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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 ②] 악몽의 세계화, 인권과 평화 동시 공격하다
한미FTA와 전략적 유연성, 세계화의 양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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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아 
아프리카대륙 탄자니아에는 ‘빅토리아’라고 불리는 아름답고 큰 호수가 있다. 빅토리아 호수의 풍부한 어족과 주변 자연환경은 호수를 근간으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생존과 행복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1960년경부터 이 빅토리아 호수에 나일강의 농어가 유입되면서, 이곳은 세계화로 인한 인권침해와 환경파괴의 대표적 온상지로 전락한다.


탄자니아의 악몽, 세계화의 악몽

프랑스계 오스트리아 감독 위베르 소페(Hubert Sauper)가 연출한 다큐멘타리 <다윈의 악몽>은 이 ‘빅토리아’ 호수가 초국적기업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경제세계화’와 ‘군사세계화’가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수출을 위해 나일강으로부터 유입된 농어는 기존 호수의 생태계를 파괴하면서 토종 물고기를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농어를 데려온 초국적 자본은 그 지역에 수산물 가공식품공장을 건설한 뒤, 무럭무럭 자란 농어를 잡아 가공해 러시아와 일본, 서유럽 등으로 수출해 돈을 번다. 반면, 토종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은 생계의 터전을 잃고 더 깊은 빈곤의 수렁으로 빠진다. 사람들은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거리로 내몰려 성매매와 구걸로 생명을 이어간다. 이윤의 극대치를 추구하는 자본의 효율성은 나일강 농어를 실어나르는 비행기를 놓치지 않는다. 탄자니아로 오는 그 ‘세계화의 비행기’는 전쟁무기를 잔뜩 싣고 온 뒤, 떠날 때 무기를 내려놓은 빈자리에 농어 가공품을 실어간다. 그렇게 뿌려진 무기는 아프리카에서의 군사패권 다툼과 내전, 민중을 학살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이렇게 경제.군사적 세계화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전쟁과 빈곤을, 서구인들에게는 값싼 농어 가공품을 선사했다.

다큐멘터리 <다윈의 악몽> 가운데 한 장면. <사진 출처: www.darwinsnightmare.com>


<다윈의 악몽>에서 나타나듯, 탄자니아가 경험한 악몽은 초국적 자본의 광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풍과 맞닥뜨리고 있는 전 세계 민중의 악몽이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오직 큰 자본만을 살찌우는 무역경제는 민중들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일상의 평화마저 초토화시킨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도 그 악몽의 비행기가 사뿐히 내려앉을 준비를 하고 있다. 비행기에는 한미FTA(자유무역협정)와 ‘전략적 유연성’이 함께 실려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경험한 이웃의 악몽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나.


경제세계화와 군사세계화, 손 잡고 오다

불공정한 국제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무역 혹은 경제 세계화는 지금껏 ‘자유’라는 환상에 기반해 강자의 경제적 이해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왔다. 불공정한 국제관계의 안정적 유지, 새로운 시장의 확대는 군사력의 뒷받침을 필요로 한다. 특히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패권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막상막하로 진행될 때, 기존 패권국가에 도전하는 새로운 강대국이 출현할 때 군사적 격돌은 더욱 극심해지게 마련이다. 현재 미국이 ‘군사력’을 앞세워 세계경찰과 지구방위대 노릇을 자임한 배경에는 미 자본주의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미국 중심의 시장 질서를 확대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그 가운데 한미FTA가 다가오고 있다. 한미FTA가 추진되어 온 과정을 추적하면, 이른바 군사동맹과 경제동맹이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여 있음을 알게 된다. 한미FTA 협상의 시작과 전략적 유연성 합의는 불과 3~4개월이라는 기간을 두고 빠르고 진행되었다. 2005년 11월 17일 노무현과 부시는 부산 아펙에서 ‘경주공동선언’에 합의한다. 경주공동선언에서 다루고 있는 핵심주제는 △한미동맹 강화 △9.19 북핵공동성명 이행 합의 추진 △한미경제협력 강화였다. 이어 2006년 1월 반기문과 라이스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으며, 2월 김현종과 로버트 포트먼은 한미FTA 협상을 개시한다고 선언한다. 경제동맹이 군사동맹으로, 군사동맹이 다시 경제동맹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왜 미국과 한국은 이토록 빠른 속도와 긴밀한 관계를 통해 한미자유무역협정과 전략적 유연성을 추진하려 하는 걸까? 우선, 미국의 입장에서 한미FTA는 불어날 대로 불어난 무역적자와 WTO체제의 느린 호흡을 비껴갈 하나의 대안이다. 지난해 미국의 무역적자 규모는 무려 8050억 달러에 이른다. 다른 나라 같으면 저축해 둔 돈을 꺼내 갚거나 다른 나라에 빚을 내야 하는 형편이다. 반면 미국인의 가계저축률은 0%에 가깝다. 그렇다면, 무역을 통해서라도 미국 경제를 살려야 하는데 오랫동안 추진해 온 WTO 체제는 세계 민중의 저항으로 커다란 진척이 없는 실정. 이럴 때 내놓은 카드가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으로의 선회였다. 그런데 자유무역협정의 실질적 진전은 막강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힘이 실리지 않는다. 누가 손해 볼 장사를 하겠다고 나서겠나. 게다가 유럽공동체가 나름 독자적인 경제블럭을 형성하고, 장차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권이 지역블럭을 추진할 가능성이 열린 이 때, 미국의 입장에는 자신의 패권을 어떻게 보장해야할지 난감할 노릇. 미 자본주의의 패권이 위협받는 만큼이나, 더욱더 ‘군사세계화’에 의존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전략적 유연성 합의에 따라 한강 이남에 배치되어 있는 주한미군은 붙박이 군대가 아닌 신속기동군으로 전환하기 위해 2008년까지 평택으로 이전확장될 예정이다. 이는 대북억제력으로 존재해온 주한미군이 전 세계 어디든 ‘미국의 시장’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달려나갈 수 있는 존재로 변함을 의미한다. 한미동맹의 내용도 새롭게 재편된다. 대응의 범위도 대테러,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재난 구호, 평화유지 활동 등으로 넓어졌고, 주한미군이 뻗어나갈 수 있는 곳도 전 세계로 확대된다. 이처럼 평택에 재배치되는 주한미군은 북한과 중국 등을 겨냥하는 가운데, 한반도의 평화와 인권을 더욱 위협할 수밖에 없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의 배경에는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이 깔려있다. 지난 5월 4일 평택 강제진압에 항의하기 위해 국방부 앞에 모인 인권평화 운동가들.


한국정부 역시 FTA 체결과 전략적 유연성 합의를 내어주는 대신 대북관계에서의 주도권을 보장받으려 혈안이 되어 있다. 자본이 주도하는 남북관계의 진전이 민중의 진정한 평화와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자유무역과 군사패권의 회오리는, 인권과 평화에 대한 공격은 동시에 몰려온다.


그들의 ‘국익’과 민중의 인권.평화

빅토리아 호수에 유입된 나일강 농어가 자생 물고기들을 먹어치웠듯이, 한미FTA를 통해 관철되는 자본의 질서는 세계화된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산업들을 잠식하고 노동자, 농민의 생명줄을 옥죌 것이다. 결국 살을 찌우는 것은 자유무역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있는’ 자본뿐이다. 탄자니아로 들어오는 수송기에 실려온 무기가 아프리카 민중의 평화를 파괴했듯이,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은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거나 딴죽을 거는 세력을 언제든 공격할 것이다. 그래서 한미FTA 반대운동은 민중의 사회적 기본권을 옹호하기 위한 인권운동일 뿐 아니라, 군사세계화에 저항하는 평화운동의 성격도 함께 가져야 한다.

한덕수 부총리를 비롯해, 김현종 통상본부장은 말한다. 한미자유무역협정 채결로 중국, 일본에 앞서 한국은 미국과 거래를 탄탄하게 놓아 결국 동북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동북아질서에서 한국이 홀로 지위를 얻을 수 없을 때 일단은 미국이라는 강자 편에 붙어먹는 게 그나마 떡고물이라도 받아 챙길 수 있다고.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국익은 누구의 이익인가. 민중의 삶을 파탄 내는 국익의 실체는 사실상 국익이 아니다. 국가안보란 이름으로 정권안보만이 추구되었듯이, 그들이 말하는 국익은 다수 민중의 생존권 침해의 다른 이름이다. 정확하게 한미FTA와 전략적 유연성은 우리를 버리고 자본의 이익을 택하고 있다. 테이블의 양쪽에는 국가 대 국가가 마주하고 있지 않다. 더 많은 이윤을 챙기려고 하는 세계화된 자본과 민중의 인권이 마주하고 있다. 한국정부가 군대 동원이라는 무리수까지 불사하며 평택에서의 저항을 진압하고 나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저항의 파고가 높아지는 만큼, 정부와 자본의 폭압도 증대될 것임은 분명하다. 때문에 지금, 한미FTA 반대운동은 ‘국익’이 아닌, ‘평화와 인권’을 옹호하는 운동이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의 경제.군사패권에 반대하면서도, 인권과 평화를 파괴하는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흐름을 조직해 내야 한다.
인권오름 제 5 호 [입력] 2006년05월24일 8: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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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6-05-26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도 좀 퍼가겠습니다. ^^

balmas 2006-05-26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이것도 역시 추천을 ... ^^;;;;
 

 

[벼리 ①] 공공의 적, 한미 FTA

인간다운 삶과 자본의 대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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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류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아니, 갑론을박은 하나의 주제를 두고 설전이 벌어질 때나 어울리는 표현이다. FTA에 대한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철지난 녹음기마냥 같은 소리만 늘어놓는 한국정부의 모습은 민망할 지경이다. 특히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요구하지는 않음을 확인’하는 정도로 사회공공성 해체에 대한 우려를 무마하려는 모습은, 한국정부가 한-미 FTA를 계기로 터져나오고 있는 민중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공정책을 무용지물로 만들다

미국과 ‘하나의 시장’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이 한-미 FTA의 목표다. 시장은 자본의 이윤 동기가 작동하는 공간. ‘하나의 시장’은 결국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수적인 권리들을 보장하기 위해 이윤동기를 억제해온 공공성의 영역을 침범하기 마련이다.

먹으면 체한다는 한미FTA 파이, 드셔보실래요? <사진 출처: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www.nofta.or.kr>


수많은 FTA들이 집중공략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의약품. 한-미 FTA 역시 예외없이 지적재산권 조항을 강화하고 있다. 의약품특허기간을 연장하고 의약품 관련 자료를 독점하며 복제의약품의 생산을 막는 것, 즉 시장에서 약이 비싸게 팔릴 수 있는 조건을 보장받는 것이 FTA가 노리는 바다. ‘약이 없어 죽을 수는 있어도 돈이 없어 죽을 수는 없다’던 환자들의 절규에 ‘돈이 없으면 차라리 죽으라’는 저주를 내리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의약품을 더욱더 시장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노력은 공공의료제도를 직접 공격하기도 한다. 호주의 공공의료제도인 ‘의약품급여제도’는 의약품을 싸고 안전하게 공급하기 위한 제도였다. 그런데 미국과 호주가 FTA를 체결한 이후 이 제도는 근본적으로 위협받게 된다. 한국 정부의 협정문 초안에도 있는 ‘투명성’이라는 문구가 이 제도를 흔드는 무기가 되었다. 협정에 관련된 국내 제도와 절차의 투명성을 보장하고 협정과 관련한 행정조치 등에 대해 행정적, 사법적 검토와 재심의 기회를 부여하자는 것이 ‘투명성’이 요구하는 바이다. 이는 의약품의 판매를 허가하고 약값을 산정하는 절차에 제약자본이 공식적으로 개입할 여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미국 기업들이 이런 불편한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협정문 초안의 8장 ‘투자’에서 보장하고 있는 투자자-국가 소송제도는 이미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에서도 악명을 떨치고 있다. 투자자인 기업이 투자유치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 수 있는 투자자-국가 소송제도가 보장된 NAFTA는 멕시코와 캐나다 정부의 환경정책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권리들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공공정책을 자본의 이해에 맞춰 해체하는 것이 바로 FTA가 불러올 사회공공성 해체의 실상이다. 그러나 인권이 협상의 대상일 수 있는가.


권리는 내어주고 의무는 팽개치고

자본이 공공정책에 개입해서 더욱 많은 것들을 시장으로 가져가는 동안, 이 과정에 민중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더 좁혀져 간다. 이미 FTA 협상 개시에서부터 민주주의는 훼손되어왔다. 민중의 권리가 도마에 올라있는데도 FTA와 관련된 절차에 민중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어떤 집단과 어떤 규칙의 교역을 할 것인가에 대해 민중이 발의할 수 있는 구조는 언감생심이라고 치자. 그러나 정부의 보고서 하나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는 입법부의 ‘능력’은 어떻게 봐야 하나. FTA를 체결해온 수많은 국가들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잽싸게 협상을 추진한다고 경축해야 하나.

이에 뒤질세라 사법부 역시 이미 신통한 능력을 보여준 바 있다. 작년 9월, 전북 학교급식 조례안이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위반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그것이다. 부실한 학교급식이 여론의 뭇매를 수차례 맞은데다 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놓인 농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여론을 울리던 당시, 대법원이 내놓은 판결은 분명 용감한 것이었다. 더구나 국제기구나 초국적자본의 명시적 압력이 존재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말이다.

‘국회 비준을 거쳐 공포.시행된 조약은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는 헌법 6조1항을 즐겨 내뱉는 사법부가 무역협정은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면서 유독 사회권규약 등 국제인권조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과연 무지의 소치일까. 대법원의 판결로 ‘식량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중요한 자원이 제3자의 힘이나 경제적 지배에 의해 박탈되지 않도록 입법을 포함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 보호할 의무’는 내동댕이쳐졌다. 바닥에서 산산이 부서진 것은 농민들의 생존권과 어린이들의 식량권, 건강권이었다.


불평등은 정부의 힘?

정부 역시 민중의 권리를 내어주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교육인적자원부는 FTA에서 초․중등 교육은 개방하지 않는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제주특별자치도와 경제자유구역에서 영리목적의 각급 외국교육기관이 설립될 수 있도록 준비해놓았다. 외국의 유수 대학을 유치할 때는 토지 무상 임대뿐만 아니라 연구비, 장학금 등의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경쟁을 통해 교육의 질을 높이겠다는, 그래서 해외로 빠져나가는 교육비용을 붙잡아두겠다는 알량한 고뇌를 기특하게 볼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공교육의 붕괴로 인해 계층별 교육 격차가 구조화되고 교육불평등이 빈곤을 악순환하는 원인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교육권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한 해 수천만원의 등록금을 내야 하는 외국대학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라면 미국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왔는데, 이 기회에 확실히 1위 자리로 올라서겠다는 것인가.

인권에 대한 정부의 몰이해는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산업자원부는 ‘제조업 등 무역조정 지원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농축산업, 어업뿐만 아니라 제조업 분야의 피해에 대해서도 지원을 하도록 했다. 자유무역협정 체결로 누군가 피해를 볼 수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솔직하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피해의 규모를 터무니없이 작게 예측하고 있는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이런 법률 쪼가리가 각종 인권후퇴에 대한 보완책이 될 수 있는지를 엄중히 물어야 한다.

지난해 7월 단전으로 인한 인권침해가 문제되면서 산업자원부가 들고 나온 소전류 제한기만 봐도 인권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은 확연히 드러난다. 사용료를 내지 못하는 가구는 110W로 사용할 수 있는 전류가 제한되도록 한 것. 냉장고를 켜놓으려면 TV는 볼 수 없고 형광등은 두 개까지 켤 수 있는 전력인 110W는 인간다운 삶, 바로 인권의 존재이유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런 정부가 FTA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지원책을 마련해 놓았다고 너스레를 떤다.

하지만 실상을 보자. 제조업의 피해는 고스란히 제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 감수해야 할 몫으로 떨어진다. ‘외부의 충격을 통한 내부 개혁’이라는 한-미 FTA의 목표는 비정규직 노동의 확대, 노동권의 후퇴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전기를 끊어놓고 제한된 전류로 삶을 묶어놓는 소전류제한기와 노동권을 박탈한 후 지원을 통해 피해를 보완하겠다는 시도는 어딘가 닮지 않았는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를 보장하는 것이 인권이고 억눌리지 않고 자유로운 노동을 만들어가는 것이 인권이다. 줄 수 있는 만큼 받는 것은 인권이 아니라 노예계약일 뿐이다.


공공성의 해체는 인권의 부정

세계인권선언에도 규정되어 있듯, 인권의 보편성은 ‘모든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의 보장을 요구한다. 과연 FTA는 모든 권리와 자유의 실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필연적으로 민중의 권리를 배제해가는 과정인 FTA는 단지 인권을 후퇴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회공공성의 해체를 통한 인권의 부정, 그것이 FTA의 정확한 실체다.

지난해 11월 나온 미국 헤리티지재단의 보고서는 “자유무역협상들은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익보다 전세계의 무역장벽을 낮추는 대안적인 방법으로서 그 가치가 있다”고 말하면서 자유무역이 경제성장률을 높인다는 믿음을 설파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달 발표된 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는 경제성장의 몫이 결코 빈곤층에게는 돌아가지 않는 현실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한-미 FTA에서 어느 나라가 더 이익을 볼 것이냐를 셈하는 것은 도박판의 양편에 누가 앉아있는지를 보지 못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전세계의 무역장벽을 낮추는 자유무역에서 나오는 열매들은 공공성의 영역에서 시장으로 넘어가 자본의 손아귀에 사뿐히 내려앉을 것이다. 이 화살표가 빈곤과 불평등이 심화되는 방향과 정확히 동일한 지점을 향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FTA 저지를 넘어 공공성 확보에 나서야

인권의 실현을 위해 우리는 더욱 많은 것을 공공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싸움들을 열어젖혀야 한다. 자본에게만 열린 영역들을 민중에게 열리도록 돌려놓아야 한다. 자본이 공중파방송에 프로그램 편성비율을 늘려달라고 하면 방송노동자와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의 편성에 개입할 수 있는 경로를 요구해야 한다. '구두, 서면 또는 인쇄, 예술의 형태 또는 스스로 선택하는 기타의 방법을 통하여 국경에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접수하며 전달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는 표현의 기회를 넓히고 표현에 필요한 물적 조건을 공공이 보장하는 질서를 요구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위기에 놓인 우리들의 삶이 인간다워질 수 있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인권이다. 그것이 실현되는 질서는 과연 시장에 있는가, 공공성의 영역에 있는가. 모든 곳에서 인간다운 삶과 자본이 격돌하고 있다. FTA 협상의 진행에 주목하고 발언하고 행동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인권을 침해하는 국가권력과 자본에 맞선 투쟁의 역사가 인권의 역사다. 우리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질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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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6-05-26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안녕하세요. 공공성과 인권을 연결시킨 좋은 논의네요. 좀 퍼가겠습니다.

balmas 2006-05-26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
그렇게 하세요. :-)
(추천까지 해주시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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