕실의 불사(佛事)를 반대하는 대간들의 상소가 이어지자 그들의 죄를 일일이 글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내렸는데, 이 글이 바로 언문으로 되어 있었다. 즉 임금이 신하들의 죄목을 직접 언문으로 써서 내린 것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임금의 행보에 놀란 신하들은 대간에 대한 처벌의 명을 거두어 달라고 거듭 청했고 세종은 몇 차례 거부하다 대간들을 석방했다.(15-18쪽)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불안한 민심을 달래고 또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교서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하고, 언문으로 방문을 만들어 반포하게 하였다. 1593년 9월에는 왜적에게 투항한 백성들에게 돌아올 것을 종용하는 내용을 담은 언문 교서를 내리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언문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언문 덕분에 왕의 말은 백성에게까지 순식간에 직접 전달될 수 있었고, 백성들은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언문 교서를 통해 지침을 받을 수 있었다.(40쪽 ‘임진왜란과 선조의 언문 교서’)

사대부, 언문 편지를 쓰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공식적으로는 한문 문화만을 향유하는 계층이었지만 필요에 따라 언문을 사용하곤 했다. 바로 여성 계층과의 소통을 위한 필요였다. 아내, 어머니, 시집 간 딸, 심지어는 첩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둘러싼 여성들에게 글을 쓸 때 사대부들은 반드시 언문을 사용하였다. 연산군 2년에는 딸의 죽음을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첩에게 언문 편지를 보낸 사대부가 신문을 받기도 했고, 명종 8년에는 양조모에게 보낸 편지가 빌미가 되어 사대부의 비밀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기도 하였다. 광해군 대 이이첨은 은밀한 사안을 언문으로 자세하게 써서 김 상궁에게 보내 왕에게 고하도록 하기도 했다.(80쪽 ‘비밀을 담은 언문 편지’)

여성의 삶과 언문
조선 시대 왕실 여성은 공식 문서에도 언문을 사용하였다. 수렴청정을 하는 대비전에서도 언문으로 교서를 써 내리곤 하였다.(129쪽 ‘왕대비의 언문 수렴청정’) 궁녀들은 언문으로 연애편지를 써 전하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결국 관비가 되거나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다.(141쪽 ‘궁녀와 연애편지’)

백성의 소통법
언문이 보급되자 문자 생활이 가능하게 된 백성들 중에는 직접 상소를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천민 신분을 면하게 해 달라, 가난을 구제해 달라는 등 사연도 다양하였다. (152쪽 ‘언문 상소로 억울함을 호소하다’) 16세기 이후로는 언문 소설이 큰 인기를 얻어 책 대여점이 생기기도 하고 아녀자들은 비녀를 팔고 빚을 내어 소설을 빌려 보기도 하였다. 책 내용을 현실과 혼동하여 살인을 저질렀다는 기록도 있다.(163쪽 ‘언문 소설의 매력에 빠지다’) 연산군 대에는 임금을 비난하는 내용의 언문 익명서로 인해 한때 언문 사용이 금지되기도 했다.(173쪽 ‘언문 익명서 사건’)

언문, 국문이 되다
언문은 다른 나라에서 알아보지 못하는 문자로서 암호처럼 쓰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언문을 쓰기도 했고, 성종 대에는 언문을 중국인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이유로 역관이 처벌을 받기도 했다.(215쪽 ‘비밀문서는 언문으로 쓰라’) 이처럼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조선의 공용 문자로 쓰여 온 언문은 1894년 갑오개혁 때 정식으로 ‘국문’이 된다.(226쪽 ‘국문의 탄생’)


같이 읽어보면 좋을 책~~재미있다.

훈민정음으로 태어나 언문으로 불리다 국문으로 거듭나기까지.. 

세계 문자 가운데 한글,  

즉 훈민정음은 흔히들 신비로운 문자라 부르곤 합니다.  

그것은 세계 문자 가운데 유일하게 한글만이 그것을 만든 사람과 반포일을 알며,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 알기 때문입니다.  

세계에 이런 문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한글은, 정확히 말해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은 진즉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이 직접 서문을 쓰고 정인지 같은 신하들에게 글자에 대한 설명을 적게 한 것입니다.  

이 책이 1940년에 안동에서 발견될 때까지 우리는 한글의 창제 원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 책이 발견됨으로 해서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인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었답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전적으로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을 세운 전형필 선생의 공입니다.  

선생은 아주 비싼 가격으로 이 책을 샀고 6∙25 때에도 이 책 한 권만 들고 피난 갈 정도로 이 책을 지키기 위해 몸을 바친 분입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역사상 유명하고 중요한 상소를 골라 해설과 함께 엮은 책이다 
책 <선비, 왕을 꾸짖다>를 보면

〈언문(諺文) 창제의 부당함을 아뢰옵니다〉-최만리(崔萬理) 편이 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1444년 6조목의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세종의 노여움을 샀다.     

6조목의 내용과 그에대한  세종의 대답의 일부분이다.

언문(諺文) 창제의 부당함을 아뢰옵니다〉-최만리(崔萬理)  


언문(諺文)을 창제하는 것은 지극히 신기하고 묘하여 만물을 창조하시는 것과 같은 천고에 훌륭한 일이오나, 신 등의 좁은 생각으로는 오히려 우려되는 일이 있사와 간곡한 정성으로 감히 뒤에 나열하오니 전하께서는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라서 시행하여 왔는데, 이제 막 글이 통하고 법도가 중국과 같이 되어가는 마당에 언문을 새로 창제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만일 중국으로 흘러들어가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예부터 중국은 그 땅이 넓어 전국의 기후와 풍토는 비록 달랐으나 그 지역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적이 없사옵니다. 오직 몽고(蒙古), 서하(西夏), 여진(女眞), 일본(日本)과 서번(西蕃) 같은 나라들이 각기 그 나라의 글자가 있사오나 이는 모두 오랑캐들의 일이므로 따로 더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옛말에 ‘중화의 영향으로 오랑캐를 변화시킨다.’는 말은 있어도, 중국이 오랑캐로 인해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도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은나라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고 하며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였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신기롭고 향기로운 영약인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쇠똥으로 만든 말똥구리의 당랑환(螳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결함이 아니오리까. -중략(中略)-
신라 설총(薛聰)이 만든 이두(吏讀)는 비록 촌스러운 말이기는 하나 모두 한자를 빌어서 어조(語助)사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한자는 원래대로 두고 서로 분리시킨 것이 아니므로, 하급 관리나 관청에 딸린 하인들도 이두를 익히려면 먼저 한자를 익힌 연후라야 이두를 쓸 수 있어 이로 인하여 문자를 알게 되는 자가 자못 많사오니 학문을 흥기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물며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관청의 장부나 문서로 하는 계약서 등에 아무런 방해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버리고 따로 촌스럽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려 하시옵니까? 만약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가 되려는 자들은 오로지 언문만을 배우려 하고 유학을 학문하는 한자는 돌보지 않기 때문에 관리들은 둘로 나누어질 것이옵니다. 언문만을 배워 출세하려 한다면 후배들이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만으로도 족히 입신(立身) 출세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니 그들이 무엇 때문에 노심초사하여 성리(性理)학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세종의 비답(批答)〉
그대들이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배된다.’ 하였는데, 설총의 이두 역시 음이 다른 것이 아니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 또한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다.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그대들이 모시는 임금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해설)
조선은 명나라를 존중하며 송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건국을 하였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이민족 국가에 대하여 중국과 같은 글자를 사용하는 동문 정책을 펴오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의 문화와 제도를 본받고 중국을 따라하도록 권하는 것이었다. 마치 일제가 강제로 우리에게 일본문자를 쓰고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듯이, 문서로서 명령하고 다스리기에 매우 편하다는 논리였다. 조선은 이소사대로서 중국을 섬겨오던 터라 이것을 어기고 언문을 창제하는 것은 독립을 주장하고 자주적인 국가를 주장하는 것으로 중국과의 외교관계에 마찰을 초래할 수 있는 큰 일이었다. 이에 최만리 등 신하들은 그것을 우려하여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한글은 위대한 조선의 문자라고 칭하지 않았고, 관공서나 외교문서에서도 조선이 망할 때까지 끝내 사용되지 않았다. 세종의 언문 문자정책은 그래서 순수한 일반 백성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라는 뜻을 분명히 하여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란 뜻의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하였다. 그리고 훈민정음을 공포하는 서문에 그 뜻을 분명히 밝혔다. 위대한 우리의 한글이 창제에 비하여 그 서문이 상당히 절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바로 당시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최만리가 상소에서 제기한 문제는 조선의 어문정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었으며, 세종의 입장에서도 언문 창제는 시급한 일이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의식하여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신하의 정성스러운 뜻이 담겨 있고,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 성리학의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는 충직한 뜻도 담겨 있었다. 최만리가 이소사대를 취하고 한자를 고수한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이었으니 오늘날의 입장에서 흑백논리로만 평가하여 최만리 등을 맹목적 사대주의자로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본문 중에서〉 

 

 

 국어사를 전공한 저자가 오랜 시간에 걸쳐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순원왕후의 한글편지들을 정리하여 현대어로 옮겼다. 저자는 왕후의 편지를 현대어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주석을 통해 편지에 나온 표현과 단어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짚고 넘어감으로써 19세기 중엽의 한국어, 왕실과 사대부가에서 사용된 언어와 편집 글 특유의 문체를 살펴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조선 제 23대 왕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세도정치의 계기인 동시에, 헌종과 철종 때 두 차례나 수렴청정한 조선 후기 정치의 핵심 인물이다. 순원왕후가 그의 친정일가에게 보낸 한글편지들은 규장각에 총 57매가 소장되어 있는데, 그 존재는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이를 모두 판독하여 현대어로 옮기고 편지의 내용과 배경을 설명한 것은 이 책이 최초의 시도이다.

순원왕후가 주고받은 한글편지들은 공식적인 기록에는 드러나지 않은 세도정치와 궁중생활의 이면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며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조정과 왕실을 이끌어야 했던 여성의 고민이 담긴 고백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순원왕후 편지에는 가족들의 안부와 집안 대소사를 묻는 사적인 내용부터 국정에 대한 자문 등 공적인 성격까지 두 가지가 교차되면서 균형을 맞춘다.

  편지로 확인하는 19세기 한국어
국어사 연구의 측면에서도 이 책에서 소개하는 순원왕후의 편지는 19세기 이전과 사뭇 다르게 전개되는 표현과 문법, 의미의 변화 등을 확인하여 국어의 변화과정을 유추할 수 있게 해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순원왕후의 한글편지》는 순원왕후의 편지를 현대어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주석을 통해 편지에 나온 표현과 단어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짚고 넘어감으로써 19세기 중엽의 한국어, 왕실과 사대부가에서 사용된 언어와 편집 글 특유의 문체를 살펴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예를 들어 순원왕후의 한글편지에서는 편지 글 특유의 독특한 문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종결형태인 ‘-삽-’체의 쓰임도 그 중 하나이다. 이는 ‘-?-’ 이하의 어미들이 탈락한 형태이며, 좀 더 간략한 표현을 선호하는 편지 글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현재 인터넷 메일 등에서 널리 쓰이는 줄임말과 비교되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순원왕후 조선 제 23대 왕인 순조純祖의 비妃이다. 1789년(정조 13) 안동 김씨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조순祖淳(1765~1832)의 딸로 태어나 1800년(정조 24) 왕세자빈으로 간택되고, 1802년(순조 2) 왕비에 책봉되었다. 슬하에 孝明世子(익종翼宗으로 추존)와 명온공주明溫公主, 복온공주福溫公主, 덕온공주德溫公主의 1남 3녀를 두었으나, 이들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보낸 아픔을 겪었다. 순원왕후는 대왕대비로서 두 차례의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1834년 순조가 승하한 후 헌종憲宗을 대신하여 수렴청정하였고,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고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또다시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1857년(철종 8) 69세를 일기로 승하하여, 순조의 능인 인릉仁陵에 함께 모셔졌다. 
 

우리말 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일본말 찌꺼기.
우리말 어휘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언어의 확장인가, 또 다른 문화식민지 역사의 예고인가.
국어사전도 밝히지 못한 일본말 찌꺼기의 역사와 유래를 하나하나 추적한《사쿠라 훈민정음- 국어사전 속 숨은 일본말 찾기》출간. 역사와 유래를 알고선 도저히 쓸 수 없는 놀라운 일본말 찌꺼기의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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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진강시인 김용택!!  

자연과 아이들을 노래하고 교과서에 실린 시로도 유명한 김용택 시인!!  

시골 감성이 잘 느껴져 더 좋아하는 시인!!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와 우편배달부"는

시인과 우편배달부 마리오를 통해, 한 편의 시가 새로운 삶과 사랑을 이끌어내는 장면을 소박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소설 '네루다와 우편배달부'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네루다가 시골 우편배달부에게 시를 가르친다.  

배달부는 시인에게 "은유란 무엇이냐"고 묻는다. 네루다는 "시에서 '하늘이 울고 있다'면 무슨 뜻일까"라고 되묻는다.  

배달부는 "비가 온다는 거잖아요"라고 절로 답하면서 시를 깨닫는다.  

한마디로 시가 내게로왔다...이다.. 



김용택시인은 나처럼 시를 잘읽지도, 시를 읽고도 잘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과 시를  자연스럽게 잘 이어준다.  

누가 시집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저는 이 시리즈를 추천하곤했습니다.  

이번 5권으로 완간된 '시가 내게로 왔다' 시리즈는  

근대시에서부터 현대시, 동시, 한시에 이르는 한국 대표 시를 모두 보여주는듯합니다.   

 

더디게만 오는 올 봄~~ 지금 현재 눈이 오는 곳도 있습니다. 

밖에 나가보니 바람이 너무 불어 좀 너무한다 싶습니다. 

봄이 너무 튕기는 것같다....칫~~ 그래도 내 마음은 벌써 봄인걸? 흥? 

얼릉얼릉 개나리,벚꽃피는 봄이와서  꽃피는 나무 아래에서 

내 아이들과 신랑은 함께 뛰어놀고 나는 벚꽃나무아래에서 시집한권 읽고싶다.. 



『시가 내게로 왔다』 1, 2권에서 근·현대 시사 100년에 빛나는 시 100편을 소개합니다. 

  

 

 

<시가 내게로 왔다> 3권에서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시인 63명의 시 65편을 소개한다.  

 

 

 

 

 

 

 

                                              

  『시가 내게로 왔다』4권은 동심이 가득한 47편의 시와 김용택 시인의 감상글이 어우러진 책이다. 

아이와 함께 읽을수있어서 참 좋더라~~ 

 

 

 

  

 

시가 내게로 왔다』5권은  18종 문학 교과서에 실린 시들과 이규보, 정약용, 도연명에서 황진이, 허난설헌에 이르는 여성 시인들의 시까지, 김용택 시인이 인상 깊게 읽고 사람들과 나눠 읽고 싶은 옛 한시들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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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 사는 서울시민이든 지방에 사는 지방시민이든 대한민국사람이라면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에 대한 애정은 무한할것같다.. 

국보1호 숭례문이 불탔을때 국민들은 왜 그렇게 슬퍼했을까? 

왜 불타는 숭례문을 보며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그건 아마 국보1호이기전에 서울의 상징물이었기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책을 보게되면 아마 서울이 익숙한이들에게는 새로운 시각을.. 그러나

만약 서울이 익숙치않은이들에게는어떤시각을 줄까? 싶다. 

일러스트작가인 지은이가 5년동안 서울의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그리고 공부하고, 생각한것을 엮은 에세이집이란다.. 서울을 그린책이라니 무작정 흥미가 생긴다.. 

책을 얼핏봐도 책쓴이의 마음과 그림 자체에 무한한 노력이 엿보인다.. 

어쩐지 책에서 여유가 느껴지며 그림옆에 깨알같은 설명이 너무 정겨운책... 

  

 

 

 

 

 

 

 

 

 

 

 

 

김영택 화백을 아십니까?  

펜화가로 한국문화재의 아름다움을 아주널리 알리신분이죠..  

예술에세이 "김영택의 펜화기행"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했던 김영택씨는 10년전 파리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했다가  

캘린더,엽서,복제화 등 기념품의 절반 정도가 펜화인 것을 발견하고 관심을 갖게되고.  

이후 펜화를 독학으로 연구하고 전국을 돌며 우리 문화재를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초 기에는 건물 위주로 그린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과의 조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하시더라구요..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15일동안 50만 번 이상 펜 선을 그어야 한다는데..  

종이위에 먹의 느낌을 주는 검은 잉크를 사용했으며.

먹펜을 즐겨 쓰는 이유는 펜이 지닌 솔직함과 정확함에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문화재와 펜그림에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보세요. 

사진으로는 볼수없는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느낄수있습니다.. 

열린책들의   장 자끄 상뻬의 그림 이야기시리즈 대형판처럼 큰판형으로 나왔으면 좋겠어요..섣부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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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 브라이슨은 박학다식하다. 글을 읽어보면 꽤나 유쾌한 사람일것같다.. 

미국인이면 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저널리스트다. 

그래서 이번 책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  

책은 판형도 크니 좋고, 책자체가 종이탓인지 많이 부드러워 손에 잘감기고 부드럽게 꺾인다.. 표지색깔과 책 제목의 빨강글씨가 눈을 어지럽게함이 좀 부담스럽다. 

부담스러워 압박으로다가오는 번역제목과 책표지의 지극한겸손(?)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감탄스러운 글맛을 자랑할까?     

빌 브라이슨이 영국시골에 고택을 샀다. 

빅토리아여왕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1851년)에 서까래를 올린 집이다. 

그 집을 둘러보며 궁금증이 생겼단다. 

이집을 지은 사람은 무엇을 어떻게 먹고 마시고 소비했을까? 

이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냈을까?하고....... 

 150년 전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과정을 주로 썼다

자기가 사들인 고택의 입구부터 다락까지 꼼꼼히 둘러보며  

각각의 공간(현관,부엌,침실,화장실)에 얽힌 일상의 역사를 꼼꼼히 탐구한다..  (물건의기원,역사 이야기까지) 

백과사전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듯..

이책을 대충 훓어보니 저자는 인간의 삶,,점점 편리한 삶만 추구하는 사람들

그에따른 자연파괴를 걱정하는듯도하다...잘 모르겠다..완독해봐야알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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