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로봇은 SF의 진보 또는 진화를 이루어내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영화들을 잘 조합해냈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봇이 나오는 블레이드 러너로부터 시작해서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공학 3원칙>을 그대로 드러냈던 로보캅, 기계들의 반란을 다루었던 메트릭스와 인간이 되고자 했던 AI 등등. 영화 속에선 이전의 공상과학 영화들이 다루었던 주제들을 맛있는 비빔밥으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점은 끝내 극복되지 못한다.

다만 로봇들이 움직이는 것을 섬세히 담아낸 화면과 터널안 추격과 액션씬은 정말 기억에 남을 만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메트릭스를 뛰어넘을 정도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용도 액션도 새로울 것이 없는데 이 영화는 왜 만들어졌을까 하는 의문이 떠 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 해답은 주인공 윌 스미스가 매일 꾸는 악몽속에 드러나는 에피소드에 있다고 생각된다.

교통사고로 트럭 조수석에 앉아있던 어린아이와 자신의 차에 타고 있던 윌 스미스 모두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둘 다 모두 죽을 운명임을 윌 스미스는 직감한다. 그 때 NS4 로봇이 나타난다. 그리고 윌 스미스를 구한다. 윌 스미스는 자신이 아닌 소녀를 구하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로봇은 오직 생존확률이 더 높은 사람을 논리적인 이성에 따라 구한 것이다. 40%대와 10%대의 차이. 그것이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오직 한가지 잣대였다. 만약 사람이었다면, 둘 중의 한 명을 구할 수밖에 없다면, 어린아이를 구했을 것이라는 것이 윌 스미스의 생각이다.(물론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일 터이다) 비록 그 확률이 떨어지더라도, 즉 현실적인 가능성이 더 낮더라도 사람은 어린아이를 구하려 했을 것이라는 설명이 이 영화의 핵심이지 않나 싶다. 그래서 영화의 끝부분 '써니'라는 인간과 같은 로봇은 끝내 수리적 이성을 택하기 보다는 인간적 이성, 감성에 따라 행동을 선택한다. 진화된 로봇, 인간과 같다는 것은 바로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확인을 하듯이.

이런 선택의 과정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숱하게 겪는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침으로써 잘 알지 못하거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예를 들어 북한산 관통도로의 경우 지금까지 쏟아부은 돈 때문에 그만  둘 수 없다는 논리나, 이라크 파병에서 미국과의 현실적인 관계때문에 철회하지 못하는 것 등등 우리는 수치적, 통계적 현실을 벗어나지 못함을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경우는 허다하다. 월급의 수치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조금 더 받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인간관계들 말이다.

인간이란 것이 무엇이라고 딱 정의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은 끝내 해결하지 못할 수수께끼로 남을 것같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참 인간적이다라고 하는 그 감정은 누구에게나 통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인간적이다는 것에 대한 통찰, 그것은 절대 숫자가 말해주는 것이 아님을 숫자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에 한번 새겨볼만한 일인것 같다.

로봇의 혁명은 또는 인간의 혁명은 그렇게 숫자에 대한 혁명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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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데이터에 이 책이 없어 페이페에 씁니다.

 

사드의 책은 지금 읽어도 충격적이다. 특히 이 책은 당신의 도덕성에 깊은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 주인공 쥐스띤뜨는 사람들이 미덕이라 부르는 그것들을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행한다. 강간을 당하고 폭행을 당하고 목숨을 위협받지만 그의 미덕은 굴할지 모른다. 만약 이것이 사드의 책이 아니라 어린이를 위한 동화나 또는 동시대의 다른 소설가들의 책이었다면 분명 큰 복을 받았을 것이다. 어려움을 견뎌내면 행복이 찾아온다는 따뜻한 얘기 말이다. 하지만 사드에게서 그것을 바라지 마라. 오히려 주인공 쥐스띤뜨를 괴롭히던 많은 사람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예사로 여기는 외과의, 성에 집착하는 성직자들, 사기를 일삼는 귀족들 등등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오히려 인생이 잘 풀려나간다. 보다 높은 직위에 오르거나 많은 연금 혜택을 받는등 죄값을 받아야 할 그들이 행복하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되어질 수 없지만 그의 소설속에선 떳떳하게 자신의 행동을 설득한다.

악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미덕은 그저 불행을 자초할 뿐이라는 역설, 그리고 선과 악은 제로섬이기에 굳이 악을 탓할 필요는 없다는 것, 또한 선이라는 것은 정해진 법률이나 도덕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기에 그것이 다른 사회, 다른 문명에서도 명백한 선일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에서 선은 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등등의 그들의 입을 통한 사드의 주장은 읽다보면 절로 수긍이 가게 만든다.

실제로 우리네 삶이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독립운동 유공자들은 가난을 대물림 받는 대신 일제 앞잡이로 나섰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손에 금을 들고서 떵떵 거리고 산다. 사람을 죽이고 맘대로 칼과 총을 휘두르며 독재의 쾌락을 즐기던 사람들 또한 아직도 그 위세가 여전하며, 세상을 위해 사회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던 사람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사필귀정이라는 이름하에 우리에게 강요되었던 선행은 실상 그 선행을 실행함으로써 얻는 마음의 평화나 또는 그것을 행해야지만 한다고 생각되어진 강박관념의 충족 그 이상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는다.

하지만 아직도 미덕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는 나로서는 모두가 미덕을 버렸을때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겁이 난다. 나를 가두고 있지만 때론 그것으로 인해 평안을 얻는다면 그것을 버릴 수 있을까? 물론 누군가가 그것을 악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게 이익을 챙기는 자들에게만큼은 미억을 발휘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익을 챙기는 자를 가르는 그 기준은 무엇일까?

선행도 악행도 그것이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라면 도대체 난 무엇을 택해야 한단 말인가? 사드는 아무래도 무정부주의자로서 인간은 어떻게든 그 질서를 회복했으리라 믿었던 것일까? 지금과 같은 국민을 위한 정부나 사회가 아니라면 개개인 스스로가 서로의 질서를 새로 만들고 부수고 만드는 작업을 계속해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더 나은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선 악덕도 미덕도 새로이 쓰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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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ing 책과 만나다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지음 / 그린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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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를 읽는다면 그 속엔 항상 정답이 있기 마련이다. 문제를 내고 그것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요구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에게 책읽기는 그래서 중압감을 가져온다. 정답을 찾아 읽는 책은 그렇기에 따분하며 읽는 것도 어렵다. 특히 사상서나 철학서는 계통 등을 따져가며 그 흐름을 이해해야 하는 정도가 어느 정도 있는 듯하다. 문학이 아닌 이런 책들은 한치의 오독도 허용할듯 싶지 않다. 그래서 때론 마치 참고서 마냥 누군가가 원전을 읽고나서 가볍게 해석해주는 책들을 읽어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책과 만나다> 라는 이 책은 마치 그런 참고서의 모양을 띠고 있다. 그러나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저자들은 결코 정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책을 읽고 나서 자신들 나름대로 소화해낸 것들을 여과없이 토해내고 있다. 독자가 그것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것이야 큰 문제는 아닐것 같다. 무엇보다도 책에서 어떤 모습을 발췌해냈는지, 그리고 내가 그것에 관심이 있는지, 관심이 있다면 그 책을 한번 읽어보고 저자와는 다른 색깔의 소화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은지가 중요할 듯 싶다.

또한 이 책이 다른 책들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한번 추스려보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보여진다. 우리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그것을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쳤을 때 어찌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들. 책 속에선 그것에 대한 고민들이 눅눅히 스며들어 있다. 운명에 대한 인정,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선이 아닌 차선의 방법들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나름대로 생각해본다.(아마도 그런 경향의 사람들이 모여 연구실에 모여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운명을 거부하고 최선의 방법을 주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 하던가. 하지만 이런 최선과 차선에 대한 제시는 운명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가능해진다. 어찌할 수 없을때 우리는 왜 어찌할 수 없는지 처음부터 고민해보는 것도 좋을듯 싶다. WHY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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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07-09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솔깃~!

하루살이 2004-07-09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0권이 넘는 책에 대한 이야기. 읽다보면 꼭 읽어야지 하는 책들이 몇권 생기게 됍니다. 행복해지는거죠.^^ 저같은 경우 가비오따스,미덕의 불운,인간의 양,한서이불과 논어병풍,마르탱게르의 귀향을 꼭 읽고 싶어지더군요.
 
- 건강하고 아름답게 사는 법
클라우스 오버바일 지음, 강혜경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건강관련 서적을 읽을 때는 으례 색안경을 끼어야 한다. 무엇무엇이 몸에 좋다는 것 뒤에는 항상 그것을 상품화 시켜 유통시키려는 세력이 존재한다고 봐야하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건강 관련 정보를 얻었을 때는 단순히 정보가 말하고 있는 어떤 재료만을 바라보지 말고 몸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합격점이다.

최근 물에 관련된 책들이 종종 등장하고 있는데, 육각수나 알칼리 환원수 등 몸에 좋다는 물만도 가지각색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물을 먹기 위해서 어떤 기계들, 즉 정수기나 연수기 등등을 구입해야만 가능하다면 이것은 한번쯤 더 깊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 책이 갖는 장점은 왜 물이 소중한 가에 대한 과학적 근거-몸의 구성성분, 뼈와 관절, 피부 혈관 등등 모든 구성요소의 대부분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와 균형이 깨어지는 순간 발병한다는 것, 따라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좋은 물을 균형있게 섭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좋은 물이라는 것은 꼭 값비싼 정수기 물이나 생수만을 고집하고 있지 않고, 수돗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등등 주위에서 쉽게 행할 수 있는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또한 비만과 관련해서도 그것이 물과 어떻게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단순히 물만 먹어서 살을 뺄 수 있다는 주장보다는 물에서 할 수 있는 운동 등을 제시함으로써 균형잡힌 시각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마시는 물 중 최고의 물은 야채나 과일 등 순수한 자연재료를 통해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물을 얼마큼 어떻게 마셔야 할지는 자세한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내 몸이 스스로 느껴보고 자신에게 맞는 법을 찾아야 한다는 숙제는 건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주어진 것이라 여겨진다. 다만 물 또한 많이 마시는 것이 해로울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이것은 물을 한번 마실때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무리 목이 마르더라도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서는 안된다. 과유불급은 음식과 함께 물에서도 적용되어져야 할 원칙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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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건대 스파이더맨은 정말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왜 2편을 봤냐고? 바로 그 점이 문제다. 왜 할리우드 영화는 그렇게 유혹적인가? 전편이 실망감을 줬다면 2편 또한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는데 왜...아무래도 광고의 파장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1편보다 더 발전되어진 CG와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입소문에 솔깃, 마땅히 볼 영화가 없던 차에 그냥 표를 끊는다.

2편은 1편보단 낫다. 그러나 그냥 나을뿐 썩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전철에서의 전투씬 정도가 조금 기억에 남을뿐 쓱쓱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화면에 그냥 정신을 놓을 뿐이다. 가끔 하품을 한다. 몸이 굉장히 피곤했다면 잠을 잤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묘한 것은 왜 그렇게 이다지도 재미없다고 생각한 영화를 진지하게 생각하는냐는 것이다.

2편에선 영웅들의 내면, 왜 내가 나를 희생하고 대중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나 내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고민등등이 녹아 있긴 하지만 여전히 영웅 만세를 외치는 따분한 면이 많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이런 영웅주의에 대해 냉소를 퍼붓는데 이상하게도 눈은 흐릿해진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군대시절 유격훈련중 편을 갈라 상대편을 웅덩이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있었는데 이런 훈련들을 마지못해 그리고 우습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저 멍하니 당하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그렇지 못한다. 어느새 난 헐크가 되어 상대편을 하나 둘씩 밀쳐내고 있다. 머리는 가만 있으라고 하는데 몸은 머리를 따르지 않는다.

감정에 휘말려 움직이는 몸뚱아리. 몸은 무엇을 기억하고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복수심이나 오기, 또는 충정의 마음같은 것은 원초적 본능인가 문화적인 배움으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울고 하는 것일까? 왜 난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에 대해 동정의 눈물을 흘릴뻔 했단 말인가? 속이 뻔히 보이는데도.

그래서 파시즘은 무섭다.(정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일상적 의미에서. 내가 내 감정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무엇인가에 이끌려 움직인다는 그 자체가 공포영화보다 더 무섭다. 내가 잠깐 의식을 놓는 순간 감정은 누군가에 의해 조정될 수도 있는 끔찍한 현실을 상상해본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한다. 말똥말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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