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보석같은 여행지, 서천
[데일리안 2006-04-24 10:00]    
춘장대 해수욕장, 동백숲 볼거리 다양

[데일리안 강태성]
백년 된 동백나무 숲에 만발한 동백꽃이 화사함을 뽐내고, 여름에는 춘장대 해수욕장의 너 른 해변과 시원한 송림에서 더위를 식히며, 가을에는 제철을 맞은 전어잡이로 홍원항에 넘쳐나는 전어 구이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뿐만 아니라 영화 JSA가 촬영된 신성리 갈대밭은 그 애잔함이 절정을 이루기도 한다. 겨울로 접어들면 금강하구둑에는 무수한 겨울철새들이 찾아와 자연의 신비를 새로이 깨 닫게 해주고, 동짓날을 전후한 40일동안엔 마량리 앞바다로 해가 뜨고 지는 해넘이와 해돋이를 모두 볼 수 있다.

바로 충남 서천군으로의 여행에서 만나게 되는 일들이다. 사시사철 이렇게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하는 여행지는 흔치 않다. 하물며 그 좋은 여행지가 여행객들에게 그리 유명하지 않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를 살펴보니 서천군 을 에워싼 주변이 충남 부여, 대천해수욕장이 있는 보령군, 전북 군산 등 오래 전부터 내로라하는 관광 명소들이었던 탓이다. 더불어 서해안 고속도로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불편했던 교통도 한가지 이유였다.

유명한 명소들 틈바구니에 끼어 억울하게 무명 신세였지만, 소리 없이 알차게 익은 가을 알밤처럼 속이 꽉찬 여행지, 서천군으로 늦여름, 초가을 여행을 떠나 보았다. 춘장대 해수욕장

해수욕장의 풍경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춘장대IC로 빠져 나와 춘장대해수욕장과 마량리 포구가 위치한 서면 방향으로 접 어드니 길 양옆으로 사람 얼굴보다 큰 접시꽃들이 가로수처럼 심어져 있다.

탐스러운 모양새와 울긋불긋 화려한 색깔을 뽐내며 활짝 웃고 있는 접시꽃들은 기대치 않았던 반가운 환영인사를 건네오고 그 덕인지 여행의 시작이 즐거워진다. 6월에 피기 시작해 8월까지 만발하는 이 꽃은 여름 해수욕객을 위한 서천군 의 첫인사쯤 될까.

들뜬 마음으로 한걸음에 *춘장대해수욕장 으로 향한다. 늦은 피서객들이 물놀이를 즐 기고 있는 춘장대해수욕장은 울창한 송림과 아카시아 숲을 뒤로하고, 서해를 향해 둥글게 두 팔을 내뻗은 형상이다.

경사가 거의 없는 넓은 백사장은 썰물로 물이 빠지면 바다에 묻혀 있던 500m 가량의 긴 모래사 장이 드러나 물놀이를 즐기던 해수욕객들은 즉석 갯벌체험을 즐긴다. 게와 조개 등의 수생생물들은 아이 들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해서 머리를 맞대고 모래를 파내고 있는 가족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수심 이 얕아 아이들의 해수욕에 좋기 때문에 이곳에는 유독 어린 자녀를 동반한 가족단위의 여행객들이 많이 눈에 띤다. 수영에 능숙치 않은 어른들 역시 안심하고 바다를 즐길 수 있어 춘장대를 찾는다.

동백나무 숲 정상의 동백정 동백정 앞 바다
서천해양박물관을 지나 마량포로 향하는 길목에 *마량리 동백나무숲 이 자리하고 있다. 어부들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500년 전에 심어진 동백나무들은 현재 84그루가 남아 있는데, 일반적인 동백나무 3~4그루 를 합친듯한 몸체의 굵기를 보자면 수령의 육중함이 절로 느껴진다.

봄이면 붉은 동백꽃이 만발하는 이 숲 정상에 바다를 내려다보고 자리한 동백정에서는 서해안의 일반적인 바다와는 다른 색다른 모습의 바다 를 만나볼 수 있다. 푸르른 바닷 빛깔과 절벽 아래로 와 닿는 파도는 이곳이 동해인지 서해인지 헷갈리 게 할만큼 아름답다. 동백정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조망한 후 소나무 숲을 한바퀴 도는 산책까지는 1시간이면 충분한 코스이다. 마량포 해돋이

마량포의 방파제 전망대 마량리 앞바다를 지나는 어선

풍성한 제철생선이 넘쳐 나는 홍원항에는 9월이면 전어가 풍년이다. 9월 말에 열리는 '전어큰잔치'에 맞추어 찾는다면 고소하고 감칠맛이 일품인 전어를 회나 구이로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 홍원항과 달리 마량포는 고기잡이보다는 관광지로서의 명성이 더 높다. 서해안의 여느 바다들과 마찬가지로 마량포에서 보는 해넘이도 근사하지만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해돋이 또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매년 동짓날을 기준 으로 전후 20여일씩 총 40여<
일간 방파제 전망대 동쪽으로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이 장관 을 연출하고 연말연시가 되면 이

*마량포해돋이 를 보며 마음을 새로이 다지려는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해돋이를 볼 수 없는 시기이지만 방파제에 올라 삼면으로 애워싼 바다를 향해 서면 마음까지 트이는 시원 함이 느껴진다. 가을이 깊어지면 신성리갈대밭과 *금강하구둑 은 그 진가를 발휘한다. 폭 200m, 길이 2km 갈대밭에는 키가 2m가 넘는 갈대들이 바람에 넘실대는 모습이 반짝이는 금강의 물결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이룬 다. 금강 하구둑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찾아오는 10만 마리의 겨울 철새들을 보기 위해 탐조여행을 떠나 보는 것도 멋진 계절 여행이 될 것이다./ 강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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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4-24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사진의 하늘, 너무나도 아름답구나...

플레져 2006-04-24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서천! 언젠가 가봐야겠음...

이리스 2006-04-24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오오.. 낭군님과 함께에~ ^^
 

방황하는 청춘아, 이병주를 읽어라
[조선일보 2006-04-24 09:37]    

이병주 전집 한길사|전 30권|각권 9000원

[조선일보]

나는 ‘이병주’라는 고봉준령을 오를 수 없다. 까마득해서 주눅이 든다. ‘소설 알렉산드리아’에 가기도, ‘관부연락선’을 타기도, ‘지리산’과 ‘산하’를 밟기도 힘이 부치고 ‘쥘부채’를 잡거나, ‘행복어 사전’을 뒤지거나, ‘그 해 오월’을 기억하기도 깜냥이 안 된다. 포기가 마땅하거늘 용심을 부리는 것은 가녀리나마 선생과 얽힌 추억이 있어서다. 선생이 내 손에 쥐어준 몇 톨 안 되는 말과 글의 이삭을 만지작거리자니 옷깃만 스친 그 인연조차 새삼 느껍다.

70년대 중반, 스물을 갓 넘긴 나에게 선생은 ‘문호(文豪)’로 다가왔다. 초기작 몇 편을 읽었을 뿐인데 내 마음은 송두리째 빼앗겼다. 그것을 ‘섬광에 눈 먼 자의 과장된 경념(敬念)’이라 나무라지 말라. 문학을 사랑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이제 이병주를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으로 나누자”라는 말까지 나온 것에 비하면 내 존경은 사사롭다. 인간과 역사, 전쟁과 이념, 정치와 애정이 종횡하는 작품 속에서 나는 막막한 미아였다. 선생의 문학적 편력이 겹쳐진 ‘허망과 진실’을 접한 나는 덧없는 인생과 배운 자의 허무에 몸서리쳤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 정약용과 사마천 등의 내면을 탐사한 이 에세이는 선생의 삶과 사상이 빚은 결곡한 마음의 지형을 엿보게 한다. 선생은 서문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은 ‘인생이란 결국 허망한 것’이라는 교훈을 가르쳐준다면서 이는 니체도 루신도 마르크스도 같다고 지적한다. ‘허망을 배운 사람은 이미 지옥을 보아버린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 허망을 뚫고 찾아낸 진실만이 지옥을 견디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란 인식이 굳어있는 것이다.’ 덧붙여 선생은 ‘허망하기에 진실이 아름답다는 것은 역설이 아니다.’고 말한다.

작가 이문열이 ‘허망과 진실’을 읽고서 ‘도스토예프스키의 평전을 써볼 생각을 포기했다’는 토로가 풍문처럼 들려올 즈음, 나는 선생이 언급한 라스콜리니코프의 히포콘드리아(우울증)가 내 평생의 숙환이 될 거란 예감에 젖었다. 선생의 저서는 전염성이 강했고 음영이 짙었다. 허망이 울증과 짝하며 나를 괴롭힐 때, 선생은 처방전을 쥐어줬다. 선생이 입버릇처럼 되뇐 ‘봉 상스 있는 딜레탕트’! 나는 그것을 ‘인생과 예술을 완미하는 양식인’으로 풀었다. 장강 같은 사유와 도저한 현학, 끝간 데 모를 박람강기로 내 덜미를 움켜잡은


선생의 행간에서 지금껏 꿈틀대는 구절은 ‘봉 상스 있는 딜레탕트’ 하나다. 반독재 투쟁과 민주화 운동이 안간힘을 쓰는 70년대의 겨울공화국에서 ‘완미’라니, 이 무슨 한가로운 사치인가. 날선 필봉을 휘두르던 한 언론인은 선생의 책을 끼고 살던 나를 그렇게 나무랐다. 그는 선생의 ‘회색’을 꼬집었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 어느 진영에 서서도 독자를 설득해내는 기막힌 변설 그리고 모든 추구를 도로에 그치게 하는 역사적 허무주의와 댄디한 망명의식은 현실의 고통과 모순을 희석하고 변혁에 동참하는 행위를 망설이게 한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나는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 이데올로기가 무슨 쓸모인가’라고 한 선생의 편에 서고 싶었고, 허망이 뼈에 저릴 때 그 좌절조차 완미하려는 한 인간의 내성(耐性)에 홀려있었다. 그렇게 내 청춘은 흘러갔다.

76년 지역의 문학 강연회에 초대한 인연으로 나는 용산 청과물 시장 한 귀퉁이 건물에 거처하던 선생을 자주 찾았다. 잔심부름을 시키는 선생이 고마웠다. 조도 낮은 집필실에서 3미터나 됨직한 책상에 수 천 장의 원고지를 쌓아두고 몽블랑 만년필을 혹사하던 선생이, 마냥 기다리는 나를 보고 “자네도 한번 피워보게’하며 건넨 것이 소련제 담배였다. 러시아어만 봐도 경기가 들던 시절 이를 도대체 어디서 구했을까. 선생의 도처가 경이였다. 일제의 학병으로 끌려가 쑤저우에서 군마(軍馬)와 지내다 걸린 동상 때문에 손가락을 자른 고통을 들으며 ‘8월의 사상’을 곱씹기도 했다. 레드 와인을 마신 후 멋들어진 붉은 콧수염을 쓰윽 문지르던 그 정경도 아슴하다.

선생은 ‘관부연락선’에서 운명적 정인(情人)으로 묘사된 서경애를 수소문해보라며 한때 교직에 종사했던 그녀의 본명을 귀띔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덮었다. 언론인 남재희는 ‘도덕과 부도덕의 경계를 허무는 선생의 행보’를 반추했지만, 나는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을 드러내는 청으로 받아들였다. 나의 편애와 독단은 선생을 진혼하지 못할지언정, 미망과 착종 속에서 방황하는 젊음들아, 그대들은 이병주를 읽어라. 내 추억은 이제 달빛에 물든 신화가 되고 있지만 그대들은 햇빛에 바랜 역사를 마주할 것이다. (4월24일 서점 배포)

(손철주·학고재 주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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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6-04-24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학때 이병주님의 소설 '허망과 진실'을 얼마나 허망하게 (?) 읽었던지. 두께도 꽤 되는 책을 말입니다.

이리스 2006-04-24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치 나인님 / 허... 허망하게.. ㅠ.ㅜ
 

서울의 봄, 분단의 그늘 … 사진으로 단편소설을 쓰다  
 
[중앙일보 정재숙] 사진으로 단편소설을 쓴다? 삶을 기록하는 데 사진만한 것이 없다면 단편사진집이 못 나올 까닭이 없다. 전시장 없이 사진전을 연다? 다량 복제와 인쇄가능한 사진이기에 사진집으로 관람객과 바로 만날 수 있다. 미술판의 막둥이로 뒤늦게 대중의 눈길을 받은 사진이 몸 가볍게 뛰는 현장이다.

원로 사진가 한정식(69)씨는 글과 사진을 엮은 '흔적'(눈빛 펴냄) 에 단편사진집이란 낯선 이름을 붙였다. 짧은 글을 곁들인 다섯 편의 사진 연작이 단편소설집 같다. 1970년 서울 광교 부근을 담은 '개발, 철거'부터 30여 년 남쪽 반공 정책의 현장을 담은 '분단의 그늘'까지 모두 한국 현대사에 중요한 대목을 기록하고 있다. 작가는 "사진 자체는 하나의 흔적이고 사진을 본다는 것은 흔적 들여다보기"라고 말한다. 그 흔적은 얼룩일 수도 있고, 급하게 몰아치던 역사의 발꿈치에서 튕긴 흙탕의 얼굴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점은 사진은 발효한다는 사실이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사진 스스로 발효한다는 사실을 이 책은 웅변한다.


'폭풍의 계절-1980년,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가 그 한 예다. 79년 11월부터 81년 2월까지 1년 여에 걸쳐 광화문 네거리에 서있던 아치형 선전탑을 같은 자리에서 찍은 연작이다. '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 국장'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각하 취임' '새 연대 새 역사 새 희망' 등 선전탑에 올랐던 문구와 언저리 풍경이 시대를 증언한다. 작가는 "온 나라가 통째로 정치만 바라보고 사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하다" 했다. 사진 몇 점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서울의 봄'을 구성 탄탄한 단편소설 저리 가랄 정도로 묘사한다.


사진작가 여동완(46)씨는 수백 점 사진을 제대로 걸 전시장을 발견하지 못하자 차라리 책을 선택했다. 타클라마칸의 사막, 중국 베이징의 풍광, 한국 서울의 뒷골목이 두툼한 세 권짜리 연작 사진집(가각본 펴냄)으로 나왔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눈 내린 서울에서 바람부는 사막으로 오갈 때 목젖이 떨리는 감흥이 인다.


최영진씨의 사진집 '야(夜)'(JINDIGITAL.COM 펴냄)는 벽에 걸기보다 내려놓고 찬찬히 볼 때 더 매력 있다. 수묵화나 목판 그림처럼 보이는 사진은 결을 쓸어보며 그림자를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종이 너머 다가오는 밤의 침묵이 보는 이를 몽환에 빠지게 한다.


정재숙 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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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하는 여선생 엿보는 이상한 문화대혁명
[조선일보 2006-04-22 02:58]    
오 나의 잉글리쉬 보이
왕강 장편소설|김양수 옮김|푸른숲|512쪽|1만2000원

[조선일보 김태훈기자]

중국 문화혁명기를 다룬 소설들은 문혁이 몰고온 광기를 고발하거나 그 아래 신음하는 영혼을 위로해왔다. 중국의 서북변방 톈산(天山)산맥 아래, 신쟝성의 성도 우루무치를 지나간 문혁도 잔인했을 것이다.

젊은 신예를 자처하는 소설가 왕강은 그 뻔한 비극 구도를 거부한다. 그는 “여전히 잔혹함이나 피비린내와 그 더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 만으로 독자의 환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지식인으로서의 자기성찰 부족”이라고 갈파한다.

소설은 우루무치의 소년 류아이의 눈 앞에 펼쳐지는 문혁 이야기. 마오쩌둥의 옆얼굴 초상화를 그린 아빠는 귀를 한 개 밖에 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산당 간부에게 따귀를 맞는다. 류아이의 엄마는, 아들이 ‘타도 마오쩌둥’이란 낙서를 썼다고 모함을 당하자 문혁과 개인숭배의 광기로부터 아들을 구하기 위해 교장과 배를 맞춘다. 어쩔 수 없이 부정을 저지른 엄마는 그러나 어이없는 격정에 빠져 제발로 교장을 찾아간다.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부조리는 인간의 이성과 문명을 비웃는다.

소년은 문혁을 고발하지 않는다. 그는 친구의 엉덩이를 걷어차거나, 여자 선생님이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본다. 우루무치 촌놈으로 남기 싫어 영어 공부에 매달리거나, 공개 총살형을 지켜보며 짜릿한 쾌감에 빠지고, 향수 냄새 풍기는 영어 선생님의 이상을 동경하며 살 뿐이다. 분노가 드러나지 않는 소설을 읽으며 문혁의 상흔을 보고, 소년이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김태훈기자 [ scoop87.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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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영혼 깨우는 초록의 속삭임…‘영혼의 정원’
[동아일보 2006-04-22 04:59]    
[동아일보]

◇영혼의 정원/마리온 퀴스텐마허 지음·장혜경 옮김/236쪽·1만 원·책씨

《당신의 감각을 활짝 열고

생명이 연출하는 기적을 느끼세요

하얀 자작나무에 새긴 요정의 서신…

라일락 향기가 전하는 사랑의 고백…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신비롭습니다》

더디 피는 들장미는 장미의 딸이다. 장미의 추신(追伸)이다. 유월의 여름을 달뜨게 했던 장미의 후렴이다. 그의 소명은 장미의 노래를 기품 있게 완성하는 것이다.

때늦은 것들이 다 그렇듯 들장미는 지나간 것보다 다가올 것을 가리킨다. 장미가 눈을 뜨고 꿈을 꾸었다면, 들장미는 눈을 감고서 꿈에서 깨어난다! 들장미는 붉은색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지 않는다. 광택에 눈길을 빼앗기지 않는다. 황혼기에 접어든 인간들과는 달리 ‘인식의 날카로운 가시울타리’(니체)에 집착하지 않는다. 들장미는 스스로 포기할 줄 아는 그 모든 것으로 인해 부자가 된다.

시드는 순간, 비단처럼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놓아버리고 달콤한 향기가 사라질 때 들장미는 작별을 고하는 작고 붉은 등불을 켠다. 수줍은 듯 앙증맞은 열매를 내미는 것이다.

그때 어디선가 호르르, 배고픈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이 등불을 물고 먼 황혼의 구름 속으로 떠나간다. ‘오래전 민들레 곁에서/지빠귀의 노란 눈동자를 보며 약속한 그대로….’(얀 스카셀)

이 책은 우리 바깥에,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정원을 매개로 주변의 소박한 사물과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생명의 신비, 그 영혼의 비밀을 캔다. 수많은 시인과 신비주의자들을 전령 삼아 총명한 사랑과 온유한 인내심이 빚어내는 ‘초록의 언어’를 들려준다.

도심 속의 녹색주의자를 자처하는 저자는 우리의 감각을 활짝 열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의 기적을 느끼라고 말한다. “네 영혼 속에서 장미의 정원을 발견하라. 장미는 고요하고, 그 깊은 침묵으로 네 가슴속 존재의 가시를 뽑는다….”

1936년 네덜란드에 튤립 투기 광풍이 불어 닥쳤을 때 사람들은 우리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잊고 있었다. ‘신의 부(富)’가 어디서 활짝 피어나는지 잊고 있었다. “가만히 튤립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노라면 그대는 신이 튤립의 무엇에 투자했는지를 알게 되리라.”

독일에는 물망초를 손에 들고 있으면 숨겨진 보물을 찾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그 보물을 잡으려고 물망초 꽃을 놓는 순간 마법은 풀리고 만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보물을 놓치고 만 것이다.

빛을 향해 돌아선 사과 꽃잎을 보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마음이 열린다는 저자. 그는 꽃송이를 드리운 라일락에서 봄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들어 보라고 다독인다. 천상의 거울처럼 반짝이는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에서 달 밝은 밤 요정이 새겨 놓은 비밀처럼 곱고 우아한 편지를 읽어 보라고 속삭인다. 부드러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창조의 혼란에 위트와 기지로 봉사하는 그 장난기에 함빡 빠져 보라고 한다.

가녀린 데이지 꽃을 매만지며 신의 은총이 느껴지지 않느냐고 묻는다. “데이지는 아이들의 꽃이다. 작은 몸짓의 스승이다. 그 완벽한 초라함으로 작은 힘을 상징하는 순수한 신호다. 이 작은 생명이 우리에게 이토록 큰 위로를 베풀다니.”

그리고 구름의 산책길을 따라가며 명상에 잠긴다. “구름은 정해진 형태를 버려야 비로소 제 형태를 얻는다. 숭고한 정적이 넘쳐나는 거대한 배가 되어 영원할 듯 하늘에 닻을 내리고 있어도 구름은 한 장의 꽃잎보다 유한하고 순간 그 자체보다 무상하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타나는 것은 그 자신이며, 그 자신이 아니다….”(괴테)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초록’은 ‘행복’을 의미했다. 행복은 싱싱한 식물처럼 푸른 것이니 우리의 정원에서 그 어떤 녹색생명도 가난하지 않다. 나비는 이 생명의 환희와 기쁨을 춤춘다. 나비가 날개를 파닥이는 곳에선 한 조각 낙원이 탄생한다. 일체의 확고한 지점을 거부하지만 끝없이 넓은 공간, 허공을 제 집으로 삼는 그 태평스럽고 경쾌한 우아함이라니. 나비는 가장 깊은 본성에서부터 격동의 허공이다. 현란한 색채의 허공이다! 원제 ‘Vom Zauber der Blumen und einfachen Dinge’(2004년).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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