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3월이 다 무색해지는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아름다워서 넋을 놓고 버스 창밖을 구경했다. 무수한 눈송이가 연속적으로 하강하는 광경에는 확실히 어떤 중독성이 있어서 쉽사리 시선을 거둘 수가 없는 것 같다. 섣불리 이야기될 수 없는 내밀한 감정들에 함부로 언어의 옷을 입히지 말아야겠다. 슬픔도 기쁨도 사랑도 쓸쓸함도 노여움도 그리움도 애써 규정하려 하지 말고 관조하는 연습을 하자. 그것들이 한껏 날을 세우고 내 가슴을 할퀴다가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어디론가 흘러가버릴 때까지 관조해야 한다. 그리고는 그들이 떠나간 연후에 남아있는 침전물만 조심스레 그러모아 서랍 속에 넣어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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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감방 같은 곳에 갇혀 있다 퇴근하면 언제나 지하철보다 버스를 타고 싶다. 밖을 구경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버스를 타면 내려서 꼬박 한 시간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날마다 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정말, 간절하게 창밖을 구경하고 싶은 날에만 버스를 탄다. 그런 날은 버스를 타는 내내 고개가 창밖으로 휙 돌아가서 내림 버튼을 누를 때까지 돌아오질 않는다. 창밖을 보며 내가 주로 하는 일은 거리에 나붙은 간판 글씨를 읽고, 건널목을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관찰하고, 어스름한 저녁 하늘의 미묘한 색조를 감상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활동이다. 

406번. 간절한 그날이면 내가 타는 버스이다. 이 버스는 시청이 가까워져 오기 시작하면 고가도로로 진입해서 명동에 이를 때까지 하늘을 난다. 탑승객으로서는 이 지점이 가장 흥분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뿐하게 지상을 초월한 버스 안에서 조심스레 창밖을 굽어보면 도시는 이미 도시의 형상을 벗어나 있다. 그것은 차라리 신이 그린 만다라라고 해야 할까. 쉴 새 없이 깜빡이는 색색의 네온사인에서, 꼬리를 문 차량의 전조등에서, 거리 구석마다 촘촘히 박힌 가로등에서- 일제히 솟구치는 불빛, 불빛, 불빛!

넋놓고 불빛들을 구경하고 있다보면 그런 생각도 든다. 이 도시에서 밥 벌어먹고 사는 수많은 시지푸스들의 노동이 밤마다 찬란한 불빛으로 점화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그렇지 않다면 도시의 밤이 이다지도 눈물겹게 아름다울 이유가 없잖아. 그렇다면 아무래도 아까 했던 말을 조금 수정해야겠다. 이 밤을 화려하게 수놓은 도시의 무늬들은 신이 그린 만다라라기보다는 시지푸스의 바위가 굴러간 자국 같은 것이라고. 퇴근 후 피곤에 절어 406번 버스를 타고 고가 도로를 날 때면 문득 뭉클해진다. 오늘 나의 사소한 피곤 또한 갖가지 색깔의 피곤들과 한데 어우러져 저 멀리서 작게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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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사주 보는 일에 빠져 있었다. 조물주의 섭리에 의해 저마다의 인생에 매뉴얼 같은 게 마련되어있다는 사실이 두렵고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의 의지라는 것이 거대한 주형틀 안에서의 부질없는 발버둥일 뿐인가 싶어 허탈하고 슬펐다. 젊은 시절 관상학에 심취했다가 자신의 관상이 형편없음을 알고 공부를 작파해버렸다는 백범 선생의 일화도 떠오르고, 목숨을 위해 친자를 버렸으나 결국 신탁을 거스르지 못한 테베의 왕도 생각났다. 거부할 수 없는 절대자의 숨결이 자신의 삶 전체를 서늘하게 관통하고 있음을 느꼈을 때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언젠가 <소립자 샤워>라는 제목의 실험 그래프를 본 적이 있다. 방사능에 노출된 원자로부터 뿜어져 나온 소립자들의 자취를 기록한 그래프였다. 거기서 소립자들은 순간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저마다 즉흥적인 행로로 뻗어가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혼란스럽기 짝이 없지만 조금 떨어져 실눈을 뜨고 바라보면 그 흐릿한 형상이 흡사 꽃이 피어나는 장면 같았다. 아름다워서,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봤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처럼 나도 그 모습이 참으로 보기에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신이 유미주의자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두려움과 무력감의 정점에서 난데없이 소립자 곡선이 떠오른 것은 아마도 내가 그 그래프를 하나의 은유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인간사라는 것도 소립자 곡선 같은 게 아닐까. 방향이나 경향성을 부여하는 것은 신이지만, 구체적 궤적이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하는 것은 인간 의지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자는 통계를 내어 도식화할 수 있지만, 후자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의지라는 것은 소립자의 운동처럼 오묘해서 명이 다할 때까지 변화무쌍하게 요동치기 때문이다. 신이 섭리와 질서를 창조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우연성과 불확정성을 창조한다. 그리하여 신이 코스모스를 주관할 때 인간은 제 삶의 카오스를 주관하는 것이다. 이것이 며칠간 사주를 탐구한 끝에 내가 얻은 잠정적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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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중요한 일들은 결코 발설되지 않는다. 그해 겨울, 염습한 할머니 시신 앞에서 아빠가 안경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어린애처럼 흐느껴 울었던 것처럼. 그리고 이후 우리 가족이 그 일에 대해 어떠한 후일담도 나누지 않는 것처럼. 그런 것들은 모두 저마다의 틈 속에 은폐될 뿐이다. 그때 흘렸던 아빠의 눈물도 여전히 아빠의 틈 속에 조용히 고여 있을 것이다.

아빠가 시시껄렁한 시비를 걸어와 나를 괴롭힐 때 화를 참는 신속한 방법은 아빠의 틈을 생각하는 것이다. 아빠의 틈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스산해지면서 말대꾸할 기운이 스르르 사라지고 만다. 나는 사람들에게 저마다 가늘고 깊은 틈이 있어서, 종종 그 안에 짠하고 허허로운 것들이 석류알처럼 박혀있는 상상을 한다. 그것은 모두 우주가 끝날 때까지 비밀로 남을 것들이다. 이야기 되어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가볍기 때문이다. 정말로 중요한 일들은 결코 발설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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