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이로의 초대 - 패러독스 사회학
미야모토 코우지 외 지음, 양인실 옮김 / 모멘토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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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사회학에 대한 책이다. 작가들이 글을 쓴 의도에서 밝히듯 사회학도 재미있으며, 현실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학문의 세계에만 갇혀 있는 그런 분야가 아닐 수 있음을 밝히려 무단히 애를 쓴다. 그러한 예로써 작가들이 시도하고 있는 것은 세상 속에 드러나 있는 여러가지 패러독스 들이다. 국가의 존재 여부, 민주주의의 작용 등등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데 근간이 되고 있는 제도들이 눈에 보이는 순기능 이외에 역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러한 영향들이 지금 당장 나타나는 것 이외에도 시간이 흘러서야 드러나는 것들도 존재함을 보여준다. 책 속에 등장하는 수십가지 패러독스들은 작가들이 책의 초반부에 이야기하듯 독자들의 사고를 훈련시켜주는 작용을 한다.

한가지 현상이나 제도 등등이 가지고 있는 순기능과 역기능, 현재 보이는 것과 잠재된 것. 이 네가지를 서로 섞어서 여러가지 다양한 결과를 예측해보도록 유도하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이는 마치 모파상의 <마녀의 빵>이라는 단편소설을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면서 작용하는 순기능이야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역기능은 복잡한 사고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마치 빵집 아가씨의 선의를 가진 행동이 한 사람의 미래를 망쳐버릴 수도 있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 마냥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사고의 훈련을 유도한다. 이런 사고의 훈련은 우리가 어떤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행동들이 가져올 수 있는 잠재적인 결과에 대한 예측을 가능케 하여, 될 수 있으면 그런 역기능을 초래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할 수 있는 행동을 선택하도록 해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예측한 것 이외의 여러가지 일들이 느닷없이 나타나는 것이 삶이기는 하지만 그런 불확실한 것을 최대한 피하도록 노력하는 것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일터이니 말이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기는 하지만 그 원인과 결과가 항상 일대 일의 관계로 눈에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감추어진 관계들, 의도되지 않은 결과들. 바로 그것을 찾는 과정은 인생을 보다 섬세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고의 힘을 키우는 것일 터이다. 세상이 안개로 쌓여 있더라고 그 안개를 뚫어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세상을 재미없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기우는 버리자. 어차피 그 안개 뒤 세상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화하는 그 무엇일 터이니 말이다. 우리가 일기를 예보하듯 아무리 100%의 정확성을 향해 가려하더라도 지구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듯이 말이다. 그래서 세상은 살 만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예측할 수 없는 결과들. 그 결과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마치 뫼비우스의 띠 위에 서 있는듯 현기증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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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12-13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이 안개로 쌓여 있더라고 그 안개를 뚫어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



통찰력이죠... 이것이 세상을 재미없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 맞습니다...기우일 겁니다...



통찰력이 있으면...세상은 더 재밌을듯해요...

아는만큼 보인다니까는...아는 재미가 좀 많겠나요~

하루살이 2004-12-13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조금 아는 만큼만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
 

팀 버튼 감독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어두운 화면에 우울한 캐릭터들. 왠지 모르게 자꾸만 땅 밑으로 꺼져가는듯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들. 이 영화를 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한 것도 그때문이었다. 그러나 포스터로 보여진 영화의 한 장면은 전혀 그답지 않게 밝았다. 그래서... 선택.

허풍쟁이 아버지. 아들은 아버지의 숱한 꿈에 대한 이야기를 지겨워한다. 환상 속에 살지 말고 제발 현실을 그리고 진실을 이야기해달라고 한다. 아버지의 죽음이 얼마남지 않은 시간, 아들은 아버지의 이야기와 진실 사이를 오가며 그의 인생을 재구성한다. 세일즈맨으로서 세상을 돌아다닌 아버지. 그 아버지가 만났던 사람들과 마을은 환상처럼 들린다. 아들은 아버지의 물건을 정리하면서 거짓으로만 알았던 그의 행적이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 그저 아이가 태어났다. 물건을 팔기 위해서 돌아다녔다.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와 같은 무미건조한 사실의 나열보다는, 강가에서 큰 고기를 낚다가 놓쳤을 때 태어난 아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빠져나와 병원 바닥을 미끄러져 가면서 태어난 사건, 죽은 후 큰 물고기로 다시 돌아갔다 라는 전설과 환상이 사실의 자리를 대신했을 때 삶은 더욱 윤택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아버지가 겪었던 모험 중 인상에 남았던 부분들을 이야기해보면 이렇다.

18세때 마을의 영웅이었던 아버지는 과감히 마을을 떠난다. 거인은 거인이 숨쉴 수 있는 넓은 곳에서 뛰어다녀야 한다는 생각에.  유령이 나타난다는 숲을 지나다 마주친 평화로운 마을. 아무런 갈등도 없고 온화한 날씨 속에서 근심걱정없이 사는 곳. 사람들은 아버지를 대환영한다. 그리고 꼬마 아이는 그가 떠나지 못하도록 신발을 훔쳐서 나무 위에 내던진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오래 머물지 못한다. 안락함보다는 맨발의 모헙을 택한다. 자신의 꿈을 쫓아서. 신발이 없다고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맨발로 마을을 떠난다. 신발이 없다는 것은 그저 허울좋은 핑계일 뿐인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시시때때로 신발을 잃어버렸다고 칭얼댄다. 난 신발을 잃어버려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고)

마을을 떠난 그가 서커스 구경을 하다 마주친 아가씨. 그는 사랑에 빠진다. 한눈에 빠져버린 사랑. 그는 그녀와 결혼할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기 위해 노예 계약을 맺는다. 서커스단의 잡일을 보는 대신 한달에 한번씩 그녀에 대한 정보를 한가지씩 얻는다는 것. 몇달이 지나가는 동안 그가 얻게된 정보는 대학에 다닌다, 황수선화를 좋아한다 등등. 언뜻 보기엔 그야말로 별 쓸데없는 정보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시시콜콜한 정보를 하나씩 얻을 때마다 행복해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마주쳤을 때,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정보들이 힘을 얻는다. 그녀의 집 앞을 온통 황수선화로 가득 채워버린 열정. 사랑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그를 보면서 사랑에 빠진 사람의 무모함과 그 무모함에 대한 동경을 배우게 된다.

삶은 사랑만으로도 충만해지며 꿈만으로도 즐거워진다는 사실. 팀 버튼은 할리우드의 악동이 아니었다. 아니면 악동이 어느새 커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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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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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계를 꾸린다는 것과 산다는 것은 똑같은 말이 아닐터,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입에 어떻게 풀칠할지, 서리를 맞지않고 어떻게 잠을 잘지 걱정하는 것이 생계라고 한다면 산다는 것은...


여기 이 책 속의 주인공들은 불과 200년도 안된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다. 평범한 조상이라 하기에는 조금 미쳐(?)있는 사람들이다. 주류에 뛰어들지 못한 변방의 지식인들.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소위 지금의 마니아나 오타쿠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즉 현실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다.(책 중 허균은 예외라고 생각되어진다)


잊는다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해서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될지, 출세에 보탬이 될지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냥 무조건 좋아서,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한다는 말이다. 붓글씨나 그림, 노래 같은 하찮은 기예도 이렇듯 미쳐야만 어느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러니 그보다 더 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미쳐야 할 것인가?(30쪽)


하지만 굶어 죽어야 했던 천문학자 김영, 책을 팔어서 겨우 끼니를 연명했던 이덕무, 자신의 기량을 끝내 세상에 펼쳐보이지 못했던 노긍을 바라보면서 정말로 미친다는 것이 미칠만큼 매혹적인 그 무엇인지 의문을 갖는다. 생계를 꾸려가는 일은 대부분 구차하다. 땅을 갈고 하늘에 목을 매며 바다에 생명을 거는 직접적인 생산에 가담하지 않는한 먹고 산다는 일은 구차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무엇인가에 집념을 보이며 몰두하고 있는 모습은 썩 괜찮아 보인다. 그렇다고 누구나 그렇게 벽이나 치에 빠지지 못한다. 이내 머릿속에선 계산이 선다. 저게 사는데-여기서 사는건 생계를 말한다-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내 벽(癖)에서 깨어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미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간혹 어떤 사람들은 미친 체 한다. 그것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으려한다. 가짜로 미치고서 밥그릇을 챙기려 한다. 그렇기에 굶어 죽어도 좋은 정도로 진짜 미친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특히 책 1권을 1억번(현재의 수치론 10만번) 넘게 읽었으면서도 그 내용을 암기하지 못해, 인용글을 자신의 글이라 착각하거나, 익숙한 낭독 소리에 그 출처를 알지 못할 정도로 우둔했던 독서광 김득신이 마침내는 문장을 얻었다는 사실은 결코 미친 짓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극한 사례라고 보여진다. 정말로 산다는 것은 미쳐야지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말이다.


책은 3부로 나뉘는데 <미쳐야 미친다>는 책의 이름은 1부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2부에서는 멋진 만남들을 3부에서는 소소한 일상에서의 깨달음을 적고 있다. 그런데 이런 만남과 깨달음 또한 어느 정도 미침의 경지에 이르렀을때 가능한 그 무엇임을 상기한다면 불광불급은 책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특히 2부에서 허균과 이정의 우정, 권필과 송희갑의 사제지간의 모습은 가히 감동적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미침의 경지에까지 이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관계. 신체적인 아픔도 죽음도 결코 가를 수 없는 사람간의 벽(癖)도 있는 법이다. 3부에서는 그림자 놀이에 빠진 정약용이 보인다. 국화의 아름다움은 그 실체만이 아니라 빛과 어우러진 그림자에서도 드러남을 보여주기 위해 친구들을 초대한다. 또 세검정의 참 맛을 알기위해 소나기를 맞으며 길을 나선다. 풍류란 으례 그런 것이다. 일상과 똑같다면 무슨 맛이 날터인가? 살아간다는 것은 참 맛을 아는 것이라 여겨진다. 살아있다는 것의 참 맛은 생계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벽과 치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밤 중에 호롱불을 켜고 국화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이나 거센 물의 흐름을 보기 위해 비를 흠뻑 맞고서 세검정에 오르는 정약용의 모습은 분명 보통의 사람들과 다르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행위로 인해서 그는 삶의 구차한 모습 뒤에 감추어진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미쳐야 비로소 삶에 미칠수(及) 있는 법이다. 맨정신으로 살아가기엔 삶은 너무나도 저만치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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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창사특집 <출가>를 우연찮게 봤다. 1개월간의 단기간 수련과정을 들여다본 프로그램이었다. 14세 아이부터 70 노인까지 그야말로 남녀노소 구분없이 도반으로 한데 모였다. 그들이 무슨 뜻으로 출가를 결정했는지는 모르나 수련의 마지막 날, 그들의 얼굴은 환했다. 오랜 고행을 끝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무엇인가를 깨우쳐가기 때문이었을까? 알 수 없지만 밝은 얼굴은 아름답다.


수행과정을 지켜보던 중 가장 가슴뭉클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서로 부처되기]라는 수행이었다. 2명의 도반이 짝이 되어서 번갈아가며 한쪽은 부처가 되고 한쪽은 108번의 절을 행하는 수행자가 된다. 108배가 진행되는 동안 한쪽에선 절하는 자도 절을 받는 자도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는다.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도 눈시울이 뜨끈해진다. 무엇이 나의 가슴을 울렸을까?


브라운관을 통해 그 수행을 지켜보는 동안 나 또한 서로 부처되기의 한 도반이 되어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108배를 받는 부처의 입장에선 도대체 난 이 절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이 사람은 왜 나에게 이토록 절실하게 절을 하고 있는가? 라는 상념이 떠나지 않는다. 반면, 108배를 행하는 입장에선 무엇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가? 부터 시작해서 나를 낮추는, 한없이 낮추는 이 절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샘솟는 듯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특히 현대를 살아갈땐 자기를 드러내야만 한다. 내가 얼마나 잘 났는지 어떻게든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부처가 되고 보니 얼마나 내가 못난 존재인지를, 그리고 왜 한없이 나를 낮출수밖에 없는지를 깨닫게 된다. 세상에 부처 아닌 것이 없으며, 나 또한 부처임을 상기한다면 자비는 넘쳐날 것이다.


1개월간의 출가. 그들은 마음을 비우고 거울을 깨끗이 하고자 절문을 들어섰을진대 그 마음 속에 자비심을 가득 안고 돌아가는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도반의 출가의 의미. 그의 출가는 곧 실천이었다. 라는 자막은 이내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출가 졸업후 자원봉사를 지원한 그 도반은 출가의 첫 발을 내디딜때부터 이미 깨달음의 세계에 한발 내디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아우성쳐도 정막의 세계에 있던 사람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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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유 2004-11-29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부분만 잠깐 봤는데, 여운이 남는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아요. 님의 글도 그렇고요...

하루살이 2004-11-30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보 상자 속의 세상에서 때론 큰 배움을 얻기도 합니다.
 


MBC프로그램 중<공감>이란 것이 있다. 자주 보는 것은 아니지만 저번 주 금요일 우연히 보게된 <팔봉씨의 도전>편은 지금까지도 나를 오리무중에 빠지게 만들었다. 팔봉씨는 32살로 암벽등반에 푹 빠져있는 산악인이다. 일정한 직업도 없이 막노동판에서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캐나다 북서쪽에 위치한 베핀섬 원정길에 나선다. 한국인 최초로 3명의 원정대가 험한 길을 나선 것이다. 죽음과 대면하며 오르는 암벽. 혹시나 찢어질까 안절부절하며 머무는 암벽위 텐트에서의 새우잠. 낙석으로부터의 위협. 암벽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미친 짓이다. 하지만 빠진다는 것이 바로 미친다는 것일터. 북한산 인수봉에서 시작한 팔봉씨의 중독을 십분 이해하며 프로그램을 지켜봤다.


그런데...


아직도 내 머리속에 맴돌고 있는 것은 그가 이 원정을 마치고 돌아와 느꼈다는 심정이다.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어요. 이젠 노후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대충 이런 뜻의 인터뷰.


모은 돈을 전부 투자해 다녀온 원정길에서 얻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노후대책이라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노후대책이라고 해서 뭐 특별한게 있을까 싶지만 분명 팔봉씨에게 있어 이것은 삶의 커다란 변화일 것이라고 상상되어진다. 저축, 모은다는 행위가 오직 바위를 향한 그리움이었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 이번엔 방편이 아닌 하나의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그의 삶을 송두리채 바꿀 그 무엇이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암벽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되어지진 않지만.


그렇다면 그는 왜 느닷없이 그런 깨달음에 도달한 것일까? 암벽등반이라는 것이 항상 죽음과 직면한 스릴감을 맛보는 것일테지만 이번 원정에서의 경험은 그 극한을 경험했던 탓이었을까? 사신을 코 앞에서 만나고 헤어지니까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게 일어난 것이었을까? 내가 살 수 있는 한 오래오래 살겠다. 산다는 것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뭐, 이런 생각에 도달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내 돈을 전부 쏟아서 한번쯤 이런 경험을 했으니 다음에 또 한다고 해서 이번과 같은 감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는 자족적 판단때문일까?


정말로 묻고 싶다. 난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으니 말이다. 당신은 마치 현실만을 위해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깨달음은 어찌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까? 저는 그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을 제 머리로, 가슴으로 메꿀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도달한 깨달음입니까?


미루어 짐작컨대 살아있다는 것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일게라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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