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평 스키장이 있는 발왕산.

원시림과 주목, 눈꽃이 아름다운 산.

겨울연가 속 풍경을 오롯이 담은 산.

자 오르자. 그 아름다움을 눈속에 담아오자.

그러나 길은 끊겨 있었다.

이런 사잇골로 가는 길은 끊겨 있었다.

끊긴 곳에 슬로프의 인공눈이 덮혀 있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아 곧은골을 찾았어야 했는데.

할 수 없다. 슬로프를 거슬러 오르는 수밖에

혼란스럽다.

스키의 재미를 위해 그렇게도 아름다운 나무를 베어내야만 했을까

문명의 편리와 쾌락은 그렇게 자연에 스며들고 있었다.

누군가 찾지 않았다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속도로.

내 몸은 자연인가 문명인가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문명은 그렇게 나를 둘러싸고 있을터.

그것은 축복인가 재앙인가

끝없이 눈떠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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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같은 사람

항상 그자리에 서 있으며 질투하지 않는다.

넉넉히 품어주고 변하지 않는 것.

그렇기에 산은 산이고 사람은 사람일뿐.

산같은 사람을 찾지 마라.

그냥 그렇게 서 있는 산을 찾으라.

 

하지만 사람은 항상 그 이상을 원한다.

그리고 사랑은 그 이상을 이상하게도 이루어주는듯하다.

신기루마냥...

산을 좋아하는 남자, 그남자를 사랑하기에 산을 오르는 여자. 그리고 그 여자를 사랑하기에 산을 찾는 또 다른 남자.

그들의 인연은 산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결국 그곳에 묻어두고 떠나야만 할 것이 있다. 산은 그렇게 서 있지만 결코 인자하지는 않다.

 

알래스카의 아시아크

이승에서 못보는 사람을 만나게 해준다는 옆모습이 아름다운 산.

결국  주인공들은 죽음을 통해 사랑을 이루는가

아니면 산의 마력이 이들을 영혼으로 만나게 한 것인가

 

산보다 큰 사랑을 만나 그곳을 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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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정상 비로봉에 올라가는 길엔 주목군락지가 있다.

살아서 1000년 죽어서 1000년이라는 나무.

눈보라 속에서 마치 꽃을 피우듯이 서 있다.

눈꽃을 피우기 위해서 그 나무는 벌거벗고 있었다.

벌거벗은 나무,

죽어서 1000년은 그렇게 서 있는 것이다.

 


바람이 거세다.

온 몸이 날아갈듯 하다. 그냥 날아버리고 싶다. 팔을 힘껏 벌리고

걸음이 빨라진다.

올라서야 한다. 기어코.

비로봉이 기다린다.

도착했다. 바람을 피할 곳을 찾는다.

정상이란 그렇게 바람이 부는 곳이다.

그곳에 계속 서 있는다는 것은 욕심이다.

결국 내려와야만 하는 곳.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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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도로위 나무 그림자는 심하게 흔들린다.

바람이 그리 심하게 불지 않는데 왜 그것은 그렇게도 거친 몸짓을 하는가

하늘을 쳐다본다.

가로등 옆 나뭇잎은 바싹 붙어있다.

조그만 움직임에도 그들 사이가 너무 가까운 탓에 그리도 크게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가깝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사소함마저도 큰 그림자를 드리우는...

고슴도치의 사랑마냥 우리는 그렇게 거리를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휘청거리지 않고 서 있으려면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때론 우린 그렇게 휘청거리고 싶어하지 않은가? 마치 술에 취한듯이, 술에 취하고파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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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최민수

짐슴보다 못한 놈이지만 살 권리는 있는 것 아닙니까?



영화 초반부 오대수가 자살남을 만났을 때 자살남이 외치는 소리다. 또한 오대수가 영화 마지막 부분 최면술사에게 자신의 기억을 없애달라고 부탁했던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기도 하다. 이 구절은 이우진(유지태)과 오대수(최민식)의 유사점 속에 감추어진 대립된 성격을 찾는 재미를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영화는 영문도 모른채 15년간의 감금생활을 마친 오대수가 5일간 자신의 원수를 찾아, 아니다 원수는 이미 이우진임을 알고 있으니 그 이유를 찾아 복수를 행하는 이야기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중의 하나는 바로 이 복수심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는 아직 고양이나 개가 자신에게 해를 가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기위해 찾아나선 일을 들어본 적이 없다.) 주인공들이 뜨거운 복수심에 휩싸이는 사건은 또한 근친상간의 금지라는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도덕적 불문율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이 두가지 점에 있어 이우진과 오대수는 천지차이를 보인다. 먼저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이렇게 외친다. 당신은 알고도 사랑할 수 있겠는냐고? 자신은 누이인줄 알면서도 순수하게 사랑했음을 역설한다. 하지만 오대수는 이름처럼 오늘도 대충 수습하지 못한다. 제발 미도와 자신의 관계를 미도에게 알리지 말아달라고 개가 되는 흉내를 내며 빈다. 자신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지 않다고 외치듯이 멍멍 짖어댄다. 하지만 우진은 오히려 인간이라는 제약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우진과 대수가 서로 무기를 겨눴을때 드러난다. 대수를 향한 총을 거두는 우진과 우진을 향해 겨눈 무선 리모콘을 과감히 눌러버리는 대수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우진은 용서를 한 것이다. 복수심을 극복한 용서는 누구나 행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죽 했으면 사랑이니 자비니 하면서 모든 종교들이 계속해서 주장해대겠는가? 반면 대수는 인간성에 충실하게 행동한다.

복수나 근친상간의 금지라는 것은 본능의 모습을 띤 인간만의 문화이지 않는가? 교육되고 훈련되어진 것에 길들여진 대수는 그래서 감금생활동안 TV를 통해 모든 지식을 흡수한다. 반면 우진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그 이상인지 그 이하인지를 가늠하기 힘들다. 근친상간은 대수롭지 않으며 복수 또한 넘어서 삶의 상실감에 빠져든다.

짐승만도 못한 놈이지만 정말 살 권리는 있는가? 아니 그 이전에 어느 누가 짐승만도 못한 놈이며 어느 누가 짐승보다 나은 사람이란 말인가? 그리고 정말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진정 짐승보다 나은 삶이기나 한 것일까?

영화와 관계없는 상상을 한다. 아차 영화의 메시지처럼 입조심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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