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고나서 개운함을 느껴본게 얼마만인가? 마치 스시를 먹고난 후의 깔끔한 느낌처럼 마음이 가볍다. 소설의 주제가 사형제도이고, 살인이 그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쾌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군더더기 없는 문체, 스피드한 사건 전개, 바로 깊숙히 밀고 들어가는 등장인물들의 심리,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관점이 잘 어울러진 덕분이라고 본다.

소설은 사형을 선고받은 감옥의 풍경에서부터 시작된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저승사자를 기다려야 하는 사형수들의 심리에서부터 독자의 시선을 꽉 사로잡는다. 소설 속의 사형수는 사카키바라 료. 그는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오토바이 사고로 사건 당시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즉, 살인에 대한 기억이 없는채 잡혀들어갔고, 따라서 자신이 저질렀는지 알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 반성할 수도 없기에 개전의 정이라는 감형의 여지 또한 받을 수도 없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어느 순간 사카키바라는 살인이 일어났던 시간,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 언뜻 기억남으로써 자신의 무죄를 밝힐 기회를 만들어간다.

소설은 사형이라는 제도가 얼마나 불합리한가를 큰 목소리를 내지 않고도 설득력있게 말하고 있다. 먼저 사형에 대한 기본적인 나의 생각을 밝히자면, 한마디로 반대다. 무슨 거창한 이론이나,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으나, 그 첫번째 이유론 재판이 잘못될 수 있다는,  인간의 실수를 인정한다는 전제 때문이다. 잘못된 증거나 증인으로 인한, 또는 거짓 강요 등으로 인한 고백 등등 판결은 언제든 잘못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형은 그러한 과정을 알고나서도 돌이킬 수 없는 결론을 내린다는 점에서 반대한다. 그리고 두번째는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에게 과연 새 인생을 살아갈 기회를 박탈해도 될 것인가에 대한 의문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번째 이유는, 피살자와 관련된 사람들의 복수심을 어떻게 달랠 수 있는가, 그리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 논란의 여지가 많을 것 같다.

아무튼 이런 기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이 소설을 접했는데, 의외로 사형이라는 제도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고, 쉽게 생각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하기야, 몇 십명씩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희대의 살인범을 매스컴을 통해 바라보게 될때, 사람들은 쉽게 저런 놈은 죽여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니, 단순히 사형제도를 없애자고 말하기에는 이들을 설득하기엔 어려울듯 싶다.

소설은 상해치사로 2년을 감옥에서 보낸 미카미 준이치가, 가석방으로 풀려난 후 퇴직을 생각하고 있는 난고라는 교도관과  함께 사카키바라 료가 원통하게 죄를 뒤집어쓴 것을 밝히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원죄가 풀리는 결말의 물고 물리는 반전은 정말 흥미진진하다. 소설은 사형이라는 판결과 그것이 진행되는 과정을 실제처럼 보여주는데, 이 과정이 법제도를 무시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그것에 대한 확인작업과 행정절차의 복잡성 때문에 사형이 집행되는 것이 늦어지고,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사형이 빨리 집행되는 아이러니는 제도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또한 나카모리 검사가 10년전 내린 자신의 첫 사형구형이 잘못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난고와 준이치를 도와주는 장면에선, 사람은 자신의 의지나 생각과는 달리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에 서글퍼진다. 검사였기 때문에 사형을 구형했지만, 그가 다른 위치에 있었다면, 아마도 깃발을 들고 사형제도 반대를 외쳤을지도 모른다는 준이치의 생각은 개인과 제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 위치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행동들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항상 돌이켜보아야만 할 것 같다.

또, 이 소설의 장점 중의 하나는 피해자의 입장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가혹한 이중의 폭력을 그들에게 행사하는지를 알려준다. 즉, 피살자의 가족들에게 들이대는 카메라가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채 그들을 바라보며, 분노하고, 슬퍼한다. 또한 살해자 쪽에서도 그들의 가족이 밝혀지는 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일상생활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새로운 불행을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알고싶은 욕구, 대중이 알아야 하는 권리 이전에 그것이 어떻게 폭력적으로 행사될 수 있는가를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소설은 사형제도를 그 근간으로 하고 있지만, 근원적으론 구치, 교도라는 제도 자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끔 만든다.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격리된채 소히 말하는 죄값을 치른 후 사회에 복귀했을 때, 얼마나 많은 재범이 이루어지는 가를 생각해보면 과연 교도소라는 제도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것인지 회의하게 만든다. 범죄에 대한 사회적 격리를 응보형으로 바라볼 것인가, 목적형으로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겠는데, 응보형으로 바라본다면 그 죄값을 격리를 겪음으로써 받은 것이니, 충분히 제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목적형으로 바라본다면, 즉 교정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재범률이 말해주듯 별 역할을 해내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순된 법제도와 집행과정, 효율성 없는 교도소 때문에 이들을 모두 없애자고 한다면 이것 또한 문제의 여지가 많다. 바로 복수의 연쇄성이 큰 문제로 다가올 수 있다. 응보의 문제에서, 개인적으로 복수를 감행해야 한다면, 그 끝은 어디일 것인가? 그리고 복수를 통해 과연 과거를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될 수 있을까? 복수는 어디까지 행해져야 한단 말인가? 등등.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처한 각자의 상황에서 여러 각도로 보여줌으로써 사형제도의 문제점과, 교도소의 역할 등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이 과장되지도 한쪽으로 치우쳐지지도 않음으로써, 그리고 한 가지 사건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영향력을 끼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다. 이토로 재미있으면서도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줌과 동시에 자신의 주장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소설도 드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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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6-01-11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가 확 땡기는 걸요.
보관함으로~~

하루살이 2006-01-11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잡으면 순식간에 끝장을 보게 될거예요 ^^

푸른신기루 2006-03-09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리뷰 읽어놓고 딴지거는 것은 아닙니다만.. 스시라는 일본어보다는 초밥이라고 써주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네요

하루살이 2006-03-09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참 판단하기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한국의 비빔밥이 외국에 나가서 비빔밥으로 불리는게 나을지 각국의 언어로 토착화되는게 나을지 혼동되는 것 처럼 말입니다. 스파게티나 피자 등의 음식 등은 그대로 외래어를 쓰면서 유독 일본어에 대해서는 지독한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어쨋든, 초밥이라는 우리말이 어느 정도 일상화되어 있으니 초밥이라고 쓰는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충고 고맙습니다.

푸른신기루 2006-03-24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 그런 외래어들이 그대로 쓰이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스시의 경우 초밥이라고 쓰자고 주장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전부터 써오던 '초밥'이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이죠. 피자나 스파게티 등은 이미 너무도 익숙해져버려서 이제와서 '서양빈대떡'이나 '서양비빔국수'라고 부르자고 하면 우습기만 할 뿐 전혀 와닿지 않지 않겠어요? 이미 익숙해진 외래어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이 있는데도 외래어를 쓰지 말자는 것이지요 - 썼던 댓글들을 보다가 들러서 몇마디 남기고 갑니다
 

<다섯 개의 시선>은 국가인권위원회가 후원한 인권에 관한 단편 영화 5개를 묶은 옴니버스 영화다. 인권에 관한 영화라고 하니 굉장히 따분하고, 재미없을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박경희 감독의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나 김동원 감독의 '종로, 겨울'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러니 다분히 따분할 수도 있겠다. 더군다나 다운증후군 학생의 일상을 찬찬히 바라보는 카메라와 외국인 노동자, 특히 조선족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인터뷰를 듣다보면, 굉장히 힘이 든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죄인마냥 느껴야 하는 중압감이 생각보다 크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때론 익숙하게 대함으로써 차별을 없애야 하며, 때론 낯설게 생각함으로써 일상 속에 감추어진 폭력을 깨달아야 한다는 압박감.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한 개인을 넘어 사회적 편견까지 깨뜨려야 하는 삶이란 얼마나 고단할 것인가? 그러나 어쩌랴, 그게 바로 행복의 나라로 가는 길임을...

음,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이 영화가 너무 딱딱해 보인다. 조금 화제를 돌려 장진 감독의 <고마운 사람>을 보면,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지한 주제나 소재를 이토록 웃음이 폭발하도록 재기발랄하게 표현할 줄 아는 감독이 과연 누가 있을 것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정말 <다섯 개의 시선>중에 발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장진 감독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을 공안시절의 고문기술자들을 통해 보여준다. 고문하는 자와 고문당하는 자가 서로 교류하고, 그 위치가 뒤바뀌는 상황을 통해서 풍자와 해학을 마음껏 펼쳐보인다. 지금, 이렇게 고문하고 있는 나는 비정규직이라 보너스도 없고 정시 출퇴근도 없으며, 근무 환경 또한 최악이다. 하지만 지금 고문받고 있는 너는 서울대를 나왔으니, 의료보험에 보너스에 성과금에 정시 출퇴근을 할 것이며, 퇴직금도 두둑할 것이다. 너는 우리같은 비정규직을 위해서도 데모를 할 것이냐? 네, 하죠. 둘의 관계는 비로소 소통이 가능해진다. 언론매체도 정부도 다들 양극화에 대해 두려워하며, 해결 방책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생색내기거나 탁상공론에 그칠뿐이다. 그 아픔이 얼마나 큰지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 양극화의 당사자들의 설움을 이토록 유쾌하게 그려내는 장진 감독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음으로 또 주목할만한 것은 정지우 감독의<베낭 맨 소년>이다. 탈북 소년과 소녀의 남한 적응기를 보여주는 이 단편은 오토바이 질주 장면의 긴장감이 그들의 삶의 위험천만함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또 마지막 소녀가 내뱉는 유일한 말이 주는 감동과 자막의 충격성이 영화적 재미를 그대로 보여준다. 천국으로 알고 찾아온 남한이 어떻게 지옥으로 변하는지를 진지하면서도 경쾌하게 그녀내고 있다.

류승완 감독의 <남자니까 아시잖아요?>는 조금 과장되어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원신 원컷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한 남자의 술주정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 술 주정 속에 드러나는 대사들이 전부 차별적 발언이다. 성, 학력, 섹슈얼리티, 직위 등등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차별적 언사로 꾸며져 과장되어 보이지만 또 이만큼 효율적으로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차별을 이야기할수도 없다고 보여진다. 다만 말로만 가득 차 있다보니, 차분한 성찰을 살펴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섯 개의 시선>은 정말 색깔 다른 감독들의, 색안경 낀 사회에 대한 때론 진진한, 때론 유쾌한 해부도다. 두시간 가까이 지켜보는 것이 조금은 지루할지도, 조금은 거북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을 깨우치는 데는 큰 도움이 되리라 본다.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해, 때론 웃으며, 때론 울며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준다. 극장밖을 나선 순간, 우연히 차별받는 그들과 마주치게 됐을때, 낯선 이방인 취급을 그만두고, 똑같은 인간임을 한번만 더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의 시선은 따뜻해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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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3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3
키류 미사오 지음, 이정환 옮김 / 서울문화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19세 딱지가 붙어 있는 동화책이라는게 도대체 뭘까?  궁금했다. 혹시 굉장히 야한 책일지도 모른다 (^^ )는 흥분된 속내를 감추고 책을 폈다. 그런데 이 책의 19세 딱지는 아무래도 잔인함에서 비롯된 것 같다. 동화책이라고 하기에는 섬뜩한 폭력과 핏내가 진하게 풍겨 나온다. 물론 이 장치는 동화책이 보여주는 파라다이스의 뒷면에 감추어진, 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기존의 가치관을 전복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3권에는 빨간 모자, 빨간 구두, 돼지 죽이기 놀이, 성냥팔이 소녀, 살인의 성 이렇게 5편이 나와 있다. 빨간 모자의 경우에는 늑대가 바람둥이로 그려져 있고, 빨간 모자는 사생아로, 할머니는 고려장과 같은 내팽겨쳐진 노인으로 나타난다. 성냥팔이 소녀의 경우엔 원래의 캐릭터 그대로 순진하게 그려져 있으나, 그 반대의 악덕한 캐릭터 사드 후작을 만난다는 설정이 다르다. 이 책에선 통쾌한 여자들의 복수가 그려져 있는가 하면, 또한 여성들의 참을수 없는 호기심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장면도 그려져 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인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는, 실상 전복적인 사고보다는 굉장히 보수적 사고체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3권 속에 있는 5편의 동화 주인공들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니, 이들 모두가 결손가정이었다. 물론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일지도 모르고, 또는 오히려 자신의 무의식을 은연중에 드러낸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읽어가면서 계속 나를 괴롭히게 만든 생각은 이들이 행하는 행동들이 마치 어렸을적 행복하지 못했던 시절에 대한 복수심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여지는 연쇄살인범들의 가정 마냥, 불행했던 아동기로 폭력적 행위의 근원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말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는,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가족이야기로 들리고,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맹목적 복종에서 한 발 벗어날 수 있는 깨달음 보다는, 행복한 가족을 그 해법으로 찾아야만 할지도 모른다는, 알고보지 않아도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았나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나의 오독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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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 갔다 오기 전과 후에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깨우쳐 준것이 <어퓨 굿 맨>이었다면, <용서받지 못한 자>는 군대 그 자체에 대한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시 한번 내 몸 속에 잠재해 있는 폭력을 일깨운다. <어 퓨 굿 맨>이 폭력에 대한 동의를 가져왔다면 <용서받지 못한 자>는 폭력에 대한 체념과 저항을 함께 일깨운다. 지금까지 나온 어떤 군대에 관한 영화보다도 <용서받지 못한 자>는 사실에 가깝다. 그리고 그 사실은 대한민국 예비군들 몸 속에 숨어있는 폭력의 씨앗을 보여준다.

 태정은 군기반장이다. 나름대로 군대 생활을 잘 해왔다고 생각한 그에게 부사수로 승영이 들어온다. 그런데 아들뻘(아버지와 아들은 군대에서 또 다른 의미로 쓰인다)도 안되는 그가 중학교 동창인 관계로 태정의 말년 군 생활이 조금 꼬인다. 그러나 태정은 승영을 최대한 감싸주려 하고- 하지만 또 그 뒤에선 승영의 고참들에게 얼차려를 가하며, 제대로 가르치라고 호통친다 - 승영은 태정의 보호아래 자신의 의지를 꺾이지 않고 군생활을 해나간다. 불합리한 명령에 따르지않고, 솔선수범하며, 자신의 위치가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군대에 들어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 내가 고참이 되면 다 바꾸겠다며 버텨낸다. 시간이 흘러, 태정은 제대를 하고, 승영 밑으로 지훈이라는 부사수가 들어온다. 지훈은 조금 어리버리하다. 승영은 지훈으로 인해 군생활이 힘들어지고, 태정 또한 이미 자신을 보호할 수 없게 되자, 점차 변해간다. 바로 군대 생활 잘 한다는 모범 군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고참들에게 장교들 물품을 선물하기도 하고, 마음에 꼭 들어맞는 이야기도 하면서. 고참들은 승영에게 지훈을 잘 가르치라고 훈계한다. 승영은 지훈때문에 힘든 자신의 처지와, 물리적 폭력에 서툰 개인적 특성 사이에서 점차 지훈에게 모질게 대하기 시작한다. 지훈은 승영에게 의지하고자 하나, 점차 변해가는 그로부터 아무것도 위안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게다가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라, 극도의 참담함을 느끼다 결국 군화끈으로 목을 맨다. 승영은 혼란에 싸이고, 휴가인지 탈영인지 모르겠지만, 밖에서 태정을 만나 위로를 받으려 한다. 하지만 태정은 승영이 아직도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모습에 짜증이 난다. 결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밝히진 않으려 한다.

영화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겪었을법한 군대 생활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다만 주위에 자살한 부대원이 흔한 것은 아니니까 그 충격의 정도가 다르다고 하겠다. 군대 생활을 하면서 제일 괴로웠던 것은 불합리한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군의 특성이라는 것이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라지만, 불합리한 명령은 거부할 권리 또한 주어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거부는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의 양심을 지켜내기 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기 위해 자신을 굽히는 것이 얼마나 편한 것인지를 깨우치게 된다. 그리고 난, 고참이 되면 다르겠다는 생각은, 본전 생각이 나서 (내가 당한 것이 있는데 라는 생각말이다) 쉽게 바꾸지 못한다. 즉, 고참이 되는 순간 그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고 있는 자기자신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군대니까 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승영의 말이 고참이 되는 순간 무너진 것과 똑같다. 군대는 개개인의 힘으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 물론 군대 참 좋아졌어 라고 다들 말하지만, 그리고 나 또한 고참이 되면서 많이 바꾸었다고 다들 생각하지만, 폭력은 어느 새 몸에 깊이 각인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 폭력은 군에서 나오는 순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어는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뛰쳐나온다.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는 자는 결국 자신의 피를 모두 쏟아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피 속에 감추어진 폭력의 씨앗을 뱉어내고 싶다고... 아마 온 몸이 다 마르도록 피를 쏟아야만 할 것이다. 폭력의 구조는 그렇게 여전히 나의 영혼을 감싸고 있다. 이 영화는 그 영혼을 돌아보도록 만든다. 참혹하고도 슬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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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첫 사랑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여자는 현재의 사랑에 전념한다고 그러던데... 이 영화는 이런 속설과는 달리 여자에게도 첫 사랑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환희며 통증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또 하나의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김정은이 첫 사랑에 대한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자 역을 맡고 있는데, 그저 사랑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혼란스러운 미스터리적 요소가 있다.(나의 이해 능력이 떨어져서 일지도 모르겠으니, 미스터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미스터리로 장르가 탈바꿈 되어 다가온 것일지도) 과거에 대한 회상이라고 생각한 순간, 그것이 현실 속에 끼어들어 현재의 인물들과 관계를 맺고, 그것이 현실의 또 다른 인물이라고 이해하는 순간, 영화는 그것이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로 끝을 맺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어리둥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차분히 영화를 한번 더듬어 보도록 하겠다.

김정은은 친구와 함께 사설학원을 운영하는 강사다. 어느날 학생 중에 하나가 눈에 띤다.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사랑했던 아이와 이름도 똑같고 생김새도 똑같다. 그리고 갑자기 회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장면이 나타난다. 김정은과 이름이 같은 여학생이 고등학교 시절 처음 사랑했던 아이가 바로 학원의 학생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사고로 죽었다. 그런데 병원 장례식장에서 그와 똑같이 생긴 아이와 마주친다. 화를 내고 영정을 부수고 난리를 치는소녀, 알고 보니 쌍둥이 동생이다. 소녀는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 여자 옆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아이는 따로 있다. 그 아이는 현재 김은정과 동거하고 있는 남자와 이름이 같다. 동거라고 하지만 말 그대로 그냥 집을 함께 나눠 쓰고만 있다. 애인이 아닌 친구다. (누군가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라고도 보던데)

김정은은 고등학생과 사랑에 빠진다. 주위에선 불온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어느날 외국에 나가 있던 그녀의 첫사랑이 돌아온다. 그를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지만 그 만남은 그다지 기쁘지않았다.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남자. 다군다나 첫 사랑과 닮았다고 생각했던 지금의 학생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첫 사랑보다는 지금의 사랑에 빠져있던 여자, 힘들지만 행복하다. 그러다 동거남과 고등학생, 첫사랑 남자가 모두 한자리에 모인다. 그녀를 잘 알고 배려할 줄 아는 동거남, 과거의 추억을 함께하는 남자, 자신의 감정을 빼앗아간 학생. 이들의 묘한 만남은 사랑니에 아파하는 김정은의 모습 속에서 아릇한 아픔과 함께 은은한 따뜻함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는 소녀와 동거남과 이름이 같은 학생의 병원신. 현재 김정은의 배에 남아있는 흉터와 똑같은 자리에 맹장 수술을 한 그녀의 상처를 동거남과 이름이 같은 아이가 바라보고 있다.  

음,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더 헷갈릴듯 싶다. 그냥 내 마음대로 해석해보면 현재에 개입하고 있는 학원생과 소녀, 그리고 그 소녀 옆의 학생은 모두 과거의 인물들이다. 지금 현재 동거남이며, 외국에서 돌아온 첫 사랑들의 과거가 현재에 편입되어 있는 것이다. 김정은은 여전히 과거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과거는 실은 첫사랑이 돌아온다는 소식때문일지도 모른다.(영화 속에선 중간에 그 소식을 알게 되는 것으로 처리되지만) 그리고 돌아온 첫사랑과의 첫 만남의 섭섭함이 사라지고, 집에서 추억을 되씹는 과정에서 과거와의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이름이 같은 두 남자의 접촉으로 가능해진다.

첫사랑은 언제든지 현재로 재생되는, 지워지지 않는 아련한 아픔이자, 성장통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것 같다. 마치 사랑니처럼 말이다.

그런데 나는 사랑니가 아직까지 나지 않은 걸로 보아서, 첫 사랑에 대한 아련한 아픔은 모두 가짜라고 말하고 싶다. 그저 하나씩 들춰보고 싶은 추억의 장면일뿐이지만, 잃어버려서 안타까움이 더한 것일뿐, 뭔가 더 특별한 어떤 것은 아닌것 같다. 무엇이든 처음 경험하는 것이 오래 각인되는 것처럼,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품게 만든것은 아닐까. 가슴까지 아파해본 첫사랑의 경험이 없으니, 현실 속에서 언제까지나 재등장하며, 지울 수 없는 첫사랑의 위력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처음이 주는 강렬함과 그 깊이만큼 가득한 아픔을 영화를 통해 조금은 알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추억이란 조금은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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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1-01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이 영화 봤어요. 뭐랄까, 환타지를 집어 넣은걸까. 하고 봤더랬지요. 게다가 마지막 장면은 뭘 말하는걸까요? 정우와의 추억이 마지막에 나온 이유가 뭘까 한참을 생각했더랬어요.

하루살이 2006-01-01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환타지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바로 그 마지막 장면때문에, 아! 모든게 다 과거였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답니다. 과거는 항상 끊임없이 현재에 끼어들어오지 않나요? 특히 술 먹을때면^^ 과거는 그래서 그냥 과거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늘빵 2006-01-01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니는 났지만 아프지는 않았어요. 뽑을 필요도 없다고 그래요. 그런데 사랑은 너무 아픕니다.

하루살이 2006-01-01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가 않으니... 아프락사스 님의 사랑이야기도 듣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