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갓바위 앞에서 난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2005. 10. 24(월)

팔공산 갓바위에 올랐다. 수능을 앞두고 많은 수험생 어머니들이 오르내리는 곳. 분명 효험이 있다고 하는 불상을 찾기 위한 길이 쉽지는 않을 거라고 짐작했건만, 고개는 계속해서 깔딱고개였다.

마침내 보게 된 갓바위. 난 아미타여래나 석가모니 상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피커에선 계속해서 약사여래불이라는 염불만이 반복된다. 그 염불에 맞춰 아주머니들의 절은 계속되고, 난 의아심을 가졌다. 분명 약사불이라면 호롱병(약병)을 들고 있어야 하는데... 안내판을 보니 약사불이 맞다. 왼손의 약병은 바람과 비에 마모되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설명도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 약사불에 대학합격 기원을 그다지도 바라는가? 원래 약사불은 건강을 기원하던 불상이지 않았을까? 물론 그 것 이외에도 여러가지 서원들을 들어주었겠지만, 그럼에도 이 약사불에 유독 대입합격을 기원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의 어떤 소원이 되었든 아마도 이 불상은 그 소원을 들어줄듯이 세상을 지긋이 바라본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어내는 것들이 어떤 형상을 지니고 있을때, 또 그것이 특정한 상징성을 간직한채 인고의 세월을 이겨냈다면 이미 그것은 신묘한 힘을 지니고 있게된다.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월이 그 속에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팔공산 갓바위에는 그런 세월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갓바위에 절을 하는 마음으로 타인을 대한다면 불국정토가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동화사 쪽으로 길을 향한다.

중간에 마주치는 암자들. 그리고 그 속에 들어차 있는 불상들. 그런데 이 불상들은 금박으로 화려하다. 동화사가 조계종사중 손에 꼽히는 부자인줄은 알지만 도대체 산 속 암자 불상을 금박을 입혀 놓은 것은 누구의 발상인지 참 안타깝다. 부처를 죽여야 부처가 될수 있다는 화두. 추위를 이기고자 불상을 태워버렸던 선종의 고승 등등. 불상이 우상이 되는 순간을 경계했던 정신은 사라지고, 오로지 크고 화려한, 돈으로 칠해놓은 불상을 통해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심어주려 하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내가 곧 부처이거늘 왜 부처에게 금옷을 입힌단 말인가? 갓바위 오르는 길이 그렇게 험한 이유 또한 끊임없이 땀 흘리며 오르는 나를 바라바도록 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우상을 만들고 싶어하는가? 내가 스스로 하기 보다는 누군가의 힘으로 운명을 거슬러보겠다는 욕망의 끝이 무섭다.

그런 속세의 욕망은 동화사에서 마주치는 통일기원약사불에서 절정을 이룬다. 오,이런. 저 거대한 불상을 지워놓고 정말 통일을 기원했더란 말인가? 저 크기만큼 통일을 빨리 다가올 것이라 생각하며 보다 더 크게크게만을 생각했으려나?

팔공산은 인간의 욕망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산이다. 갓바위와 통일약사불이 공존하는 곳. 과연 불토정국은 어디에 있는가?

 

 

 

 

 

 

 

이 거대한 약사불이 과연 통일의 염원을 다 담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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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0-31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을 좋아하시는 분이군요.
저도 산에 오르기 너무 좋아하는 사람 입니다.
기회가 없어서 많은 산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산에 오르는 일이 무지 행복하답니다.

하루살이 2005-10-31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산을 특히 좋아한답니다. 올 겨울은 과연 얼마나 자주 눈꽃을 대할 수 있을지...
기대반 걱정반. 시간과 건강이 허락해줄지, 그리고 마음의 게으름을 이겨낼 수 있을지...

icaru 2005-11-01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속세의 욕망은 동화사에서 마주치는 통일기원약사불에서 절정을 이룬다. 오,이런. 저 거대한 불상을 지워놓고 정말 통일을 기원했더란 말인가? 저 크기만큼 통일을 빨리 다가올 것이라 생각하며 보다 더 크게크게만을 생각했으려나?

이 줄을 읽으면서...너무너무 하루살이 님 답다는 생각을 ^^;;; =3=3=3

그나저나..
와아~ 하루살이 님이시다!!!!

하루살이 2005-11-02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비(?)하게 남아있어야했는데...^^

icaru 2005-11-02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비함의 절반은 남아 있당게요~
아슴프레 하게 보여요...(의도하신 거 같당게...!)

하루살이 2005-11-02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gracina 2005-11-04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여주셔서 감사해요~
게다가 하루살이님을 드러내 주시니 반갑고도 반갑네요^^


하루살이 2005-11-06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갓바위의 세월의 흔적을 잘 보여주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 속에서 영험함이 힘을 가질텐데...
 




가야산 정상 상왕봉을 앞두고

 

2005.10.25.(화)

경상도 합천에 있는 가야산에 올랐다. 가야산은 조선 8경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도대체 조선 8경이 어디인지는 알수가 없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선정해서 어떻게 퍼져나갔는지를 모를 뿐더러 또 제각각이라 도무지 어느 곳이 8경에 속한지 나로서는 감도 잡을 수 없다. 다만 그만큼 감탄을 자아내는 비경을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생각만 들었다.

가야산에는 해인사가 있다. 해인사는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법보 사찰이다. 물론 8만대장경이 이곳에 있으니 당연한 이유일터다. 해인사라는 절 자체는 그다지 크다는 느낌을 주고 있진 않으나 주변의 고목들이 이곳이 역사를 간직하고 있음을 말없이 가르쳐주고 있다. 더군다나 붉은 색을 자랑하는 굵직한 소나무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왠지모를 청정한 느낌을 준다. 소나무 기둥 하나하나엔 모두 숫자가 쓰여진 조그만 팻말을 붙여놓았다. 아무래도 최근 소나무들에게 치명적인 병을 예방하자는 차원에서 관리를 철저히 하고자하는듯이 보여진다.

가야산은 돌산이다. 흙을 밟으면서 올라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계속해서 돌길을 걸어야만 한다. 마애불상이 놓여있는 산 중턱 900미터 정도까지 올랐을때 언뜻 보여지는 정상은 그야말로 이 산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보여진다. 위의 사진은 그 정상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돌더미 위에서 찍은 것이다.  (산 위에 조그마한 점이 바로 나.)900미터 정상에서 다시 뚝 떨어져 600미터까지 내려섰을때 아, 지금부터 치닫고 올라가는 곳이구나 라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했다. 최고 1400미터에 가까운 상왕봉까지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가보자 마음 먹고 가다 밑에서 바라보던 돌산과 다른 분위기에 순간 발걸음을 멈춘다. 하루종일 안개에 쌓여 먼 풍경은 그다지 잘 보이진 않았으나 산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정상에서 칠불봉으로 가는 순간 합천에서 성주로 넘어서는 순간이다. 산은 하나인데 그것을 가르는 인간의 잣대는 산 위에 가상의 선을 그어놓았다. 산은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그 선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선은 산을 내려온 순간 힘을 발휘할 것이다. (성주쪽으로 넘어가서 다시 해인사를 가기 위해선 군이 바뀐다는 이유로 택시 값이 엄청 비싸다고 한다. 그 거리에 상관없이) 칠불봉에서 다시 해인사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백운동 쪽으로 떨어질 것인지 고민이 됐다. 백운동 쪽은 대중교통이 불편해 오늘 안으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친구와 산에 오를땐 대부분 같은 길로 내려오지 않았기 떄문에 이번에도 과감히 백운동 쪽을 택했다. 해인사 쪽보다는 단풍이 많이 들어있고 색깔도 곱긴 했지만 올해 전반적으로 단풍은 그다지 예뻐 보이진 않는다.

백운동으로 내려오니 염려했던 것이 현실로 드러났다. 버스는 2시간 후에나 있다니 음, 어쩐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걸어보자. 걷다가 히치하이킹을 하면 되지 않을까? 물론 걱정은 많이 됐다. 대학생이었을땐 차 얻어타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쉽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시커먼 남자 2명이서 차를 얻어탄다는 것은 그닥 만만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세상이 그것을 점차 어렵게 만들어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세상 탓에 나이탓에 얼굴 탓까지 해본다.

그런데 다행히도 국립공원관리공단  차가 해인사까지 갈 일이 있어서 그 차를 얻어탔다. 1주일에 한두번 간다고 하는데 마침 우리가 그걸 얻어탔으니 운도 좋다. 백운동 쪽에 지어지고 있는 야생화 화원이며, 단풍 이야기며, 성주 참외 이야기 등으로 얻어탄 고마움을 아저씨에게 건넨다. 해인사 가는 중간에 내려 고령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탄 후 고령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산을 오르면서 정상까지 어떻게 올라가나 겁을 먹은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아마 오늘은 어제 팔공산에 오른 이후 아직 피곤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오르다 보니 다소 다른 생각을 떠올렸나 보다. 자신의 처지에 따라 전혀 예상치 못한 심리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까지 산의 정상은  나에게 언제나 그대로의 감성을 준다. 때가 낀 가슴과 마음을 시원한 바람으로 깨끗이 씻어준듯한 느낌. 이 느낌을 갖지 못한다면 아마 산에 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잠시나마 바람과 하나가 되는 순간, 난 행복하다. 산의 줄기줄기를 내려다보며 그 사이사이 사람들의 흔적을 바라보며 집착을 벗어던진다. 깍이고 깍여 이렇게 아름다운 절경을 만들어주는 산처럼 깍이고 깍여도 아파하지 않을 것임을 마음 속에 다지며...


                                      

 

 

 

 

            가야선 정상에 올라서기 전

            마주치게 되는 불상

            난 무슨 소원을 빌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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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10-31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후~ 가야산 이제보니 돌산이네요~
한번도 안 가봤다지요...
무슨 소원 비셨는지..이제 생각나셨는가요오?

하루살이 2005-10-31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하지 못하는 소원이 더 애틋합니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계속 소원을 바라던 그 상황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얽매이지 않을 잠깐 동안의 소원. 그것으로 족합니다.
 

지난주 일요일 SBS 스페셜로 방송됐던 고지마 원숭이가 자꾸 떠오른다. 일본의 고지마라는 무인도에 살고 있는 원숭이 집단을 촬영한 기록을 보여준 다큐프로였다. 5년이라는 시간의 공백동안 변한 집단의 권력구조 속에서 제작진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야시'라는 암컷 서열 1위의 권력에 대한 집착과 그 몰락의 과정이었던 듯 싶다.  내가 보기엔 서열의 혜택이라는 것이 먹이의 접근도에서 드러나는 것 같고, 그야말로 그들에게 있어 먹이를 구한다는 것은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보여졌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집단의 우두머리가 바뀌기 전까지 분쟁을 조절하고 외부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해왔던 서열 2위였던 수컷 원숭이가 서열 1위로 오르는 순간 먹이에만 집착하고 모든 제 문제들은 그냥 놓아둬버리는 나태함을 보여준다. 누구도 자신의 권력을 침탈할 수 없다는 안정적인 요소가 그의 게으름을 불러 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서열 맨 꼴찌였던 암컷 한마리. 원숭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구마를 먹기 위해 자신에게 매달린 새끼마저 떼어놓으려 하는 어미를 보는 심정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달려드는 새끼와 그것을 떼어놓으려는 어미, 그리고 하나라도 더 먹기 위해 새끼를 쥐어패는 모습 속에서 모성은 과연 어디까지 가능한가? 라는 의문을 품는다. 보다 못한 할머니 원숭이가 어미를 새끼에게 보내는 장면, 그리고 새끼를 안으면서도 쥐어박는 모습 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불온한 생각.

가족은 굴레다. (사랑이 굴레인것 처럼)

원숭이를 통해 이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 걸까? 모성이라는 것도 결국 교육을 통해 확장되어지고, 강화되어지는 것은 아닐까? 보험금을 위해 아이를 살해하는 어머니, 벌어먹는 게 힘들어 동반 자살을 택하는 어머니,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가 아이들 먼저 강에다 던져버리는 냉정함...

모성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그리고 우리는 아름다운 모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통해 그 한계를 계속 넓혀왔고, 아예 한계 자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기야 그래서 동물과 인간은 다르다는 핑계를 댈터이니 원숭이를 가지고 모성을 논하지는 말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성은 본능이라고 배워온 터이니 오직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본능도 있을 것인가?

어머니에게 한없는 사랑을 바라지 말자. 어머니의 이름으로 한 여성을 저울질하지 말자. 

아~ 그러니, 나의 사랑스러운 어머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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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한번 형성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 스피노자

홍세화 씨가 자주 인용하는 글.

나도 돌이켜보면 고집불통이다. 나를 부수고 새로운 나를 짓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는 것 같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 누에고치를 뚫어야 하듯, 데미안처럼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하는 새처럼...

더군다나 하나 둘 나이를 먹어가면 이 고치와 껍질의 두께는 너무나 견고해져 제 아무리 거센 칼끝으로도 깨지지 않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하나의 창으로 통해버린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창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벽을 허물어 그 자리에 창을 만드는 일. 하지만 두꺼운 벽에 흠집을 내는 것마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창을 만들도록 자극하는 고마운 책들이 분명 주위에 많을 터인데, 나에게 만들어져 있던 창은 너무나 견고하다. 이 창은 홍세화 씨의 말처럼 강압적인 교육을 통해 형성되었고 현실의 길을 통해 다뎌졌다. 따라서 왠만해선 허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그 책들마저 이 창을 통해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창을 내는 것이 힘들어지게 된다. 간혹 기존의 창을 조금 넓혀주기는 하지만.

나이 마흔은 불혹이라 했다. 아직 마흔까진 시간이 많다. 불혹의 마음을 갖는다는 건 내 주위가 담으로 쌓인 것이 아니라 통유리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세상이 밝게 보일 것이니 말이다. 벽으로만 둘러쌓여 있다면 얼마나 불안하고 미혹될 것인가?

이젠 내 창을 의식해보자. 분명 지금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의식의 벽들이 깨어져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그래도 밀알 한 알이 썩어야 비로소 새로운 밀알들이 탄생하는 것 아니겠는가? 나를 죽여가는 작업을 해보자. 두렵더라도 한걸음 한걸음씩. 아직은 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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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11-01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아직 젊습니다....
 
부자사전 1
허영만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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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나도 부자가 되려는게 꿈인 세상이다. 몇 년안에 몇 억을 모을 수 있는가가 화두다. 그야말로 세상엔 온통 재테크 기술로 넘쳐난다. 정말 모든 사람들이 모두가 부자가 되는 그런 세상이 머지않아 올지도 모르겠다는 환상마저 갖게 만든다. 이렇게들 열심히 공부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왜 부자가 되려고 하는 걸까? 만화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부자가 되면 다 행복해지는 걸까? 라고 물었을때 그렇다라고 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작가는 부가 행복의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필요조건이라 한다면 또한 생각해볼 문제다. 부가 행복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면 국가의 부 지수가 낮으면서, 그리고 실질적으로 수입이 적은 사람들이 행복지수가 높은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지만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이 없다면 왠지 불안하다. 가난하면 절대 행복해질것 같지가 않아 보인다. 지금 당장에라도 단 몇 억, 아니 몇 천만원만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훨씬 행복할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정말 얼마나 가지고 있어야 부자이고, 또 얼마나 여유가 있어야 행복할수 있을까?

어렴풋한 기억으론 만화에서는 부동산을 제외하고 10억 이상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부자라고 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어떻게 부자가 됐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이 만화의 목적인바 그것을 잠깐 소개해보면, 부자가 되겠다는 굳은 의지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성실성과 실천력이 그 뿌리라고 한다. 무엇인가 비결을 바랐던 사람들에겐 실망감을 안겨줄듯 싶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렇다. 아끼고 아껴쓰는 절약정신으로 종잣돈을 만들고, 그것을 대부분 건물에 투자해 임대수입이나, 부동산 차익을 노려라. 제대로 파악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억 속에선 역시 이 땅에서는 부동산이 최고야 라는 느낌만이 강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이들이 돈을 모으는 행태를 보면 조금 치졸해보이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이 책의 저자 허영만의 아들이 다음에는 베푸는 부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보라고 주문했을까? 그렇게까지 해서 돈을 모아야만 할 것인가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그러나 일정한 부의 축적 이후의 그들의 삶은 솔직히 부러운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양심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으니 만화 속에서도 드러나는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자본주의에선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될 순 없다. 조금 전의 부동산을 당장 생각해보더라도 임대업을 한다면 주인과 세를 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고, 땅도 가진 자와 가질 수 없는 자로 나뉘어야 한다. 즉, 자본주의에서는 일정한 부 안에서 누군가가 많이 가진다면 누군가는 그만큼 덜 가질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체 자본의 양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을 나누어 갖어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제로섬 게임을 할수밖에 없다다.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복지제도적 측면, 특히 세금을 통해 차이를 줄여나갈 수도 있을텐데, 우리는 오히려 그 차이의 심각성을 말하면서도 실재론 그 차이를 더욱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한심스럽다.)내가 가진만큼 누군가는 덜 가지고 있어야지만 하는 사회. 그 속에서 하나라도 더 갖기위해 다들 악다구니를 쓴다면 과연 그 세상은 행복한 곳일까? (우리 사회는 더 갖는 것이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그리고 갖고 있는자가 더 챙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극소수의 특권자가 되기 위해 어떤 수단도 다 동원할 수 있도록 유혹하고 있지 않은가?)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서 있는 몇몇 사람만이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 그래서 그 자유로운 소수가 되기 위해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 하는 곳, 그곳이 행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라도 행복해지자고, 그러기 위해선 돈을 모아야 한다고, 비책을 찾는 사람들을 욕할 수도 없을 것 같다.  행복으로 가는 유일하고 빠른 길은 먼저 부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고 세상은 가르쳐오지 않았는가? 한번도 그것을 의심해보지 않는 사람들에겐 부자가 되는 것이 일생 일대의 과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제로섬으론 자본주의만이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아니, 이런식의 자본주의라면 그것을 지탱해줄 사람들을 잃음으로써 끝장날 시기가 올지도 모르겠다.

정말 제로섬으로 움직이는 무서운 세상 속에서 제로섬이 아닌 시너지게임을 할 수 있는 세상은 환상이고 망상일까? 시너지로 움직이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게 현실일까? 마음 한켠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움크리고 있다. 그 마음을 활짝 피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은 없을까?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일단 곳간부터 채워야만 가능한 일일까? 이 책이 말하는 부자가 되는 방법을 그대로 마음의 부자가 되는 방법으로 적용해, 세상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굳은 의지를 갖고 하나하나 방법을 찾아 행동하면 혹시 '행복의 나라'가 가능할까? 의지와 성실성이라는 똑같은 방법을 가지고서도 세상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과연 어디로 갈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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