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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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노인으로 태어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어린아이가 되면서 생을 마감한다는 발상은 기발하다. 하지만 그냥 기발한 발상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는 생각보다 풍부하고 잔잔한 감동을 전달한다. 엇갈린 사랑의 안타까움이 큰 줄기를 형성하는듯 보이지만 결국 이 영화는 시간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됐다.  

노인에서 어린아이로의 성장은 살아가는 동안 늦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보여진다. 우리가 어렸을 적 겪는 경험들은 모두가 처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벤자민버튼의 입장에서는 아주 늦은 나이에 겪는 일이 된다. 그러나 늦더라도 처음은 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도 벤자민버튼은 자신의 딸에게 이런 편지를 남긴다.  

가치 있는 것을 하는데 있어서 늦었다는 건 있을 수 없다. 하고싶은 것을 시작하는데 시간의 제약은 없단다. 넌 변할 수 있고 혹은 같은 곳에 머물 수도 있지, 규칙은 없는 거니까. 최고로 잘할 수도 있고 최고로 못할 수도 있고. 난 네가 최고로 잘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너를 자극시키는 무언가를 발견해 내기를 바란단다. 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해 내기를 바란단다. 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껴보길 바란단다.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기를 바란단다. 네가 자랑스러워하는 인생을 살기를 바란단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갖기를 바란단다. 

이것은 또한 영화 속에서 영국해협을 건너는 엘리자베스 에봇 여사의 일화를 통해 보여진다. 

젏었을 적 해협을 거의 다 건너기 전 포기하고 말았던 그녀에게 기자들은 다시 도전할 것인지를 묻는다. 여사는 "왜 하면 안되죠"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남들은 불가능할거라 생각한 나이에 34시간 22분을 헤엄쳐 해협을 건넌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그래서 세상엔 결코 늦은 일이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는 끝없는 도전정신을 자극시킨다. 나이 때문에 포기하는 일은 말라고. 우리 모두 시간을 거꾸로 먹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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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영상포엠 충남 당진 편에선 굴따는 70노파의 모습이 보여졌다. 갯벌에서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굴을 따는 노파는 바구니 가득 굴을 따고 싶다는 욕망을 내비친다. 하지만 욕심껏 굴을 따지 못하는 것은 가득찬 바구니를 들고서 갯벌을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구니는 한가득 차지 못하고 조금은 허전한듯 비어있다.  

제작자는 넌지시 할머니에게 말을 건넨다. 마음을 비우시는건 어때요? 할머니는 가벼운 미소로 대답한다. 욕심을 버리고 어떻게 사느냐고. 욕심은 죽었을 때 비로소 사라지는 것이라고.  

할머니의 말은 머리에 쿵 하고 충격을 던져주었다. 무소유의 정신, 허허로움 속에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교훈은 할머니와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였다.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떠도는 영혼을 부러워하던 이에게 그야말로 70년이라는 삶의 세월이 묻어나는 한마디는 묵직하게 다가왔다. 한없이 가벼워지고자 하는 영혼에 천만근 추를 매달아놓은듯 땅에 다리를 박고서 삶을 고민하도록 만든다.  

삶이란 빈 손으로 왔다 빈 손으로 간다 하지만, 그 중간 중간 손 안에 많은 것을 채우고 또 채우기도 한다. 할머니가 말한 욕심은 손 안에 채웠던 그 순간들을 말한 것은 아니었을까. 입 속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남의 손에 쥐어주기 위해서, 호주머니에 넣어두기 위해서 등등, 결국 손에 쥐어졌다 사라지는 것들이 아니던가. 그 손에 쥐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할머니의 욕심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욕심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게 인생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할머니는 손 한 움큼 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바구니 가득 굴을 담았다가는 결국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손 한 움큼의 욕심. 살아가는 의지를 불태우고 만족감에 행복할 수 있는 그 적당함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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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인간
심포 유이치 지음, 김난주 옮김 / 들녘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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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서로가 그립고 반가워야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철없고, 상처 입기 쉽고, 자기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몰라 괴로워했던 과거의 모습을 서로 확인할 수 있어야 지금과 이어진다. 필요한 것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감각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에만 사는 인간은 없다. 갓 태어난 아기는 우는 것밖에 모른다. 경험을 쌓아가면서 사람이 된다. 내게는 과거가 없다. 아직 어린애나 다름없다. 함께 과거를 그리워할 친구가 없다.  325쪽 
 

소설의 주인공 나쓰미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목숨마저 위태로울 정도로 큰 사고였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식물인간이 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머리속에선 과거의 그가 없다.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나쓰미는 나쓰미라는 이름을 가진 예전의 그일까.(이런 소재는 소설이나 SF영화의 단골로 등장한다) 과거의 기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그 또한 예전의 그가 아닐 수도 있다.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이국의 땅에 건너갔을 때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는 게 쉬울 수 있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때문이지 않을까.    

소설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음을 나쓰미의 치료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나쓰미는 마치 아이가 말을 배우고 인생을 알아가듯 천천히 자신의 정체성을 쌓아간다. 하지만 서른을 갓 넘긴 그가 열살짜리 아이일 수는 없다. 8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나쓰미는 현재에 안주하지 못하고 과거의 자신을 찾아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마주치는 사건의 전말은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애인이었던 여자가 왜 자신을 피하려 하는지, 과거의 친구들이 머뭇거리며 왜 자신의 애인에 대해 질문하지 않은지, 그리고 조금은 몰상식해 보이는 친구들을 왜 사귀었는지 의심가는 과거의 자신... 그리고 어머니와 의사는 왜 그토록 자신이 과거를 잊고 현재로부터 새로 출발하도록 하려 애썼는지 등이 소설이 결말을 향해 가면서 숨가쁘게 드러난다.  

그리고 마지막에 벌어지는 대형사고는 과거를 알게 된 그가 과거의 자신에게로 돌아갈 것인지, 현재의 나라는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할 것인지를 시험하게 만든다. 자아라는 정체성이 갖는 끈적끈적한 한계. 즉 자아를 규정하는 순간 생겨버리는 경계선은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자아를 잃어버린다는 두려움을 일으킨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 경계선 안에 머물고 싶어한다. 그러나 때론 불굴의 의지로 경계선을 넘어서는 순간도 발생한다. 바로 그 순간이 기적의 인간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경계선을 넘어서는 순간이 바로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안도의 순간일 수도 있다.  

즉 '나라는 인간' 이라고 규정해버린 '나'의 틀을 깰 수 있는 그 순간이 바로 기적의 순간이 되며, 그것이 새로움을 향한 변화의 기폭제가 되는 것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기적의 인간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생명의 기적이라기 보다는 나라는 틀을 깨는 바로 그 순간의 기적을 말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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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의 러시아워는 훨씬 더 복잡할 것이다. 옆 사람과 몸을 꼭 붙이고 말없이 서 있는 사람들의 행렬이 온 일본을 혈관처럼 달리고 있다. 마침내 오염돼 쓸모가 없어진 혈액은 신장에서 걸러 몸 밖으로 버린다고 들었다. 사람도 그렇게 되는 걸까. 러시아워에 시달리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102쪽 

아는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면 누구든 한번 찾아가야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다 그 사람이 주위에 없다는 사실에 길들어져 병원으로 가는 횟수가 줄어든다. 환자도 아무도 찾아주지 앟는 것에 끝내는 길든다. 길들 뿐이다. 쓸쓸한 마음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 쓸쓸함에도 결국은 길든다. 병과 상처에 고통받는 일에도 길든다. 길들어, 그에 맞설 기력을 잃어간다. 110쪽 

사람에게는 각기 삶의 방식이라는 게 있지. 어떻게 죽느냐가 아니라, 그건 하나의 삶의 방식이야. 아픔을 참고 무리를 하는 삶은, 남들에게는 몸을 소중히 다루지 않는 어리석은 삶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지. 하지만 말이야, 그때의 생활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럴수록 사람은 그 생활을 소중히 여기고 무리를 거듭하게 되는 법이야. 176쪽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입원해 있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사람에게 죄를 묻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인심을 베풀어 자유의 몸으로 풀어줄 수도 없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으니 입원이라도 시켜두자. 주위 사람들이 자기 만족을 위해 취한 조치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 사람에게 죄를 인식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자유를 강탈한 의미가 없지 않은가.  3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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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09-02-16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발자국 남겨주세요. 가끔은 흔적이 그립답니다. *^^*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자세는 삶의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다  - 오프라 윈프리 

 모험이란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자세다. 보험은 위험을 대비하는 자세다. 모험은 보험을 통해서만 감행하는 것은 아니다. 보험은 모험 때문에 발생한 것도 아니다. 위험은 항상 주위에 산재해 있기에, 그것을 정면돌파하거나 피해갈 뿐이다. 피해가려 해도 피하지 못했을 때 보험이 필요한 것이고, 새로운 것을 얻고자 할 때 모험이 필요하다.  

안락함은 신체는 물론 정신까지도 제자리 걸음에 멈추게 할 뿐만 아니라 뒤처지게 만든다. 안락함은 그래서 위험의 또다른 이름이다. 위험이란 안락함을 위협하는 것이지만, 안락함이 위험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모험이 없는 길은 위험한 길이다. 물론 지나친 모험은 그 자체로도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모험이 없는 위험은 필연적으로 마주쳐야 하는 위험이 되고, 모험으로 닥친 위험은 설사 실패의 쓴맛을 얻어도 실패라는 이름 대신 또다른 도전과 성공이라는 다른 이름을 얻는다. 보험은 그 다른 이름, 즉 도전의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보험을 보험받은 모험은 모험이 아닌 듯하면서도 모험을 더욱 모험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기에 위험을 피하고 싶다면 보험에 드는 것보다 먼저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을 저질러야 하는 것이다. 모험은 인생을 기름지게 만드는 거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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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를 풍자로 보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서야...

풍자를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가 좀더 여유로워졌으면 한다.

 

-한눈으로 보는 명박도

 



 

 그림 출처 : 그자식 (gujasi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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