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기도

-체로키 인디언의 기도문

 

한 사람의 여행자가

이제 또 우리 곁으로 왔다네.

우리와 함께 지내는 날들 동안

웃음이 가득하기를.

하늘가의 따스한 바람이

그대 집 위로 부드럽게 불어오기를.

위대한 정령이 그대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기를.

그대의 모카신이 눈밭 위 여기저기에

행복한 발자국을 남기기를.

그리고 무지개가 항상

그대의 어깨를 어루만져주기를.

 

얼마 전부터 태동이 느껴진다. 태동은, 아, 내 안에 무언가 꿈틀댈 때의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너와 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이토록 자명한 감각이 주는 확신. 글을 쓰는 지금도 내 몸 안에서는 두 개의 심장이 뛰고 있다. 아기와 내가 하나의 육신에 영혼을 의탁해 사계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직 얼굴 한 번 마주하지 못한 아기에게 진한 사랑의 연대를 느낀다.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은밀하고 안전할, 내 어둡고 따뜻한 자궁이 누군가의 온 우주란 사실, 내 안에 작고 여린 미래가, 만개할 하나의 가능성이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날마다 벅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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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어떻게 봐야 할까. 황현산 선생의 글처럼 이 글도 일종의 담묵법(?)으로 쓰인 거 같고 어느 한 문단만 가지고 매섭게 물어뜯는 건 이 글의 격조에 어울리는 대응은 아닌 듯하다. 이 글을 읽고 화가 난다면 이 글에 견줄 만한 기법으로 그러니까 담묵법의 깊은 맛이 우러나는 글로 맞대응을 해야 (적어도 이문열한테는) 호소력을 갖지 않을까.

몰매 맞아야 할 글까진 아닌 거 같은데. 더 이상 능멸을 자초하지 말고 이제 그만 보수의 존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품위있게 내려오라는 얘기를 문학적으로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거 같은데. 현실인식은 떨어져 보인다. 촛불을 보고 아리랑 축전을 연상하는 것은 아버지 컴플렉스로 깊어진 반공 정서 때문인지 파시즘에 과민한 개인주의적 기질인지 몰라도 지나친 알러지 반응 아닌가. 솥뚜껑을 자라로 착각해도 유분수지.

내 보수주의자 친구는 지금 이 사태를 보수의 문제로 보는 시대착오적 프레임 자체가 이 사람이 이제 맛이 간 증거라고. 고루한 자기 프레임에 갇혀 근본적으로 사태파악을 못하고 있는 거라고. 한편 메스컴에서 누군가는 자기가 가진 이문열 책을 다 불지르고 싶다고도 하더라만 그래도 솔직히 불태워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책들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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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피날레라는 제목의 연주회에 갔었다. 장소가 퇴근 길목이 아니었으면 안 갔을 거다 피곤해서. 그러니까 우연히 간 거였는데, 좋았다. 음악은 특히 아리아는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현실을 압도하는, 순수하고 고결하고 벅찬 비현실의 시공간에 한 시간 반 동안 있었다 어제. 좋은 음악은 몸이 일에 시큼하게 절여지면 절여질수록 곡진하게 잘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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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에서는 망자를 떠나보내는 일이 그저 엄숙하고 비장한 행사만은 아니었다. '다시래기'라고 하는 마당극과 같은 희극 공연이 엄연히 장례 예식의 일부를 구성하기도 했으니. 관을 앞에 두고 다시래기를 구경하면서 유족들은 울다가도 끝내 웃을 수밖에 없었겠다. 천둥이 몰아치는 날씨, 성경책, 십자가, 검은 우산 따위가 클리셰로 떠오르는 기독교식 장례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가 죽음조차 하나의 축제와 놀이의 장으로 승화시킨 진도 상장례를 보고 나니 신선하고도 뭉클했다. 가족과 이웃의 죽음은 분명 슬프고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진도 상장례는 죽음이라는 비극조차 생에 대한 긍정으로 치환한다. 구성진 노랫가락으로 떠난 자의 저승길을 축원하고 눈물로 얼룩진 남은 자의 삶을 다정한 해학으로 보듬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저미는 가슴으로, 하지만 또한 명랑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실제 장례식도 아닌데 이 즐거운 애도의 예술 앞에서 눈물이 다 났다. 좋았다.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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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이인원

 

 

눈독들일 때, 가장 아름답다
하마
손을 타면
단숨에 굴러 떨어지고 마는
토란잎 위
물방울 하나


아니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눈독에 머물지 않고 덤벼들어야지. 야생의 짐승이 그렇듯이, 호기심으로 빛나는 발톱을 세우고, 격정과 충동에 휩싸여 야수처럼 덤벼들어야지. 산산이 부서지는 날카로운 이슬에 온가슴이 찢기더라도 파국을 향해 용맹하게 돌진해야지. 모든 류의 관조 취미는 늙음의 표식이다. 그것이 그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되어도 결국은. 이라고 며칠 전에 썼다가 어제 우연히 어떤 책에서 (어느 일본 소설가의 작풍 변화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이런 대목을 읽었는데

 

(...) 욕망이 대상에 도달하고 그곳에서 힘을 다한 후 남겨진 것은, 언제나 쾌락의 절반은 익살맞고, 절반은 끔찍한 껍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작품이 성공한 것은 <벨벳의 꿈>(1919)이나 <인어의 슬픔>(1917)에서 주체와 욕망의 대상이 두꺼운 유리로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욕망이 불완전하게 끝나는 때이다. 욕망은 언제나 대상과의 간극 바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관서 지역으로 이주한 이후, 다니자키는 욕망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것, 욕망을 어디까지나 지연시키고, 그 지연을 쾌락으로 만드는 것을 선택한다. 그것은 직접성에서 간접성으로의 전환이다. 눈부신 빛에서 그림자로 가라앉는 모호한 형태로 전환하는 것. 순간적으로 부여되는 선정적인 이미지에서, 대상을 만지작거리는 맹인의 손가락 끝으로의 전환. (...) 그는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의 마조히즘을 완성하는 것이다. -158쪽, 구라카즈 시게루,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 中에서

 

의도적으로 욕망의 충족을 지연시키면서 쾌락을 얻는 관조 취미는 늙음의 표식이 아니었군. 마조히스트의 생활 양식이었군. 늙은이든 마조히스트든 그런 식의 변태적 금욕주의는 나를 질리게 만든다. 사랑은 눈독 들이는 게 아니라 덤벼드는 거다. 사랑은 기투(企投f)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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