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규 언더그라운드 여행기 - 젊은예술가의 세계기행 2
박훈규 지음 / 안그라픽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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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친구중에 100만원을 들고 호주로 날아가 1년을 살고 온 놈이 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꼭 해보고 싶다던 음향공부를 하고 돌아온 그 친구가 참 대견스럽고, 부러웠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또한 만만치 않다. 나이도 비슷하거니와 사는 모습이 친구와 많이 닮아있어, 마치 친구의 여행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마저 들었다. 50만원을 들고서 떠난 호주, 그리고 영국. 다시 돌아온 서울.

90년대 중반 어학연수가 유행처럼 번지던 시절. 집안의 경제적 사정을 핑계로 외국으로 나가보겠다는 꿈조차 꾸어보지 못했던 나. 이제와 돌이켜보니 참 바보같다. 용기가 없는 것을 돈이 없는 것으로 핑계를 대고, 감히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던 어리석음이 마음 한구석을 옥죄어온다.

책은 곳곳에서 무모함으로까지 비쳐질 행동들이 실은 자신을 찾는 지름길이었음을 보여준다. 억누르고, 가다듬고, 맞춰가는 내가 아니라, 표현하고, 흘러가는대로 놔두고, 변모해가는 나를 이루어가는 것. 그것은 두려움과 모험이 공존하는 여행을 통해서 다가온다. 고등학교 숙제가 3개국을 돌아다니고 느낀 점을 써 오는 것이라는 독일의 학생이야기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비행기 한 번 타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나로서는 우물안 개구리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칸트처럼 자신의 고향을 지키면서도 지구만큼 크기의 사고를 펼친 철학자도 있긴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닐테니까...

저자 박훈규는 만화에 대한 애착에 가출을 한 소위 불량학생이었다. 하지만 그 만화에 대한 애착이 결국 그가 외국으로 날아가 희망과 용기를 얻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돌파구를 만들어줬다. 초상화를 그리면서 돈을 벌 수 있었던 그는, 수많은 그림들을 그리면서 그림에 대한 생각도 바뀌고, 공부도 착실히 할 수 있었다. 또한 주위에 많은 사람들과 그림으로 교감하며 사람에 대해서도 많은 걸 배웠다. 익숙하고 정착할 수 있었던 곳을 떠나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그의 여정은 살겹다. 그런 여정들이 마냥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떨고, 불안감에 휩싸이면서도 감행한 것이기에 말이다. 여행의 단상들이 적힌 한편으로 자신이 그려왔던 초상화들과 여행중 손에 쥐어진 영수증등을 보여주는 사진 속에, 손으로 직접 쓴 글들을 읽다보면 그의 마음 속 울림을 접할 수 있다. (서체의 독특함때문에 읽기가 다소 불편하긴 하다) 밖에서 바라볼 땐 아무렇지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행동들도 실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어떤 선택의 순간과 똑같이 고민과 불안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즉, 참으로 용기있고,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어떤 행동들이 결코 그가 영웅이거나 잘나서가 아니라, 그저 쉬운 것보다 좀 더 힘든 길을 택했다는 차이 하나뿐이었음을 말이다. 그리고 그 힘든 길이 그저 힘들다는 차원을 넘어 자신이 진정 원하는 자신을 찾아 가는 길이었음을, 그래서 여행은 언제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임을 깨우친다.

용기가 가져다 준 작은 차이가, 자신의 초상화의 모습을 완전히 뒤바꿀 수도 있음을 실감하며, 그의 여행일기장을 조심스레 덮는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떠날 수 있기를 고대하며, 마음 속으로나마 작은 배낭 하나를 꾸려본다. 언제라도 당장 지고 나갈 수 있도록...

(사족; 호주의 정책을 부러워하는 말 중에서 쓰레기를 수출함으로써 자신의 땅을 깨끗이 지키고자 한다는 부분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 쓰레기를 돈을 받고 수입하는 나라는 어떨 것인지... 소위 선진국이라는 곳이 과연 다른 나라의 희생없이 달성된 것인지 찬찬히 뜯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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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파업 프로그램 중엔 자원봉사 활동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대학교때 농촌봉사활동을 제외하곤 사회에 나와서 자원봉사를 경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가 봉사활동을 간 곳은 고덕에 있는 우성원이라는 곳으로, 장애인 철인 3종 선수등으로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나는 그곳에서 주로 중증 자폐증세가 있는 사람들이 거처하고 있는 요양원 방과 화장실을 청소하고, 오후엔 식당을 깨끗이 하는 일을 했다. 물론 내가 지금 거처하고 있는 자취방보다 훨씬 깨끗한 곳을 쓸고 닦다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청소를 끝내고 잠깐 짬을 내 아저씨 한분과 공 주고받기를 했는데, 난처하게도 그 놀이를 언제 어떻게 끝내야할지 몰라 당황스럽기도 했다. 다행히 점심시간이 다가와 한숨 놓긴 했다.^^

자원봉사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남다른 것 같진 않은데, 자원봉사를 하기전 원장님께서 하신 일장연설의 한 대목이 가슴 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원장님께서는 이 곳에 기거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신연령이 잘해야 5살 정도라면서 그들을 대하는 어려움을 토로하시기도 했는데, 화재의 위험성이나, 집을 잃고 헤매는 통에 찾아 다녀야 하는 일 등을 늘어놓으셨다. 그리고 그 중 가슴 속에 남은 에피소드 하나. 운동회를 열어 100미터 달리기 경주를 하는데, 이게 좀처럼 끝을 맺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원생들이 50미터 쯤 달리다, 먼저 간 사람이 갑자기 자리에 우뚝 서서 뒤에오는 원생을 기다려 같이 걸어들어온다는 것이다. 이래가지고서는 좀처럼 운동회가 흥겨울 수가 없다는 말씀에 나는 오히려 내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사람사는 꼴이 이런 모양도 갖춰야지 하면서 말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모양새는 너도 나도 그 100미터를 빨리 가겠다고 아우성이다. 때로는 뒤에서 잡아채기도 하고, 앞에서 발을 걸기도 하고, 또는 남은 아무 상관없이 그저 앞만 보며 뛰어가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먼저 가겠다는 아수라. 앞에 가던 사람들이 멈추어서 함께 가겠다고 손을 내민다면, 그 모습은 어떨까? 물론, 100미터 신기록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들도 있어야 제 맛일것이다. 누군가는 그 신기록을 향해 몇천 킬로미터를 훈련하고, 멋진 달리기의 표본을 보여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1등을 할 수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신기록을 달성할 수도 없다. 그러나 자신만의 기록을 갈아치울수 있을련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신기록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통해 달기기의 자세와 주법 등을 새로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달릴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모두들 달리라고 강요하는 듯 하다. 그래서 왠지, 달리기를 멈추고서 뒤어 오는 사람들과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었다는 원생들을 통해 경쟁이 아닌 다른 삶의 모습을 배울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때로는 고독하게 자신의 100미터를 향해 뛰어가면서도, 때로는 잠시 멈추어서서 손을 맞잡고 걸어도 가는 세상이 될 수 있었으면... 그리고, 그런 세상을 향해 과감히 멈추어설 필요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의 이 파업이 바로 그 멈추어섬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파업 19일째 잠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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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파업 선포식을 가졌다. 대학교 때 배운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피부로 직접 다가오는 순간이다. 정리해고라는 칼날에 저항해서 노동자가 기껏 가지고 있는 무기는 파업밖에 없다는 것이 서글프다.

왜 정리해고를 해야하는지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도 없이, 그저 회사가 어렵다는 핑계와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만을 계속 할뿐 경영상의 어려움을 증명할 자료도, 시기적으로 왜 이렇게 서두를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설명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구조조정 이후 회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아무런 청사진도 없이 그저 칼날에 목을 내 놓으라고 한다.

구조조정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가 아니다. 회사가 외부 환경의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또는 사회 변동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서 기업체가 할수없이 몸무게를 줄이거나, 다른 사업으로 변경해야지만 살아남는 경우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도마뱀의 꼬리를 자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은 단순히 도마뱀의 꼬리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 도마뱀의 머리를 잘라내는 격이다. 머리를 자르고서도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경영자였다라고 생각하니 어찌보면 지금과 같은 어려움이 닥쳐온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노조원들이 파업을 결정했을때 조금은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90%에 육박하는 파업찬성에 먼저 놀라기도 했지만, (이것은 분명 부도덕한 경영자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후배들의 목을 쳐낸 것을 지켜본 선배들의 애정이 함께 녹아있었기에 가능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 과연 평상시 모래알처럼 보이던 동료들이 한마음이 되어 뭉칠수 있을것인가 내심 불안했다. 하지만 오늘 선포식을 지켜보니 조금은 안심이 된다. 파업이 장기회되고, 사측이 어떤 비열한 방법을 동원할지 모르지만, 오늘과 같이 한마음이 된다면 아무 걱정없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됐다.

개인적으로는 지금 당장이라도 회사를 떠난다고 해서 먹을 것 걱정을 할 처지도 아니고,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의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른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기에 이것을 향해 전진할 수 있는 길도 놓여져 있다.(물론 그 길도 쉽지 않다. 몇년의 피땀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파업을 결정하기 전 희망퇴직이라는 불순한 의도의 회사 방침에 순응해 떠날수는 없었다. 이대로 회사를 떠난다면 난 지금 이후의 내 삶에서 얼마나 떳떳하게 살 수 있을까 자문해보고 또 자문해봤다.

자기들끼리만 살아보겠다고 노동자들의 목을 아무 거리낌없이 치고 있는 그들의 강심장에 비수를 꽂지 아니하고서는 내가 진정 꿈꾸는 세상살이를 해낼 수 있는 명분을 지닐 수 없을 것 같았다. 분명 힘들고 외롭고  포기하고픈 길을 선택했다는 것을 안다. 솔직히 이 파업이 어떻게 진행될지 두려움도 크다. 하지만 내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내 인생의 다시 오지 못할 투쟁이라 생각하니 자뭇 격양되기도 하다. 이 싸움이 승리로 끝날지 패하게 될지 모르겠으나, 마지막까지 나에게 정정당당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닐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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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사람은 없지만 그 결말이 비극인 경우가 있다. 그래서 도덕을 얘기하는 것이 세상을 모르는 순진한 이야기로 비쳐지기도 한다.

캘리포니아의 한 바닷가. 캐시는 아버지가 물려준 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다소 무기력한듯 보이지만 그래도 출발할 둥지는 있다. 그러나 사소한 법적인 잘못으로 집은 경매에 넘겨지고, 설상가상으로 몇일 후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가 집을 찾아오겠다고 한다. 보아하니 마땅한 직업도 없어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편과도 이혼한 처지이니, 집을 되찾을수는 있을련지 모르겠다.

이란에서 정치적 소용돌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 온 베라니 대령. 하루 온 종일 일을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진다. 낮에는 도로포장의 인부로, 저멱에는 가판대 판매상으로 쉴 틈이 없다. 가족들은 가장이 무슨 일로 자신들을 풍족하게 먹여살리는지 알지 못한다. 대령의 마음 속엔 과거 카스피해에서 머물렀던 별장만이 가득하다. 그래서 삶의 재기를 위해 경매에 나온 캐시의 집을 싸게 사게되고, 어느 정도 손을 본 후 비싸게 되팔 생각이다.

즉  이 영화는 집을 둘러싼 이야기다. 삶의 기쁨, 슬픔, 무력함, 우울함, 도전정신, 의지, 두려움, 공포 등이 모두 녹아 있다. 캐시는 어머니가 오기 전 집을 되찾으려 하지만 베라니 또한 투자의 결실을 거두지 못한다면 고단한 삶의 여정을 끝낼 수가 없다. 정말 누군가의 잘못도 아니지만 그들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캐시는 점차 무력감에 빠져들고, 자살을 시도한다. 베라니는 그녀의 자살을 막고, 상처입은 새라 생각하며,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집을 돌려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의 삭풍은 선한 의지만으로 막을 순 없는가보다. 캐시를 도우려했던 레스터라는 경찰(아이가 둘이나 있지만 친구같은 아내로 인해 권태감에 빠져있다. 아내를 버리고 캐시를 사랑하고자 도망을 선택한다)이 끼여들면서 사건을 뒤엉키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해결책을 찾아내고, 원래의 집값을 경매인에게 받아서 돈은 캐시가 받고, 집은 대령이 차지하기로 한다. 그리고 자신의 꿈인 아들과 함께 돈을 찾으러 나서는 길,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한다.(사고의 내용을 밝히는 것은 스포일러가 될 듯. 영화 중 가장 안타까운 장면이다) 눈물만이 가득찬 집. 세상은 온통 고요하다. 대령의 가족은 아마도 카스피해안으로 찾아갔을련가?

삶에 대한 의지만으로도, 선에 대한 믿음으로도 세상의 비극을 바꾸어내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아름다운 석양과 바다를 내다볼 수 있었던 집은 모래와 안개로 가득차 희미하다. 세상은 맨 몸으로 부닥쳐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힘들고 벅찬 곳이라, 꿈을 꾸어야만 한 숨의 숨을 겨우 쉴 수 있다. 그 꿈이 거창하진 않더라도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게 할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 그래서 그들의 집에 대한 집착은 쉽사리 포기하지 못할 그 무엇이었을게다. 포기할 수 없는 것, 하지만 포기해야만 해결될 수 있는 것들. 그러나 포기하는 순간 닥쳐올 역경에 대한 두려움. 비극은 바로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미래에서 비롯됐다. 모래처럼 푹 빠뜨리고, 안개에 갖혀 한치 앞도 보여주지 않는 저 망막하고 두려운 인생의 길 앞에, 이제 캐시는 그곳이 자신의 집이 아님을 비로소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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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지음, 백영미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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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이 공의 세계에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사유작용 등 감각작용도 없고, 빛깔과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비감각적 대상인 원리 등 객관대상도 없으며, 시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 촉각의 영역) 사유의 영역등 주관작용도 없느니라.

반야심경의 한 대목이다. 현상이 모두 공이라는 이 생각은 자칫 허무주의로 사람을 빠지게 만들련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개인적으로 이 대목을 인간의 한계점에 대한 고백으로 이해한다. 물론 오독의 소지가 다분하다.

감각의 박물학이라는 리뷰에 난데없이 반야심경이 왜 튀어나왔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차츰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해결해가기로 하겠다.

책의 저자는 서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쾌락에 대한 집착이 아닌 헬렌 켈러와 같은 감각에 대한 유희를 주장하는듯이 보여진다.

죽음과 강렬한 감각은 인간의 공포인 동시에 특권이다(11쪽)

저자는 감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책을 통해 보여주며, 세상을 한껏 즐기라고 말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책은 온통 감각에 대한 찬양으로 넘쳐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공감각으로 나뉜 각각의 장은 그 감각들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여러가지 예를 들면서 보여준다. 그러나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감각이 갖고 있는 한계점 들이다. 52쪽에서 말하고 있는 매클린토크 효과라는 것도 인간의 감각이 얼마나 믿을 것이 못되는지에 대한 전적인 증거로 보여진다.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여학생들은 때때로 월경의 주기가 룸메이트를 따라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상대방의 몸에서 풍기는 체취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월경주기를 잃어버리고 상대방에 맞춰가기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 지금은 상식으로 알고 있지만 지구가 자전하면서 내는 소리의 크기가 너무 커서 우리는 듣지 못하고, 또는 너무 작아서 박쥐만이 듣는 소리도 있다. 눈에 보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자외선과 적외선의 영역이라는 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파장의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착시 현상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인간이 외부 환경을 받아들이는 여러가지 감각들이 실은 모순투성이에 잘못된 정보를 들여오기 일쑤다. 따라서 진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감각은 어찌보면 믿을만한 것이 못될련지도 모른다. 감각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못할뿐더러, 실은 외부 대상 자체들 또한 절대적인 어떤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이것에 시간마저 개입하기 시작하면 대상은 계속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거짓이니, 아무 것도 받아들일 필요가 없을까?

잠시 모든 것을 중단하고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워보라. 흘려보냈던 모든 것에 감각을 집중해보자. 실내도 괜찮겠지만 숲 속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먼저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해보자. 평소에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마치 꽃이 피어나는 소리마저도 들릴듯한 착각에 빠질련지도 모르겠다. 실내에 있다면 오디오를 틀어놓고 음악에 귀를 기울여도 좋다.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새삼 느낄수 있을 것이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촉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어디선가 풍겨오는 꽃냄새에 취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눈을 뜨면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구름에 취하기도 할 것이며, 나뭇잎의 색깔이 하루하루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다 기쁨으로 충만되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음을 깨치는 순간, 감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감한다. 그러나 이 감각이 주는 행복감을 벗어나, 쾌락을 쫓는 순간 향유하던 감각은 이내 덫이 된다. 보다 더 좋은 소리, 보다 더 좋은 색깔에 대한 집착이 사람의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련지도 모른다.

반야심경은 바로 이런 욕에 대한 경계심이라고 보여진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기쁨으로 충만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는 상태. 비록 그것이 거짓된 것이라거나 비틀어져서 들어오는 정보일지라도, 그것이 그렇게 들어온 것임을 알고 있는 상태라면, 그것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진리 또한 내 몸 속에 있음을 깨우치게 되지는 않을까?

지금 이렇게 키보드를 치고 있는 손가락의 감각 하나하나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세상은 온통 기쁨 투성이지 않겠는가? 눈이 멀고 귀가 먼 헬렌켈러가 세상을 행복과 기쁨으로 받아들였듯 세상을 대한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인 이 세상이 색즉시복福공즉시행幸이 되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본다. 내 몸의 감각이 그렇게 소중하며, 그 감각의 대상들이 또한 소중한 것들이니, 어찌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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