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곳에서 만큼은 이기적으로 살고 싶다. 오로지 나를 위한 글쓰기. 나를 위무하고 나를 보살피고 나를 기쁘게 하는, 오로지 나만의 순수하고 완벽한 쾌락을 위한 글쓰기. 여기서 나는 감히 그렇게 행동해도 될 만한 충분한 자격을 지닌다. 왜냐하면 나는 이곳에서 돈을 벌지 않기 때문이다.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철저히 이타적이 된다. 지금 당장 등뼈를 구부려 바닥까지 몸을 낮추고 네 발등이라도 핥을 수 있을 만큼. 그것은 처절하다 못해 자못 숭고한 일이지. 그러나 어쨌든 이곳은 돈벌이의 현장이 아니므로 그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보여지되 보여짐에 구애받지 않는 내부지향적 글쓰기. 배설에의 쾌락만을 노리는 글쓰기. 오로지 쓰기의 즐거움만을 향유하고자 하는 자족적 글쓰기. 홀로 추는 괴이한 춤 같은 글쓰기. 말기 중이병자 같은 글쓰기. 좀 더 적극적으로 이렇게 써보면 어떻게 될까. 점입가경이려나. 그러나 오픈된 공간에서의 글쓰기란 그 형식이 아무리 폐쇄성을 띠더라도 존재론적으로 이미 교신과 소통에의 의도를 품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모순이 낳는 독특한 비틀림의 미학이 있지 않을까. 그걸 적극 추구해 보자.

 

2 초등학교 다닐 때는 매해 봄마다 학급이 재편성되는 게 가장 고역이었다. 늘 이방인처럼 어색한 표정으로 쭈뼛대며 지내다가 2학기가 끝나갈 즈음에야 겨우 교실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아이들과도 조금은 친해졌다 싶어 안도감을 느끼면 그새 또 새 학년이 되어 반 친구들이 일순 연기처럼 흩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이듬해 새로운 학급에서 새로운 일 년을 보내면서도 흩어져버린 지난해의 급우들을 곱씹으며 역시나 또 이방인 같은 어색한 포즈로 학년이 끝날 때까지 쭈뼛대며 지내던 얘가 나였다. 어쩌면 나는 급우들의 기억 속에 언제 봐도 방금 막 전학 온 것 같던 애로 남아있을 지 모르겠다. 만성 부적응이라고 해야 할까, 요즘은 유년 시절의 이러한 태도가 세계에 대한 나의 어떤 근본적인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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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5 17: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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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7 1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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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표범은 번식기에만 암수가 짝을 지어 다니고 이후로는 헤어져 단독 생활을 하는데, 홀로 초원을 배회하던 수컷이 어린 표범을 발견하면 냄새를 맡아 자기 새끼가 아닐 경우 가차 없이 물어 죽인다고 한다. 다큐 초반부에서는 암컷의 생활 공간 근처에 두 마리의 수컷이 서로 영역 다툼을 벌이며 포진해 있자 암컷이 양쪽 수컷을 번갈아 오가며 둘 모두와 교미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새끼를 낳더라도 두 마리 수컷 모두 새로 태어난 새끼가 자기 핏줄인 줄 알고 더 이상 물어 죽이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마치 암컷 표범이 오로지 미래의 자식을 건사하고자 어미 된 자로서의 대의에 입각해 일말의 양심이나 수치심도 미련 없이 폐기해버린 듯이 느껴져서 이 대목이 잠시 감격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실상 암컷에게 있어서 신의니 도덕이니 양심이니 수치심이니 하는 따위는 눈물을 삼키며 포기해야 할 필요도 없는,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 덕목일 것이다. 그런 것들의 부재가, 생존과 번식만이 곧 삶의 유일한 의미이며 오로지 본능만이 숭고한 세계에서는 하등의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생한 아프리카 대자연의 영상이 보여주고 있었다. 다큐가 마치 인간 사회의 심연을 대변하는 우화 같아서 보는 내내 망연한 전율을 느꼈다.

 

표범의 새끼들은 두 살이 넘으면 어미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 그때까지 어미는 밤이고 낮이고 열심히 사냥을 하며 최선을 다해 새끼들을 보살핀다. 사냥은 쉽지 않다. 먹이를 탐색하다가도 사자가 나타나면 즉각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 피신해야 한다. 사자도 나무를 탈 수는 있지만 몸무게 때문에 표범이 올라간 가늘고 높은 가지까지는 따라 오를 수 없다. 나뭇가지가 견딜 수 있는 하중을 각자 치밀하게 가늠하면서 사자와 표범은 불과 일 미터 남짓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먹느냐 먹히느냐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표범을 위협하는 이는 비단 사자만이 아니다. 때로는 개코원숭이 무리를 만나 줄행랑치기도 하고 다잡은 먹이를 하이에나 무리에게 속절없이 내주어야 할 때도 있다.

 

우여곡절 끝에 먹이를 잡으면 어미는 근처 수풀에 숨어있던 자식들에게 어서 오라고 소리를 낸다. 어느 날은 사냥을 떠났다가 한참 만에 토끼를 물어온 어미 표범이 평소 때처럼 새끼들을 부르지만 두 마리 중 한 마리만 나타난다. 다른 한 마리는 아무리 불러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미는 위험을 감수하고 넓은 초원으로 나아가 계속해서 잃어버린 자식을 불러보지만 소식이 없다. 그때 새끼들을 숨겨둔 은신처 옆에서 배가 단단히 부른 채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비단뱀이 보인다. 비단뱀과 사투를 벌이는 어미. 비단뱀이 결국 새끼를 토해내고 도망가자 어미는 더 이상 비단뱀을 응징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 그리고는 죽은 새끼를 물고 그늘진 곳으로 가서 새끼의 살점을 뜯어 먹는다. 다큐에서는 이것이 일종의 의식이라고 했다.

 

한동안 축 늘어진 채로 있던 어미가 살아남은 나머지 다른 한 자식이라도 굶어죽이지 않으려는 듯 수척한 몸을 이끌고 다시 사냥에 나선다. 그러나 가까스로 잡은 임팔라는 너무 무거워 안전한 나무 위로 들어 옮길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남은 한 마리 새끼를 불러내어 나무 밑에서 임팔라를 뜯어먹도록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피 냄새를 맡고 하이에나가 몰려온다. 새끼 딸린 표범은 하이에나 무리를 이길 수 없으므로 도망칠 밖에. 힘들게 사냥한 먹이가 다른 놈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다가 어미 표범은 다시 사냥을 떠난다.

 

다큐 속 표범의 생애는 인간의 삶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기구하고 고단해 보인다. 흔히들 사회를 정글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아프리카 정글의 어느 한 암표범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더 이상 정글은 사회의 냉혹함을 표현하기 위해 은유로서 도용되는 그 무엇이 아니었다. 둘은 비유의 간격을 허락할 것도 없이 본질적인 면에서 전혀 다르지 않았고 표범의 삶은 내가 요근래 본 가장 뜨겁고 가슴 먹먹한 리얼리티였다. 자식을 잃었으나 살기 위해 다시 사냥을 떠나는 어미 표범의 야윈 뒷모습을 기리기 위해 나는 지금 이 긴 글을 적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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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님, 사실은 제가 정말이지 칭따오보다 열 배는 사족을 못 쓰는 맥주가 있습니다. 이름 하여 쾨니히 루드비히 바이스비어 헬(Konig Ludwig Weissbier HELL). A님께서 이미 맛보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우, 이건 뭐, 그냥 숭늉입니다. 걸쭉한 것이 이건 뭐 딱, 모내기 하다 마셔야 할 술입니다. 도시인이라면- 가히 모내기와 맞먹는 야근을 마친 후 타는 목마름으로 원샷해야 할 술입니다. 칭따오가 소녀 뒤꼭지 같다면 이건 뭐랄까요. 음, 이건 말하자면 나훈아입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맥주는 정녕코 나훈아인 것입니다. (끔찍하면서 또한 아찔하게도) 나훈아 선생님을 마시는 기분인 것입니다. 제가 이런 해괴망측한 글을 적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바로 기린 이치방을 먹고 약간 맛이 갔기 때문입니다. 기린 이치방을 먹으면서 쾨니히 루드비히 바이스비어 헬에 대한 감상을 적다니 실로 악질적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배신이야말로 저의 주특기랍니다. 그럼 기린 이치방 리뷰는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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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4 2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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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5 21: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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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5 17: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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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5 2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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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4-08-15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수양님, 이렇게 귀여울수가요. 쾨니히는 마셔보지 못했습니다. 기억해뒀다 기회를 봐야겠어요. 기린 이찌방도 좋아합니다.

수양 2014-08-16 11:51   좋아요 0 | URL
네 정말정말 강추여요~^^/
 

소시오패스에게는 가령 루쉰, 슈테판 츠바이크, 괴테, 아우구스티누스 등이 보여주는 중후하고 심오한 정신성 같은 게 전혀 없다. 아주 얇다. 얇고 날카롭다. 날선 백지(白紙) 같다. 그는 괴로워하지도 고뇌하지도 회의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애당초 감정을 느끼질 못하니까. 자신의 이득에 따라 움직이므로 신념도 없다. 아니, 그렇다면 이득에 따라 움직인다는 게 바로 신념이겠군? 앞서 리뷰에서 소시오패스 유형으로 레니 리펜슈탈, 니체, 돈 후안, 박정희, 괴벨스 등을 들었는데 이중에 과연 니체를 소시오패스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재고해볼 필요가 있겠다.

 

사실 니체는 좀 예외적인 것 같다. 니체야말로 소시오패스 철학(그런 게 있다면)을 정초한 사람으로 보여지기는 하지만 정작 그의 본성은 오히려 전혀 소시오패스 같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는 고통에 너무나 예민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작은 날씨 변화에서조차 우울을 느끼고 해방감을 느끼고 그랬던, 무슨 지진계 바늘 같던 사람이었으니까. 차라리 그는 소시오패스의 대극에 서있던 자였으나 극도의 자기단련 끝에 소시오패스로 거듭난, 노력형 소시오패스라고 해야 할까. 니체의 진정 대단한 점은 자기극복에 있는 것 같다. 하여간 특이한 종족인 듯. 벤치마킹해볼 만한 탁월한 기질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듯.

 

가까운 주변 인물 중에서 소시오패스 유형에 근접하는 자를 찾자면 남자친구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넘치는 자신감, 낙천성, 강한 승부욕과 성취욕, 스릴과 모험 추구, 위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적음, 감정이 거의 없음(없는 듯이 보임), 그래서 늘 차분함, 공감 능력 결핍, 감각추구 경향.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나는 결혼상대자로서 소시오패스 유형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닐까. 현실 사회에서 생존 능력이 취약한 나의 무능을 보완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인간형을 내 삶에 초빙하고 싶었는지도. 생존과 안전에의 절박한 욕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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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는 아파트 옥상에서 누가 투신자살을 했다. 경찰차가 도착하고 시신이 수습되는 동안 산 자들의 호들갑으로 주변이 잠시 떠들썩하였으나 이내 모든 상황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게 되었다. 어딘가를 향해 그토록 맹렬한 속도로 돌진해본 것은 그로서는 아마도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리라. 그가 온몸을 내던져 지구상에 최후의 방점을 찍은 곳은 놀이터 구석이었다. 한때 시신이 누워있던 그곳에서 이제는 꼬마들이 깔깔대며 논다.

 

흔히 신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허락한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거야말로 선뜩한 얘기가 아닌가. 신의 매서운 눈길에 의해 우리 각자 심신의 내구력이 정밀하게 측량되어 최고치의 형벌이 저마다에게 고유한 값으로 주어진다니, 이 얼마나 잔혹한 놀이의 법칙인가. 자살은 이 가혹한 놀이판을 스스로 걷어차 버리는 일이다. 초유의 결단이다. 대-우주적 반칙이다. 궁극의 저항이다. 신을 향해 인간이 지어보일 수 있는 가장 매서운 비웃음이다.

 

상황이 불리할 경우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시작된 이 잔혹한 놀이를 자진하여 종결시켜 버릴 수도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아울러 우리가 처한 이 세계라는 것이 본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얼마든지 퇴장할 수 있는 열린 계(界)라는 사실을, 그날 아침 그가 내 앞에서 명쾌하게 실증해 보였다.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뎌라. 여의치 않으면 죽어라. 죽음은 금기가 아니다, 라고 하얀 천에 덮인 그의 죽음이 선언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어떤 의미에서 영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는 위엄 있게 이 놀이를 거부한 것이니까. 죽음으로써 신 앞에 당당히 의사 표현을 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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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4 19: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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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4 2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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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9 18: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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