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객 9 - 홍어를 찾아서
허영만 지음 / 김영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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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접시의 홍어회가 열 사공의 죽음을 떠올린다.

홍어는 피묻은 사공의 등골을 발라먹고, 사공은 혼신의 힘으로 홍어의 잔등에 작살을 박는다.

 이 상잔(相殘)! 우리들의 피안은 어디에 있는가

홍어를 생각하면 이 시가 먼저 떠오른다. 삶의 치열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엄숙함이나 경외감이 '헉' 숨을 멎게 하는 느낌마저 든다.

전라도에선 홍어가 올라오지 않으면 잔치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 전라도에선 자란 나이지만 홍어를 자주 구경한 것은 아니다. 또 홍어를 즐기는 편도 아니다. 그냥 먹을 줄은 안다는 정도. 톡 쏘는 맛과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독한 냄새 정도로만 기억되는 홍어. 시를 대하고 나면서부터는 음식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생명을 담보로 상 위에 올라올 수 있다는 생각에 함부로 대할수 없고, 절대 남길 수도 없다.

그 홍어도 이젠 수입산으로 가득 차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이제 홍어도 계급을 가질수밖에. 한국산인지, 흑산도 토박이인지에 따라 취급하는 손길이 달라진다. 나같이 아무거나 먹어대는 사람에겐 그 계급이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의 입은 간사해서 위로 올라간 혀는 절대로 아래로 내려오지 않으려 한다. 식객은 바로 위에 있는 혀를 만족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만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홍어잡이를 하는 어부와 마찬가지로 치열하다. 그러나 식객의 장점은 꼭 이런 치열함만 담아내지 않고 어머니의 사랑을 품고 있다는데 있겠다. 식객 1권에서부터 작가 허영만이 말했듯이 어머니의 손맛이 가져다 준 원초적 기억이 바로 최고의 맛으로 남는 것 아니겠는가? 이야기 곳곳에 숨겨 있는 이런 사랑의 손맛을 만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오는 식객은 그래서 단순히 요리 만화로만 그치는 것은 아닌것 같다. 무궁무진한 음식의 세계로의 초대. 그리고 말없이 다가오는 어머니의 사랑. 또다시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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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나무 왼쪽 길로 - 전5권
박흥용 지음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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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 박흥룡은 길은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라고 표현했다. 그 감동을 이 만화로 어떻게든 전해보려 했을터이고, 그것은 고스란히 독자에게 유혹으로 다가온다. 아무도 걸어간 본 적이 없는 길은 없다고 하지만 또한 누구나에게 똑같은 길 또한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상복이는 어려서부터 마을 어귀 호두나무에서 어머니를 기다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서울로 돈 벌러 가신 어머니가 명절이면 선물을 잔뜩 들고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던 상복은, 한번은 걸어서, 조금 큰 다음에는 자전거를 타고 어머니를 만나러 서울로 향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어느덧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발을 내디뎌야 하는 순간. 할머니는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털어놓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재가를 하셨다는... 상복은 마음에 상처를 안고 분노를 품고서 고향을 떠난다. 오토바이를 타고 무작정 떠난 길, 어렸을 적 자신을 귀여워했던 동네 누나가 부임받은 학교로 찾아가고, 거기서 누나의 부탁을 받는다. 딸기를 찾아달라는. 만화의 대부분은 이 딸기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딸기를 찾는 과정은 전국을 순례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현재와 과거, 주변인과 주인공이 자연스레 섞어들어가면서 현실과 환상을 뛰어넘어 우리나라 곳곳에 숨겨 있는 각 지역마다의 사연을 담아내고,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만화 초반부는 주로 남도 중심의 지역지 소개에 가깝다면 후반부는 아리랑을 중심으로 놓고 그것에 얽힌 사연을 풀어놓는다.

각 만화 끝에는 여행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1권의 경우엔 작가가 직접 상복이가 돌아다닌 길목을 돌아보며 쓴 글이 붙여져 있다. 그런데 이 글이 만화 못지않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작가가 소개했던 그 곳을 꼭 찾아보고픈 마음을 갖도록 만드는 매력을 지닌 글과 사진들 때문에 가슴이 울렁울렁 거린다. 땅에 발을 고정시키지 못하고 마음은 벌써 그곳을 찾아 유영하고 있는듯한 착각으로 말이다. 2.3.4권 말미에는 만화 편집자들이 찾아 떠난 상복의 여행지 소개가 있고, 5권에서는 작가와의 대담이 들어가 있다. 어렸을 적 방황이 어떻게 현실의 작품 세계에 도움이 됐는지 그리고 무작정 떠난 여행이 중독성을 띠어가는 모습, 오토바이에 대한 전문가적 지식 등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만화는 마지막에 딸기의 정체를 드러내고 상복은 그 딸기를 통해서 한 층 성숙해진다. 길을 떠나는 자가 성숙할 수 있는 것은 길이 주는 가르침 때문이다. 이 만화에서 상복이 받은 가르침은 세상에 막다른 길은 없다라는 사실일 것이다. 막다른 곳이라 여긴 곳도 결국 어디론가 통하는 길이 놓여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결코  절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교훈. 길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주저앉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에게 힘을 준다. 지금 힘이 들고 쓰러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더라도, 거대한 벽에 부딪히더라도, 다시 일어서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놓여져 있을 것이라는 희망. 그 희망이 바로 길의 유혹이요, 길이 주는 감동일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상복이 천안 쯤에서 만난 오토바이 수리를 해주는 아저씨의 말씀은 한동안 머릿속에 남아있을듯 싶다. 상복이 성장통을 거치는 것과는 어떻게 보면 상반된 입장이긴 하지만, 이 또한 여행이 준 감동이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열댓 살 되던 때지..  동네 스무 살 된 형님들이 공장에 취직해서 돈도 벌고 술, 담배하는 것이 어른같이 그럴 듯해 보이는 거야. 나, 스무 살 되던해, 집 뛰쳐나와 공장에 들어갔어. 이런, 어른은 무슨... 돈 벌고 술 담배만 하는, 껍데기만 어른 흉내를 낸 거였어. 그런데 서른 살  된 선배, 형님들이 장가가고 애도 낳고... 그러는 거야. 그 모습이 진짜 어른 같더라구. 그래서 나도 장가갔어. 그런데 겉만 어른이고 속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야. 마흔이 되면 뭐 좀 알겠거니 했는데... 서른 살 때 아무 것도 몰랐던 그대로 마흔이 되더라구. 이제 내 나이 오십이 됐거든... 이제, 뭐 좀 알겠더라구. 아무 것도 몰랐던 서른 살의 그때 그 모습으로 육십 칠십, 마침내 죽음까지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말야...

길을 떠난다고, 또는 인생의 여행길을 조금 더 걸어간다고 무엇인가를 더 알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삶의 해답이 놓여져 있어 어느 순간 그것과 맞닿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세상에 해답은 존재하지 않을련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가출이든 출가든 그것이 해답을 찾아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실망만을 안겨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길을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바로 작가가 말한 길은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기 ‹š문일 것이다. 그 감동은 온 몸에 새겨져 절대 잊힐리가 없다. 그래서 온 몸이, 마음이 절망의 늪에 빠진 순간,  몸 안에 감추어져 있던 감동의 기억이 슬며시 찾아와, 바로 오늘 당신이 배낭을 꾸리지 않을 수 없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비록 서른 살 그때 그모습으로 아무 것도 모른채 죽음까지 맞이하게 될 지언정, 감동이 주는 내 삶의 흔들림을 포기하고 싶진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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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 2010-01-15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흥용 씨 만화! 감동적이고 잼있지요.
<내 파란 세이버>도 재미있었던! 그런데 <쓰쓰돈 돈쓰 돈돈돈쓰 돈돈쓰>는 좀 실망했다는.
이들 만화책은 모두 소장하고 있습니다. ㅎㅎ
절판이 된 책들을 보면 제가 희귀한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기쁨도 들어요.
 

노자 도덕경엔 自然은 不仁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은 착한 사람에겐 상을 내리고 악한 이에겐 벌을 내릴 것이라는 착각으로부터 깨어나게 해주는 경구로 나는 알아듣고 있다. 최근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자연재해가 바로 이러한 불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거처럼 생각된다. 착하다고 해서 허리케인이나 지진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이 괴물은 아니다. 인간이나 생명체를 죽이기 위해 이빨이나 발톱을 드세우고 덤벼드는 괴물로 그려지는 자연은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실제 자연은 불인한 존재이지 괴물은 아닌 것이다. 식인 상어가 마치 오직 사람만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덤벼드는 모습마냥 이상한 일도 없다.

<오픈 워터>는 이런 부자연스러운 재앙을 화려한 액션으로 꾸민 치장을 걷어내고 마치 다큐멘터리 마냥 가만히 카메라를 들이댄다. 휴가를 얻은 부부가 스킨스쿠버를 즐기려 바다 한가운데로 나왔다 배를 잃어버린다. 망망대해. 위치를 제대로 찾았는지 티격태격.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두려움.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카메라는 끝없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이들만을 가만히 지켜본다. <남극일기>의 하얀 눈덩어리가 눈을 피로하게 만들고 지겹게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파란 색만이 가득한 이 영화가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았다는 것은 새삼 놀랍다.(솔직히 좀 지겹긴 했지만 남극일기만큼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그럭저럭 런닝타임이 지나가 있다)

할리우드였다면 당장 덤벼들었을 상어들이 한번 쓰윽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하고, 해파리의 습격에 대항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렸을지도 모르는 장면들도, 심리적 불안감에 육체적 고통을 가중시키는 작용만 할뿐이다.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을 알아채고 구조하러 올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영화 속 주인공과 똑같이 안고서 시간은 흘러가고, 상어들이 자꾸 나타나다보면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주인공 부부는 이런 상황에 대해 네 탓 내 탓 다투다가도, 서로 의지해야 할 대상이 오직 그 둘뿐임을 알고, 그리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막다른 상황에서 사랑을 확인하기도 한다.

망망대해에서 보내야 하는 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상황은 어떻게 될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내 눈이 피로해지는 만큼 그들의 체력도 다해갈 것임을 알고, 곧 무슨 사단이 발생할 것임을 예측한다. 하지만 영화는 어떤 극적 장치도 끼워넣지 않고 담담하게 결말을 맺는다. 이것이 비극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자연 앞에서 무장해제됐을 때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만을 보여줄뿐이다.

영화가 꼭 화려할 필요도, 어떤 극적인 드라마적 장치도 없이, 눈을 사로잡는 액션이 없더라도, 썩 괜찮은 영화를 만들수 있다는 것을 <오픈 워터>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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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11-08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극일기>의 하얀 눈덩어리가 눈을 피로하게 만들고 지겹게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흠...그랬군요... 아직 남극일기도 이 영화도...보진 않았지만...
썩 괜찮게 여겨지는데요... 전 심리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런닝타임이 훌쩍 지나가버리는 그런 영화가 좋더랍니다 ^^

하루살이 2005-11-09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극일기>는 자연에 대한 공포와 귀신과 같은 초자연적 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 같아 조금 아쉬웠습니다. 암튼 하얀 눈은 실컷 구경할 수 있죠. 지겹도록...
 
매일 떠나는 남자
로랑 그라프 지음, 양영란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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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돌아옴을 전제로한 떠남이다. 휴가란 여행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잠시 벗어나 있는 것. 그것은 나를 둘러싼 현실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나라는 이미지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라는 허상은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특징지어지므로 그 관계를 벗어나게 되면 그 허상또한 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하지만 다시 돌아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과감히 그 고정된 나라는 상을 탈출할수가 없다. 내가 아닌 다른 나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잠시 쉬어갈뿐인 것이다. 또는 나는 그대로인채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과의 만남을 통해 나를 조금이나마 변화시켜줄 뿐이다.  

여기 <매일 떠나는 남자>라는 소설 속 주인공은 이런 휴가가 아닌 완전한 떠남을 바라는 남자다. 어디로 떠날지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상태지만 날마다 떠날 것을 바란다. 지금과는 너무나도 다른 새로운 나로 태어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세계 어느 곳으로도 떠날 수 있도록 풍토병 예방 주사를 꼼꼼히 맞기도 하고, 여행지 카탈로그를 집안에 가득 쌓아놓기도 한다. 여행용 가방을 하나 사두고 그 안에 차곡차곡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사서 채워놓기 시작한다. 반면 자신의 집에는 언제든지 마음껏 떠날 수 있도록 점점 비우기를 시도한다. 또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사랑이나 증오심을 품으려 하지 않고 어떤 일에건 적극적인 개입을 주저한다. 이것은 완전히 떠나는 것을 방해할 사슬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삶이 행복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평할 일도 없는 그저 마음이 편안한 상태다. 그러고 보면 실제로 떠나지 않았어도 이미 그의 정신은 떠나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남자, 끝내 40년 동안 떠나는 계획만 세우고 떠나지 못했다. 20년 넘게 살던 원룸의 전세집도 주인이 바뀌면서 할 수 없이 옮겨야 할 처지에 빠졌을 때 비로소 호텔로 옮긴다. 그러나 그 호텔이란 것도 잠시 머무는 곳이 아니라 계속 거주하는 장소다. 누군가가 그를 찾아온 후 다음에 어디서 볼 것인가 물어본다면 그는 지금 이 호텔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임을 말한다. 결국 죽을 때까지 설문조사서 발표된 프랑스에서 가장 우울한 곳 캉에서 한발도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 이후 그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으려 했던 삶의 행보와 달리 느닷없이 나타난 아들 덕에 달로, 우주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번역자는 이 남자가 비록 실제론 떠나지 못했지만 나날의 삶이 떠남과 같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난 반대로 결국 떠나지 못하는 현대인의 비애를 이 남자가 대변하고 있는듯이 보여진다. 가지고 싶지 않아도 갖게 만드는 이 사회는 훌훌 털어버릴 수 없도록 만든다. 남기고 가버리면 될 것이지만 쉽지 않다. 모아놓은 시간과 열정이 그를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사물함에 사표를 항상 써두고 떠날 준비를 하지만 떠나지 못하는 남자는 이 시대 셀러리맨과 닮아 있다. 그저 여행가방에 여행물품을 하나 둘 쌓아두는 것 이외에는 실제로 방 밖을 나서지 못하는 삶의 굴레.

도대체 사람들은 왜 떠나고 싶어할까? 그 욕망의 근원은 무엇일까? 난 완벽한 떠남의 근저에는 완전히 다른 삶에 대한 동경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혹 과거로 시간을 되돌릴수 있다면 이라는 몽상과도 맞닿아 있는듯이 보여진다. 지금의 내가 꼭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재의 나가 아닌 다른 나로서의 삶을 꿈꾸어 본다는 것은 왠지모를 해방감을 준다. 내가 놓여진 지금 이 곳에서 그런 변신을 시도할 수도 있지만 왠만해선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꿈을 꾼다. 떠나는 꿈을. 그리고 그 꿈은 하루하루 매일 매일 떠나는 나를 보여준다. 그래서 나의 방안에도 여행가고 싶은 곳에 대한 정보가 적힌 쪽지들이 이쪽 저쪽에서 뒹글고 있다.  가끔씩 컴퓨터 앞에서 아름다운 그곳을 찾아 인터넷 여행을 떠난다. 나도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씩 떠나는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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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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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못되고 경우없는 놈이 그토록 강하다는 것은 알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었지만, 그놈은 어쨌든 강한 놈이었다. 개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견딜 수 없다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물린 다리는 땅을 디딜 수 없이 힘이 빠졌고 내 몸이 아닌 것처럼 허청거렸으나, 그 욱신욱신 쑤셔대는 고통은 모조리 나의 것이었다.(182~183쪽)

그렇다. 살아간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내야 하고, 견뎌내지 못하다라도 견뎌내는 일인 것이다. 못된 놈이 강하고, 세상이 쑤셔대는 날카로움에 온 몸이 쑤셔대는 것. 그 고통을 고스란히 내 몸으로 간직한다는 것이 바로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책은 개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상살이다. 뭐, 그렇다고 인간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로 가득찬 그런 소설은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의 신산함을 개의 눈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개는 절대 애완견이 될 수 없다. 온실의 화초처럼 보호받고 살아가는 애완견마냥 살아가는 사람은 없으므로, 당연히 소설 속 개는 땅을 밟고 발바닥에 굳은 살이 박히는 개여야만 한다. 우리네 발바닥에 굳은 살이 박히듯. 애완견마냥 발에 헝겊떼기를 감싸안고 살아갈 수 없는 우리네 삶이기 때문에.

주인공 보리는 진돗개다. 그는 댐공사로 수몰되는 마을에서 태어나, 가난에 찌들려 살아가는 어촌마을로 옮겨진다. 그렇다. 이 소설의 배경은 우리의 과거 이야기이다. 하지만 결코 과거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 찢어진 가난은 여전히 우리의 고향에 존재하고, 우리네 삶은 여전히 신산스러우므로. 보리의 바람은 사람이 눈치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개의 마음으로 개의 일을 판단하지 못하고 개의 마음을 헤아리는 눈치 말이다. 개를 헤아리지 않더라도 사람들끼리라도 눈치를 잘 살피라고 말이다. 제멋대로 막가는 사람이 잘난 사람 대접받고 소신 있다 칭찬받는 개수작 부리지 않는 세상이기를,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 없도록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부러운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개처럼 저 혼자의 몸으로 세상과 맞부딪치면서, 앞다리와 뒷다리와 벌름거리는콧구멍의 힘만으로 살아가지를 못해. 나는 좀더 자라서 그걸 알았어. 그것이 사람들의 아름다움이고 사람들의 약함이고, 모든 슬픔의 뿌리라는 것을.(42쪽)

사람들은 부대끼며 살아간다. 그 부대낌이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도 하고, 슬프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인생의 행로다. 그 행로에 항상 눈치를 보아가며 서로를 따듯하게 대해줄 힘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는 약한 존재다. 그래서 발바닥에 굳은 살이 박히도록 걸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굳은 살이 바로 살아가는 힘이 된다. 굳은 살이 박히지 않는 개는, 아니, 사람은 조그만 진흙에도, 빙판에도 거꾸러진다. 굳은 살은 비바람을, 눈보라를 이겨내는 힘이다. 삶의 상처다. 그리고 행복이다.

보리는 주인 아저씨의 죽음으로 모두 이사 가야 하는 주인집에 따라가지 못한다. 아파트는 진돗개가 살 곳이 못된다. 앞으로 보리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갈지 알 수가 없다. 그 정처없고 예견할 수 없는 보리의 삶이 바로 나의 행로다. 그의 상처가 바로 나의 상처이지만 서로 핥아줄 혀를 지닌 동반자가 있으므로(있을 터이니) 삶은 아름다울 것이다. 스산한 바람이 지나면 꽃은 필 것이다. 개는 그 꽃밭의 향기를 맡으며 힘차게 뛰놀것이다. 개의 굳은 발바닥을 찬양하며... 또 닥쳐올 스산함을 견뎌내야만 할 그 굳은 발바닥을... 사라지지 않을 그 스산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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