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3일 토요일 하늘이 무척 파랗다.

쉬는 날이면 두번씩 잔다. 한번 일어났다가 잠시 창문을 열어놓고 다시 눕는다. 오늘은...  글쎄 오늘은 왠지 꼼지락거리고 싶지 않았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마냥 누워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전날 산에 오르리라 마음먹은 것도 있고.

7시 30분쯤 집을 나섰다. 청량리에서 1330번을 타고 가평 현리터미널로 가기 위해 조금 서두른다.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마다 출발시간이 달라 조금 초조하다. 게다가 청량리에서 지하철을 내렸을 때 화장실이 급해진다. 이상하게도 최근엔 산에 오르기전 꼭 화장실에 가는 버릇이 생겼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교훈 중에 꼭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화장실을 가라는 부분이 생각난다. 낭패를 당하지 않기 위해 들여야 할 습관중에 하나. 다행히 낭패를 당하지는 않았다. 현대코아 앞에 세워진 1330번은 좌석에 앉자마자 출발했다. 왠지 뭔가 잘 들어맞는 기분이다. 그런데 차가 무지무지하게 막힌다. 토요일 오전이라 그런가? 구리를 지나면서부터는 차들이 길게 꼬리를 문다. 현리에서 운악산 가는 버스는 10시 20분 출발이다. 놓치면 한시간을 공치게 된다. 10시쯤 되자 나 말고도 초조한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할머니 두분이 운전기사와 이야기를 나눈다. 차 놓치면 안되는데... 기사 아저씨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궁하면 통하는 법인가? 그런데 이것도 궁한 것인가? 도시의 부산스러움에서 벗어나 느긋함을 즐기기 위한 여행에서 차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태운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아무튼 기사 아저씨의 도움으로 10시 17분 터미널 도착, 운악산 현등사로 가는 버스를 용케 탔다. 그리고 35분 운악산 앞에 도착, 슬슬 산을 오를 준비를 한다.

운악산은 경기 5악(개성 송악산, 파주 감악산, 관악산, 가평 화악산) 중의 하나라고 한다. 935.5m의

 산으로 가히 악이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산이었다. 매표소에서 눈썹바위로해서 만경대 정상까지 2시간 남짓 걸렸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산에 오르는 기분이 최고다.  산의 연한 초록색 잎들에

마음마저 가벼워진다. 마음에 걸린 것은 산아래 놓인 골프장. 이 좁은 땅덩어리에 농약을 듬뿍 묻혀 키워내야할 잔디들을 거느린 저 골프장이 정말 필요한 걸까? 물론 여가와 놀이라는 측면에서 무엇인들 안괜찮겠는가마는 결코 얻는것보다는 잃는게 많은 것이라는 생각에 한숨이 나온다. 으~ 잊어버리고 오르자. 입에 고구마를 문채 거친 숨을 몰아쉰다. 병풍바위의 아찔한 낭떠러지에 현기증이 인다. 꼬마 녀석 하나가 잘도 쫓아온다. 그래도 아직까지 산에 오르면서 나를 추월한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장하다. 정상에 오르는 길, 바위들마다 철심이 박혀있다. 사람들이 쉽게 오르도록 만들어놓은 철심을 볼때마다 난 왜 일본이 일제시대때 맥을 끊어놓는다면서 설치해놓은 쇠말뚝이 생각나는 것일까?  산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해놓은 계단들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철심이 왠지 눈에 거스른다. 하지만 덕분에 쉽게 산을 오를 수 있긴하다. 철심이 없었다면 엄청 고생했을것을 생각하면 필요악같기도 하고...

정상서 한숨 돌리고 절고개를 지나 현등사로 내려온다. 현등사 입구에 세워진 화두는 '나는 누구인가?'다. 이런, 요즘 무진장 고민하고 있는 나의 화두도 저 글자인데... 절에 들어가보면 화두를 세겨놓은 돌조각을 볼 수 있는데 기억에 남는 것중에 하나는 '이 뭐꼬'다. 현등사에 들어가보니 절이 주는 아늑함을 느낄 수 있다. 산에 오를때마다 느끼지만 산속 명당 자리는 군부대와 절이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현등사의 관음전엔 주련이 한글로 되어있다. 오호라, 한글 주련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데...

그래서 여기 그 주련을 옮겨 적는다.

부처님 몸이 누리에 두루하다

모든 중생 앞앞에 나타나시니

인연따라 어디에나 두루하건만

본래의 보리좌를 여의지 않으시니

누군가가 이도리에 의심 없으면

만나는 일 모두가 살바야이리라.

 

살바야는 일체지를 말하며, 모든 것을 아는 사람, 즉 부처님을 이르는 것이기도 하다.

만나는 일 모두가 살바야이니, 지금 이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 속에서도 부처가 가득하시겠군... 부처의 자비로 넘쳐나길, 나무아미타불.

다시 매표소로 내려오니 1시 45분 할머니 집에 들어가 순두부를 시켜 먹는다. 아~ 이 순두부라는 것이 순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 듬성듬성 손으로 마구 뜯은 것 같이 거칠다. 하지만 맛이 순하니 좋다. 할머니들의 여유로움과 정이 넘쳐보인다. 좋게 보려면 좋게 보이기 마련. 산 속에서 땀을 흘리고 나서인지 모르지만 맛있게 한기를 때우고, 자 이제부터가 고민이다. 터미널까지 가는 차는 2시간 정도 비어 있는데, 에라 모르겠다. 한 7km정도 거리지만 걸어보자. 이런 날씨도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닌데, 시골길을 걷기로 한다. 조금 다리가 아프지만 그래도 걸어보자.

한 2,3km정도 갔을까? 자꾸만 힐끗힐끗 뒤를 쳐다본다. 히치하이킹을 위해서. 아, 이 나이에 시커멓게 생긴 도둑놈 마냥한 사람에게 누가 차를 세워줄 것인가? 그럼에도 계속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힐끔힐끔. 아 좋은 풍경 다 놓치게 생겼다. 도대체 난 지금 왜 걷고 있는거야? 마을의 개들은 짖어대고, 소똥 냄새 진동하고...

히치하이킹을 포기하니 그제서 풍경은 다시 내 마음으로 돌아왔다. 몸이 고생해도 마음은 편안타. 엔돌핀이 솟으면 몸도 가뿐해질텐데, 그것은 몽상일뿐이고... 그래도 터벅터벅 걷는 길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길가에 아저씨, 여중생 모르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며 한참을 걸어 터미널 도착, 마음을 놓고 서울로 돌아온다.

눈속에 푸른 하늘을 담고서. 마음의 요동침을 절실히 느끼며, 무엇에 쫓겼는지 허겁지겁한 모습에 스스로 웃으며 말이다. 길을 떠날 땐 차라리 시계마저 벗어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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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소녀 - 소설로 읽는 사랑철학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이정순 옮김 / 현암사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은 15세된 게오르그라는 소년이 11년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마치 대화하듯 써내려간 글이다. 아버지의 편지는 액자소설 형식으로 들어가 있고, 그것에 대한 감정, 느낌 등을 아들인 게오르그가 덧붙여 써내려가는 글은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다. 사는게 우울하다거나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사람들일지라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삶과 사랑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볼 것 같다. 눈물을 펑펑 흘리는 감동보다는 눈시울이 잠깐 젖는 잔잔함, 폭소보다는 입가에 얇은 미소를 띠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아버지의 편지는 당신이 20대 초반이었을적, 운명이라 여기게된 오렌지 소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전차 안에서 마주친 오렌지를 가득 담은 종이봉투를 들고 있는 소녀.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이미 아버지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한채 헤어진 그. 다시 그 소녀를 만나기 위해 갖은 추측과 상상을 해대기 시작한다. 오렌지를 그렇게 가득히 산 것은 극지방을 여행하기 위한 비상식량일것이라거나, 대가족에게 쥬스를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라거나 등등. 그리고 다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전차를 연신 타보기도 하고, 오렌지를 그렇게 살만한 곳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이 자주 가는 카페에서 마주친 그녀. 이번에도 그 만남은 짧은 한마디만을 나눈채 끝난다. 아, 그리고 또 얼마나 수많은 상상 속에서 행복하면서도 괴로운 재회를 기다리던가!

오렌지 소녀에 대한 정체를 여기서 밝힐 필요는 없을듯하다. 다만 운명이라고 생각되었던 만남들이 사실은 서로가 서로를 애타게 찾아헤맸기 때문에 가능했다라는 것에 어떤 거룩함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자식에게 남겨주고자 했던 것들을 통해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삶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갖게 만든다.

자연이 기적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거라. 세계가 동화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란 말이다. 그걸 꿰뚫어보지 못하는 사람은 동화가 끝날 무렵에 가서야 겨우 알게 될지도 모르지.(161쪽)

우리는 누구도 알지못하는 어떤 커다란 동화속에 함께 살고 있는 거라고. 우리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어떤 세계에서 춤추고 놀이하며 수다떨고 웃으며 살아간다고, 이 춤과 이 놀이는 삶의 음악이라고 너에게 얘기해주었단다. 인간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그 음악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172쪽)

허블 망원경을 통해 우주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알게되는 과학적 지식들이 신화적 세상을 망가뜨릴 수는 없다.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지식으로 세상을 분리하고 뜯어본다고 해서 자연의 그 신비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과학자의 눈 보다는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풍부한 감성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아들에게 바랬다. 비록, 이별이라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얼마나 신비로우며 살만한 곳인가를 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서 차분히 전한다. 아버지는 이별도 고통도 없이 그저 영원한 존재로 남을 것인지, 이별을 기약해야 하지만 사랑을 할 수 있는 한정된 삶을 살 것인지의 선택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이 행복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아들에게도 선택해보라고 한다.

게오르그는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나서 한츰 성숙해진다. 새아버지에 대해 더욱 애정을 갖고, 어머니를 보다 온전히 이해하고, 짝사랑했던 바이올린 소녀에게 고백할 것임을...

청소년만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메마른 가슴을 촉촉히 적셔주는, 아름다운 사랑과 삶의 철학이 담긴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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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2005-04-26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서 하루살이님이 퍼올리신 글들이 마음에 많이 와닿습니다. 물론 하루살이님의 글도.. 그래서 추천 한방 했답니다. 흐흐~

하루살이 2005-04-28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은 못되더라도 시인의 눈은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icaru 2005-04-2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별도 고통도 없이 그저 영원한 존재로 남을 것인지, 이별을 기약해야 하지만 사랑을 할 수 있는 한정된 삶을 살 것인지의 선택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이 행복했음을 고백한다. ...

눈물을 펑펑 흘리는 감동보다는 눈시울이 잠깐 젖는 잔잔함, 폭소보다는 입가에 얇은 미소를 띠게 만드는 그런 책이, 더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이거 아닙니까... ! 별 다섯이라... 유심히 읽다가 갑니다 ^^

하루살이 2005-04-28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뜻하지 않게 발견하는 보물가운데 하나랍니다.
 
인생 9단
양순자 지음 / 명진출판사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글은 서울구치소 교화위원으로 3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한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다. 할머니의 인생을 담은 이야기라기 보다는 할머니가 손주나 자식들에게 옛얘기 하듯 인생의 지혜를 나눠주고 있다. 자신의 이혼경력으로 말미암아 이혼 상담 또한 많이 해온 덕분에 결혼이나 사랑에 대한 훈시도 삶의 소중한 경험이 묻어 나온다. 나이와 지혜가 분명 비례관계가 아니지만(나이값 못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지혜라는 것이 젊은 사람들에게서보다는 대부분 연륜을 쌓은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에서 삶의 비의(秘意)를 느끼기도 한다. 특히 양순자라는 할머니가 사형수들에게 마지막 가는 길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역할을 해 온데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가슴 깊게 느낀다. 그렇다고 서당의 훈장처럼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있는 글도 아니다. 추운 겨울 외갓집 사랑방에서 군밤을 구워먹으며(물론 이런 장면도 이젠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기는 하지만) 외할머니가 해주는 옛날 이야기를 듣듯이 편하게 읽어가면 된다.

할머니는 자신이 인생 10단이 아니라 9단임을 강조한다. 공자 석가 예수와 같은 성인의 10단이 되기에는 자신 또한 이생이 너무 좋고, 희노애락에 대한 애착 또한 쉽게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일 터이다. 또한 글 속에서 토로하듯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에게 복수도 하고, 잘못이 생겼을 때 모든 것을 내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모습 속에서 얼핏 속내를 들여다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인생 9단의 말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 탓만은 아니지만 내 탓도 있소라는 자세, 복수를 하지만 남을 잘못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잘됨으로써 깔끔하고 통쾌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다. 나의 발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의지다. 그리고 그 나는 잃을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다. 소유에 대한 애착을 갖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고, 그 자유로움이 자애로움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애가 상대에 대한 구속이 되어서는 안된다. 즉 내가 이렇게 하는데 당신은? 이라거나, 내가 이렇게 도왔는데 당신은 왜 아무 것도 변한게 없소? 라는 욕심마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줄 알고 손을 털고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잃은게 뭐가 있겠는가?

세상은 변해간다. 사람도 변한다.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 아닌가? 세상도 사람도 변하는데 사랑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할머니는 모든게 변해감을 인정하라고 한다. 하지만 변하는 것이 어떤 모습을 띠는냐에 관심을 가지라고 한다. 즉 콩은 그대로 놔두면 썩기 마련이지만 발효를 시키면 된장도 되고 간장도 되고, 청국장도 되듯이 말이다. 세상에 대한 애정, 사람에 대한 애정도 그렇게 발효시켜야 된다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바라지 말고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그 모습속에서 맛깔스러움을 찾으란다. 예전엔 그렇지 않았는데 하면서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 그의 변해가는 모습이 얼마나 발효가 되었는지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나는 옛날 그대로인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 또한 변해가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썩어가지 말고 건강한 발효를 해내도록 숙성의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숙성은 그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햇빛과 바람, 비와 같은 여러 환경 속에서 익어가듯, 되돌림을 바라지 않는 사랑, 특히나 자신에 대한 애정, 마지막 날인 것처럼 하루하루를 아끼며, 점점 마음의 찌꺼기를 없애가는 속에서 이루어진다.

특히 마음의 찌꺼기를 없애자는 것은 아무런 설명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때론 찝찝한 마음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그저 마음 가는대로 그렇게 흘러보낼 때 진정 우리는 숙성된 맛을 품지 않을까? 내 몸과 마음을 훌훌 털어, 그 무게를 줄여나가 마침내 빈털털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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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26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 9단이라는 말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지요. 여기 하루살이님의 마지막 문장은 특히 더 그렇네요. 잘 읽고 갑니다^^

하루살이 2005-04-26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 9급의 눈에 인생 9단의 이야기를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른 처세서와는 달리 외할머니가 인생이야기하듯 풀어나가는 것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책이었습니다.

icaru 2005-04-28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주인장 분들 중에 하니케어 님이 계신데... 이 책을 모시기 마트에 들렀다가... 그만.. .그 자리에 서서... 삼십 동안을 읽었다 하시더라고요...

님의 이 리뷰를 읽으니... 이 책이...참...쉽지 않은 인생이야기를 물흐릇듯...편하게 풀어내는 이야기로구나~ 싶은 것이... 세상사에 복닥이다... 복수를 다지고 마음이 모질어지려 할 적에 ,, 이 책 읽으면 딱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답니다.

하루살이 2005-04-28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딱일겝니다. 모진 마음을 아름답도록 만들어주는^^
 
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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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여자다. 한 여자는 기쁨, 정열, 삶이 그녀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모험들을 맛보길 갈망하고, 다른 한 여자는 진부한 일상, 가족적인 삶, 계획하고 완수할 수 있는 자잘한 행위들의 노예가 되기를 갈망한다. 나는 한 몸 속에 살면서 서로 싸우는 주부이자 창녀다.(198쪽)

모험은 항상 위험하다. 새롭되 위험하지 않다면 모험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 위험은 정열이라는 파도를 만나 좌초당한다. 정열은 모험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라는 순풍을 제공한다. 그래서 도달하는 곳은 신세계다. 자신이 항상 꿈꾸어 오던 신세계. 비록 그곳이 생각만큼 안온하지 않더라도, 욕망을 좇아 끝내 도달한 곳이기에 아름답다. 

주인공 마리아는 브라질의 시골서 휴양지로 잠깐의 모험을 떠난다. 혼자이기에 두렵지만 이내 발걸음을 내디딘다.

원죄는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이 느낀 마음의 동요를 아담과 나누어 가지고 싶어한 데에 있다.(271쪽)

끝내 외로운 존재가 사람이다. 결국에 맞닥뜨려야 하는 것은 혼자다. 가정과 사회라는 안락한 품은 평온함과 안락함을 주지만 노예의 삶이기도 하다.(그러나 또한 얼마나 달콤한가?) 마리아는 자신에게 닥쳐온 유혹의 끈을 잡는다. 나이트클럽 댄서로 스위스로 날아가는 그녀. 그녀는 제네바에서 창녀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분명 선택이다. 어찌할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다. 그 생활 속에서 마리아는 사랑과 삶에 대해 하나둘 배워나간다. 남자들 또는 여자들의 하루라는 것이 단지 성생활에 소비되는 11분을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 속에서 세상을 깨우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쾌락의 추구가 아니라 중요한 모든것에 대한 포기라는 사실만 알아둬요. (262쪽)

이것은 그녀가 사랑하게 되는 화가 랄프의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책을 읽는 나에게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든다. 누군가 때문에 또는 무엇 ‹š문에 라는 이유를 달고서 포기하는 것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나의 현재요, 사람들의 현재가 아닐까?

욕망은, 당신이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이예요.(209쪽)

그래, 잠시 잊고 있었다. 상상한다는 것을. 상상마저 허락하지 않는 삶을 누가 강요했는가? 현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상상은 몽상이다. 상상은 실현되어질 수 있는 욕구의 극한점을 보여준다. 욕구에 충실한 삶은 상상을 현실로 만든다. 그 욕구들을 억압하는 사회에서 많은 이들은 주부로서의 삶을 택한다. 창녀는 손가락질 받는다. 손가락질 받는다는 것은 혼자 동떨어져 있음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은 두려움으로 다가선다. 당당한 창녀 선언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뭐, 그렇다고 문제될게 있겠는가마는..  아직도 우리 마음 속엔 두려움이 크게 자리잡고 있음을...) 그러나 간혹 욕구를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상상을 펼쳐야 하지 않을까? 외로워도 슬퍼도 상상의 나래는 꺽이지 않을 것임을 당신도 알고 있지 않는가! 때론 슬픈 주부가 아니라 아름다운 창녀이고 싶은게 우리들의 마음이 아닐까?

자, 슬슬 모험을 떠나보자. 이 커다란 세상에 오직 나 하나와 마주쳐보자. 나의 상상을 향해서 길을 그려보자. 그 길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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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2005-04-22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삶을 주부와 창녀로 이분한 사람은 또한 남자가 아닐까요? 저도 이 책을 읽어봤지만 남자들의 삶은 그런 식의 이분법을 쓰지 않거든요. 그냥 남자일 뿐. 남성들에 비해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분화가 되지 못했는지만 느껴집니다. 현재의 이와 같은 이분법을 돌파할 수 있는 출구는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성 스스로 이와 같은 이분법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살이 2005-04-24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저는 성적인 개념에서 이 문장을 바라보진 않았는데, 그렇게도 보여지겠군요. 이분법은 그 경계의 명확한 구분을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만 여겨집니다. 꼭 그렇게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세상에 어디있겠냐고 생각하면서도 사고의 편의성을 위해 그런 과감한 간략화의 잘못을 저지르곤 하죠. 주부와 창녀는 그냥 안주와 모험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걸 남자로 비유하자면 회사인과 백수, 아, 이건 어딘가 조금 모자란듯 하고, 글쎄 뭐가 좋을까요? 왕과 기사. 으~ 이것도 지금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져 보이고. 그러고 보니 남자라는 것이 여자를 모두 포함하는 그 무엇으로 지금껏 정의되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구, 쩝. 암튼 지안님의 속내를 잘 알아듣겠습니다.

클레어 2005-04-2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시비를 거는 글은 아니었습니다만 혹시나 언짢으셨으면 지안이 삐딱한 탓이라 여겨주십시오..(흐흐~ 어물쩡 넘어가기..^^;;) 요즘 아이들 책(동화도 그렇고 만화도 그렇고..)을 많이 읽고 있는데, 소년만화 속에 보이는 '성장'이라는 화두를 살펴보자면 세상과의 투쟁, 관계 맺기가 남자주인공을 주체로 세우면서 이루어지는데 비해, 여자아이들의 만화의 경우에는 남자친구에게 여성으로 어필되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더군요. 그 속내를 좀 더 짚어보자면 여성은 남성을 이용해서 세상을 돌파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잘난 남성들에게 어필이 되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즉, 여자 아이들의 세상관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체득한 것이라기 보다는 남성을 통해 얻게 되는 식으로 되더군요. 하루살이님께서 지적하신 주부와 창녀에 대한 개념은 그런면에서 아주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주부'와 '창녀'...안주와 모험... 여성들이 세상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그만큼 협소하다보니 '창녀'처럼 많은 남성들을 상대하는 여성들일수록 남성들로 많은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얻게 되고 그와 같은 모험(?)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도 넓어진다고 할 수 있겠고, '주부'의 경우는 한 남성에서 세상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다보니 세상을 보는 눈이 한정되는데 비해 세상으로부터의 비난 등으로 부터는 자신을 보호하면서 안전한 삶을 꾸려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의 삶이 더 분화가 되고 남성들을 통해 뭔가를 얻는 대리만족 지향의 생각에서 벗어나 세상과 직접 소통하고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는 성장과정을 거친다면, '창녀'라는 이미지가 세상을 알아가기 위한 모험이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주부'가 '편안한 안주'라는 이미지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거구요. 왜 하루살이님 서재에서 제가 이렇게나 긴 글을 쓰는 것일까요? 아마도 하루살이님이 좋아서 일겁니다. (또 놀러올께요..흐흐)

하루살이 2005-04-25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짢기는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아아~ 언어라는 것의 한계성을 절감합니다. 흑흑. 주부와 창녀라기 보다는 가족과 일탈 이렇게 정의할게요. 그리고 님의 말씀에 백번 동감합니다. 아마도 만화가나 동화작가의 대부분이 남성인 탓도 있을 겁니다. 차이를 인정하되 차별하지 않는 사회의 밑거름은 어렸을적 교육부터 주어진다고 봅니다. 장애인에 대한 대우 또한 마찬가지라고 보여지네요. 장애우들이 일반 학교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이니... 성역할이나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한 포용력을 자연스레 배울 수 있는 곳이 학교였으면 좋겠습니다. 조기유학에 눈이 먼 현실이 안타까울뿐입니다.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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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세상은 운명처럼 돌아간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 내가 여기 이곳에 있는 이유가 운명때문이라고 말이다. 나의 의지로 선택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이곳에 앉아있는 것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때면 이제부턴 소설 속 양치기 소년을 생각해보아야겠다. 자신의 마음 속 보물을 찾아 피라미드로 떠난 양치기 소년말이다.

우리들, 인간의 마음은 그 보물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하지 않아. 사람들이 보물을 더이상 찾으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불행히도, 자기 앞에 그려진 자아의 신화와 행복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거의 없어. 사람들 대부분은 이 세상을 험난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세상은 험난한 것으로 변하는 거야.(214쪽)

하루중 나를 생각하며 지낸 시간은 얼마나 되던가? 나는 온데간데 없고, 항상 그 자리엔 일과 근심뿐이다. 행여나 마음 한 구석에 꿈이라는 보물을 아직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돈, 명예, 인간관계, 힘 따위의 핑계로 묻어버린다. 더군다나 그 꿈이 오직 자신의 신화이외에 아무 의미도 없다고 느껴질때엔 더욱 깊숙히 숨겨둔다.

자아의 신화보다는 남들이 팝콘 장수와 양치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린거지.(49쪽)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보물을 찾아나서는 발목을 잡아채는 것은 두려움이다.

꿈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하나, 실패하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세(230쪽)

이상하게도 일이 꼬일때가 있다. 반면 이상하게도 무엇인가 자꾸 기회를 제공하는 경우가 있다. 평소에 생각해왔던 그 무엇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실마리 같은 그 무엇을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다. 이것을 소설은 표지라고 한다. 자신의 보물찾기를 도와주는 표지. 그것은 현실에 눈을 똑바로 떴을 때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표지를 보았을때 두려움 없이 길을 나서야 한다.

비밀은 바로 현재에 있네.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면, 현재를 더욱 나아지게 할 수 있지.(172쪽)

표지를 보려면 현실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 나를 찾아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나이지, 운명이 아님을 알아채야 한다. 책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당장에라도 배낭을 짊어지고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드는. 마음이 또 일렁인다.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는 이미 죽어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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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4-23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나이지, 운명이 아니다....
저는 요즘 이게 헷갈린단 말입죠...

하루살이 2005-04-24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운명도 내가 있어야지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어찌할 수 없는 흐름속에 파묻힌다거나, 어쩌다보니 어떤 곳에 서 있는 저를 바라보면서 운명을 떠올리곤 하지만 그 운명이라는 것, 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의지를 운명이라고 생각해보면 편하지 않을까요? 저도 잘은 못하지만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저 운명이 나의 의지다.