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대표단편선 2
이노우에 야스시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6년 9월
평점 :
절판


오에 겐자부로의 <인간의 양>을 읽다보면 부끄러움에 얼굴을 못 들게 된다. 그같은 상황에 처했을때 틱낫한 스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달라이 라마라면 어떻게 했을까? 예수님 부처님 또는 공자님은 과연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노자나 장자, 맑스, 알튀세르 등등의 철학자들은 또? 네루다, 도스토 예프스키, 김용택 시인, 법정 스님이라면 달랐을까? 등등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동원해서 과연 그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것인지를 무한히 상상하게 만든다.

과연 어떤 일이 있었기에...

나는 피곤한 몸을 끌고 버스에 오른다. 맨 뒷좌석 미군들이 앉아있고 그 옆에 한 아가씨가 있는데 바로 그 옆에 앉는다. 시끄럽다. 미군들과 여자 사이에 실강이가 오간다. 그러던 중 그 실강이에 우연히 내가 끼여들게 된다. 그리고 시작되는 사건들. 미군들은 나를 좌석들 사이 통로에서 엉덩이를 까발리게 만든다. 나만이 아니다. 그들의 폭력적인 위압에 많은 사람들이 엉덩이를 내 놓아야 했다. 그리고 다행히 이 놀이에 동참하지 않게 된 사람들은 안도의 함숨을 내쉬며 힐끗힐끗 쳐다본다. 자존심이 모두 무너져 내린다.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미군들이 버스에서 내린다. 난 평정을 되찾으려 한다. 목적지다. 나도 내린다. 그 때 이 광격을 목격했던 선생 한명이 따라 내린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선다. 이 사건을 이대로 묵과해선 안된단다. 경찰서로 간다. 그러나 경찰들은 웃음만 흘릴뿐이다. 미군과 관련된 사건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며 계속 웃기만 한다. 난 끝내 이 자리에서 도망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집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편히 잠을 청하는 것이다. 한잠 자고 나면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계속해서 나를 쫓아온다. 꼭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며.

그렇다. 칼을 들고 서 있는 나보다 힘이 센 사람앞에서 난 꼼짝없이 당하고만 있다. 선생도 그렇다. 그들 앞에선 한마디 말도 못하면서 나중에서야 지식인의 자존심을 내걸며 사건을 해결하잔다. 비겁하다.

하지만 나 또한 그렇게 비겁할 것임을 안다. 20대라면 달랐을 것이라며 허풍도 치지 않는다. 그래도 10대였다면 혹시 모르겠다라고 위안을 삼지도 않는다. 난 그런 비겁자일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 상황에서 나 혼자 저항해봤자 개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 감히 반항은 꿈도 못꿀것임을 잘 안다.  버스 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다면 혹시 상황이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일절 갖지 않는게 신상에 좋다. 미군 8놈과(6이었던가?) 덤비겠다고 모두가 일심동체로 일어서는 일은 없을 것임을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그럼 그렇다고 치자. 모두가 어찌하다보니 그들과 맞섰다고 하자. 자, 이젠 어떡하지. 그들이 칼을 휘두르는 앞으로 내가 달려들 수 있을까?

용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힘을 갖고 있을 때 그 힘을 바탕으로 나오는 것이 용기인가? 아마 힘을 갖추고 있는 상태에서 나온 행동은 겸손이나 인내이지 용기는 아닐 것이다. 부닥쳤을 때 깨질 수도 있음을 알지만 부닥치는 것, 잘못하면 만용이다. 만용과 용기의 차이는 또 무엇인가? 깨질 줄 알면서도 꼭 부닥쳐야 할 필요가 있을때 부닥쳐보는 것, 그것이 용기인가?

세상은 나에게 타협만을 가르쳤다. 개울 속의 돌맹이처럼 살아갈 것을 가르쳤다. 용기는 동화속에서나, 영화 속에서나 존재한다. _역사 속의 영웅들을 떠올려보라고? 그래서 그들은 영웅이지 않은가? 나같은 하찮은(?) 사람이 어떻게 영웅이 되겠는가? 그래서 조용히 있고싶다. 나라도 그저 그렇게 멍청히 당했을 것임을 솔직히 시인한다. 그런데 그렇게 갑작스레 당한 모멸감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것인가? 그것이 끝내 사라지지 않을 그 무엇이라면...

비겁자도 괴롭다. 문득 문득 잠이 들다가도 떠오를 그 사건들. 시간이 약이 되지 못할 악몽들. 나를 짓누를 그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올가미에 갇힌 삶. 어느 순간 자책감에 무너져내릴 나를 바라본다는 것.

비겁자도 괴로운 것이다. 왜 나에게 용기를 주지 않은 것입니까? 외쳤봤자 돌아오는건 자괴감일 뿐이다. 용기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키워낼 방법이라도 가르쳐주셔야죠.

그래서 비겁자도 괴롭습니다. 비겁자로 살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살아야하기 때문에 슬픕니다. 비겁자로서 살지 않아도 될 그런 세상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비겁자이지만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는데는 분명 한 몫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발 비겁자를 만들지 않는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비겁한 자의 변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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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로봇은 SF의 진보 또는 진화를 이루어내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영화들을 잘 조합해냈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봇이 나오는 블레이드 러너로부터 시작해서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공학 3원칙>을 그대로 드러냈던 로보캅, 기계들의 반란을 다루었던 메트릭스와 인간이 되고자 했던 AI 등등. 영화 속에선 이전의 공상과학 영화들이 다루었던 주제들을 맛있는 비빔밥으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점은 끝내 극복되지 못한다.

다만 로봇들이 움직이는 것을 섬세히 담아낸 화면과 터널안 추격과 액션씬은 정말 기억에 남을 만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메트릭스를 뛰어넘을 정도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용도 액션도 새로울 것이 없는데 이 영화는 왜 만들어졌을까 하는 의문이 떠 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 해답은 주인공 윌 스미스가 매일 꾸는 악몽속에 드러나는 에피소드에 있다고 생각된다.

교통사고로 트럭 조수석에 앉아있던 어린아이와 자신의 차에 타고 있던 윌 스미스 모두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둘 다 모두 죽을 운명임을 윌 스미스는 직감한다. 그 때 NS4 로봇이 나타난다. 그리고 윌 스미스를 구한다. 윌 스미스는 자신이 아닌 소녀를 구하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로봇은 오직 생존확률이 더 높은 사람을 논리적인 이성에 따라 구한 것이다. 40%대와 10%대의 차이. 그것이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오직 한가지 잣대였다. 만약 사람이었다면, 둘 중의 한 명을 구할 수밖에 없다면, 어린아이를 구했을 것이라는 것이 윌 스미스의 생각이다.(물론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일 터이다) 비록 그 확률이 떨어지더라도, 즉 현실적인 가능성이 더 낮더라도 사람은 어린아이를 구하려 했을 것이라는 설명이 이 영화의 핵심이지 않나 싶다. 그래서 영화의 끝부분 '써니'라는 인간과 같은 로봇은 끝내 수리적 이성을 택하기 보다는 인간적 이성, 감성에 따라 행동을 선택한다. 진화된 로봇, 인간과 같다는 것은 바로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확인을 하듯이.

이런 선택의 과정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숱하게 겪는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침으로써 잘 알지 못하거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예를 들어 북한산 관통도로의 경우 지금까지 쏟아부은 돈 때문에 그만  둘 수 없다는 논리나, 이라크 파병에서 미국과의 현실적인 관계때문에 철회하지 못하는 것 등등 우리는 수치적, 통계적 현실을 벗어나지 못함을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경우는 허다하다. 월급의 수치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조금 더 받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인간관계들 말이다.

인간이란 것이 무엇이라고 딱 정의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은 끝내 해결하지 못할 수수께끼로 남을 것같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참 인간적이다라고 하는 그 감정은 누구에게나 통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인간적이다는 것에 대한 통찰, 그것은 절대 숫자가 말해주는 것이 아님을 숫자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에 한번 새겨볼만한 일인것 같다.

로봇의 혁명은 또는 인간의 혁명은 그렇게 숫자에 대한 혁명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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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데이터에 이 책이 없어 페이페에 씁니다.

 

사드의 책은 지금 읽어도 충격적이다. 특히 이 책은 당신의 도덕성에 깊은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 주인공 쥐스띤뜨는 사람들이 미덕이라 부르는 그것들을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행한다. 강간을 당하고 폭행을 당하고 목숨을 위협받지만 그의 미덕은 굴할지 모른다. 만약 이것이 사드의 책이 아니라 어린이를 위한 동화나 또는 동시대의 다른 소설가들의 책이었다면 분명 큰 복을 받았을 것이다. 어려움을 견뎌내면 행복이 찾아온다는 따뜻한 얘기 말이다. 하지만 사드에게서 그것을 바라지 마라. 오히려 주인공 쥐스띤뜨를 괴롭히던 많은 사람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예사로 여기는 외과의, 성에 집착하는 성직자들, 사기를 일삼는 귀족들 등등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오히려 인생이 잘 풀려나간다. 보다 높은 직위에 오르거나 많은 연금 혜택을 받는등 죄값을 받아야 할 그들이 행복하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되어질 수 없지만 그의 소설속에선 떳떳하게 자신의 행동을 설득한다.

악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미덕은 그저 불행을 자초할 뿐이라는 역설, 그리고 선과 악은 제로섬이기에 굳이 악을 탓할 필요는 없다는 것, 또한 선이라는 것은 정해진 법률이나 도덕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기에 그것이 다른 사회, 다른 문명에서도 명백한 선일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에서 선은 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등등의 그들의 입을 통한 사드의 주장은 읽다보면 절로 수긍이 가게 만든다.

실제로 우리네 삶이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독립운동 유공자들은 가난을 대물림 받는 대신 일제 앞잡이로 나섰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손에 금을 들고서 떵떵 거리고 산다. 사람을 죽이고 맘대로 칼과 총을 휘두르며 독재의 쾌락을 즐기던 사람들 또한 아직도 그 위세가 여전하며, 세상을 위해 사회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던 사람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사필귀정이라는 이름하에 우리에게 강요되었던 선행은 실상 그 선행을 실행함으로써 얻는 마음의 평화나 또는 그것을 행해야지만 한다고 생각되어진 강박관념의 충족 그 이상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는다.

하지만 아직도 미덕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는 나로서는 모두가 미덕을 버렸을때 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겁이 난다. 나를 가두고 있지만 때론 그것으로 인해 평안을 얻는다면 그것을 버릴 수 있을까? 물론 누군가가 그것을 악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게 이익을 챙기는 자들에게만큼은 미억을 발휘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익을 챙기는 자를 가르는 그 기준은 무엇일까?

선행도 악행도 그것이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라면 도대체 난 무엇을 택해야 한단 말인가? 사드는 아무래도 무정부주의자로서 인간은 어떻게든 그 질서를 회복했으리라 믿었던 것일까? 지금과 같은 국민을 위한 정부나 사회가 아니라면 개개인 스스로가 서로의 질서를 새로 만들고 부수고 만드는 작업을 계속해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더 나은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선 악덕도 미덕도 새로이 쓰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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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ing 책과 만나다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지음 / 그린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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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를 읽는다면 그 속엔 항상 정답이 있기 마련이다. 문제를 내고 그것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요구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에게 책읽기는 그래서 중압감을 가져온다. 정답을 찾아 읽는 책은 그렇기에 따분하며 읽는 것도 어렵다. 특히 사상서나 철학서는 계통 등을 따져가며 그 흐름을 이해해야 하는 정도가 어느 정도 있는 듯하다. 문학이 아닌 이런 책들은 한치의 오독도 허용할듯 싶지 않다. 그래서 때론 마치 참고서 마냥 누군가가 원전을 읽고나서 가볍게 해석해주는 책들을 읽어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책과 만나다> 라는 이 책은 마치 그런 참고서의 모양을 띠고 있다. 그러나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저자들은 결코 정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책을 읽고 나서 자신들 나름대로 소화해낸 것들을 여과없이 토해내고 있다. 독자가 그것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것이야 큰 문제는 아닐것 같다. 무엇보다도 책에서 어떤 모습을 발췌해냈는지, 그리고 내가 그것에 관심이 있는지, 관심이 있다면 그 책을 한번 읽어보고 저자와는 다른 색깔의 소화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은지가 중요할 듯 싶다.

또한 이 책이 다른 책들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한번 추스려보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보여진다. 우리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그것을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쳤을 때 어찌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들. 책 속에선 그것에 대한 고민들이 눅눅히 스며들어 있다. 운명에 대한 인정,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선이 아닌 차선의 방법들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나름대로 생각해본다.(아마도 그런 경향의 사람들이 모여 연구실에 모여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운명을 거부하고 최선의 방법을 주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 하던가. 하지만 이런 최선과 차선에 대한 제시는 운명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가능해진다. 어찌할 수 없을때 우리는 왜 어찌할 수 없는지 처음부터 고민해보는 것도 좋을듯 싶다. WHY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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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07-09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솔깃~!

하루살이 2004-07-09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0권이 넘는 책에 대한 이야기. 읽다보면 꼭 읽어야지 하는 책들이 몇권 생기게 됍니다. 행복해지는거죠.^^ 저같은 경우 가비오따스,미덕의 불운,인간의 양,한서이불과 논어병풍,마르탱게르의 귀향을 꼭 읽고 싶어지더군요.
 
- 건강하고 아름답게 사는 법
클라우스 오버바일 지음, 강혜경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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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건강관련 서적을 읽을 때는 으례 색안경을 끼어야 한다. 무엇무엇이 몸에 좋다는 것 뒤에는 항상 그것을 상품화 시켜 유통시키려는 세력이 존재한다고 봐야하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건강 관련 정보를 얻었을 때는 단순히 정보가 말하고 있는 어떤 재료만을 바라보지 말고 몸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합격점이다.

최근 물에 관련된 책들이 종종 등장하고 있는데, 육각수나 알칼리 환원수 등 몸에 좋다는 물만도 가지각색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물을 먹기 위해서 어떤 기계들, 즉 정수기나 연수기 등등을 구입해야만 가능하다면 이것은 한번쯤 더 깊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 책이 갖는 장점은 왜 물이 소중한 가에 대한 과학적 근거-몸의 구성성분, 뼈와 관절, 피부 혈관 등등 모든 구성요소의 대부분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와 균형이 깨어지는 순간 발병한다는 것, 따라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좋은 물을 균형있게 섭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좋은 물이라는 것은 꼭 값비싼 정수기 물이나 생수만을 고집하고 있지 않고, 수돗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등등 주위에서 쉽게 행할 수 있는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또한 비만과 관련해서도 그것이 물과 어떻게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단순히 물만 먹어서 살을 뺄 수 있다는 주장보다는 물에서 할 수 있는 운동 등을 제시함으로써 균형잡힌 시각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마시는 물 중 최고의 물은 야채나 과일 등 순수한 자연재료를 통해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물을 얼마큼 어떻게 마셔야 할지는 자세한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내 몸이 스스로 느껴보고 자신에게 맞는 법을 찾아야 한다는 숙제는 건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주어진 것이라 여겨진다. 다만 물 또한 많이 마시는 것이 해로울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이것은 물을 한번 마실때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무리 목이 마르더라도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서는 안된다. 과유불급은 음식과 함께 물에서도 적용되어져야 할 원칙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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