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취해 있어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이것만이 문제다.

어깨를 억눌러 그대를

아래로 구부리게 하는

시간의 끔찍한 짐을 느끼지 않으려면,

노상 취해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에?

술에건, 시에건, 미덕에건, 당신 뜻대로.

다만 취하기만 하라

그러다가 궁전의 계단에서나, 도랑의 푸른 풀 위에서나,

당신 방의 음침한 고독속에서,

당신이 깨어나 취기가 이미 덜하거나 가셨거든 물어보라.

바람에게, 물결에게, 별에게, 새에게, 시계에게,

지나가는 모든 것에게, 울부짖는 모든 것에게,

굴러가는 모든 것에게, 노래하는 모든 것에게,

말하는 모든 것에게 몇시냐고 물어보라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대답해 주겠지.

취할 시간이다! 시간의 구박받는 노예가 되지않으려면

취하라 노상 취해 있으라! 술에건 시에건 미덕에건

당신 뜻대로.

ㅡ보들레르

 

 

다른 이들에게 책 선물을 할때 앞에다 끄적이는 두 글자가 있다.

"뜨자"

세상을 똑바로 보는 눈을 뜨자는 것이며, 어떻게 해도 세상이 변할 것 같지 않으면 그 세상을 떠 버리자는 의미로 끄적인다.

그런데 보들레르는 반대로 취해버리잔다. 시간의 짐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해버리잔다.

그것이 꼭 술일 필요는 없다. 취하자는 건 그것으로 인해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취한 순간은 시간이 흐르면 결국 깨게 마련이다. 노상 취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 것인가? 그러나 노상 취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갖고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 것인가?

뜰 수 없다면 취하자.

아~나도 취해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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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 > 올리비아 핫세


어렸을 적 보았던 영화중 어떤 장면들은 각인이 되어서 절대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올리비아 핫세는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게 만들었죠. 이 사진을 보니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과감히(?) 퍼 왔습니다.  저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목숨을 건 도박도 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또 하나 머릿속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이미지가 있는데요, 그것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마지막 옥상씬 이라고 할 수 있겠죠. 목숨이 다해(에너지가 다해라고 해야 하나요)  고개를 숙인 안드로이드 로이(롯거 하우어)를 배경으로 하얀 비둘기가 날아 오르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서정적 비극입니다. 게다가 비까지 주르륵.

아름다움도 슬픔도 모두 심장을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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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신하에게 세상의 모든 지혜를 적어내라고 명령한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30권이나 되는 백과사전이 완성된다. 왕은 어느 세월에 이걸 다 읽겠느냐며 요약해 오라고 다시 명령한다. 또 10년의 세월이 지나 단 한권의 커다란 책이 완성된다. 그러나 책은 너무 무겁다. 왕은 다시 더 줄여 올것을 명하고 다시 흐르는 10년의 세월. 왕은 커다란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있다. 신하들은 한 문단으로 줄였다. 임종을 앞에 둔 왕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침내 신하들은 한 문장으로 줄여 가지고 들어온다.

"공짜 점심은 없다"

ㅡ 가비오따쓰 P150 중 요약

 

가슴에 꽂힌 말과 글이라기 보다는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거리라고 여겨져 적어본다. 무노동 무임금을 언뜻 떠올리게도 하고 일하지 않는자 먹지도 말라라는 구절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리고 그리 오래 산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서도 공짜로 얻어먹는 점심이란 분명 없는듯이 보여진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이것을 한번 설명해보자.

얘들아 세상에 공짜 점심이란 없단다.

아이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파고다 공원에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얻어먹는 공짜 점심. 노숙자들이 얻어먹는 식사들. 다 공짜다. 뒤에 숨겨진 무엇인가 있을 것 같지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분명 공짜다. 세상은 꼭 교환이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굴러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가 가르쳐준 화폐의 기능이 세상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길을 가다 귀여운 아이들에게 과자 한 봉지 사다줄 수도 있다. 땀흘려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에게 그냥 그대로 보내도 되지만 식사 한끼 대접한다.

한 없이 퍼주는 삶도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방식이 꼭 정답인 것은 아니다.

세상에 공짜 점심도 있을 것이다. 라고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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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07-28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옳습니다.... 저도 아무런 대가 없는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없지 않으니까요...

하루살이 2004-07-29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게 받았는지 많이 받았는지 따져보지 않아도 되는 그런 교환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이놈의 머리는 그걸 계산하느라 어찌나 바쁘게 돌아가는지. ^^;;; 잠시 휴대폰이 아니라 머리를 꺼 두셔도 좋겠습니다. ㅋㅋㅋ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실수투성이들이잖아.

                                영화 <페이 첵>중에서

 

세상을 움직인 발명이나 발견중 어떤 것들은 실수에 의해 우연히 발견됐다. 잠을 자다 우연히 흘린 침 한방울로 인해 발견된 페니실린이라든가 고양이가 떨어뜨린 실린더를 통해 발견되어진 안전유리 등등.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깨우치는 것 중의 하나는 그 사람의 실수를 통해서 일수도 있다. 흔히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는 말로 실수를 위로하곤 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위로가 아니다. 정말로 그 사람의 다른 모습을 그 속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실수 그 자체를 넘어 그것을 어떻게 대처해나가는지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 실수를 두려워말라. 모든걸 완벽하게 해내려고 주저하는 사이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때론 저질러야 한다. 실수도 다 나의 것이다. 그 실수들이 쌓여 완벽을 꿈꾼 바로 그곳으로 향할 수 있다. 왕도만을 찾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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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대표단편선 2
이노우에 야스시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6년 9월
평점 :
절판


오에 겐자부로의 <인간의 양>을 읽다보면 부끄러움에 얼굴을 못 들게 된다. 그같은 상황에 처했을때 틱낫한 스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달라이 라마라면 어떻게 했을까? 예수님 부처님 또는 공자님은 과연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노자나 장자, 맑스, 알튀세르 등등의 철학자들은 또? 네루다, 도스토 예프스키, 김용택 시인, 법정 스님이라면 달랐을까? 등등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동원해서 과연 그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것인지를 무한히 상상하게 만든다.

과연 어떤 일이 있었기에...

나는 피곤한 몸을 끌고 버스에 오른다. 맨 뒷좌석 미군들이 앉아있고 그 옆에 한 아가씨가 있는데 바로 그 옆에 앉는다. 시끄럽다. 미군들과 여자 사이에 실강이가 오간다. 그러던 중 그 실강이에 우연히 내가 끼여들게 된다. 그리고 시작되는 사건들. 미군들은 나를 좌석들 사이 통로에서 엉덩이를 까발리게 만든다. 나만이 아니다. 그들의 폭력적인 위압에 많은 사람들이 엉덩이를 내 놓아야 했다. 그리고 다행히 이 놀이에 동참하지 않게 된 사람들은 안도의 함숨을 내쉬며 힐끗힐끗 쳐다본다. 자존심이 모두 무너져 내린다.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미군들이 버스에서 내린다. 난 평정을 되찾으려 한다. 목적지다. 나도 내린다. 그 때 이 광격을 목격했던 선생 한명이 따라 내린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선다. 이 사건을 이대로 묵과해선 안된단다. 경찰서로 간다. 그러나 경찰들은 웃음만 흘릴뿐이다. 미군과 관련된 사건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며 계속 웃기만 한다. 난 끝내 이 자리에서 도망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집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편히 잠을 청하는 것이다. 한잠 자고 나면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계속해서 나를 쫓아온다. 꼭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며.

그렇다. 칼을 들고 서 있는 나보다 힘이 센 사람앞에서 난 꼼짝없이 당하고만 있다. 선생도 그렇다. 그들 앞에선 한마디 말도 못하면서 나중에서야 지식인의 자존심을 내걸며 사건을 해결하잔다. 비겁하다.

하지만 나 또한 그렇게 비겁할 것임을 안다. 20대라면 달랐을 것이라며 허풍도 치지 않는다. 그래도 10대였다면 혹시 모르겠다라고 위안을 삼지도 않는다. 난 그런 비겁자일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 상황에서 나 혼자 저항해봤자 개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 감히 반항은 꿈도 못꿀것임을 잘 안다.  버스 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다면 혹시 상황이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일절 갖지 않는게 신상에 좋다. 미군 8놈과(6이었던가?) 덤비겠다고 모두가 일심동체로 일어서는 일은 없을 것임을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그럼 그렇다고 치자. 모두가 어찌하다보니 그들과 맞섰다고 하자. 자, 이젠 어떡하지. 그들이 칼을 휘두르는 앞으로 내가 달려들 수 있을까?

용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힘을 갖고 있을 때 그 힘을 바탕으로 나오는 것이 용기인가? 아마 힘을 갖추고 있는 상태에서 나온 행동은 겸손이나 인내이지 용기는 아닐 것이다. 부닥쳤을 때 깨질 수도 있음을 알지만 부닥치는 것, 잘못하면 만용이다. 만용과 용기의 차이는 또 무엇인가? 깨질 줄 알면서도 꼭 부닥쳐야 할 필요가 있을때 부닥쳐보는 것, 그것이 용기인가?

세상은 나에게 타협만을 가르쳤다. 개울 속의 돌맹이처럼 살아갈 것을 가르쳤다. 용기는 동화속에서나, 영화 속에서나 존재한다. _역사 속의 영웅들을 떠올려보라고? 그래서 그들은 영웅이지 않은가? 나같은 하찮은(?) 사람이 어떻게 영웅이 되겠는가? 그래서 조용히 있고싶다. 나라도 그저 그렇게 멍청히 당했을 것임을 솔직히 시인한다. 그런데 그렇게 갑작스레 당한 모멸감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것인가? 그것이 끝내 사라지지 않을 그 무엇이라면...

비겁자도 괴롭다. 문득 문득 잠이 들다가도 떠오를 그 사건들. 시간이 약이 되지 못할 악몽들. 나를 짓누를 그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올가미에 갇힌 삶. 어느 순간 자책감에 무너져내릴 나를 바라본다는 것.

비겁자도 괴로운 것이다. 왜 나에게 용기를 주지 않은 것입니까? 외쳤봤자 돌아오는건 자괴감일 뿐이다. 용기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키워낼 방법이라도 가르쳐주셔야죠.

그래서 비겁자도 괴롭습니다. 비겁자로 살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살아야하기 때문에 슬픕니다. 비겁자로서 살지 않아도 될 그런 세상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비겁자이지만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는데는 분명 한 몫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발 비겁자를 만들지 않는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비겁한 자의 변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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