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다지 총명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공부를 하려고 하는 까닭이 뭘까. 생각해보면 결론은 역시 공허감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나야말로 전형적인 히스테리 자아가 아닐까. 히스테리적 자아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엄청난 공허감이다. 거대한 무(無)로 이루어진 유(有)인 그들은 몸과 마음을 다 바칠 ‘어떤 것’을 찾아내어 그것으로 무(無)라고 하는 자기를 덮어 씌워버림으로써 오로지 그 윤곽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 때문에 그 ‘어떤 것’은 무엇보다도 강력해야 한다. 공허를 제대로 덮어 씌워버리기 위해서. 쉽게 구멍이 뚫리거나 벗겨지면 안 되므로 또한 견고하고 튼튼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이 남편이나 가정이나 직업 따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결국 관계의 산물인데, 관계라는 건 허물어지기가 너무도 쉬우니까. 강력하고 안전하고 견고한 어떤 것. 내가 찾는 그것이 현재로서 학문인 것 같다. 이런 생각이 계속 이어진다면 나는 아마도 모든 학문 중에서도 가장 형이상학적인 학문에 목매달게 되지 않을까. 철학이나 신학 같은.

 

2 삶이라는 총체적인 비의에서 오는 고독과 단순히 인간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고독은 다른 종류의 것일진대 나는 자꾸만 그 둘을 혼동한다. 견고한 자폐의 성 안에 틀어박혀 그간 수집한 몇 되지도 않는 책들을 세계의 전부인 양 끌어안고 마이 프레시어스를 연발하며 사는 것이 내 모습은 아닐까. 그러면서 내가 만들어낸 이 국지적인 공간의 어둠과 음습함을 존재자의 서글픈 필연이라고 거창하게 착각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내부로 파고드는 습벽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럼으로써 실재로서의 주변을 외면하는 것, 아니 심지어 냉소하고 경멸하는 것, 나와 주변을 대립적 관계로 인식하는 그 편협한 생각의 틀이 잘못된 게 아닐까. 배움이 결코 자폐의 성을 축조하는 작업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인데, 오히려 배움이란 궁극적으로 세상을 향한 가교를 놓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인데, 나는 왜 자꾸만 골룸이 되어가는지. 앎이 계속될수록 책에 대한 집착과 탐욕은 늘어나고 심지어는 책에 대한 물신화 증세까지 생겨난다. 더욱 더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다.

 

3 지금 이 순간이 고독하다면 그건 내가 전적으로 사랑이 고갈된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않으면서 또한 아무로부터도 상처받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단단한 껍질을 두른 채 나는 지금 그 안에 단단히 갇혀있다. 가능하면 부딪힘의 횟수를 줄이고 내부로 은신하려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배팅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지금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성만이 안전하고 나는 오로지 그것만을 견딜 수 있다. 독서는 사실 배팅하지 않은 데 대한 알리바이인 것이다. 알리바이가 술이나 춤이 아니라 책이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일 뿐이다. 부유하는 선택지들 사이를 아무렇게나 휘저어 낚아챈 것이 때마침 책이었을 뿐이다.

 

4 내가 풀 수 없는 문제에 관해서는 집착을 버려야 할 것이다. 흐릿한 추정과 상상 속에서 스스로를 옭아매지 말자. 무엇보다도 과거의 사건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행동은 현재로의 투신을 지연시킬 뿐이다. 아니, 과거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영원히 메울 수 없는 검고 슬픈 틈 앞에서 더 이상 하릴없이 서성이지 말자. 정념에서 벗어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몫의 생을 꾸려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절망 속에서 진군할 것. 일체의 희망 없음 속에서 미소 지을 것. 현재로서는 확실히, 탐닉하고 몰두할 만한 순수하고 지고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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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널 경멸해왔다. 요즘도 이따금 네 블로그에 들어가서 글을 읽을 때마다 도무지 참을 수 없이 역겨운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에 대한 관심을 확 끊어버릴 수 없는 까닭은 네 글에 면면히 흐르는 섬세한 지성 때문이리라. 그래, 너는 재기가 있고 명석하다. 그래서 너는 아름답지. 아, 차라리 네가 시시하기라도 해버렸다면! 그렇다면 나는 당초에 너에 대한 관심조차 없었을 텐데. 이 점이 나를 얼마나 곤혹스럽게 하는지 너는 영원히 모르겠지.

 

왜 나는 너를 혐오하는가. 너는 얄팍하다. 피상성 자체가 나쁜 게 아니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 얄팍하지. 하지만 얄팍한 가운데서도 주어진 조건 안에서 눈물겨울 만큼 정직하고 겸허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있어. 그러나 너는 얄팍하면서 오만하다. 얄팍한 주제에 권위적이고, 얄팍한 주제에 어른 행세를 하려 든다. 네 역량을 갉아먹는 너의 가장 큰 폐단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그 특유의 교만함이다. 네 교만이 너로 하여금 너무도 쉽게 정의와 진리를 확정짓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너는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쉽게 그럴싸한 참된 것을 발견해 내어서는 그 뭣도 아닌 앎을 전시하고 계몽하려 한다. 아, 거기서 오는 역겨움을 대체 어쩔 것인가. 구제불능의 그 끔찍한 지적 속물주의를 어쩔 것인가.

 

네가 추구하는 정의라는 것은 내가 볼 땐 순 나이브하기 짝이 없다. 왜냐면 근본적으로 너는 깊이 고민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너는 너 자신과 맹렬하게 싸우지 않는다. 자신을 괴롭히지 않아. 자신에 대해 모질게 회의하려고 하지 않아. 모르지. 속으로는 열심히 회의하는지도. 그러나 너는 설령 너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회의하더라도 그것을 좀처럼 글로 적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해 회의한 것을 글로 쓰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거의 다 헛소리고 개소리다. 그런 것은 그저 다 매캐한 연막 같은 것에 불과하단 말이다. 하지만 너는 특유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영원히 그 연막을 걷어내지 못하겠지.

 

사회적 능력, 인간관계, 지적 경험, 네가 갖춘 교양과 지식 등 갖가지 방면에서 너는 무의식적으로 끝없이 너 자신을 스타일링하려고 한다. 좀 더 파고들어도 모자랄 시간을, 자기를 예쁘게 연출하고 포장하는데다가 다 써버린다. 너의 글을 보면 마치 집 앞 슈퍼에 나갔다 올 때도 화장을 하는 여자들이 떠오른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취향의 강요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만, 대체 그 화장이 무슨 소용이냐. 그 화장 좀 안 하면 안 되는 것이냐. 그러나 절망적이게도 내가 볼 때 네가 하는 화장은 의식적이라기보다는 그저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 그러더라. 자세를 필요로 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라고. 하여튼 너는 어린 시절부터 그래왔으니 이건 뭐 희한한 태생적 기질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질 않는다.

 

너는 대체 너의 민낯을 한번이라도 정직하게 들여다본 적이 있느냐. 들여다보고 울어본 적은 있느냐. 운 것을 글로 써본 적은 있느냐. 써놓은 것을 보고 역겨워서 더 크게 울어본 적은 있느냐. 너는 없다. 앞으로도 없을 거다. 영원히 없을 거다. 그게 바로 너의 한계다. 네가 영영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너의 끔찍한 한계다. 너는 너 자신을 심지어 스스로에게조차 적나라하게 드러내려 하지 않아. 왜일까. 그건 네가 늘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기 때문이지. 근본적으로 너는 너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별로 없는 거야. 오로지 자존심만 있지. 그래서 너의 에고이즘은 견고하지 못하다. 애처로울 만큼 위태롭다.

 

자기 자신에게 투철하지도 않으면서 타인으로부터는 끝없이 인정과 선망을 얻고자 애쓰는 너의 끊임없는 자기 연출, 나이브함, 허술한 에고이즘, 어설픈 소녀 취향의 정치적 올바름, 속물성과 허영기... 아, 나는 정말이지 네 등짝이야말로 발로 차주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도무지 네 밉상스런 글을 쉽사리 끊질 못하는 것일까. 네 글에서 나의 일면을 발견하기 때문일까. 너를 혐오하기에는 우리가 꽤나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그저 술 먹고 네 생각이 나서 떠들어댔다고 해두자. 역시 나는 너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불쾌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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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철학으로 읽기>라는 책에서 '돌아온 탕아'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을 처음 보게 되었는데, 눈에 밟혀 이후로 자꾸만 생각이 난다. 렘브란트는 왜 이런 걸 그렸을까. 그는 이 장면을 거리에서 실제로 본 것일까. 용서를 비는 저 탕아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저들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런 이야기도 안 잊혀진다. "한 선비가 기녀를 사랑하였다.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지새우며 기다린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 아홉 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김영승의 <슬픈 국>이라는 시도. "모든 국은 어쩐지 / 괜히 슬프다 // 왜 슬프냐 하면 / 모른다 무조건 // 슬프다 // 냉이국이건 쑥국이건 / 너무 슬퍼서 // 고깃국은 발음도 못 하겠다. // 고깃국은... / 봄이다. 고깃국이." 지하철 안전벽에서 우연히 본 이 시도 간혹 생각이 난다. 

 

이런 것들이, 잊혀지지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몸 속 깊은 곳에 무슨 결석처럼 쌓여가는 것 같다. 발음도 못 하겠는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왜 그러냐 하면 모른다 나도. 나도 그냥 괜히 그렇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그런 게, '국' 같은 게, 독서의 동력이 된다. 뭐라도 더 읽고 싶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것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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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ZEMICHI (a path between rice fields), 1991, 73 x 52

 

칭따오, 하면 뭐니뭐니해도 이 그림이 떠오른다. 내가 생각하는 칭따오 맥주와 가장 부합하는 이미지라고 할까. 아이다 마코토(Aida Makoto)는 기괴하고 엽기적인 작품을 많이 그린 모양이지만 이 그림 만큼은 예외적으로 몹시 서정적이어서 계속 들여다보고 있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다.

 

양희은의 <들길 따라서>라는 노래도 생각난다. 들길 따라서 / 나 홀로 걷고 싶어 / 작은 가슴에 고운 꿈 새기며 / 나는 한 마리 파랑새 되어 / 저 푸른 하늘로 날아가고파 / 사랑한 것은 너의 그림자 / 지금은 사라진 사랑의 그림자.

 

허풍이 아니라, 정말이지 믿을 수 없게도 칭따오를 마시다 보면 문득 눈앞에 푸르른 들판과 함께 소녀의 고운 가르마가 지평선까지 펼쳐지는 것이다. 가르마 끝에 당도하면 '지금은 사라진 사랑의 그림자'라도 어렴풋이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은 칭따오로 막장까지 달려본 적은 없으니 단정은 못 짓겠다. 칭따오+양꼬치 혹은 칭따오+골뱅이무침 혹은 칭따오+교촌치킨이 생각나는 저녁이다. 먹어? 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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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2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22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4-05-22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먹어봐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콸콸콸 따라서 벌컥벌컥 마시면 안될 것 같은 이 느낌은..

맥주 리뷰도 신선한데 저 그림(아닌 줄 알앗어요)을 같이 걸다니..

수양 2014-05-22 22:10   좋아요 0 | URL
맥주 리뷰를 연재해볼까 싶습니다ㅋㅋㅋ

왜 알라딘에는 술을 안 파는 걸까요... 술과 책의 케미를 모르는 무식한 작자들 같으니라고...;;

컨디션님 칭따오 한번 잡솨보셔요 컨디션 님한테 한잔 따라 드리고 싶네요 ㅋㅋ 원격으로라도... 한잔 받으셔요..ㅋㅋ
 

김현 선생 말씀을 오마주하면 블로그질이라는 것은 배고픈 거지 하나 구원 못한다. 굳이 효용을 논하자면 알라딘 매출액에 간접적으로 기여하는 바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미미한 부분을 제외하면 블로그질이란 도무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블로그질을 왜 하나. 바로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서 비로소 (그 본연의 의미에 가장 충실한) '놀이'라고 하는 가치가 생기기 때문이다. 결과물이 타인에 의해 어떻게 전용되든 상관없이 적어도 나 자신에게 블로그질이란 그 자체로 순수한, 그 자체가 목적인 즐거운 놀이이다.

 

그러나 언젠가 미래의 배우자에게도 이 공간을 무람없이 개방해서 내 노는 모습을 구경하게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단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침범할 수 없는 최소한도의 독자적인 영역을 보장받고 싶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가족 간에도 좌변기에 앉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 공개하고 싶지 않은 것일 뿐. 좌변기라는 표현이 너무 자학적인가. 그럼에도 나로서는 여전히 자꾸만 독서가 오입질로, 글쓰기가 배설행위로 느껴지는 걸 어쩔 도리가 없다. 둘 다 행하기는 행하되 그러면서도 늘 자랑스럽지 못하고 떳떳하지 못하고 매번 부끄럽다. 읽고 쓰면서 그렇게 항상 죄의식을 느낀다. 죄의식을 느끼기 때문에 쾌락이 배가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읽고 쓰는 일이라는 게, 현실적인 삶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하등 도움이 안 되고 나로서는 심지어 생활에 방해가 되는 측면까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즉각적인 쾌락을 주기에 절제해야겠다고 생각할수록 더 큰 유혹에 넘어가 자꾸만 탐닉하게 되는 것 같다. 지금도 이걸 쓰고 앉아 있느라고 퇴근을 늦게 할 판이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블로그질이 생활을 위기로 몰아넣지 않도록 윤리준칙을 세워야겠다- 도저히 잠자코 있을 수 없을 경우에만 간략하게 말할 것. 짧고 강하게 쾌락을 즐기려는 게 그 목적이다. 그렇다면 퇴근 시간을 미뤄가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지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태인가. 뭐 꼭 그런 거 같지는 않은데? 역시 예상했던 대로 글러먹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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