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의 탄생 - 나는 왜 다른 사람과 다른 유일한 나인가
주디스 리치 해리스 지음, 곽미경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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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궁금한 적은 없었던가. 나는 왜 너랑 그토록 다른지. 왜 똑같은 사람은 한명도 없는지.

이에 대한 설명은 본능과 환경, 즉 유전자와 양육으로 나뉘어진다. 행동유전학적 관점은 본능에, 진화심리학적 관점은 양육에, 그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이 두가지 설명을 모두 빗겨가는 예가 있다. 바로 샴 쌍둥이의 성격이다. 일란성 쌍둥이를 더 넘어서는 샴쌍둥이라면 유전자가 일치하기 때문에 성격이 똑같아야 하는 것 아닐까. 자라난 환경도 똑같기에 더더욱 둘은 똑 닮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실제 샴 쌍둥이는 너무 다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둘의 성격을 가른 것일까.

이 책은 지금까지 제시된 개성의 탄생과 관련된 연구와 논문이 왜 잘못됐는지를 그들의 작업을 통해 알려준다. 그리고 그 작업들을 바탕으로 전혀 새로운 이론을 내세운다.

양육환경의 영향은 형제의 각기 다른 성격, 유전자의 영향은 입양된 형제들의 다른 모습 등 서로 반대적 입장에 달하는 수많은 사례들이 펼쳐진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다르게 만들었단 말인가.(물론 유전자와의 상관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와 성격의 상관성은 0.45 정도이고 환경과의 상관성은 0.05 정도로 본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의 사회화 과정이다. 가정이 아닌 밖에서 또래집단 사이에 펼쳐지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등이 형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사회화 과정과 지위체계화 속에서 성격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성격 형성은 12~14세 정도에 완성된다. 그 이후의 사회화는 전에 이루어진 성격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이것 또한 예외는 존재한다. 

이런 이론의 바탕에는 인간의 언어적 능력과 사람에 대한 인식 능력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구별이 본능적으로 구현되어진다는 사실이 있다. 그것이 생존과 번영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너무 복잡해진다)

저자의 이론은 정말 솔깃하다. 모든 문제를 어렸을 적 성에 대한 문제로 보는 프로이트의 이론과 또한 어렸을 적 경험 특히 부모와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바라보는 심리학적 견해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에 점수를 주고 싶다. 실제로도 이런 해석들이 얼마나 무리한 것들이 많았는가.

하지만 저자의 이론을 긍정하다 보면 한가지 걱정되는 측면과 마주친다. 바로 유아기 사회화 집단을 잘 골라야 한다는 점이다. 유아기에 접하는 사회화 집단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과 능력이 영향을 받게 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한민국의 과잉교육열풍을 무조건 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아이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을, 그리고 인간이란 결국 사회화 속에서 탄생하는 개인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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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이 유전자의 발현을 유발하기도 한다.-<개성의 탄생> 중

 

유전자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상하게도 운명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신체적, 정신적 형태와 능력은 많은 부분 타고난다. 게다가 살아가는 동안 어떤 시기가 닥쳤을 때 찾아오는 유전적 발현도 있다. 가령 머리가 벗겨지거나 하는 것은 머리관리를 얼마나 잘 했는냐도 중요하겠지만 기본 바탕엔 호르몬 변화를 가져오는 유전자 영향이 크다. 그리고 이런 유전적 영향이란 타이머가 있어서 그 시간대가 되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어느 시기엔 어떤 변화가 나에게 찾아오는 것에 대해 이것이 유전의 타이머 작동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한번쯤 품어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숨죽여있던 유전자를 자극해서 어떤 형질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소위 열성적 성격의 유전자가 죽을 때까지 그 형질을 발현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어떤 행동이 자극제가 되어 유전자가 우성적 형질을 띨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용불용설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다만 용불용설과 다른 것은 유전자의 속성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행동의 자극을 통한 유전자의 각성이란 타고난 운명이 아니라 운명의 개척을 말하는 듯하다. 따라서 감추어진 나의 능력을 깨우는 길은 모험의 연속을 통해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행동하라! 그곳에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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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의 강연 중에 나오는 우화 하나.

한 남자가 자동차를 시속 10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리고 있다. 그때 뒤따라온 경찰 오토바이. 자동차를 멈추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자동차와 나란히 서게 됐을 때 땅에 발을 내딛다 그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이유는. 오토바이가 정지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속한 자동차와 엎치락 뒤치락 하다 둘이 속도가 같아지자 순간 정지한 것이라 생각한 것.

그렇다면 이 우화가 주는 교훈은? 상대적 비교에서 벗어나자는 거다.

그런데 상대적 비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흔히들 부부싸움에서 가장 피해야 하는 것으로 옆집과의 비교를 꼽기도 한다. 뭐 부부싸움뿐이랴. 오죽 했으면 엄친아가 등장하겠는가. 

흔히들 자신에 대한 평가는 과하기 마련이고 타인에 대한 평가는 과소하게 된다. 이런 평가가 과거로 흘러가면 "왕년에" 라는 단어가 튀어 나오고 미래로 향한다면 "마음만 먹는다면" 이라는 단어를 동원한다. 이것도 일종의 남과 비교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일려나. 어쨌든 이런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는 타인에 대한 과소평가와 이루어져 헛된 꿈을 꾸게 만들기도 한다. 이때 주위에서 쏟아지는 말 한마디가 '눈높이'다. "넌 눈이 너무 높아" 말이다.

타인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그 주위 사람들의 평가를 모아 이리저리 점검해 보는데에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평가들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여기서 또 삐딱하게 등장하는 것이 소위 '뒷담화' 아니던가. 그리고 누구와 어떤 상황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냐에 따라 평가 또한 시시각각 변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 평가를 듣고 있는 당사자에 대한 이해 또는 평가에 따라서 의도가 개입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타인의 평가를 새겨 들어야 하는 것은 내 스스로의 평가는 대부분 과대 포장 됐거나 과소폄하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관계 맺기는 그래서 너와 나의 문제를 넘어 우리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가 된 순간 상대적 비교는 어디에서나 튀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상대적 비교가 한없이 늘어나게 된다면 조금은 상대적인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끊임없이 부딪쳐 소통하는 것만이 그나마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떨어지지 않는 비결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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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3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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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주인공을 꿈꾼다.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자기만의 작품 속 주인공이 되기를 희망한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인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아무런 자극도 없는 인생을 보낼 바에야 죽는 편이 낫다는 그런 지향성. 303쪽

이 열망이 사회로 확장되기 시작하면 일종의 명예욕 비슷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모방범의 범인은 이 열망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다른 모든 것은 이 열망의 불꽃 밑에 사그라드는 재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범죄의 행각을 만천하에 알리는 대담함을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된다. 영웅은 그렇게 탄생한다. 또는 악당도.

주위의 눈이란 그런 것이다. 진실이 자신에게 직접 닥쳐와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 놓이지 않는 한, 인간은 그것과 직면할 수 없다. 자신에게 가장 편하고 안락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설득력을 지닌 해석을 진실로 채택하는 것뿐이다. 377쪽

해석이 힘을 얻기 시작하면 그것은 어느새 진실이 되어버린다. 진리가 사라진 자리에 진실은 한움큼 자리를 차지하고 새로운 진실이 찾아올 때까지 맹위를 떨친다. 사람들은 그것의 거짓 가능성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거짓 진실을 닮으려 애쓰는 세상의 모든 모방범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사족: 이 소설은 피해자의 가족에 대한 위로와 함께 가해자 가족의 참상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왜 한 개인을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화 해 그 집단 속에 사람들을 묶어 비난하려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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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맘마미아>는 참 유쾌하다. 소피는 자신의 결혼식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우연히 보게 된 어머니의 일기장을 통해서 자신의 아버지가 세 명 중 한 명일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소피는 이들에게 초대장을 보낸다. 이들을 직접 보면 자신의 아버지를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서. 이 세 명의 남자가 도착하고 나서 어머니와 마주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 영화의 큰 줄거리다. 그리고 영화는 이 모든 이야기를 <아바>의 노래로 이어간다.

영화의 메시지는 이런 해프닝과는 무관하게 소피가 자아를 찾아 보금자리를 떠나 세상으로 나아간다는데 있다. 그런데 이 메시지 이외에도 관객의 마음을 슬프게 하면서도 흡족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바로 사랑과 소유에 대한 관계다.

<the winner takes it all> 사랑도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한다. 짝사랑에 실패하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사랑을 얻어야지만 비로소 모든 걸 가질 수 있다.

승자가 다 갖는 거에요. 패자는 초라하게 서 있을 뿐이죠. 승리의 옆에서.

승자가 다 가지는 거에요. 패자는 몰락해야 하는 것. 그건 간단하고 명백한 거죠.

게임은 다시 시작됩니다. 연인이든 친구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승자가 모든 걸 갖게 되어 있는걸요.

정말 사랑은 물론 이 사회도 모두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혼식장에서 의외의 일이 일어난다. 세 명의 남자가 모두 1/3의 아빠, 1/3의 사랑이라도 갖겠다고 나선다. (실은 아빠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은 유전자 입장에선 최상은 아니라하더라도 차상은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갖는 승자독식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 유아살해인데 자신의 자식일지 모른다는 상황은 이 유아살해를 쉽게 일어나지 못하게 해준다) <아내가 결혼했다>에선 이런 상황이 아내의 자발적 도발로 일어난다. 하지만 남자 입장에서 보면 그녀 혼자만이 승자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사랑게임은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희망 말이다. 그런데 사랑은 정말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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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8-11-09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정말 좋았지요?
맘 편하고 아주 유쾌하게 봤어요. 전 영화본후 한참을 이 영화속에서 살았다지요..

하루살이 2008-11-10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를 흥얼거리면서요 ^^
귓가에 노랫가락이 한동안 머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