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를 단련하다 - 인간의 현재 도쿄대 강의 1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다치바나의 책을 읽다보면 지식에 대한 욕망에 불타오르게 된다. 세상엔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단순히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알아야하며, 그것이 왜 중요한 것인가도 함께 깨우쳐준다.

이 책은 도쿄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보다 충실하게 고쳐 쓴 강의록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대상이 대학생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은 이 시기가 사고의 감수성기 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생리 기능의 감수성기는 어린이 시절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물을 보는 기본적인 시각이나 사고방식의 틀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의 감수성기는 소년 시절부터 청년 시절에 걸쳐서 존재(87쪽)

기러기나 오리 새끼의 각인에 대해서는 들어보았을 것이다. 알에서 갓 깨어나 처음 보는 것을 자신의 어미로 알아보는 것. 인간에게도 이런 시기가 있다. 각인처럼 불변의 것은 아니지만 어떤 시기에 어떤 부분을 스펀지처럼 흡수함으로써 잘 바뀌지 않는 시기가 있다는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는 전후의 시기는 지성의 감수성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선악이나 진리, 또는 종교 등을 포함해 인생관, 사회관, 세계관과 관련된 문제에 부딪히고 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갖가지 정보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다양한 의견들을 접하는 것이다. 스펙트럼을 최대한 넓히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확고부동한 진리가 있다는 생각에 그것에 집착하다보면 옴 진리교와 같은 맹목성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이런 예로써 우리가 강력하게 믿고 있었던 진리라고 하는 것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깨져나가는 것을 든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상대성 이론과 패리티 비보전설(대칭성의 파괴) 등 진리라 여겨졌던 것들은 다른 진리로 대체될 가능성에 항상 놓여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의 기로에 서 있는 시기엔 이것을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함몰되지 않고 다양함을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대학이라는 감수성기를 지나고나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굳어진 머리를 가지고서도 잃지 않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물론 뇌과학적으로 훨씬 힘든 시기일지라도 말이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서는 질문을 올바르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질문만 올바르면 답은 저절로 이끌려 나옵니다. 질문은 그에 대한 답을 정말로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 올바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원칙만 지킨다면 이른바 철학적 난문은 전부 풀립니다. 사라지게 됩니다. 이른바 철학상의 난문은 잘못된 질문 방식이 낳은 허상에 지나지 않습니다.(169쪽)

 질문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다치바나처럼 철저한 자료조사 풍부한 논거, 예시를 갖추었을 때 질문도 대답도 올바르게 될 것이다.

어쨋든 이 책을 읽고나면 한가지 빨리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눈에 보인다. 다치바나는 현재와 미래를 이끄는 것은 자연과학에 있다고 본다. 실제로 자연과학없이 미래를 생각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지식이라고 하면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 머무른다.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자연과학에 대한 접근과 공부가 필요한 시기일 듯하다. 이것은 다치바나의 책을 읽으면 확실히 설득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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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뱃속이 편안하다고 계속 안주하면 결국 죽음에 이를뿐이다.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고통을 통해 어른으로 성숙할 기회를 얻고 생명도 지속된다.

그렇다. 편안하다고 10개월을 넘어서까지 있다보면 모두에게 해만 끼칠 뿐이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 밖으로 빨리 나오겠다고 서두르면 그것도 역시 해롭다.

안주와 고통 사이, 중용은 이곳에서도 필요하다. 생명을 지속하고 성장하기 위해선.

단 안주와 평온을 헷갈려서는 안될 것이다. 안주와 고통 사이 평온을 유지하며 우리는 성장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성장이 괴로움으로 뒤범벅이 된다면 우리는 피터팬으로 남으려 할 것이다.

안주하지 않고 평온을 유지하며 고통을 감내하는 법. 그것이 성숙으로 이르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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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리포터가 달라이라마에게 물었다.

당신은 비폭력을 주장했던 마틴 루터 킹이나 간디처럼 결국 암살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 본적은 없는가?

달라이라마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난 안보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껄껄 웃더니

적은 나에게 인내와 관용을 가르친다. 그런 가르침을 주기 때문에 적은 스승이다.

라고 말을 잇는다. 적이라고 해서 두려워할 이유도 꼭 물리쳐야 할 대상인 것도 아닌 것이다. 달라이라마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그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갈등과 스트레스 속에 휩싸인다. 갈등의 주체, 스트레스를 주는 상대는 욕을 하고 주먹을 날리고픈 적일 것이다. 괴롭고 힘들고 때론 마주치기가 두렵기도 한 그 존재. 이런 상대에게조차 배움을 베푸는 스승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우린 가질 수 있을까.

달라이라마의 수행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경쟁 속에서 상대를 물리쳐야만 하는 생각에 갇혀 있지않고, 서로 배움을 통해 상생할 수 있는 길을 잠깐이나마 엿본 것 같아 흐믓했다. 그 길이 이내 사라지고, 막다른 골목이 나타날지라도, 잠깐 동안의 희미한 흔적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듯하다. 마음의 평온은 그 기억과 함께 나타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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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로 지구는 평평해졌다고 한다. 네트워크의 발달로 국경과 국경의 의미가 무색할만큼 서로 가까워지고, 세계화로 인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의 생활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래서일까. 티베트라는 지구의 오지(?)에서 발생한 일도 바로 뉴스로 접할 수 있게 됐다. 달라이라마의 완전한 자치라는 양보적 입장과 완전한 독립이라는 운동가, 그리고 절대 독립을 허용할 수 없는 중국의 입장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위치에 설 수도 있게됐다.

하지만, 정녕 우리는 티베트의 참 모습을 보고 있는가. 중국의 통제로 라싸를 비롯해 티베트는 외부와 완전 차단됐다. 평평하다던 지구에 사각지대가 있었던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네트워크도 힘으로 하드웨어를 점령함으로써 그 작동을 멈추게 할 수 있다. 평평한 지구는 권력의 평평함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언제 어느 때고 기울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티베트는 보여준다.

하드웨어의 물리적 장악만 문제는 아니다. 하드웨어는 놔 둔 채 그 안의 소프트웨어를 장악하려는 의도도 곳곳에 숨어 있다. 이러한 의도 또한 평평한 지구에선 낱낱이 밝혀질 것이라 예상하지만, 실제론 교묘하게 숨어, 또는 힘으로 그 정보를 왜곡시킨다. 개방된 라싸. 하지만 그것은 연출된 모습이었다고 티베트의 승려들은 주장한다.

정말로 평평함이 지구 전체에 퍼져나간다면 자치와 독립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국경이 아무 의미가 없는 세상에서 독립과 자치란 같은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치도 독립도 허용않는 중국을 지켜보며 아직도 지구는 평평하지 못함을 알게된다.

과연 우리는 우리 만이라도 어느 정도 평평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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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축구와 쿵푸덩크는 닮은듯 다르다. 쿵푸를 소재로 스포츠와 접목시킨 점, 화려한 특수효과, 그리고 포복절도할 만한 황당함 등등이 닮아 있다. 더군다나 스포츠를 다루는 영화가 그렇듯 갈등, 경쟁을 통해 끝끝내 승리하는 감동적 드라마를 선사한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소림축구와 쿵푸덩크는 차이를 보인다. 주인공들이 모두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그 색깔이 다르다. 그 다름은 달인과 천재의 차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주성치를 비롯해 소림축구의 조연들, 그리고 이들의 영향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도시인들은 모두 쿵푸의 귀재가 된다. 차를 주차하고, 2층 버스에 올라타고, 넘어질 위기에서 덤블링을 하고... 일상으로 돌아간 주인공들마냥 쿵푸 또한 일상에서 요긴하게 쓰인다. 쿵푸가 삶 속에 스며든 것이다. 모두가 쿵푸의 달인이 된 것이다. 삶 속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달인들-영화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보여지듯-을 떠올리게 만든다.

반면 주결륜의 쿵푸덩크는 천재들간의 싸움이다. 이들 천재들의 솜씨는 범인들이 쫓아갈 수 없다. 오직 멀리서 바라보고 응원하는 것 이외에는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은 오직 영웅적 이미지만 부각된다. 주걸륜 탄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반전과 그 뒤에 이어지는 일상으로의 복귀는 그저 천재의 인간적 성품일 뿐이다.

웃음으로 결말짓는 소림축구와 감동으로 결말지으려 한 쿵푸덩크. 사람 속에 들어와 호흡하는 방식에 있어서 역시 주성치가 한 수 위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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